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위 문서: 문예 관련 정보
1 辭
춘추전국시대 초나라#s-1.1에서 생겨난 운문으로, 굴원이 지은 것들을 모아 놓은 초사(楚辭)라는 운문집이 유명하기 때문에 초사라고도 부르며, 그 중 <이소(離騷)>가 가장 유명하여 소(騷)라고도 부른다. 사부#s-4 문서 참조.
2 詞
江南好,風景舊曾諳。日出江花紅勝火,春來江水綠如藍。
能不憶江南。
백거이 - <억강남(憶江南)>
大江東去浪淘盡千古風流人物故壘西邊人道是三國周郞赤壁
亂石崩雲驚濤裂岸捲起千堆雪
江山如畫一時多少豪傑
遙想公瑾當年小嬌初嫁了雄姿英發
羽扇綸巾談笑間强虜灰飛烟滅
故國神遊多情應笑我早生華髮
人間如夢一樽還酹江月
소식(시인) - <염노교사 - 적벽회교>
词(cí)
사는 당(통일왕조) 때 생겨난 운문으로, 생겨난 당시엔 근체시에 밀려 유행하지 못하고 송나라 때 유행하였다. 본디 당시 유행하던 곡조에 붙여 읊기 위한 노랫말[1]이나, 당시엔 제대로 된 악보가 없어 현재는 그 곡조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노랫말만 전해지는 것이다.
당시엔 한 곡조에 부르는 사람이 자유롭게 사를 지어 붙이는 방식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제목만 같고 나머지는 다 다른 사가 속출하였다. 결국 송대에 이르러 소동파가 부제#s-1를 붙이는 방식으로 곡조와 사를 분리함으로서 이 문제를 해결하였다.
2.1 역사
당나라 때 유행하였던 문학 장르는 위에서 설명했다시피 근체시이다. 하지만 문서를 참조하면 알겠지만 근체시는 지켜야 할 형식이 많아 지식이 부족한 민중보다는 지배 계층에게 널리 퍼졌으며, 민중에게는 위진남북조시대부터 자유로운 형식의 노래가 유행하였다. 한편 남북조시대에서 수나라#s-4, 당나라에 이르는 동안 서역(인도, 중앙아시아)의 음악이 유입되어 민간 가요가 크게 발전한다. 그리고 당나라에 이르러 이러한 민간가요가 상류 사회에 전파되었다.
개원 이래로 노래하는 사람들이 오랑캐와 민간 악곡을 뒤섞어 사용하였다.
- 구당서 음악지
이러한 일이 일어난 이유는, 당시 상류 사회에서 유행했던 근체시가 형식이 너무 엄격하여 그것을 읊는 문인들이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는데 한계가 있다고 느끼고, 곧 형식이 자유로운 사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당현종 이후 문인들의 사 창작이 본격화되어 백거이 등과 같은 당대 유명 시인들이 사를 함께 짓기 시작한다.
하지만 사를 하나의 문학 장르로 확정시킨 인물은 온정균(溫庭筠, 820 ~ 870?)이라는 대가로, 민간가요 특유의 서정성을 살리고 화려한 필치를 동원하여 사를 작성하였는데, 이후 온정균의 사를 바탕으로 오대십국시대에는 본격적인 사의 창작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송대에 이르러 장선(張先, 998 ~ 1078)과 유영(柳永, 990? ~ 1050?)이 기존의 1절(2~4구)뿐이었던 사를 2절 이상으로 늘리기 시작하여 만사(漫詞)를 만들어 낸다. 또 소동파에 의해 서민적이거나 여성적이었던 사의 정서에서 남성적, 서사적 정서가 추가되어 주제가 풍부해졌으며, 이 때부터 사에 부제가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남송 말기에 유미주의적 가치관이 생겨나면서 형식주의에 치우쳐 쇠퇴하였고, 원나라와 명나라 때 희곡[2]과 소설이 유행하며 자취를 감추었다. 다행히 청나라 때부터 송대의 사에 관심을 갖고 연구한 것이 있어 오늘날까지 남아 있는 사가 몇 개 있는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