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교향악단

1 개요

영어: London Symphony Orchestra

영국의 대표적인 관현악단이자, 세계구 급으로 쳐도 상위권에 드는 본좌 악단. 영문 명칭 그대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 또는 약칭으로 런던 심포니라고도 부른다. 홈페이지

영국 최고의 오케스트라로 꼽히며, 그라모폰지 등의 오케스트라 순위에서 5위 안 팎에 드는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악단이다. 그라모폰지의 자국 버프가 있지만, 기량으로는 세계 정상급 악단임을 부인할 수 없다. 영화음악 등 클래식 음악 이외의 영역에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데, 그 대신 클래식 음악 부분에서는 오히려 런던 필, 필하모니아 등 런던의 다른 오케스트라보다 전통이나 명성이 떨어지는 측면이 있다.

2 연혁

1904년에 창단되었는데, 아예 새로 결성된 것은 아니고 일종의 흑역사가 있었다. 런던에서 연주회 전문으로 활동하던 퀸즈 홀 관현악단이 모체였는데, 1903년 쯤부터 이 악단의 지휘자였던 헨리 우드가 단원들한테 다른 악단에서 오부리 뛰거나 레슨 다니는 등의 과외 활동을 금지하는 등 다소 쫀쫀하게 군 것이 화근이었다.

결국 이에 꼭지가 돈 50명 가량의 단원들이 단체로 퇴단해 새로운 악단을 따로 만들었는데, 이게 런던 교향악단이다. 어찌 보면 독일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비슷한 케이스다. 다행히 산업혁명의 본산으로 당대 가장 부유한 도시 가운데 하나였던 런던은 당대의 본좌 지휘자였던 한스 리히터[1]가 창단과 동시에 수석 지휘자로 취임한 덕분에 듣보잡 신세로 재출발하는 굴욕은 면할 수 있었다.

리히터는 1911년 시력 악화로 지휘 활동을 접을 때까지 재임하면서 악단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졌고, 1906년에는 프랑스로 창단 후 첫 해외 연주 여행을 갔다오기도 했다. 리히터의 후임으로는 작곡가로 유명한 에드워드 엘가가 부임했지만, 한 시즌 지휘하는데 그쳤고 세 번째로 당시 베를린 필과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의 상임지휘자였던 거장 아르투르 니키슈가 제3대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다.

니키슈도 1912년에 악단을 이끌고 미국에 순회 공연을 가는 등 악단의 국내외 지명도를 한층 끌어올렸는데[2], 이듬해에는 HMV(현 EMI)에 창단 후 첫 녹음을 취입하기도 했다. 하지만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자동적으로 적성국 요인으로 분류되어 강판당했고, 1915년에 토머스 비첨이 급히 땜빵되어 1916년까지 악단을 이끌었다.

1919년에는 앨버트 코츠가 제5대 수석 지휘자로 취임했고, 과거 추축국들이었던 독일이나 오스트리아와 관계가 개선되자 해당 국가들의 유명 지휘자를 객원으로 적극 초빙해 공연하기 시작했다. 코츠가 1922년에 사임한 뒤에는 한동안 수석 지휘자 없이 활동했지만, 활동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1932년 해밀턴 하티가 제6대 수석 지휘자로 부임한 직후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영국 경제도 개발살났고, 악단 운영에도 큰 타격이 가해졌다.

재정 부담을 줄이기 위해 대량 감원이 행해졌고, 하티도 1935년에 직책에서 물러나면서 이후 거의 15년 가까이 수석 지휘자 없는 긴 침체기를 가지게 되었다. 그나마 공연이나 녹음 수요는 아직 있어서 이 수입으로 간신히 버티는 상황이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때도 심한 타격을 입었다. 그나마 종전 후인 1950년에 오스트리아 출신의 지휘자인 요제프 크립스를 제7대 수석 지휘자로 영입해 재기를 시도했고, 크립스는 1954년 미국의 버펄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이임할 때까지 재임했다.

크립스가 사임한 후 또 몇 년의 공백기를 거쳐 1960년에는 프랑스 출신의 노장 지휘자인 피에르 몽퇴가 제8대 수석 지휘자가 되면서 본격적인 재도약이 시작되었고, 이 때부터 2010년 현재까지는 거의 공백 상태가 없이 수석 지휘자 제도가 유지되고 있다.

몽퇴의 후임으로는 헝가리 출신의 이슈트반 케르테즈가 부임했다. 케르테츠는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지휘자로 DECCA가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아직 젊은 신예였기 때문에 음악계에서 네임밸류가 떨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런던 심포니 측은 케르테츠를 영입하여 DECCA와 활발한 음반 녹음을 기대했는지도 모르겠는데, 안타깝게도 DECCA는 자사와 전속계약을 맺은 빈 필의 세션에 케르테츠를 주로 투입했기 때문에 런던 심포니와는 그다지 많은 녹음을 남기지 않았다. 케르테츠는 실력 있는 지휘자임은 분명했으나 나이가 너무 젊은 편이어서인지 단원들이 무시하는 경향도 있는 등 악단과의 관계는 원만하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케르테츠가 대중적으로 인기가 없었다는 점을 큰 문제점으로 여긴 경영진은 후임으로 대중성과 쇼맨쉽을 겸비한 앙드레 프레빈[3]을 수석지휘자로 영입했다. 프레빈은 헐리우드에서 영화음악으로 명성을 쌓았지만 클래식 지휘자로는 경험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런던 심포니를 맡기 전 프레빈의 지휘 경력은 휴스턴 심포니 상임지휘자로 1년 일한 것이 전부였다. 프레빈이 수석지휘자로 취임하여 두세 시즌이 지나자 경영진은 이번에는 프레빈의 음악성에 한계를 느꼈다. 마침내 경영진은 프레빈을 중도에 경질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레빈은 의외로 완강하게 저항했다. 프레빈은 계약서상에 명시된 자신의 임기 보장을 요구하며, 단원들을 끌어들여 자신을 지지하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결국 경영진은 그를 경질하려는 것을 포기했고, 그는 계약서상의 임기를 모두 채웠다. 덕분에 프레빈은 런던 심포니에서도 제법 장수한 지휘자가 되었고, 임기 후에는 계관지휘자가 되었다.

런던 심포니 경영진은 프레빈을 경질하는데는 실패했지만, 대신 음악성 있는 거장 지휘자들을 객원지휘자로 초빙하는데 많은 노력과 자금을 투입했다. 일례로 런던 심포니는 칼 뵘을 객원지휘자로 초빙하기 위해 당시 다른 오케스트라들이 정상급 지휘자들에게 지불하던 개런티의 세 배 정도 되는 거액을 제시했다.

프레빈과 계약된 임기가 모두 끝나자 런던 심포니 경영진은 프레빈의 후임 지휘자로 클라우디오 아바도를 수석 지휘자로 영입하였다. 그러나 아바도가 유명해짐에 따라 빈 필과 빈 국립가극장, 시카고 심포니, 라 스칼라 등 다른 악단과의 활동에 더 큰 신경을 쓰느라 런던 심포니와는 활동이 거의 뜸해지게 되었다. 미안함걸리적거림을 느낀 아바도는 자진해서 사임을 하려했지만, 오히려 경영진은 이름만 걸어놔도 좋으니 계속 상임지휘자를 맡아달라고 요청했다. 이러한 요청에 더 미안해하면서 그만둘 줄 알았는데 아바도는 런던 심포니의 상임을 몇년간 더 유지했다. 그러나 1988년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차기 지휘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내심 시카고 심포니를 노리고 있던 아바도는 마침내 걸리적거리던 런던 심포니를 사임하고야 말았다.

아바도의 후임으로는 미국의 신예지휘자 마이클 틸슨 토머스가 지명되었고, 1995년에 콜린 데이비스가 영국 지휘자로서는 해밀턴 하티 이래로 통산 네 번째 수석 지휘자에 부임했다. 데이비스는 2006년 퇴임한 후에도 2013년 타계할 때까지 악단의 회장 직책을 맡으면서 객원으로 종종 지휘대에 섰고, 후임으로는 러시아 출신의 발레리 게르기에프가 2007년에 부임해 2013년 현재까지 재임 중이다. 다만 게르기에프가 계약이 만료되는 2015년에 추가 갱신 없이 퇴임해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로 옮겨갈 예정이라고 발표했기 때문에, 악단에서는 후임 수석 지휘자를 물색하는 작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베를린 필에 있다가 2018년 퇴임할 것이라고 발표한 바 있던 사이먼 래틀과 계약에 성공했고, 래틀은 2017/18년 시즌에 예술 감독 직책도 겸임해 취임할 예정이다.

3 역대 수석 지휘자

부임 예정인 지휘자는 기울임체로 표기했다.

  • 한스 리히터 (Hans Richter, 재임 기간 1904-1911)
  • 에드워드 엘가 (Edward Elgar, 재임 기간 1911-1912)
  • 아르투르 니키슈 (Arthur Nikisch, 재임 기간 1912-1914)
  • 토머스 비첨 (Thomas Beecham, 재임 기간 1915-1916)
  • 앨버트 코츠 (Albert Coates, 재임 기간 1919-1922)
  • 빌럼 멩엘베르흐 (Willem Mengelberg, 재임 기간 1930-1931)
  • 해밀턴 하티 (Hamilton Harty, 재임 기간 1932-1935)
  • 요제프 크립스 (Josef Krips, 재임 기간 1950-1954)
  • 피에르 몽퇴 (Pierre Monteux, 재임 기간 1961-1964)
  • 이슈트반 케르테즈 (István Kertész, 재임 기간 1965-1968)
  • 앙드레 프레빈 (André Previn, 재임 기간 1968-1979. 퇴임 후 계관 지휘자 호칭 수여)
  • 클라우디오 아바도 (Claudio Abbado, 재임 기간 1979-1987)
  • 마이클 틸슨 토머스 (Michael Tilson Thomas, 재임 기간 1987-1995. 퇴임 후 수석 객원 지휘자로 활동 중)
  • 콜린 데이비스 (Colin Davis, 재임 기간 1995-2006. 퇴임 후 회장 호칭 수여)
  • 발레리 게르기에프 (Валерий Гергиев, Valery Gergiev, 재임 기간 2007-)
  • 사이먼 래틀 (Simon Rattle, 재임 기간 2017-)

4 특징

현존하는 영국 관현악단들 중 연주회 전문 악단으로는 고참 급이고, 타 악단에서 독립해 자주적으로 세운 단체인 만큼 단원들의 자부심이 상당히 강한 편으로 유명하다. 전체적인 합주력 외에 개별 단원들의 연주 실력도 상당히 출중한 편으로, 특히 수석급 연주자들이었던 제임스 골웨이(플루트)나 배리 터크웰(호른), 게르바스 드 페이어(클라리넷), 오시안 엘리스(하프) 등의 주자들은 이후 독주자 혹은 실내악 연주자로 개인적인 명성을 쌓기도 했다.

그럼에도 2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악단 전용의 콘서트홀이 없어서, 뛰쳐나온 퀸즈 홀이라든가 로열 앨버트 홀, 로열 페스티벌 홀 등 이곳저곳에서 셋방살이를 해야 했던 안습 상황을 겪기도 했다. 그나마 1982년 준공되어 입주한 바비컨 센터도 음향이 이게 뭐냐고 까이기 바빴고, 수 차례의 개보수 공사를 거쳐 21세기에 와서야 그럭저럭 괜찮은 공연장이 됐다고 평가받고 있다. 하지만 2017년에 부임 예정인 래틀이 계약 협상을 하면서 악단 전용 콘서트 홀 건립을 요구했기 때문에, 계약 조건 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바비컨 센터를 떠나 새로 짓는 홀로 거점을 옮길 것으로 보인다.

비록 재정난과 전쟁크리 등으로 인해 이래저래 힘든 운영 상황을 거쳐왔다고는 하지만, 웬만한 실력은 계속 갖추고 있었던 탓에 녹음 의뢰가 꽤 많이 들어오는 편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다. 특히 몽퇴가 수석으로 부임한 후에는 네덜란드에서 갓 설립한 신생 음반사인 필립스에서 최신 기술이었던 스테레오로 녹음한 양질의 음반들이 쏟아져 나오면서, 업계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필립스 외에도 데카, 도이체 그라모폰, EMI, 컬럼비아(현 소니BMG 계열의 소니 클래시컬) 등등 별의별 크고 작은 음반사들에 이름을 남겼는데, 다만 21세기 들어 음반 매출이 크게 감소하기 시작하자 조금씩 발을 빼는 분위기다. 그런 탓인지 2000년 부터는 아예 악단에서 자체적으로 'LSO Live' 라는 음반사를 창립해 공연 실황 녹음으로 음반을 제작하고 있다. 음반 뿐 아니라 해당 음원들을 아이튠즈아마존 등에 유료 다운로드로 판매하고 있어서, 여러 모로 영국의 악단 중에서 현대 기술에 꽤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재정적인 문제와 관련해서인지 2차대전 후에는 영화음악 쪽에서도 많이 작업하고 있다. 다른 유명 오케스트라가 영화음악 같은 일을 꺼려하기 때문에 주요한 영화음악 녹음시장의 상당지분을 런던 심포니가 차지할 수 있었다. 때문에 스탭 롤에도 OST 연주 담당 단체로 꽤 많이 눈에 띄고 있다. 심지어 비틀즈딥 퍼플, 마이클 잭슨 같은 이나 뮤지션들과도 협연할 정도의 유연성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존 윌리엄스의 지휘 아래 스타워즈OST를 녹음하기도 하였고, 건담 시드건담 시드 데스티니의 OST를 기반으로 작곡가인 사하시 토시히코가 개편한 두 곡의 교향조곡(교향 모음곡)도 이 악단이 연주해 녹음했다. 한국에서는 김동률의 솔로 앨범 2집~4집에서 기용되었다.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인 런던 심포니의 경영 정책은 지휘자의 선임에도 영향을 미쳤는데, 헐리우드의 영화음악계에서 오랫동안 활동한 앙드레 프레빈을 상임지휘자로 선임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직업지휘자로써의 프레빈의 경력은 1년에 불과했다.

이처럼 영화음악이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덕분에 런던의 오케스트라들 가운데서 재정으로 가장 좋은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고, 또 이를 통해 악단의 기량을 계속 최고로 유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대중음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댓가로 클래식 음악 분야에서 실력에 비해 과소평가받는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실제로 런던 심포니가 클래식 분야에서 남은 명연주는 악단의 명성에 비해 크게 부족한 편이다.

1966년에는 악단 부속 합창단으로 런던 교향 합창단(London Symphony Chorus)이 창단되었고, 합창단 단독 공연 외에 교향악단과 거의 전속으로 협연하고 있다.
  1. 바그너의 수제자로 빈 필하모닉의 상임지휘자를 20년 가까이 했다. 리히터 이전까지는 다소 비정기적인 활동을 했던 빈 필을 정상궤도로 올려 놓은 인물이다. 빈 필의 자리를 그만둔 후에는 좋은 페이를 지급했던 런던에서 자주 활동했다.
  2. 그런데 하필이면 이 공연 때문에 악단 전체가 수장될 뻔하기도 했다. 바로 그 유명한 타이타닉으로 이동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는데, 다행히도 예약이 제대로 되지 않아 올림픽호로 바꾼 덕에 화를 모면할 수 있었다.
  3. 프레빈은 베를린 출신이지만 2차 세계대전 전후 미국에 남아있던 반독일 정서를 우려해서 독일 출신임을 숨기기 위해서 성을 Priwin에서 Previn으로 고쳤고, 이름도 프랑스식으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