États généraux (프랑스어) States-General (영어) |
1 개요
앙시앵 레짐 시기 프랑스 왕국에서 프랑스의 세 신분의 대표자[1]가 만나 국가의 중요 사안에 관해 토론한 일종의 신분제 의회. 형태는 의회의 그것과 비슷했지만 옆나라와 달리 실질적인 권한은 거의 전무했으며 사실상 국왕의 자문기관[2] 정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 그쳤다.[3] 이러한 한계로 인해 정기적으로 개최되지 못한 채 국왕이 필요할 경우에만 개최되다가 프랑스의 중앙집권이 강화된 1614년 이후로는 160년 넘게 아예 개최조차 되지 않다가 1789년 프랑스 혁명 직전에야 마지막으로 열리게 된다. 그런데 삼부회가 역사적으로 유명해진 것은 전적으로 이 마지막 회의 덕분인게 함정
2 역사
1302년 당시 교황 보니파시오 8세와 갈등을 겪던 필리프 4세가 자신의 지지세력을 규합하는 한편으로 갈등과 관련되어 해결책을 제시받기 위해 각 지역의 영주, 성직자 및 대표자들을 소집한 것이 삼부회의 시초였다. 그리고 이 구성은 삼부회가 지속되는 내내 변하지 않는다. 삼부회가 주로 처리했던 업무는 국왕에 대한 자문과 더불어 징세에 동의를 표시하는 것이었다.[4] 맨 처음 삼부회가 개최됐을 무렵인 14세기 전간기에는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힘이 그리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삼부회는 상당한 권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권한은 백년전쟁 시기 최고점에 오르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삼부회는 납세 동의권을 왕에게 반납(...) 이게 웬 떡하는 초대형 병크를 저지르고 만다. 뒤늦게야 아차 싶었는지 1484년 삼부회는 국왕에게 납세 동의권을 돌려줄 것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당연히 무시했다. 그리고 이 1484년 이후로 프랑스에서 삼부회는 76년 동안 열리지 않는다.
사라져가던 삼부회를 다시 살려낸 것은 바로 16세기 전 유럽을 뒤흔들어버렸던 종교 개혁이었다. 거듭된 종교 전쟁으로 돈이 궁해진 국왕이 다시 앵벌이에 나설 수 밖에 없었기 때문(...) 그리고 이 시기 삼부회는 잘만하면 영국의 의회와 같은 방향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보여줬다. 각 신분들이 삼부회에 출석할 자신들의 대표자를 투표로 선출하였으며[5][6], '왕의 의지가 있는 곳에 법이 있다'는 주장에 맞서 '왕과 신민 사이에는 상호 우정이 있어야 한다'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하게 표출된 것은 물론이거니와 1576년에는 당시 국왕 앙리 3세에게 '삼부회에게 입법권을 부여하며 이를 통해 결의된 법은 국왕 역시 준수할 것'까지도 요구했지만 딱지를 맞고 만다. 이후 17세기로 접어들면서 프랑스에서는 절대왕정과 중앙집권이 급속도로 이루어졌고, 이에 따라 삼부회는 1614년을 끝으로 175년 동안 개최되지 않는다.
2.1 1789년
프랑스 재정을 다 태워먹은 태양왕 루이 14세의 사망 이후 프랑스의 사회는 갈수록 혼돈스러워졌다. 루이 14세에게 눌려 지내던 성직자와 귀족 계급은 루이 14세의 사후 이때다 싶었는지 자신들의 경제/사회적 특권을 확장시키는데 열심이었고 그 결과 18세기 중반에 이르면 인구의 2%가 채 안되는 1,2신분[7]이 전체 프랑스 토지의 40%를 차지하는 촌극을 빚는다.[8] 이들 특권층은 정치적으로도 정부 고위직을 장악하고 면세 특권을 누렸기 때문에 세금을 비롯한 각종 경제적 부담은 고스란히 제3신분의 몫으로 떠넘겨진다. 게다가 3신분 가운데서도 힘이 있었던 부르주아들을 이런 저런 명목으로 빠져나갔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거의 모든 부담은 프랑스 국민 중 가장 빈곤했던 농민들에게로 전가됐던 셈. 이들이 특권층에 대한 적개심에 활활 불타오른 것이야 당연지사.
이런 상황에서 프랑스 정부는 하라는 개혁은 안하고 7년전쟁, 미국 독립 전쟁과 같은 대외세력다툼에만 몰두했고 그 덕분에 이미 루이 14세의 사망 시점에서 엉망이었던 프랑스의 재정은 1780년대에 이르면 파산 직전에 이른다. 결국 국왕 루이 16세는 재정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삼부회를 175년만에 다시 열기로 결정하고 1789년 5월 5일 베르사유에서 삼부회가 개최된다. 국왕은 어떻게든 삼부회의 논의사항을 재정 문제로 국한시키고자 노력했지만 분노에 휩싸인 제3신분이 그럴리가 있나. 삼부회는 개최되자마자 3신분에 의해 프랑스의 모순적인 사회구조를 개탄하는 목소리로 뒤덮인다. 이어서 3신분은 자신들의 대표자 수를 기존의 2배로 늘려줄 것을 요청했고 이를 받아내지만 허울좋은 기만책이었다. 기존의 삼부회 의사결정 시스템이었던 투표 방식[9]은 변경되지 않았다.
- ↑
다들 알고 있겠지만1신분은 카톨릭 성직자, 2신분은 귀족, 3신분은 평민. - ↑ 주된 자문사항은 회계문제였다.
- ↑ 그런 점에서 오히려 삼부회의는 영국의 의회보다는 동시대 스페인 왕국의 코르테스나 신성로마제국의 제국 의회와 여러모로 유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코르테스나 제국 의회는 꾸준히라도 열렸지 삼부회는 왕이 필요할 때만 열렸잖아 - ↑ 물론 삼부회가 순순히 징세에 동의를 표하지는 않았다. 귀족과 성직자들은 징세에 댓가로 자신의 영지에 속한 백성(주로 농민)들에 대해서 지배권을 강화했으며 평민
이래봤자 농민은 없고 죄다 부르주아였지만들은 징세를 댓가로 경제적인 특권을 부여받고자 노력했다. - ↑ 물론 보통선거같은 개념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그래도 투표로 대표자들을 뽑았다는 것 자체에 의의가 있다.
- ↑ 사실 이렇게 투표로 대표자들을 선출하는 관례는 3신분의 경우 삼부회가 처음 개최되던 14세기부터 있었다. 다만 모든 신분들이 자신들의 대표자들을 투표로 선출하는 것이 관례로 굳어진 것이 16세기 중반.
- ↑ 이 시기 프랑스의 총 인구가 2500~2600만 명 사이였는데, 1신분이 만명 가량이었으며 2신분이 40~50만 가량이었다.
- ↑ 그 중에서도 압권은 만 명으로 전체 인구의 0.04% 가량이었던 1신분이 전체 토지의 10%나 차지했다는 것이다.
- ↑ 대표자 한 명당 한 표가 아니라 각 신분이 한 표를 행사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