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네임은 구스타프 하인리히 에른스트 마르틴 빌헬름 푸르트벵글러(Gustav Heinrich Ernst Martin Wilhelm Furtwängler). 독일의 지휘자 겸 작곡가. 1886년 1월 25일 ~ 1954년 11월 30일
20세기 초중반을 대표하는 지휘계의 거장으로 지금까지 회자되는 인물이다.
바그너의 오페라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징어의 제1막 전주곡을 지휘하는 모습. 1942년 2월 26일 베를린의 AEG 공장에서 나치 관제 노동 단체인 '기쁨을 통한 힘(Kraft durch Freude)' 의 주최로 열린 베를린 필 노동자 위문 공연 때 독일 주간뉴스가 녹화한 영상이다.
목차
1 생애
베를린에서 저명한 고고학자인 아돌프 푸르트벵글러의 아들로 태어났고, 집안에서는 '빌리(Willy)' 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일찍부터 교양인의 기본 소양 격으로 피아노와 바이올린 연주법을 비롯한 기초적인 음악 이론 교육을 받았고, 일곱 살 때 '동물 이야기' 라는 동요를 처음 작곡했다. 그러나 학교에서 행하는 제도권 교육에는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고, 결국 아버지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당대의 명사들을 초빙한 가정 교육을 시키게 되었다.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당시 학교 선생들의 회상은 '건방진 아이' 였다는데, 물론 당시 독일 교육이 다소 권위적인 면도 있었지만 푸르트벵글러가 그 이상으로 선생들에게 도전적으로 군 것도 사실이었던 듯 하다.
빌리가 목표한 것은 작곡가였으나, 차츰 지휘에도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10대 시절에는 자작곡의 사적인 비공개 연주를 비롯해 몇 차례 지휘대에 서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공식적인 지휘자 데뷰는 1906년에 있었는데, 집안의 재력과 명성을 이용해 재정난에 빠져 있던 뮌헨의 카임 관현악단(현 뮌헨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을 사실상 임대해서 치른 공연이었다. 참고로 이 때 공연 프로그램은 베토벤의 서곡 '헌당식' 과 자작 교향곡 B단조의 1악장, 그리고 브루크너의 교향곡 제9번이었는데, 갓 스무 살 나이의 지휘자로서는 자뻑 수준의 선곡이었다.
그러나 작곡가로서도 지휘자로서도 처음에는 그다지 좋은 평을 얻지 못했는데, 1907년에 아버지 아돌프가 그리스에서 유적 발굴 도중 열병에 걸려 객사하자 졸지에 가장의 임무를 떠맡게 되었다. 결국 돈벌이가 그럭저럭 수월한 편인 지휘 활동 위주로 진로를 택했고, 취리히와 뮌헨, 스트라스부르 등지에서 제3지휘자나 보조 지휘자, 연습 지휘자 등을 거쳐 1911년에 뤼베크의 시립 음악 협회에서 처음으로 음악 감독을 맡았다.
뤼베크 시절에는 자신의 관현악 연주곡 영역을 크게 확장하는 한편, 당시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이라는 독일의 두 특급 악단들에서 음악 감독을 맡고 있던 아르투르 니키슈를 만나 큰 영향을 받게 되었다. 1915년에는 만하임의 오페라극장으로 이임했고, 여기서는 오페라 레퍼토리의 확장과 충실도를 높였다.
1919년에는 오스트리아의 빈에서도 빈 톤퀸스틀러 관현악단의 지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고, 선배인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후임으로 베를린 국립가극장의 교향악 연주회를 지휘하거나 빈 악우협회 관현악단을 모체로 새로 조직된 빈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지휘를 맡는 등 점차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922년에 선배인 니키슈가 라이프치히에서 타계한 뒤, 30대의 나이로 그가 잡고 있던 베를린 필과 게반트하우스의 음악 감독직을 거머쥐면서 독일 지휘계의 떠오르는 샛별로 공식 인증을 하게 되었다.
1927년부터는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정기 지휘자로도 활동했는데, 세 개나 되는 동시 직위를 가지기 벅찼는지 1928년과 1930년에는 차례로 라이프치히와 빈의 직위를 사임하고 베를린 필에 집중했다.[1] 동시에 영국과 프랑스, 미국 등지에 연주 여행을 다니기도 했고, 독일 음반사인 도이체 그라모폰에서 음반 취입도 했다. 1931년에는 바그너 오페라의 상연으로 유명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예술 감독으로 임명되는 등 인기와 명성이 절정에 달했다.
그러나 1933년 히틀러가 주도하는 나치가 집권하면서 독일 음악계에도 반유대주의 등의 사조가 득세하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도 나치의 선전물로서 이용 가치를 시험받기 시작했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헤르만 괴링에 의해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으로 임명되었고, 요제프 괴벨스 휘하의 제국음악협회에서도 부회장 직위를 얻어 독일 음악계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가 항상 나치의 의도에 맞게 행동한 것은 아니었다. 사실 이는 푸르트벵글러의 상관 격이었던 제국음악협회 회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를 비롯한 많은 음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문제였다. 결국 괴벨스는 이들을 차례대로 물갈이한 뒤, 제국음악협회를 나치 당원이나 골수 나치빠를 중심으로 하는 어용 단체로 완전 개편했다. 어쨌든 푸르트벵글러는 재능이 있는 음악인이라면 아리아인이건 유대인이건 가리지 않고 구제해야 한다고 주장해 알프레드 로젠베르크[2] 등 골수 나치 인종주의자들의 비난 대상이 되었고, 순수 아리아인임에도 유대인 음악가들과 활동하면서 나치로부터 찍힌 작곡가 파울 힌데미트의 최신작인 교향곡 '화가 마티스' 를 초연하고 그 직후 그를 변호하는 논설을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차이퉁이라는 일간지에 싣는 등 일탈 행위가 도를 넘어서게 되었다.[3]
결국 나치 상층부의 이런저런 압력으로 베를린 필 음악 감독을 비롯한 모든 직책을 사임하고 은거에 들어갔으나, 1935년에 자신의 명예 회복과 처우 개선 등을 괴벨스와 협의한 뒤 음악계에 복귀했다. 은거 중에는 미국에서 아르투로 토스카니니의 후임으로 뉴욕 필하모닉의 상임 지휘자 직책을 맡기기 위한 물밑 작업도 있었지만, 이것을 알아챈 나치가 역관광을 보내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 자신도 미국행을 주저하다가 결국 독일에 남기로 결심했다.[4]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미국 공연에서 꽤 성공을 거두었지만, 토스카니니를 비롯한 선배나 동료 라이벌들의 인기에까지 이르지는 못했다. 어쨌든 뉴욕 필 초빙 계획이 무산된 뒤로 미국에서 푸르트벵글러는 '친나치 지휘자' 로 낙인찍히게 되었다.
한편으로는 은거 기간 중에 작곡가로서 자신을 나타낼 기회도 얻게 되었고, 두 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대규모 피아노 협주곡을 완성한 뒤 각각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역할로 초연하기도 했다. 음악 감독이나 상임 지휘자 같은 공식 직책은 아니었지만 베를린 필의 연주회를 객원으로 계속 지휘했고,[5] 1938년에 오스트리아의 독일 병합 이후 강제 해산 위기에 처했던 빈 필의 존립에도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푸르트벵글러는 4월 22~23일에 빈 필을 이끌고 베를린에서 히틀러와 괴벨스가 관람하는 가운데 특별 연주회를 열었고, 좋은 반응을 얻어 해산 계획을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렇게 은혜를 입은 탓인지, 빈 필은 전후 푸르트벵글러와 카라얀 사이의 아귀다툼 속에서 푸르트벵글러를 밀어주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독일의 음악 활동도 점차 군국주의 지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고, 푸르트벵글러도 점령지들인 체코나 덴마크 등에서 공연하거나 기쁨을 통한 힘 같은 나치 관제 단체에서 주최하는 자선 공연에 참가해야 했다. 이러한 활동은 베를린 필의 징집 면제 등 특권을 유지하기 위한 조처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전후 '친나치' 라는 의혹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족쇄이기도 했다.
1942년에 들어서면서 독일 본토도 연합군 폭격기들의 공습으로 털리기 시작했고, 연주회나 오페라 공연도 공습 경보로 자주 중단되기 시작했다. 푸르트벵글러도 1순위 레이드 대상이 된 베를린을 자주 비우게 되었고, 특히 중립국인 스위스에서 객원으로 자주 출연하기 시작했다. 1944년에 히틀러 암살 미수사건이 벌어진 뒤에는 그 배후 세력으로 엉뚱하게 의심받기 시작했고, 게슈타포의 비밀 사찰이 시작되면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게 되었다.
결국 당시 군수장관이었던 알베르트 슈페어를 비롯한 지인들의 경고와 권고를 받고 1945년 1월에 베를린 필과 빈 필의 연주회에 차례로 출연한 뒤, 게슈타포의 추적을 따돌리면서 2월에 스위스로 피신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패전 후에는 나치 부역자라는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 입국이 제한되었고, 스위스 내에서도 좌파 정치인들을 비롯한 반나치 성향 인사들의 비난을 받았다. 이후 오스트리아와 독일에서 차례로 연합국 군정 당국의 비나치화(또는 탈나치화. denazification) 심사를 통과해 1946년부터 이탈리아에서 지휘 활동을 재개했고, 1947년에는 베를린 필과도 전후 처음 연주회를 열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는 전시 시절부터 경쟁 상대로 여겨졌던 신예 지휘자인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과 경쟁이 심화되었고, 카라얀을 밀어내기 위해 잘츠부르크 음악제나 루체른 음악제, 바이로이트 음악제 등의 행사에서 주도권 싸움이 계속되었다. 동시에 런던의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베를린 필, 빈 필의 연주회 무대에서도 암투가 계속 되었고, 결과적으로 너무 광범위하게 넓어진 활동 무대를 건사하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1949년에는 미국의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파격적인 조건으로 푸르트벵글러에게 상임지휘자직을 제의했다. 베를린 필의 네 배에 달하는 연봉을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시카고에는 일년에 단 몇주만 체류하면 되는 조건이었다. 이 소식이 미국 음악계에 전해지자 미국에서 활동하던 여러 음악가들이 반나치를 명분으로 대대적인 반대 운동에 들어갔다. 여기에는 블라디미르 호로비츠나 아르투르 루빈슈타인 등의 거물급 음악인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사태는 시카코 인근 음악계를 넘어서서 전미국 음악계로 확산었는데, 결국 푸르트벵글러 스스로 시카고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제의를 거절했고, 미국에서 곤경에 처하게 된 시카고 심포니 측도 푸르트벵글러에 대한 더이상의 구애를 접고 라파엘 쿠벨릭을 후임 지휘자로 내정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당시 미국에 체재하던 유대인 음악가들 중 지휘자 브루노 발터와 바이올리니스트 에후디 메뉴인 정도만이 이 반대운동에 참가하지 않았다. 메뉴인은 푸르트벵글러야말로 나치에 저항한 인물이었다면서 그를 적극 옹호했다. 당시 미국에서 가장 명망 높은 유대인 음악가였던 브루노 발터 또한 동료 유대인 음악가들로부터 푸르트벵글러 반대운동 참여를 지속적으로 권유받았지만 끝내 참여를 거부했다. 브루노 발터는 훗날 인터뷰에서, 비록 자신과 푸르트벵글러는 사이가 좋지 않았지만, 당시 반대운동은 반나치는 그럴싸한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미국 음악인들의 자기 밥그릇 지키기에 불과한 싸움이었기 때문에 참여를 거절했다고 말했다.
푸르트벵글러는 남미의 아르헨티나를 수 차례 방문해 객원 지휘자로 출연했고, 말년에는 베네수엘라에서도 무대에 올랐다.
1952년에는 베를린 필의 음악 감독으로 공식 복귀했지만, 이 시점부터 건강이 급격히 악화되기 시작했다. 자주 폐렴에 걸리고, 지나친 항생제 남용 등 현대의 관점에서 보기에도 건강 상태가 개판 오분전이었다. 잘츠부르크 음악제에서는 리허설 도중 고열로 공연을 취소해야 했고, 1953년 1월에는 빈 필과 베토벤의 교향곡 제9번을 공연하던 중 실신하기도 했다. 또 항생제 남용의 부작용 등으로 청력도 같이 악화되면서 지휘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54년 9월에 베를린 필을 지휘한 베를린 예술 주간의 개막 공연이 마지막 공식 무대가 되었고, 이후 10월 초까지 빈에서 바그너의 오페라 '발퀴레' 의 녹음 작업을 한 뒤 바덴바덴 근교의 에버슈타인부르크 요양소에 입원하다가 폐렴으로 타계했다. 유해는 하이델베르크의 베르크 묘지(Bergfriedhof)에 있는 어머니의 묘소 옆에 안치되었다.
지휘자 칼 뵘은 푸르트벵글러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이제 누가 브람스 교향곡의 파사칼리아를, 누가 브루크너의 아다지오를, 누가 베토벤의 교향곡을 연주할 것인가?'라고 했다.
2 지휘와 작곡 성향
푸르트벵글러의 지휘 스타일은 오늘날 관점에서 볼때 독특하다 못해 요상하게 보인다. 양손을 벌벌 떨듯이 움직이고 상체를 이리저리 휘청이며 박자를 젓는 모습을 보고 '풍선인형 지휘'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푸르트벵글러가 장신인데다가 탈모가 있고 지휘 영상이 주로 흑백이어서 이런 모습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지휘는 '정확도' 면에서 상당히 불안하게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처음 마주하는 악단들과 연습할 때는 오히려 악단원들이 더 걱정스럽게 쳐다보거나 의아해하는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우스갯소리로 단원들이 지휘자를 보고 연주를 하는 것이 아니라 악장을 보고 연주를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특히 시작할 때 애매한 동작을 취하는 것으로 유명하다.[6] 이는 어쩌면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원이나 음대 등 정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교육' 과 독학에 의지한 덕에 고정된 지휘 기법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정석으로 여겨지는 지휘 스타일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데, 복잡한 리듬의 곡이나 단원들의 호흡이 딱 맞아 떨어져야 하는 부분에서 절충해 지휘했다고 한다.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이나 빈 필에서 거의 전폭적인 신뢰를 받았던 지휘자였지만 빈 필의 회장이었던 바순주자 후고 부르크하우저는 푸르트벵글러의 애매한 지휘와 해석을 매우 싫어했고 대신 칼박자 토스카니니에 열광했었다.
그러나 이런 지휘 기법이 푸르트벵글러 음악의 핵심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는 어느 지휘자보다도 연습 벌레로 유명했고, 칼같이 맞아 떨어지는 정확성 보다는 음악의 흐름과 여러 악상들이 맞물리는 경과구에서 자연스러움을 나타내기 위해 고심했다고 한다. 전후 베를린 필을 이끌었던 첼리비다케가 베를린 필에 지나치게 정확성을 요구하자 베를린 필을 미국 오케스트라처럼 만들려고 한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남아있는 녹음들 중에서는 베토벤이나 브람스, 바그너의 작품에서 이러한 방향이 꽤 효과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단, 바흐나 헨델 류의 바로크 음악과 하이든, 모차르트 류의 고전 음악에서는 다소 호불호가 엇갈리는 편이다. 낭만 시대 작곡가지만 꽤 이질적인 성향의 브루크너에서도 요즘은 '너무 내달리고 거칠다' 는 비판 여론이 많다.
녹음 작업을 그리 좋아하지 않은 지휘자로도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는 다르다. 사실 크나퍼츠부쉬나 첼리비다케 등 당대의 다른 지휘자들을 보아도 녹음 작업 자체를 즐기는 지휘자는 많지 않았다.[7] 푸르트벵글러의 경우 종전 후 지휘를 금지당하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에 경제적인 이유에서 녹음 활동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다만 녹음에 있어서는 상당히 까다로운 지휘자 중 한명이었다. SP 시대에는 4분 혹은 4분 30초마다 판을 가느라 연주를 중단해야 하는 것에 굉장히 짜증을 많이 냈다고 한다. 이 때문에 1926~27년에 도이체 그라모폰에 취입한 베토벤의 교향곡 5번을 제외하면, 1930년대 중반 까지의 녹음들은 대부분 이런 시간 제한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관현악 소품들이었다. 하지만 1937년에 HMV(이후 EMI) 독일 지사인 엘렉트롤라와 계약을 맺은 뒤에는 1920년대 중반에 녹음했던 베토벤 교향곡 5번의 재녹음을 비롯해 차이콥스키의 교향곡 제6번을 처음 취입하는 등 다시 대곡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데카의 프로듀서였던 존 컬쇼에 따르면 푸르트벵글러는 여러대의 마이크 설치하는 것에 대해 매우 민감한 반응을 보여 한 대 빼곤 모두 치워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런던에서 필하모니아 오케스트라와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녹음할 때도 매우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어서 중간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서 런던 거리를 배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대전 후 독일이 개발/개량했던 오픈릴 테이프와 마그네토폰(테이프 레코더)이 상업용 녹음에도 쓰이기 시작하면서 EMI와 도이체 그라모폰 등에 꽤 많은 양의 녹음을 남겼고, 지금도 명반으로 손꼽히는 음반들이 많다. 사실 이 음반 작업은 푸르트벵글러에게 끊임없는 짜증을 안겨주었다지만, 일단 수입이 짭짤했기 때문에 이혼한 전처에게 지급하던 생활비나 집세, 사생아와 의붓자식들을 포함한 자녀들의 양육비 등이 절실했던 터라 전쟁 전보다는 훨씬 적극적으로 임했다.
공식적인 스튜디오 녹음 외에는 방송국들에서 중계/녹음한 이런저런 실황 음원들도 많은데, 특히 1942~45년에 독일 제국 방송이 테이프로 녹음한 것들은 '전시 녹음(Wartime Recordings)' 이라고 해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전쟁이라는 상황에서 이루어진 연주회의 녹음인 만큼 대부분의 연주에서 극에 달한 텐션과 스피드를 느낄 수 있고, 푸르트벵글러와 나치라는 논쟁 떡밥과도 긴밀히 연관되는 물건들이다.
고전적인 독일/오스트리아 계통의 작품 외에도 '현대음악' 의 소개를 적극적으로 행한 지휘자이기도 했는데, 녹음으로 남아있지 않을 뿐이지 공연 기록을 살펴보면 이고르 스트라빈스키나 버르토크 벨러, 모리스 라벨,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 파울 힌데미트, 아르놀트 쇤베르크, 구스타프 말러 등 당대에 이름을 날린 중요한 이들의 작품 상당수를 세계 초연 혹은 독일 초연하는 등 꽤 맹활약했다. 이 때문에 보수적인 음악인들이 '현대음악 공연 횟수 안줄이면 알아서 해라' 고 갈구기도 했다고 한다. 흠좀무.
다만 전쟁이 끝난 이후에는 현대음악을 올리는 횟수가 많이 줄었다. 말러 같은 경우에는 1920년대까지만 해도 교향곡도 1~4번에 한해 연주기록이 남아짔지만, 전쟁 이후에는 가곡집 '방황하는 젊은이의 노래' 와 '죽은 아이를 그리는 노래' 딱 두 곡만 가끔 지휘했을 뿐이었다.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말러를 교향곡 작곡가로서는 결코 높이 평가하지 않았는데, 만년에 체코 출신의 후배 지휘자인 라파엘 쿠벨릭이 네덜란드의 왕립 콘서트허바우 관현악단을 객원 지휘해 교향곡 제5번을 무대에 올렸을 때도 청중석에서 연주를 들은 뒤 대기실로 찾아가 쿠벨릭에게 "연주는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공들여서 연주할 만한 곡인지 모르겠군요." 라고 말하기도 했다.
현대음악을 자주 다룬 것은 자신이 '작곡하는 지휘자' 라고 생각하는 관점에서도 자연스러운 결과였는데, 다만 조성음악 등 후기 낭만파 시대까지의 어법에서 벗어나지 않는 보수적인 성향이었다. 그래서인지 푸르트벵글러가 다룬 '현대음악' 중에서 무조나 12음 음악은 거의 찾아볼 수 없고, 기껏해야 쇤베르크의 작품 몇 편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생각과 의지가 작곡 영역에서 효과적으로 발휘되었는지는 아직 논쟁의 여지가 많다. 무엇보다 푸르트벵글러 작품의 인지도가 여전히 낮고, 브루크너같은 선배 작곡가들의 작곡 스타일과 거의 복붙 유사해서 독창성이 매우 떨어진다는 것이 문제다.
3 정치적 문제
푸르트벵글러 하면 흔히 떡밥으로 던져지는 것이 토스카니니와의 대립 기믹이나 나치 부역 문제다. 전자의 경우 양측 주변인들 사이에서 너무 억측이나 넘겨짚기 등이 많아 상한 떡밥이라고 보는 이들도 많지만, 후자는 지금도 여전히 풀어놓으면 만선을 이루는 양질의 떡밥으로 작용할 정도. 푸르트벵글러는 나치 당원이 아니었지만, 어느 나치 당원 음악가들보다도 독일의 음악적 자존심을 상징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떡밥의 신선도가 지금도 유지되는 듯하다.
푸르트벵글러가 나치에 동조하지는 않았지만 미국으로 망명하지 않은데는 미국 음악계에 대한 깊은 불신과 실망감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푸르트벵글러는 지휘에 있어 주관적인 해석을 강조하는 대표적인 지휘자로 꼽힌다. 그는 지휘는 제2의 창조작업이며, 악보 이면에 있는 작곡가의 정신을 읽어야한다고 이야기하면서 적극적인 템포 루바토를 구사했다. 푸르트벵글러의 주관적인 지휘의 대척점에 있던 인물이 토스카니니였는데, 푸르트벵글러는 사석에서 토스카니니의 칼박자 지휘에 대해 비판적인 발언을 하기도 했다. 또 그런 토스카니니에 열광하는 미국인들을 몹시 경멸했다. 우유부단했던 푸르트벵글러는 지인들에게도 미국 망명에 대한 생각을 꺼내기도 했는데, 자신이 미국에 가도 미국인들은 자신의 음악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라면서, 결국 자신의 음악을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지휘를 필요하는 것은 독일뿐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푸르트벵글러는 힌데미트 사건 등으로 나치와 대립각을 세우다가 나치에 항의하는 의미로 1935년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를 사임했다. 그후 푸르트벵글러는 1942년까지 지휘활동을 자제하는 등 나치와 대립각을 세우기도 했다.
그러나 푸르벵글러가 생각을 바꿔서 다소 적극적으로 지휘활동에 복귀한 것은 1942년경부터다. 괴벨스에 따르면 어떤 계기가 있었는지 모르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이때부터 다시 지휘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것. 아마도 미국의 참전 등으로 전세가 급격히 기울자, 그래도 망해가는 나라에 대한 애국심이 작용한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 있다. 이때부터 푸르트벵글러는 베를린 필의 정기연주회뿐만아니라 전선에서의 위문공연 형식의 콘서트나 이후 크게 문제가 된 히틀러의 생일콘서트 등에 나서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푸르트벵글러는 나치의 요주의 인물이었으며, 나치가 푸르트벵글러가 체포하려한다는 소문이 돌던 1945년 1월 푸르트벵글러는 빈 콘서트 직후 숙소로 돌아가는 척 하면서 나치친위대 요원들을 따돌리고 알프스산을 넘어 스위스로 망명했다.
전후 비나치화 심사에서도 가장 쟁점이 되었던 문제였는데,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많은 유대인 혹은 유대 혈통의 음악가들을 나치의 마수에서 구해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10대 시절부터 친구였던 작곡가 발터 브라운펠스나 바이올리니스트 칼 플레슈, 베를린 필의 '1/2 유대인 혈통' 단원들을 비롯한 많은 유대인 음악가들이 그의 노력으로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그대로 받아들이기 뭐한 것이, 푸르트벵글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면 누구든 구원해야 한다' 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푸르트벵글러가 후원한 음악가들 중에는 대놓고 골수 나치 당원 혹은 나치 찬동자들이었던 막스 트라프, 칼 횔러, 고트프리트 뮐러, 게르하르트 프로멜, 쿠르트 헤센베르크 같은 작곡가들도 있었다.
또 독일 점령지에서 연주회를 개최한 것도 논란이 되었는데,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독일 전차들의 뒤를 쫓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면서 가능한한 이런 기회를 피하기 위해 애썼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체코와 덴마크 공연은 이미 기록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며, 점령지 공연은 아니지만 독일 뿐 아니라 전세계로 방송된 1942년의 히틀러 생일 전야제 기념 공연은 그야말로 크리티컬 히트였다. 푸르트벵글러 사후 50주년이 되었던 2004년에 아치펠(Archipel)이라는 음반사에서 나온 CD가 그 당시 녹음된 디스크를 복각한 물건이라면서 출반되어 이런 논쟁에 다시 불을 붙였는데, 다만 녹음의 진위 여부 등도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푸르트벵글러의 나치 시대 행각은, 절충적으로 보자면 대대로 내려오던 독일 민족주의라는 요소와 '예술가들은 정치에 손을 대서는 안된다' 는 예술지상주의가 푸르트벵글러 자신의 공명심이나 경쟁자들에 대한 열폭과 더해져 빚어낸 일종의 병림픽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이는 장르를 불문하고 혼란스러운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현대의 음악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제시될 수 있는 문제고, 그런 점에서 반면교사로 볼 수도 있다.
4 사생활
푸르트벵글러는 1923년에 덴마크 여성인 치틀라 룬트와 결혼했는데, 룬트는 푸르트벵글러와 결혼하기 위해 돈많은 남편과 일부러 이혼할 정도로 열성적이었다. 처음에는 그럭저럭 관계가 좋았지만 아내가 불임이라는 넘사벽 문제가 있었던 데다가 푸르트벵글러 자신이 하도 사생아를 많이 만드는 통에 점차 악화되어 결국 1931년에 별거한 뒤 1943년 공식 이혼했다. 사실 푸르트벵글러는 결혼 이전에도 이러저러한 여성들과 관계를 가진 바 있었는데, 대부분 여성들 쪽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아이를 갖기 원해서였다는 흠좀무한 사실.
이 때문에 당시 호사가들은 푸르트벵글러의 사생아들이 열 명은 넘을 거라고 수군대기도 했는데, 일단 공식적으로 확인된 사생아들은 빌헬름(1916년. 생모 율리에. 가족성 불명), 다크마르(1920년. 생모 아우구스테 벨라), 프리데리케(1921년. 생모 엘리자베트 후흐), 이바(1923년. 생모 엘제 허친슨), 알무트(1934년. 생모 이르메 슈바프) 다섯 명이었다. 룬트 자신도 아이를 가질 수 없다는 것을 평생 콤플렉스로 여겼고, 남편이 다른 여자들과 낳은 사생아들을 대신 키우려고 하기도 했지만 생모들이 모두 거절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두 번째 결혼은 전쟁 막바지였던 1944년에 엘리자베트 아커만과 했는데, 아커만도 전 부인이었던 룬트와 마찬가지로 법률가 한스 아커만과 결혼한 기혼자였다. 하지만 엘리자베트의 남편이 1940년 프랑스 침공 때 장교로 참전했다가 오를레앙에서 전사한 뒤, 푸르트벵글러는 본격적으로 그녀에게 프로포즈하기 시작해 결국 결혼에 성공했다. 엘리자베트는 재혼하면서 전 남편과 낳은 자식들도 데려왔고, 푸르트벵글러도 이들의 계부 자격을 수락했다. 결혼 직후 엘리자베트는 아들을 임신했고, 먼저 스위스로 피해 있으라는 남편의 충고에 따라 취리히에서 출산했다.
안드레아스로 이름붙은 이 아들이 푸르트벵글러 생전의 유일한 적자인데, 할아버지와 마찬가지로 고고학 교수로 일했다. 이외에 적자가 아닌 사생아들 중에는 다크마르 벨라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고,[8] 엘리자베트가 데려온 아이들 중에는 딸인 카트린 아커만이 배우로 명성을 얻었다. 카트린의 딸인 마리아 푸르트벵글러도 현재 의사 겸 배우로 활동 중이다.
어릴 적부터 혼자놀기 스킬에 충실해서였는지 사교적인 면에서 대단히 서투른 인물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등산이나 하이킹, 스키 등의 운동을 좋아했던 탓에 HP 수치는 꽤 높은 편이었고, 특히 목 근육이 매우 두터웠다.[9] 승부 근성도 상당했다고 하는데, 가족들이랑 간단한 게임을 하다가도 지면 빡쳐서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집어던지기도 했다고 한다. 다만 이런 승부 의식이 병적으로 비뚤게 나간 경우가 꽤 되는데, 카라얀과 빚어진 구질구질한 에피소드[10] 뿐 아니라 브루노 발터나 프리츠 부슈, 클레멘스 크라우스,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피츠너 등 당대의 다른 유명 지휘자/작곡가들과 관련해서도 이런저런 뒷담화나 바람직하지 않은 막후 경쟁 등의 흑역사가 연출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편으로는 그렇게 한없는 명예욕과 시기심에 반해 금전적인 문제가 늘 따라다녔는데, 첫 부인과 별거/이혼하면서 빠져나간 수많은 관련 비용도 있었고 자신이 돌봐야 할 가족이나 사생아들, 구명을 위해 힘쓴 음악인들을 위해 내놓은 지원금도 상당한 액수였다고 한다. 특히 2차 대전 종전 후에 연주 금지까지 당해서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전후 그렇게 싫어했던 녹음 활동을 꽤 자주 하고 남미까지 가서 지휘대에 올랐던 것도 이런 문제가 크게 작용했다. 그러나 유력 지식인의 아들이자 대지휘자로 존경을 받던 위치였던 만큼 주변의 지원도 늘 빵빵한 상태였고, 스위스에서 도피 생활을 할 때도 거물급 사업가에게 돈과 집을 후원받는 등의 행운도 누렸다.
아버지의 영향 탓이었는지 육류나 어패류보다는 곡류나 채소, 과일 같이 담백한 음식을 좋아하는 채식주의 성향이었다는데, 다만 유제품이나 달걀은 먹는 락토-오보 비건 성향이었다고 한다. 식사량도 그리 많지 않은 편이었고, 특히 공연이 있는 날이면 날달걀이나 과일, 빵 몇 쪽 등으로 간단하게 때우고 무대에 오르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5 수상 경력
하이델베르크 루프레히트-칼스 대학교 명예 박사 학위 (1927)
만하임 명예 시민 (1929)
푸르 르 메리트(Pour le Mérite) 문화예술훈장 (1929)
프로이센 추밀원 고문 (1933) - 괴링에 의해 수여된 직책. 1935년의 베를린 필 사임 파동 때도 이 직책만은 법에 따라 버리지 못했다. 흑역사.
이탈리아 공로훈장 대십자장 (1934) - 무솔리니가 국왕 대신 수여. 그러므로 이것도 흑역사.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코망되르(3급) (1939) - 참고로 히틀러는 이 수상 소식을 언짢아했고, 괴벨스도 독일 언론에 공표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수상을 허락했다.
독일연방공화국 공로훈장 대십자성장 (1952)
빈 모차르트 협회 모차르트 메달 (1952)
6 주요 작품
푸르트벵글러가 작곡한 작품들의 자필보나 필경에게 의뢰해 만든 필사보 등의 중요 자료는 대다수가 푸르트벵글러 유고로 묶여 취리히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하지만 생전에 출판된 작품은 그리 많지 않고, 1990년대에 와서야 베를린의 음악출판사인 리스 운트 에얼러에서 해당 도서관과 유고 소유권자였던 미망인 엘리자베트의 협력과 승낙을 얻어 공식적인 출판 작업을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인지도가 현시창인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휘자로 쌓은 업적을 기리는 공연에서 푸르트벵글러의 자작곡을 연주하는 경우도 종종 있고, 특히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푸빠가 득시글대는 일본 등지에서는 리바이벌 움직임도 꽤 활발한 편이다. 1930년대 이후 작품들은 엄청나게 확대된 규모와 서사 비극을 연상시키는 묵직하고 어두운 성향 때문에 후기 낭만파 음악 애호가들이 종종 찾기도 하는 편이다.
6.1 교향곡
교향곡 D장조 (1903, 1악장만 완성됨)
교향곡 B단조 (1905~08, 1악장만 완성되었고, 이후 교향곡 제1번의 1악장으로 대폭 개작됨)
교향곡 제1번 B단조 (1905~41)
교향곡 제2번 E단조 (1943~45)
교향곡 제3번 C샤프단조 (1949~54) - 일부 문헌에서는 마지막 4악장이 미완성된 작품이라고 하고 있지만, 명백히 완성된 곡이다. 다만, 푸르트벵글러 자신은 4악장을 별로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6.2 관현악곡
서곡 E플랫장조 (1899)
축전 서곡 (1904)
6.3 협주곡
피아노와 관현악을 위한 '교향 협주곡' (1920경~37)
6.4 실내악
바이올린 소나타 A단조 (1899)
피아노 4중주 C단조 (1899)
피아노 3중주 E장조 (1900)
피아노 5중주 C장조 (1912~35)
바이올린 소나타 제1번 D단조 (1935~37)
바이올린 소나타 제2번 D장조 (1938~40)
6.5 피아노곡
피아노 독주를 위한 세 개의 소품 (1902)
6.6 합창곡
합창과 관현악 '사라져라, 그대의 어두운 전당이여' (1902)
독창, 합창과 관현악 '종교적 찬가' (1903)
독창, 합창과 관현악 '테 데움' (1902~09)
7 저서
푸르트벵글러는 생전에 음악과 관련한 꽤 많은 양의 논설과 수필을 남겼는데, 이것과 관련한 책도 독일에서 몇 권 출판되었다. 그 중 '음과 언어(Ton und Wort)' 라는 음악 에세이집이 1987년에 '음악의 생명력'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도 출간되었는데, 독일어 원판이 아닌 일본어 번역판을 중역한 것이라 곳곳에 오류가 눈에 띈다.[11] 그리고 책 자체도 푸르트벵글러의 자뻑 성향이나 유대인에 대한 선별적 구제론, 전쟁 책임은 나치에만 있고 독일 국민들은 잘못이 없다는 등의 인지부조화식 발언 등 시류에 뒤떨어진 올드비의 면모가 종종 나타나는 탓에, 현 시점에서는 비판적으로 읽어야 한다.[12] 그리고 나온 지가 20년도 넘은 터라 당연히 절판 상태고, 헌책방을 샅샅이 뒤지거나 시립 도서관 등에서 대출해야 볼 수 있다.- ↑ 빈 필은 애인이고 베를린 필은 아내라는 말을 남겼다.
- ↑ 발트지역 독일계이주민임. 히틀러가 맥주집 폭동시 구속되었을때 나치당내 대리인으로 지목했고, 후에 나치당 인종국장, 오스트란드(발트3국) 총독.뉘른베르크전범재판서 사형당함.
- ↑ 힌데미트는 이후 계속되는 나치의 다굴을 피해 터키를 거쳐 미국으로 망명했다.
- ↑ 푸르트벵글러는 미국 청중들의 음악적 수준을 매우 낮게 평가했다. 자신이 미국에서 공연했을 때 공연장의 분위기에 실망했던 것 같고 청중들이 자신의 음악을 제대로 이해 못한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던 것 같다. 그리고 자신이 혐오했던 토스카니니가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는 것에 대해서도 크게 실망을 했다. 그는 미국인들보다 독일인들이 자신의 음악을 훨씬 잘 이해한다고 믿었고 이것은 그가 끝까지 미국으로 가지 않고 독일에 머물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 ↑ 많은 문헌들에서 1935년의 '복귀' 를 공식 직책의 회복이라고 간주하고 있지만, 공식적인 서류나 문건을 살펴보면 그런 사실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실제로 전쟁 후기에 괴벨스가 베를린 필을 다룬 영화 '필하모니커' 를 찍을 때 푸르트벵글러를 섭외하려고 했지만, 푸르트벵글러는 자신이 악단의 공식적 수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거절했다.
- ↑ 베를린 필의 경우 푸르트벵글러의 손이 세번째 단추를 지날때 시작했다고도 한다.
- ↑ 프로듀서의 차가운 마이크 음성에 따라 반복적으로 연주하는 작업이 썩 즐겁게 느껴지진 않았을 것이다.
- ↑ 1943년 8월 18일에 개최된 베를린 필의 여름 특별 음악회 때 일본인 지휘자 에키타이 안과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20번을 협연한 기록이 있다(!).
- ↑ 이 덕에 1941년에 스키를 타다가 사고로 중상을 입었을 때도 간신히 목뼈 골절을 피할 수 있었다.
- ↑ 푸르트벵글러는 공적인 자리의 발언이나 서신 교환을 제외하고는 카라얀을 늘 'k' 라고 칭할 정도로 열폭의 극치를 달린 바 있다.
- ↑ 가령 티롤이라는 지명을 가타카나 음역인 치로루라고 그대로 써놓고 있다. 게다가 저자명을 빌헬름은 날려먹고 '푸르트 벵글러'라고 적어놨다는 것이 특징이라면 특징. 출판사는 삼성미술문화재단, 번역가는 바리톤 가수인 황병덕으로 되어 있고, 문고판이다.
- ↑ 푸르트벵글러의 방대한 평전을 집필한 헤르베르트 하프너도 이러한 푸르트벵글러의 모순에 대해서는 냉소적 혹은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