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프 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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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ustav Mahler (1860년 7월 7일 ~ 1911년 5월 18일)
오스트리아작곡가지휘자로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교향곡 작곡가.

1 생애

1860년 보헤미아[1]의 칼리슈트에서 유대인 집안의 자녀로 출생했고, 이후 모라비아의 독일인 거주지역인 이글라우로 이주해 유년시절을 보낸다. 어린시절 이미 수천곡의 민요와 군가를 욀 정도로 대단한 음악적 소양을 드러냈다 하며, 6살부터 본격적으로 학과 공부와 음악 공부를 시작하게 된다. 뛰어난 음악적 소질이 있었지만, 유년시절 여러 형제들의 죽음에 대한 경험으로 살아남았다는데 대한 심한 죄책감을 지니고 있었다. 이 유년시절의 경험은 그의 음악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 직접적으로 이것과 관련을 맺는 음악이 바로 탄식의 노래이다.

15살이 된 1875년 빈 음악원에 입학해 율리우스 엡스타인에게 피아노를, 로베르토 후스에게 화성학을, 프란츠 크렌에게서 작곡을 배웠다. 3년 뒤에 빈 대학에 입학해 음악과 역사, 철학 등을 공부하게 된다. 한편으로 빈에서 처음으로 리하르트 바그너의 악극을 접했고 안톤 브루크너에게서 대위법 강의를 받았는데 이들은 말러의 음악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빈 대학 시절 칸타타 탄식의 노래를 작곡해 베토벤상에 도전했지만 입상에는 실패했다. 후일 그는 친구인 나탈리 바우어 레히너에게 "만약 이때 베토벤상을 수상했다면, 작곡에만 전념했을것"이라 고백했다 한다.[2]

작곡에만 전념할 처지가 아니었던 말러는 대학을 졸업한 후인 1880년, 바트 할의 여름극장에서 지휘자로서 데뷔하게 된다. 이후 1881년에 류블랴나, 1882년 올로모크 극장을 거쳐 1883년에는 카젤의 왕립 극장에서 부지휘자가 되었다. 카셀에서 소프라노 요한나 리히터와 사랑에 빠졌지만 끝내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경험이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로 승화되었다. 당대의 최고 지휘자였던 한스 폰 뷜로우를 찾아가 제자로 받아달라고 부탁했으나 거절당한뒤, 1885년 프라하로 옮겨갔고, 이듬해인 1886년에는 라이프니츠에서 지휘자 생활을 했고 1888년에서 1891년까지 부다페스트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자 겸 음악감독으로서 경력을 쌓아나갔다.

1887년, 병에 걸린 아르투르 니키쉬를 대신해 바그너의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를 지휘해 평론가들과 관중들에게 호평을 받았고, 이듬해에는 베버의 손자의 위촉으로 베버의 미완성 오페라 "세 사람의 핀토"를 완성해 명성을 쌓아나갔다. 그 사이에 교향곡 제1번 "거인"을 작곡해 부다페스트에서 초연했지만 반응은 신통치 않았다. 한편으로 바그너의 "라인의 황금"과 "발키리"를 무삭제로 공연하기도 했다.[3]

이후 1891년, 함부르크로 옮겨 7년여 동안 장기계약으로 오페라 극장의 지휘자로 활동하게 된다. 함부르크 시절, 말러는 오스트리아 북부의 슈타인바흐에서 유일하게 작곡에만 전념할수 있는 오페라 극장의 비수기인 여름철에 휴가를 얻어 작곡에 전념했고, 이곳에서 교향곡 제2번 "부활", 제3번, 그리고 그의 초기 교향곡에 지대한 소재를 제공한 가곡집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를 작곡했다.

1897년, 말러는 빈의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제안받았다. 그러나 당시 오스트리아 법으로는 가톨릭 교도가 아닌 사람은 관직에 기용될수 없었다. 말러는 결국 가톨릭 교도로 개종하고 빈 국립 오페라 극장의 음악감독에 취임하게 된다. 빈 시절, 말러는 타협할줄 모르고 음악적 완성도에 대한 철저한 완벽주의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특히 당대 주목받는 화가로 저명한 알프레드 롤러와의 협력작업으로 탁월한 예술적 성과를 거두었다.[4]

지휘자로서 모차르트, 베토벤, 글루크 등의 오페라들을 자주 무대에 올렸으며 특히 그가 가장 추종하던 리하르트 바그너의 오페라들은 기회가 생길때마다 무대에 올려 가장 열성적인 바그너의 전도사로 활동했다.특히 알프레드 롤러와의 협력작업으로 완성된 트리스탄과 이졸데가 대표적이다.[5]

1902년, 말러는 19살 연하인 알마 쉰들러와 결혼하였다. 흔히 사람들 사이에 말러의 에피소드로 회자되는, 오케스트라 연습중 1시간 정도 자리를 비운 말러에게 단원들이 어디 갔다 왔냐고 묻자 '결혼하고 왔다'고 말하는 에피소드는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조지 버나드 쇼도 어쩌다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었는데 진위는 알 수가 없다. 정확한 출처가 있다면 추가바람.)[6] 그 사이에서 '푸치'라는 애칭의 마리아 안나와 '구키'라는 애칭의 안나 유스티네[7]를 낳았다. 빈 시절은 말러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로 말러는 마이에르니히의 별장에서 여름 휴가철에 작곡에 열중해 교향곡 제4번, 5번, 6번 "비극적", 7번, 8번 "천인의 교향곡"과 뤼케르트의 시에 의한 가곡집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와 "뤼케르트 가곡"을 작곡했다.

그러나 말러의 행복은 1907년, 산산히 깨지게 된다. 그해 말러는 장녀인 마리아 안나를 성홍열로 잃고 만다. 사랑하는 딸을 잃은 고통에다가 말러 자신도 심장에 병이 있다는 의사의 진단을 받았다. 이후 말러는 죽을때까지 죽음의 공포에 시달리며 걸음걸이 수까지 세면서 걸을 정도로 건강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게 된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말러의 비타협적 성격과 완벽주의에 반감을 품고있던 적들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19세기말 유럽을 강타한 반유대주의의 여파로 언론들의 말러에 대한 반유대주의 공세[8]로 인해 결국 그는 그해 빈 국립 오페라극장의 음악감독직을 사임하게 된다.

이후 말러는 미국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제안을 받고 미국으로 건너가 1908년 한 시즌동안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극장에서 지휘봉을 잡는다. 그러나 아르투로 토스카니니를 더 선호하던 메트 이사진들의 선호도에 밀려 다시 유럽으로 돌아오게 되지만,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제안으로 뉴욕 필의 지휘자가 된다. 이후 말러는 죽을때까지 미국과 유럽을 오가며 활동했다.

이시기 말러는 끊임없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부인 알마의 외도로 인한 충격으로 심적으로 편할 날 없는 시기를 보내야 했다. 이 시기에 작곡된 작품으로 "대지의 노래"와 교향곡 제9번, 그리고 결국 완성하지 못한 교향곡 10번이 있다. 이 시기 작품들에는 죽음의 공포와 이별의 정서, 알마에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등이 뒤엉켜있다. 말러가 교향곡 9번격에 해당하는 "대지의 노래"에 9번의 번호를 붙히지 않은것도 죽음에 대한 공포의 영향으로 보여진다.[9]

결국 스스로도 이래선 안되겠다는 생각을 한듯, 말러는 1910년, 네덜란드의 라이덴에서 휴가를 보내고 있던 정신분석학의 시조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찾아가 심리면담을 받게 된다. 프로이트는 말러의 잠재기억을 이끌어내 말러의 우울증이 어린시절 형제들의 죽음과 아버지에게서 받은 학대에서 기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끌어냈고, 부인 알마에 대한 집착은 알마에게서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하려고 한 탓이라 진단했다. 말러 본인은 어머니의 모습을 갈구한다는 진단은 부정했다.

1911년 2월, 말러는 뉴욕에서 연쇄상구균 감염으로 발열 중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생애 마지막이 된 공연을 마친후 유럽으로 건너가 파리에서[10] 치료를 받았지만 증세는 호전되지 않았다. 말러 자신의 요청으로 빈으로 옮겨진후 1911년 5월 18일, 5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죽은 딸의 묘가 있는 빈 근교 그린칭 공동묘지에 딸 옆에 안장되었다.

말러는 생전에는 뛰어난 지휘자로만 주목받았고, 그의 교향곡들은 제2번 "부활"과, 8번 "천인의 교향곡" 정도가 연주에서 호평을 받은 정도일 뿐이었다. 그의 사후에도 그의 제자이자 친구들인 브루노 발터, 오토 클렘페러 정도 외에는 그의 교향곡을 연주하는 지휘자도 별로 없었고 나치 독일아래 유대인 예술작가들에 대한 탄압에 의해 거의 묻혀지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1960년 이후, 레너드 번스타인에 의해 말러의 교향곡은 다시 주목을 받아 활발하게 연주되었고 오늘날, 세기말의 정서를 그려낸 후기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적 작곡가로 위상이 재정립되었다. 여담으로, 말러 본인의 명언 중에 '나의 시대는 올 것!'이 있다. 헌데...그것이 사실이 됐다.(...) 바로 밑에 작품 목록을 보면 교향곡 전곡 문서가 있다. 이건 그 유명한 차이콥스키드보르작에게도 없는 것이다. 반대로 대중들에게는 비교적 마이너하지만 꽤 넓은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는 쇼스타코비치의 경우에도 교향곡 전곡 문서가 있다. 이제 말러의 인기는 대단해서 말러의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레리안이라는 용어까지 생겼을 정도.

한편 말러가 죽은 뒤 아내 알마는 1915년 바우하우스로 유명한 발터 그로피우스(1883~1969)와 재혼했으나 5년만에 이혼하고 1929년 시인이자 작가인 프란츠 베르펠(1890~1945)과 재혼했다. 베르펠이 죽은 뒤에 미국으로 가서 살다가 1964년 85살로 사망했다.

2 슈트라우스와의 관계

구스타프 말러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두 사람은 성장배경만큼이나 판이한 성격의 소유자들이었다. 다분히 감성 지향적이고 신경이 예민했으며 시간만 나면 자신만의 세계 안에서 고독을 즐겼던 말러와 달리, 슈트라우스는 이성적이고 계산적이었으며 틈나는 대로 동료음악가들과 카드노름을 즐길 정도로 사교적인 성격이었다. 두 사람은 상대방의 음악에 대해 잘 알고 있었고, 서로를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실제 삶 속에서도 이들은 막역한 관계였다. 두 사람은 1887년 라이프치히에서 처음 만난 이후, 말러가 먼저 세상을 떠날 때까지 긴밀한 교분을 나눴다. 알마 쉰들러는 두 사람 사이를 이렇게 회고했다. “두 사람이 길고도 열띤 토론을 나누는 동안, 나와 파울리네(슈트라우스의 아내)는 미용사, 블라우스, 최근에 읽은 소설 등등을 소재로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야 했다. 그들은 결코 동의할 수 없는 사람들 마냥 계속해서 대화하는 것을 즐겼다.” 작곡과 지휘 양 분야 모두에 정통했던 두 사람은 서로의 작품을 지휘했던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말러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교향곡 3번 '가정'’, ‘영웅의 생애’, ‘돈 후안’과 같은 슈트라우스의 초·중기 관현악 걸작들을 수차례 지휘했고, 슈트라우스 역시 말러의 교향곡 2번과 교향곡 3번을 콘서트 무대에 올렸다. 지휘자로서 상대방의 작품을 세밀히 분석했던 경험은 서로의 음악세계를 보다 더 깊이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말러는 우주를 향한 교향곡의 새로운 세계를 펼치며 다음 시대로의 무조적 가능성을 열어주었다면, 슈트라우스는 소우주인 인간의 새로운 드라마를 제시하며 오케스트라-비르투오시의 독보적인 가능성을 열었다. 이렇게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서로의 방향은 달랐지만 고전주의자로서의 위치를 버리지 않았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말러와 슈트라우스는 독일계 후기낭만음악의 마지막 정점을 쌓아올린 두 개의 거대한 기둥이었다. 두 사람 모두 지휘자로서의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방대한 편성의 오케스트라를 자유자재로 쥐락펴락했던 관현악법의 명수들이었고, 그와 반대로 시에 담긴 순수한 서정을 섬세하게 풀어놓았던 리트의 대가들이기도 했다. 낭만음악의 전통을 기반으로 20세기 음악의 새로운 세계를 예비했다는 측면에서도 공통점이 있다. 말러는 슈트라우스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슈트라우스와 나는 하나의 산을 각기 다른 비탈에서 오르고 있다. 우리는 언젠가 만나게 될 것이다.” 부연하자면 표면적인 스타일이나 방법론적인 측면에서는 차이가 있겠지만, 자신들이 추구하는 음악적인 지향점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 인정한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당대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말러는 ‘작곡을 부업으로 하는 지휘자’로 받아들여졌다. 그들은 포디움 위에 우뚝 선 마에스트로 말러에게는 열광하였지만, 그가 바쁜 일정을 쪼개어가며 틈틈이 작곡했던 교향곡과 가곡들에는 그다지 열렬한 환호를 보내지 않았다. 하지만 말러는 자신의 작품들이 제대로 받아들여질 때가 올 것임을 의심치 않았다. “아직 나의 때가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예언 아닌 예언은 결국 한 세기가 지나기도 전에 실현되었다. 슈트라우스는 생전에 이미 작곡가로서 최고의 명성을 누렸다. 그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대중의 취향이 어떻게 바뀌는지를 제대로 파악하였고, 그들의 기호에 부응하는 음악을 끊임없이 만들어내면서 60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독일을 대표하는 작곡가라는 지위를 누릴 수 있었다. 제3제국과 2차대전을 거치는 동안, 나치 부역자라는 오명과 함께 시대의 흐름에 역행하는 수구적인 작곡가의 대표인물로 여겨지면서 그의 음악세계가 평가 절하되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 위상은 오래지 않아 복원되었다. 그리고 탄생 150주년이었던 2014년을 전후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그의 작품들이 세계 각지에서 널리 연주되고 있다.

3 구스타프 말러의 작품들

3.1 교향곡

교향곡 제1번(말러)
교향곡 제2번(말러)
교향곡 제3번(말러)
교향곡 제4번(말러)
교향곡 제5번(말러)
교향곡 제6번(말러)
교향곡 제7번(말러)
교향곡 제8번(말러)
대지의 노래
교향곡 제9번(말러)
교향곡 제10번(말러)

3.2 실내악

피아노 4중주 A단조

3.3 성악곡

젊은 시절의 노래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어린이의 이상한 뿔피리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뤼케르트 시집에 의한 노래
탄식의 노래

3.4 기타

블루미네(교향곡 제1번의 원래 2악장)

4 기타 사항

  • 말러의 음악은 일단 대부분의 대곡들이 그 크고 거대한 규모 때문인지 20세기 중반까지 많이 연주되지는 않았다.[11] 하지만 녹음기술의 발달에 따라 점점 자주 연주되고 녹음되었으며 일시적인 유행이나 재발굴, 열광의 수준을 넘어 현재 세계 심포니 오케스트라들이 일상적으로 자주 연주하고 있다. 국내에서는 부천필의 말러 사이클이 큰 주목을 받았으며 2011~2012년에는 서울시립교향악단(서울시향)이 말러 전곡 연주 시리즈를 진행했다.[12]
  • 토마스 만의 소설인 '베니스에서의 죽음'이 말러를 모델로 한 소설로 알려져 있다. 동명 소설을 1971년에 루키노 비스콘티 감독이 영화화했다. 이 영화에서는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13]에서도 쓰인 말러 5번 4악장이 주요 영화 음악으로 인상적으로 쓰였다. 영화 촬영장에서 5번 4악장을 계속 틀어놓았는데 비스콘티 감독이 이 음악이 누구 것인지 모르고 '영화 음악이 좋은데 작곡가를 소개시켜달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 말러 교향곡 8번은 '천인교향곡'이라는 부제가 붙을 만큼 많은 사람이 동원되어야 하는 스케일이 큰 연주다. 실제 천명이 아닌 삼백명, 오백명 정도로 연주되는 경우가 많다. 말러는 이 교향곡으로 대우주의 울림을 표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중세 라틴어 찬송가인 'Veni, creator spiritus'(오라, 창조주 성령이여)에 곡을 붙였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의 TV판 마지막회에서 말러의 교향곡 8번 '천인교향곡'의 이 창조주에 관한 라틴어 합창 부분이 인상적으로 삽입되었다. 더해서 이 그 꿈을 꾸고 깨어난 뒤 '프로이트 선생님이 폭소할 거야'하고 머리를 잡고 고민하는데, 실제로 말러가 8번 교향곡을 작곡하던 당시 아내인 알마의 외도 때문에 프로이트와 상담을 했던 기록이 있다.
  • 알프레드 롤러의 회고에 의하면 상당한 몸짱(...)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말러는 많은 운동을 즐겨하던 사람이었으니 몸짱인게 당연할듯도 하지만. 사실 지휘자한테도 체력이 무척 중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말러리안들은 쿨게이라는게 레알? 말러의 몸짱사진은 없다.(...)
  • 말러리즘은 클래식 스노비즘과 일맥상통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클래식 덕후들이 말러를 지나치게 밀어주는 경향이 있다. "말러나 쇤베르크 좋아하면 허세"가 종종 회자되기도 한다.
  • 애니메이션 은하영웅전설의 OST는 각종 클래식의 명곡으로 채워져 있으나, 그 중에서도 말러의 분량은 독보적이다. 아니, 은영전은 말러 없이는 성립하지 않는 애니이다.
  • 말러 음악을 광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을 말레리안이라고 한다.
  • 말러의 어린시절은 매우 불행했다. 말러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정신병을 앓았으며, 말러의 15명의 형제 중 8명을 일찍 잃었다. 게다가 그의 가족 중에는 맹인도 있고 정신병과 뇌종양을 앓거나 권총 자살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말러의 조울증과 강박신경증 등은 어린 시절에서 유래한 듯하다.
  • 말러는 작품을 쓰면서 언제나 고민하고 갈등했던 작곡가이며, 그의 교향곡들은 그의 실험정신의 결과이다. 그가 자신의 교향곡에서 추구했던 것은 그 자신의 말처럼 모든 것을 포용하는 '하나의 세계' 로 만드는 것이었다. 거기에는 현학성과 단순함이 공존하며, 보편적인 고상함과 낭만적 서정성이 흐흔다. 또한 그의 곡에선 자연에 대한 묘사적 표현, 대중적인 춤 리듬, 민요, 코랄, 행진곡 등 엄청나게 다양한 요소를 포함하며, 조성을 거의 무조성의 경계까지 몰고 감으로서 교향곡이 갖는 조성감각을 거의 무력화시켰다. 말러가 교향곡을 최종적 해체지점까지 확장시켰다고 평가되는 이유이며, 쇤베르크나 베베른 같은 다음 세대 작곡가에게 가장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말러가 현대음악 등장의 도화선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으며[14], 말러의 곡을 듣다가 이후 교향곡은 없다고 평가되는 드미트리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들을 들으면 쇼스타코비치의 음악은 분명 현대음악임에도 불구하고[15] 당혹하게 다가오지 않는다.
  1. 이 때문에 체코 출신으로 분류되는 경우도 있다.
  2. 참고로 이 때의 심사위원은 브람스였다. 말러의 스승 브루크너가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을 고려하면, 바그너와 대립 관계였던 브람스가 말러의 음악에 좋은 점수를 주었을 가능성은 애초부터 낮았을 것이다.
  3. 바그너의 악극들은 워낙 길어서 당시에는 이곳 저곳을 삭제하고 공연하는게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말러는 그것이 예술적이지 않다며 무삭제판 공연을 자주 진행했었다.
  4. 하지만 제작비가 높아서 극장의 이사회측에선 별로 안좋아했다고 한다.높으신 분들은 그걸 몰라요
  5. 그러나 정작 바그너의 아내 코지마는 말러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싫어했다 한다.
  6. 그런데 말러는 본인이 의도치 않게도 NTR을 행하게 되었다. 본래 알마는 말러의 지인이자 알마 본인의 음악 선생이었던 알렉산더 쳄린스키와 연인 관계였다. 하지만 알마의 가족들은 쳄린스키가 못생기고 명성이 낮다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강요하였고, 결국 알마와 쳄린스키는 헤어졌다. 그 직후에 말러와 알마가 결혼해 버린것(...).
  7. 언니와는 달리 안나 유스티네는 오래 살아서 1988년까지 생존했고 조각가로 활동했다.
  8. 1897년에 일어난 드레퓌스 사건과 1905년에 러시아에서 공개된 시온 의정서 파문으로 유럽에는 반유대주의가 만연해 있었다.
  9. 클래식 작곡가의 유명한 징크스 중에 9번 교향곡을 쓰면 쓰다가 죽거나 쓰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는다는 것이 있다. 루트비히 판 베토벤, 프란츠 슈베르트, 안토닌 드보르자크, 안톤 브루크너 등이 이 징크스의 희생자. 물론 그런 거 다 씹고 천수를 누린 하이든도 있고 50개 넘게 쓴 모차르트도 있다. 말러는 이 징크스에 대해 꽤 진지하게 생각했는지, 9번 교향곡이 되었어야 할 곡을 대지의 노래라는 이름을 붙여서 피해갔으나, 방심했는지 10번 째로 교향곡을 하나 더 썼는데 이게 9번 교향곡이 되면서(...) 이 징크스의 새로운 희생양이 되었다. 자세한 사항은 9번 교향곡의 저주 항목 참조.
  10. 당시 새로운 백신이 개발되었기 때문에 파리로 간것으로 보인다.
  11. SP는 플레잉 타임상 한계가 있었다. 긴 말러의 교향곡을 담기에는 쉽지는 않은 매체. 어느정도 말러 르네상스는 녹음 매체와 기술의 발전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상 8번 교향곡의 경우는 1950년 이전의 녹음이 존재하지 않는다. 말러교향곡 9번만해도 벌써 82분에 달하는데 처음에 CD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때에는 40분대로 두장에 나눠 발매했으나 기술이 발달한 최근 82분을 한 장에 담은 중가반이 발매됐다.
  12. 이때 연주된 말러 교향곡 10번 전악장(데릭 쿡의 2번째 판본)이 대한민국 초연이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처음으로 모든 교향곡을 연주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대부분의 지휘는 상임지휘자인 정명훈씨가 진행했지만, 교향곡 7번과 대지의 노래의 경우는 부지휘자인 성시연 씨(현재 경기필하모닉 상임지휘자)가, 교향곡 10번은 제임스 드프리스트가 지휘를 맡았다.
  13. 이전에는 형인 존 F. 케네디의 장례식에서 쓰였다고 적혀있었으나, 라디오에서 많이 방송되었을 뿐 장례식에서는 연주되지 않았다. 실제로 그의 장례식에서 연주된 음악은 슈베르트아베 마리아.
  14. 실제로 현대음악의 시초라 볼 수 있는 무조성의 음악을 확립한 쇤베르크는 말러의 열렬한 팬이었다.
  15. 다만, 무조는 아니기에 20세기 후반 이후의 현대음악처럼 난해하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