사이먼 래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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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r Simon Denis Rattle, OM[1], CBE

사이먼 래틀 경(1955~)

1월 19일이 생일인데 2011년 1월 19일 베를린 필하모닉의 공연 때 관객들과 단원들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불러줬다 *영상 래틀 귀여워요 래틀

1 생애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열다섯 살 때 로열 리버풀 관현악단의 타악기 주자가 된 '타악 신동' 출신. (그가 직접 팀파니를 치는 모습이 영상으로 있다.*영상) 관현악단 경험을 살려 지휘자로 변신, 19세 때인 1974년에는 본머스에서 열린 존 플레이어 국제지휘콩쿠르에 최연소 연주자로 참가, 1등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타악기 주자 출신이라 그런지 칸타빌레에 약한 면모를 보이기도..

25세 때인 80년 무명의 시골 악단인 버밍엄심포니오케스트라 지휘자로 취임해 1998년까지 이 심포니를 세계적인 교향악단으로 성장시켰다. 그는 60여 명이나 되는 단원을 정리한 뒤 최고의 인재로 악단을 재정비, 명연과 명음반을 쏟아놓기 시작했다.

특히 현대음악과 말러의 교향곡에 대한 독특한 해석으로 눈길을 끌었다.[2]-네이버 용어사전-

런던의 왕립음악원(Royal Academy of Music)에서 피아노와 지휘를 전공했으며,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영문학을 전공했다. 영국을 대표하는 지휘자로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1987년 CBE 훈장을, 1994년에는 Knight Bachelor(기사작위)를 받았다. 2002년 클라우디오 아바도의 후임으로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인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수석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원래는 2012년까지가 계약기간이었으나 이를 2018년까지로 연장했다. 단원들이나 관객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받은데다가, 래틀이 의욕적으로 추진한 디지털 콘서트홀[3]이 말 그대로 대박을 거두면서 베를린 필의 재정상태를 크게 개선시켰기 때문이라고 한다. (물론 이 배경에는 베를린필의 재단법인화도 한 몫을 했지만) 여러모로 금전적으로 베를린 필하모닉을 발전시킨 지휘자라고 할 수 있다. 카라얀 시절에 비하면 궁핍하지만

2018년 이후에는 재계약하지 않겠다고 밝힌 상태.
2017년 9월부터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기로 하였다. 관련기사



2012 런던 올림픽 개막식에서 등장하여 영국 영화산업에 대한 트리뷰트인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불의 전차> 연주를 지휘했...는데 연주 중에 정신줄 놓은 미스터 빈을 보고 경악했다.(...)

2 평가

래틀이 베를린 필의 지휘자가 된 것에 호사가들이 입방아를 찍지만 마땅한 경쟁자가 없는 관계로 최종투표에서 별 어려움없이 당선되었다[4]. '파이낸셜 타임스'지에 의하면 사이먼 래틀은 43%의 지지율을 얻었다고 한다. 카라얀 사후 강력한 후보였던 마젤과 바렌보임은 연로했기 때문에 언론에서는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예측되고 있었고[5]. 어쩌면 가장 강력한 후보가 될 수 있었던 마리스 얀손스는 당시에 심장마비 수술을 받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건강문제로 후보군에서 배제되었다.

현대음악에 능하다. 래틀이 상임지휘자를 맡은 이후 베를린 필에서 현대음악 래퍼토리가 상당히 늘었다.(Late Night at Philharmonie 처럼 현대음악으로만 꽉 채운 연주회도 인기 있는 편이다.) 그러나 다른 지휘자들이 잘 다루지 않는 현대음악만으로 래틀의 역량을 최고로 평가하는 것에는 무리수가 있다. 취임 초기에는 현대음악을 많이 다루는 래틀의 성향에 대해 베를린 청중이 반발하기도 하였고 언론도 이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다. 래틀은 이러한 여론을 수렴하여 현대음악의 비중을 줄이고 독일 고전주의 및 낭만주의 레퍼토리를 확대하며 본인 스스로 이러한 레퍼토리에 적응하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의 브루크너 교향곡 해석은 지날 수록 해석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주류 레퍼토리인 독일 낭만주의 음악 해석엔 호불호가 크게 갈리는 편이다. 연주에 대한 평가는 워낙 거장들의 시대먼치킨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쁘진 않지만 과거의 명연에 비하면 아쉽다는 평을 받기도. 고전주의 이전의 레퍼토리에 있어선 평범하다고도 하고 뽕끼가 있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독일 낭만주의 음악에 대해서는 베를린 필이라는 천의무봉의 악기를 가지고 연주한 것 치고는 아쉬움이 많다는 평을 받기도 하다.

래틀이 취임 후 2005년 베를린 필이 로열 콘서트헤보에 밀렸으나.[6][7] 10년 뒤 2015년 최고의 오케스트라 1위를 탈환했다.[8] 래틀은 리카르도 샤이에게 3표차로 밀리며 근소한 차이로 지휘자 랭킹 2위를 차지했다.

여담으로, 베를린 필 음악감독 당선 이전엔 객원을 엄청 뛰던 지휘자. 데뷔 이후 줄곧 베를린 필 레귤러 객원으로 연주를 소화했고, 빈 필의 연주횟수가 꽤 많다. 미국쪽으론 LA필과 가장 친근했으며 이 외에도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를 종종 연주했다. 신기하게도 런던 심포니와는 그리 친밀한 관계는 아니다.

버밍엄 시절 말러 교향곡 2번이 레퍼런스 중 하나로 꼽히며 명성을 날렸고 베를린 필 취임후 취입한 말러 5번 8번 9번 10번은 레퍼런스 급으로 유명하다. 빈 필로 녹음한 베토벤 교향곡 전집은 취향을 심하게 타는 연주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평을 받지는 못했다. 그밖에도 홀스트의 행성, 이모겐 홀스트에게 헌정된 음악으로 구성된 음반, 바흐 마태수난곡과 요한수난곡, 메시앙과 쿠르탁의 음반, 스트라빈스키 아폴로, 시마노프스키 작품집, 베를린필과 함께한 브람스 교향곡 전집, 하이든 교향곡집(베를린필, 버밍엄 둘 다 우수하다) 스트라빈스키와 신빈악파 음악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마이너 레퍼토리 최강자?)(카라얀, 아바도, 래틀 모두 신빈악파에 능하다는 공통점이 있다.[9]) 등등 추가기재 필요

3 비즈니스 수완

사업적 수완이 매우 뛰어나다. 지휘자가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비즈니스맨으로 성공했을 것이다. 사실 이러한 경영가로서의 면모가 베를린필의 상임 지휘자로 선임되는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 카라얀은 음악이라는 콘텐츠와 신기술에 의한 매체, 그리고 자신의 타고난 외모의 이미지를 잘 활용한 비지니스맨으로 성공을 거두었다.(이는 조롱이 아니며 상임지휘자로서 아주 뛰어난 덕목이다.)반면 래틀은 조직 전략을 기획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며 조직을 관리하고 바이어들과 협상하는 능력이 뛰어난 말그대로 비즈니스맨으로써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래틀은 베를린 필이 국가 보조금을 받는 처지에서 탈피하여 재단으로 독립하여 출범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에 베를린 필의 재단화에 대한 기획안을 제시했고, 이것이 그가 상임지휘자가 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상임지휘자가 되기 전부터 베를린 필 재단화 작업에 크게 기여했다. 이후 베를린 필의 디지털 콘서트홀을 오픈하는 등 악단의 비즈니스에 크게 관여했다. 이로 인해 악단의 재정이 개선되었기 때문에 단원들의 지지도도 높은 편이다. 하지만 정작 악단의 가장 큰 수입원이었던 음반 수입이 급감했다는 점이 에러(이는 변명의 여지가 있는것이 절대 다수의 지휘자가 2000년 이후 음반 수입이 급감했다. 이는 2000년대 이후 한국 가요 음반판매량만 봐도 알 수 있을것이다. 실제로 베를린필 외 타 악단들도 음반수입은 급감 크리... 안습..). 대부분의 지휘자들이 크게 꺼리는 후원자 접대와 같은 비즈니스 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있다. 내한공연 시 지휘대에서 후원자였던 박성용 금호그룹 명회회장에 대한 헌사를 자주 표하여 청중들에게 충공깽을 선사하기도 했다. 래틀은 훗날 베를린필의 21c 경영모델을 체계화한 인물로 이름이 남을 것이다.

  1. 오더 오브 메리트(Order of Merit)의 약자. 이것은 영연방 전체에서 정원이 24명에 불과한 특별 상급훈장이다. 의전상 1등급 훈장과 2등급 훈장 사이에 위치한다. 2014년 신년 서훈 명단(2014 New Year Honours)에서 사이먼 래틀과 고전문헌학자 마틴 리치필드 웨스트(Martin Litchfield West), 임페리얼 칼리지 런던 흉부외과 교수 마그디 야쿱(Magdi Yacoub)까지 3명이 새로 오르면서, 이 훈장의 정원은 딱 1자리만 남게 되었다.
  2. 1988년 말러 교향곡 2번 음반으로 '음반계의 오스카상'이라는 그라머폰상 '올해의 음반상'을 받았고 이후 해마다 상복이 쏟아졌다.-네이버 용어사전 발췌-
  3. 인터넷을 통해서 베를린필의 공연을 생중계해주는 베를린 필하모닉 공식 웹사이트. 때로는 해외 공연도 생중계를 해주며 아카이브를 통해서 예전에 했던 공연 영상들도 볼 수있다.
  4. 카라얀이 1986년 래틀이 베를린필 객원 지휘로 말러 교향곡 6번을 지휘하는 것을 보고 다음 베를린 필 상임지휘자로 래틀을 점찍었다고 하는 얘기도 있다.(세계의 오케스트라) 이와 더불어 카라얀이 직접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에 초청하였고 피가로의 결혼은 잘츠부르크에서 대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카라얀은 세이지 오자와나 세미욘 비쉬코프 등에 대해서도 차기 베를린 필 지휘자로 거론하는 등 여러 지휘자들에 대해서 립서비스를 한 바 있다. 특히 1985년 처음 베를린 필을 지휘한 세미욘 비쉬코프는 카라얀의 격찬을 받고 베를린 필의 후계자로 급부상한 바 있다. 카라얀은 비쉬코프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1975년 카라얀과 DG가 파격적인 재계약을 맺은 이후 카라얀 이외의 지휘자가 베를린 필과 음반 녹음을 남긴 것은 매우 이례적이었다. 그러나 누구보다도 카라얀이 자신의 후계자로 자주 언급한 이는 세이지 오자와였다. 80년대 후반 세이지 오자와는 베를린 필과 함께 해외순회 공연을 다닐 정도로 베를린 필과 잘 나가고 있었다. 잘츠부르크 페스티벌의 전권을 가진 음악감독으로써 페스티벌을 운영을 위해 여러 지휘자들을 초빙해야 했던 카라얀은 아바도, 무티를 비롯해 당시 많은 신예 지휘자들을 잘츠부르크로 초빙하여 빈 필에 데뷔시킨 바 있고, 그럴 때 마다 카라얀 후계자설이 뜨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립서비스에도 불구하고 카라얀 자신은 어느 누구도 후계자로 키우려는 실질적인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후계자가 일찍 결정되어 자신의 권력에 레임덕이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1989년 4월에 베를린 필을 사임한 이후에도 카라얀은 베를린 필의 후임자 선출에 전혀 개입하려 하지 않았다. 독설의 대가그리고 츤데레 첼리비다케 역시 뮌헨필에서 객원지휘를 하는 것을 보고 극찬했었고 이에 첼리비다케 사후 뮌헨필에서 사운드를 살릴 만한 유일한 지휘자로 래틀을 지목했으나 래틀은 이를 고사했다
  5.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가 중요한 변수로 작용했다. 베를린 필은 정기음악회 뿐만아니라 순회공연, 음반녹음 등 수많은 일정을 함께 소화하며 악단을 발전시킬 젊은 지휘자를 원했다. 푸르트벵글러는 30대에, 카라얀은 40대에 베를린 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50대에 베를린 필에 취임한 아바도는 나이가 많은 편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카라얀 사후 바렌보임이 상대적으로 부족한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후보로 꼽힌 것은 40대라는 나이가 크게 작용했다. 마젤, 무티, 오자와 등 다른 후보들도 당시에 40~50대였으며, 60대 이상이었던 지휘자들은 전혀 거론되지 않았다
  6. 2005년 로열 콘서트헤보는 복수의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7. 다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서는 전반적으로 여러 오케스트라의 실력이 상향 평준화되기도 했고, 녹음 기술 또한 과거에 비해 크게 발달했기 때문이지 베를린 필의 연주력이 떨어졌기 때문은 아니라는 지적이 있다. 베를린 필 정도의 역사가 있는 악단이 지휘자가 바뀐다고 해서 갑자기 연주력이 떨어지거나 하지는 않는다.
  8. 로열 콘서트헤보는 2위를 차지했다.
  9. 푸르트뱅글러는 현재 시점에서 신빈악파를 잘한다고 하기에 무리가 있지만 상당히 이른시기에 많은 신빈악파 음악을 소화했다. 카라얀은 신빈악파에서 낭만성을 진하게 뽑아내었고, 아바도의 경우 맑은 사운드로 이해하기 쉽게, 래틀의 경우 그야말로 구조전체를 보여주는 방식으로 신빈악파 음악을 소화해 냈다. 다음 베를린필 상임도 신빈악파에 능한 지휘자가 될것인가 지켜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