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닮았다.
Daniel Barenboim (히브리어: דניאל ברנבוים) 아르헨티나 태생의 피아니스트 겸 지휘자 1942년 11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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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러시아계 유대인 부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이 모두 피아노 연주에 일가견이 있었기 때문에 다섯 살 때부터 피아노 레슨을 받을 수 있었고, 1950년에 일곱 살의 나이로 첫 공개 연주회를 개최해 신동으로 불렸다. 2차대전 후 이스라엘이 건국되자, 바렌보임은 1952년에 가족들과 함께 이주해 아르헨티나+이스라엘 복수국적을 갖게 되었다. 동시에 오스트리아의 빈과 이탈리아의 로마에서 피아노 리사이틀을 개최하며 유럽 무대에도 진출해 연주 활동을 계속 벌였다.
1952년에 이탈리아 시에나의 키지아나 음악원에서 처음으로 지휘 수업에 참가하면서 지휘에도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했고, 주빈 메타와 클라우디오 아바도 같이 훗날 마찬가지로 지휘자로 대성하는 이들과도 동기로 같이 배웠다. 1954년에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에서도 매 년 여름마다 열리는 음악제에 참가해 이고르 마르케비치가 주관하는 지휘 강좌 수업을 들었는데, 특히 이 때 당대 본좌로 꼽히던 지휘자 빌헬름 푸르트벵글러를 만나 그의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하고 찬사를 받기도 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바렌보임에게 자신이 지휘하는 베를린 필과 함께 베토벤의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하지 않겠냐고 제안했지만, 아직 나치의 홀로코스트가 생생한 기억으로 남아 있던 바렌보임의 아버지는 이 제안을 거절했다. 푸르트벵글러는 음악제 종료 후 몇 달 뒤 사망했기 때문에 바렌보임이 그와 협연할 기회는 이후에도 주어지지 않았지만, 이 때의 경험이 워낙 인상적이었기 때문인지 바렌보임은 지금도 자신의 멘토로 푸르트벵글러를 꼽고 있다.
1955년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첫 공연을 가졌고, 당시 명교사로 이름을 날리던 나디아 불랑제에게 화성법과 작곡을 배우기도 했다. 이어 런던과 뉴욕에서도 성공적인 공연을 이어가며 레오폴드 스토코프스키 등의 지휘자들과 협연하는 등, 10대 중반의 나이로 분주한 활동을 이어갔다. 1966년에는 지휘자로도 공식 데뷰해 투잡을 뛰기 시작했고, 이듬해에는 영국의 유명 첼리스트 재클린 뒤 프레와 이스라엘에서 유대교 의식에 따라 결혼한 뒤 곧바로 제3차 중동전쟁에 참전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가져 화제가 되었다.
1973년에는 에든버러 음악제에서 모차르트의 오페라 '돈 조반니' 를 지휘해 오페라 무대에도 데뷰했고, 1975년에는 게오르그 솔티의 뒤를 이어 파리 오케스트라의 음악 감독으로 부임해 처음으로 중요한 상임 직책을 맡게 되었다. 바렌보임은 이 악단과 현대음악 공연을 적극적으로 진행하며 자신과 악단의 연주 곡목을 상당히 넓혔고, 또 피아니스트로서도 악단 단원들과 실내악 공연을 개최하는 등 강한 친화력을 보여주며 1989년까지 장기 재임했다.
하지만 사생활은 그다지 순탄치 않았는데, 아내 뒤 프레가 1970년대 초반 무렵 부터 다발성 경화증이라는 불치병에 걸려 연주 활동에 큰 차질을 빚고 있었고, 결국 1973년 2월에 열린 뉴욕 공연을 끝으로 오랜 투병 생활에 들어갔다. 뒤 프레가 아직 세상을 뜨기 전이었던 1980년대 초반에 바렌보임은 러시아 출신의 피아니스트 엘레나 바슈키로바와 내연 관계를 맺기 시작했고, 다비드와 미하엘 두 아들까지 봤다. 결국 뒤 프레가 1987년에 사망한 뒤 바렌보임은 이듬해 바슈키로바와 공식 재혼했는데, 이게 세간에는 불륜으로 비춰져 지금까지도 이 건을 들며 바렌보임을 까는 이들도 있다.
1981년에는 바그너 오페라 공연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음악제에 처음 초빙되어 공연했는데, 이후 1999년까지 계속 무대에 올라 바그너의 대표작 오페라들 거의 대부분을 지휘했다. 특히 1988년부터 1992년까지 공연된 니벨룽겐의 반지 4부작은 실황 음반 및 영상물로 제작되어 호평을 받았는데 이것은 바렌보임에게 일대의 큰 전환기가 되었다. 이 음반을 통해 정상급 바그너 지휘자로써 입지를 확고히 했을 뿐만아니라 그간 유망주로 평가받던 바렌보임이 이제는 거장의 반열로 평가받는 계기가 되었다.
1988년에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사건으로 유명한 옛 바스티유 감옥 부지에 신축 중이던 오페라극장의 음악 감독으로 내정되었는데, 1989년 1월에 느닷없이 극장장 피에르 베르제로부터 해고 통지를 받고 본격적인 임기가 시작되기도 전에 불명예 퇴진을 당했다. 바렌보임의 대타로 들어온 지휘자가 바로 정명훈이었기 때문에, 이 사건은 한국 음악계에서도 상당히 자주 회자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바렌보임은 프랑스 음악계와 사이가 틀어졌고, 오랫동안 파트너쉽을 유지했던 파리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 직책도 같은 해 사임했다.
1989년 카라얀이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직을 사임하자, 로린 마젤과 함께 유력한 차기 후계자로 떠올랐다. 1980년대 중반에 베를린 필은 카라얀과 갈등을 겪으면서 카라얀이 아닌 다른 지휘자와 음반녹음을 시도한 바 있었다. 그러나 여러 지휘자들이 카라얀의 눈치를 보느라 망설이고 있던 와중에 바렌보임이 선뜻 응해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베를린 필과 녹음한 적이 있었다.[1] 이후 바렌보임은 베를린 필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결국 베를린 필의 차기 상임지휘자직은 클라우디오 아바도에게 돌아갔다.
1991년에 게오르그 솔티의 뒤를 이어 미국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 음악 감독으로 부임했다. 여기서도 유럽 정통 레퍼토리를 기반으로 하면서도 존 코릴리아노의 교향곡 1번을 초연하는 등 현지 음악도 고르게 다루면서 전임자 솔티 만큼은 아니지만 10년 이상 재임할 수 있었다.
하지만 바렌보임은 임기 후반기에 악단 발전 기금을 모으러 다니는 행정 업무의 과중함을 호소하면서 2006년 6월에 사임했고, 이후에는 1992년 이래 겸직하고 있던 베를린 국립 오페라단과 휘하 관현악단인 베를린 슈타츠카펠레의 음악 감독에 주력하면서 푸르트벵글러가 재직했던 베를린 필의 공연에도 정기적으로 객원 출연했다.
또 1989년에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자, 바렌보임은 어느 지휘자들보다 재빨리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 땅을 밟은 동독 시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기념 음악회를 여는 등의 행동력으로 카라얀 이후 차기 베를린 필 상임 지휘자까지 노릴 수 있었다. 하지만 단원 투표 결과는 친구 클라우디오 아바도로 나왔고, 바렌보임은 다소 섭섭하다는 코멘트를 남기기는 했지만 이후에도 계속 베를린 필의 정기적인 객원 지휘자로 초빙받고 있다.
1999년에는 아랍권과 이스라엘의 긴장 관계를 개선하기 위한 취지로 팔레스타인 출신의 영문학자 겸 사회운동가인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동으로 양 측의 청소년 연주자들을 모아 서동시집 관현악단을 결성해 청소년 음악 교육과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고, 2000년에는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으로부터 종신 지휘자 직함을 받았다. 2006년에는 극장 행정 당국과 크게 다투고 돌연 사임한 리카르도 무티를 대신해 이탈리아 밀라노의 라 스칼라 오페라단 수석 객원 지휘자로 공백을 메꾸었고, 2011년에 공식적으로 음악 감독에 부임했다. 또 이전 까지는 비교적 소원한 관계였던 오스트리아 음악계에서도 조금씩 활동을 늘려가고 있고, 2009년과 2014년에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신년음악회 지휘 무대에 서기도 했다.
2014년 현재 베를린과 밀라노를 거점으로 활동하고 있고, 이외에도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상주지인 스페인의 세비야를 비롯해 거의 전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는 원로급 지휘자 겸 피아니스트로 대접받고 있다.
2 수상 경력
- 이탈리아 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장 (1984)
- 그래미상 클래식 실내악 연주 부문 (1991, 1995)
- 그래미상 클래식 관현악 연주 부문 (1992)
- 독일연방공화국 대공로훈장 대십자장 (2002)
- 스페인 아스투리아스 왕자상 (2002, 에드워드 사이드와 공동 수상)
- 그래미상 클래식 독주와 관현악 협연 부문 (1977, 1983, 2002)
- 빌헬름 푸르트벵글러상 (2003,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과 공동 수상)
- 그래미상 클래식 오페라 부문 (2003)
- 기독교와 유대인 협력을 위한 독일 조정위원회 부버-로젠츠바이크 메달 (2004)
- 독일 하나우 파울 힌데미트상 (2004)
- 독일 츠비카우 로베르트 슈만상 (2005)
- 에른스트 폰 지멘스 음악상 (2006)
-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3급) (2007)
- 독일 괴테 인스티투트 괴테 메달 (2007)
- 일본 타카마츠노미야 전하기념 세계문화상 (2003)
- 이스라엘 볼프 재단 볼프상 (2008)
- 영국 로열 필하모닉 협회 금메달 (2008)
- 덴마크 레오니 소닝 음악상 (2009)
- 아르헨티나 코넥스 재단 코넥스상 음악 부문 (2009)
- 이스탄불 국제음악제 평생공로상 (2009)
- 국제연합 독일 위원회 오토 한 평화메달 (2010)
-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음악상 (2010)
- 베스트팔렌 평화상 (2010)
- 프랑스 레지옹도뇌르 훈장 그랑도피시에(2급) (2011)
- 대영제국 훈장 명예 KBE(2등급) (2011)
- 오스트리아 브루노 크라이스키 인권상 (2011)
- 드레스덴 평화상 (2011)
- 네덜란드 에디슨 음악상 평생공로 부문 (2011)
3 음악 성향
정격연주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는 동시대 연주자들이나 지휘자들과 달리, 음악 쪽에서는 상당히 보수적인 축에 속한다. 시대 고증 보다는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는 보편적 전통을 더 중시하는 스타일이고, 이는 피아니스트와 지휘 양 쪽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때문인지 고전 이전의 바로크 음악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곡집이나 골드베르크 변주곡 외에는 다소 다루는 빈도가 덜한 편이고, 주로 고전과 낭만, 현대 레퍼토리의 연주와 지휘에 주력하고 있다.
피아니스트로는 모차르트와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전곡을 녹음한 것이 가장 눈에 띄는 성과인데, 특히 후자는 도이체 그라모폰과 EMI에서 각기 한 종씩 제작할 정도로 열의를 보였다. 나중에 EMI에서 영상물로 전곡을 한번 더 녹음하였고, 이것이 또 데카에서 CD로 발매되어 총 3종이다.유투브에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치면 맨날 맨 위에 나온다 이외에도 멘델스존의 무언가 전집, 쇼팽의 야상곡 전집, 브람스의 변주곡 등의 녹음이 유명하다. 협주곡으로는 자신이 독주와 지휘를 직접 맡아 잉글리시 체임버 오케스트라와 EMI에서 녹음한 모차르트 피아노 협주곡 전집을 시작으로 존 바비롤리 지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녹음한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전집, 오토 클렘페러 지휘로 같은 악단과 녹음한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전집이 1960년대의 대표 녹음으로 손꼽힌다.
지휘 쪽도 레퍼토리가 비슷한 편인데, 특히 나이를 먹어가면서 주 레퍼토리가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등 독일계 대가들의 교향곡이나 협주곡, 피아노곡, 바그너와 베르디의 오페라 위주로 자리잡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다. 특히 바그너의 경우는 거장이 없는 요즘 시절에 드문 거장 스타일의 연주로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다는 평이다. 하지만 음반들은 대개 덜 무르익을 때 녹음해서 혹평이라는 것이 함정 물론 그 쪽에만 고착화되지는 않고 있고 아르헨티나 태생이라 그런지 2006년에는 부에노스아이레스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이끌고 야외 탱고 음악회를 개최하는 등 대중적 감각도 갖고 있음을 어필한 바 있다. 또 피에르 불레즈나 엘리엇 카터 등 현대음악계의 노장 작곡가들이 남긴 작품들도 적극적으로 공연하고 있고, 2010년대 들어서는 서동시집 관현악단 활동의 일환으로 아랍계와 유대계 신진 작곡가들이 갓 선보인 관현악 작품들도 골고루 무대에 올리기 시작하고 있다. 1990년대 들어서는 그 동안 유대인임에도 별로 관심을 갖지 않고 있던 말러의 교향곡들도 조금씩 손을 대고 있다.
특히 베토벤 음악에 대한 자세는 거의 숭배라고 해도 될 정도인데, 서동시집 관현악단을 이끌고 2011년과 2012년에 세계 순회 공연을 했을 때도 기본 연주곡이 베토벤 교향곡 전곡이었고 이 실황은 각각 CD와 DVD로 묶여 발매되었다. 내한 공연 때도 베토벤 교향곡 전곡을 완주하였고, 판문점에서도 연주회가 있었다. 피아노 협주곡 전곡도 자신이 독주와 지휘를 겸해 꾸준히 무대에 올리고 있다. 아예 자신이 연주하고 지휘한 교향곡과 피아노 협주곡, 피아노 소나타 전집을 'Beethoven for all' 이라는 부제의 염가 세트로 데카에서 출반하고 있을 정도다.
4 사회 활동
레너드 번스타인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유대인임을 강조하는 인물이지만, 동시에 세계시민으로서 중동 지역의 모든 군사/정치적 분쟁에 반대하는 견해를 분명히 하고 있다. 특히 서로를 철천지 원수로 삼고 있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청소년들을 최소한 음악에서라도 화합하게 해보자는 취지로 결성한 서동시집 관현악단에서 이런 경향이 매우 강하게 나타나는데, 아예 이 악단의 활동상을 다룬 다큐멘터리까지 제작될 정도로 국제적인 관심을 모으고 있다.
서동시집 관현악단과 이룬 강 큰 성과는 2005년에 있었던 라말라 공연이었는데, 이 공연은 이전에도 여러 차례 추진했다가 숱한 군사 분쟁으로 인해 중단되었다가 스페인 정부의 유대인 단원들에 대한 신원 보증과 외교관 전용 여권 발급, 팔레스타인 현지의 해외 외교 당국들+국제연합 소속 상주 기구들과 협력해 가까스로 진행할 수 있었다. 이 공연은 이후 CD로, 또 상술한 서동시집 관현악단 다큐멘터리와 함께 DVD로 묶여 출시되었다.
2011년 5월에는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가장 심한 지역인 가자 지구의 고고학 박물관에서 '가자를 위한 관현악단' 이라는 공연을 개최했는데, 바렌보임과 뜻을 같이 하는 베를린 필과 베를린 국립 관현악단, 빈 필, 파리 관현악단, 라 스칼라 오페라 관현악단의 단원들이 모여 결성한 일종의 올스타 악단이 출연했다. 이렇게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사이의 평화 운동에 이바지한 공로로 2008년에는 팔레스타인 명예 시민권을 받았는데, 이렇게 해서 바렌보임은 아르헨티나-이스라엘-팔레스타인-스페인의 4중 복수국적을 가진 전무후무한 음악인이 되었다.
언론과의 인터뷰에서도 자신을 정치가가 아닌 음악가라고 하면서도 중요한 시사 문제에 대해서는 돌직구 식으로 강한 발언을 날리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이스라엘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극우 유대인들의 정착촌 증축을 공개적으로 비판한다던가 볼프상 수상 기념사로 이스라엘 독립 선언서를 언급하며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에 대한 군사 행동이 그릇된 것임을 주장하는 등의 행동으로 정통파 극우 유대인들과 하레디에게 되레 매국노 취급까지 당하고 있다. 하지만 정통파 극우 유대인들과 하레디들도 하마스 같은 팔레스타인 강경 단체 만큼이나 답이 없는 수구꼴통인 것은 마찬가지라, 오히려 바렌보임의 평화 운동을 홍보해주는 역효과만 내고 있다.
반유대주의에 이용된[2] 것으로 악명 높은 바그너 음악에 대한 선호도 숱한 논쟁을 불렀는데, 오랜 친구 주빈 메타와 마찬가지로 바렌보임도 바그너 음악의 이스라엘 연주를 끈질기게 추진해오고 있다. 물론 1980년대 까지는 이런 움직임이 상당히 비판받고 있었지만, 아이작 스턴 등을 비롯한 여타 유대인 연주자들이 이스라엘의 바그너 음악 터부시는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음악인들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의견을 내놓는 등 지원에 나서면서 2000년대 들어서는 여전히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바그너 음악의 이스라엘 공연이 조금씩 늘고 있다.
5 가족과 주변 관계
뒤 프레와 함께 한 결혼 생활은 짧았지만, 음악인 가족이었던 만큼 여러 협연작들을 녹음과 영상으로 남겼다. 엘가의 첼로 협주곡을 아내와 협연한 흑백 영상물이 유명하고, 크리스토프 누펜이 감독한 슈베르트의 피아노 5중주 '숭어' 영상에서는 뒤 프레와 바렌보임의 절친들이었던 이츠하크 펄먼, 핀커스 주커먼, 주빈 메타가 즐거운 모습으로 협연하는 장면이 담겨 있다.
다만 뒤 프레가 너무 이른 나이에 불치병에 걸린 탓에 둘 사이에 아이는 없었고, 1983년과 1985년에 바슈키로바가 낳은 두 아들이 현재까지로서는 유일한 자식들이다. 장남 다비드는 KD-Supier라는 예명의 힙합 가수로 대중음악계에 들어선 이래 프로듀서와 작곡가로 일하고 있다. 차남 미하엘은 아버지처럼 피아노를 배우다가 바이올린으로 전향해 바이올리니스트로 활동하고 있고, 2003년부터 아버지가 창단한 서동시집 관현악단의 악장(콘서트마스터)으로 재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