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필리프 3세 | ← | 필리프 4세 | → | 루이 10세 |
이름 | 필리프 미남왕(Philippe le Bel) |
생몰년도 | 1268년 ~ 1314년 11월 29일 (46세) |
재위기간 | 1285년 10월 5일 ~ 1314년 11월 29일 |
출생지 | 프랑스 퐁텐블로 |
사망지 | 프랑스 퐁텐블로 |
역대 나바르 왕국의 군주 | |||||
후아나 1세 & 펠리페 1세 | ← | 펠리페 1세 | → | 루이스 1세 |
1 개요
프랑스 왕국 카페 왕조의 11대 왕이며, 필리프 3세의 아들이다. 잘생긴 외모로 미남왕이란 칭호가 붙었다. [1]
그는 삼부회를 처음 소집하여 처음으로 도시시민들의 정치권을 인정했으며, 측근 귀족세력을 이용해 관료제를 확립시켜 중앙집권국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교황청과의 싸움에서 승리함으로써 그야말로 중세 봉건 사회 자체를 파괴시킨 왕이 되었다. 1285년 나바르의 여왕 후아나 1세와 결혼하여 공동왕 펠리페 1세로 즉위했는데 1305년 후아나 1세가 사망하자 프랑스-나바르 왕국의 단독 왕이 되었다.
2 교황과의 대립
필리프 4세는 즉위하자마자 강력한 통일정책을 펼쳐서 프랑스 통일에 방해가 되는 요소인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1세 그리고 그러한 잉글랜드와 동맹을 맺은 플랑드르의 백작 기 드 당피에르와 싸우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막대한 전비지출이 되었으며, 그러한 전비를 충당하기 위해서 당시 부유한 세력이었던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걷기 시작했다. 여기서부터 교황과의 마찰이 시작된 것이다.
당시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는 필리프 4세의 통일정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교황의 입장에서는 지방영주들이 갈라져 있는 상태로 십자군 전쟁에 나서주기를 원했는데, 필리프 4세가 통일정책을 펼치면 지방영주들로부터 십자군 전쟁에 필요한 군사차출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필리프 4세가 성직자들로부터 세금을 거두자 교황은 이에 대한 금지명령을 내렸는데 필리프 4세는 교황청으로 가는 물자를 끊는 것으로 대응했고, 결국 교황은 양보하고 말았다.
하지만 필리프 4세는 이후 교황의 신임을 얻고 있던 파미에르의 주교 베르나르 세세를 이단과 국가반역죄로 투옥하기에 이른다. 그러자 교황은 세속왕권이 교권을 침해한 것이라 판단하고 필리프 4세의 성직자 과세권을 유보시키고 교서를 내린다.
그러나 필리프 4세는 1303년 즉각 교황의 교서를 불태워버리고 노트르담 성당에서 이른바 삼부회를 소집하여 프랑스 국민의 지지를 얻게 된다.
3 아비뇽 유수
한편 필리프 4세의 총신과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의 반대세력이 힘을 합쳐 보니파키우스 8세를 습격하여 그 여파로 보니파키우스 8세가 죽게 되고 이후 즉위한 교황도 곧바로 죽게 되자, 필리프 4세는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황에 앉힌다. 그가 바로 클레멘스 5세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가 지켜보는 가운데 리옹에서 교황에 오른다. 그러던 중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7세가 로마를 점령하자 클레멘스 5세는 1307년 아예 교황청을 아비뇽으로 옮겨버리게 된다. 이가 바로 아비뇽 유수이며 교황은 이후 70년동안 프랑스 국왕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4 성전기사단 탄압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탄생한 성전기사단은 조직 확대과정에서 조직원들의 재산을 맡아 이를 바탕으로 금융업을 벌여서 오늘날의 은행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잦은 전쟁으로 전비충당이 급했던 필리프 4세는 유대인을 탄압함과 동시에[2] 자신의 수중에 들어온 교황을 이용해서 성전기사단을 이단으로 몰게 된다. 결국 1312년 교황을 압박해 성전기사단이 남색 등을 일삼는[3] 범죄 집단이라는 교지를 받아내는 데 성공하고, 이때까지 살아남은 기사단장 자크 드 몰레와 다른 기사 등 2명에게 사형을 선고, 화형시킨다. 그리고 이 때 자크 드 몰레는 머지않아 프랑스 왕과 교황 모두 내 앞에서 죄를 빌게 될 것이며, 그 자손들도 천벌을 받을 것이라고 소리치며 최후를 맞았다.
그리고 같은 해 필리프 4세도 갑자기 사망한 것은 물론 얼마 가지 않아 대까지 끊기면서 사람들은 무고한 성전기사단 단원들을 잔혹하게 죽인 것에 대해 복수를 당한 것이라고 수근거렸다고 전한다. 게다가 이걸로 끝이 아니어서 이후에도 프랑스 왕실 수난사는 계속 이어지다가 결국 루이 16세가 시민으로 강등된 뒤 참형에 처해지는 결말을 맞았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결국 자크 드 몰레의 저주가 실현된 셈.
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이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당시 템플 기사단이 멸망하는 장면을 프롤로그 미션으로 넣었다. 자크 드 몰레가 화형당하는 처형장에서 필리프 4세가 출현한다.
5 사후
이렇듯 교회세력을 누르고 중앙집권을 이룩한 그였지만 자식장사가 영 좋지 못했다.
그의 장남 루이 10세는 즉위 2년만에 20대의 나이로 의문의 죽음을 당했고 손자 장 1세는 루이 10세가 죽은 이후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5일 만에 죽었다. 조카 장 1세를 이어 왕위에 오른 차남 필리프 5세 역시 상속자 없이 즉위 6년만에 20대의 나이로 죽었다. 그 뒤를 이어받은 삼남 샤를 4세는 자신의 동생 프랑스의 이사벨라를 이용하여 잉글랜드 왕위계승에도 관여했으나, 역시 상속자 없이 즉위 6년만에 30대 초반의 나이로 죽게 되어서 결국 카페 왕조의 직계는 끊기게 되었다. 사실 루이 10세, 필리프 5세, 샤를 4세 모두 각각 장 1세, 필리프, 샤를 등 아들이 각각 한 명씩 있었지만 모두 영아기 때 요절했다(...). 더불어 딸들도 있었으나, 살리카법의 확대 해석으로 모계 계승 불인정으로 왕이 되지 못했다.
이후 프랑스의 왕위는 필리프 4세의 동생이었던 샤를 드 발루아의 아들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받게 되어 필리프 6세로 즉위하고 발루아 왕조가 들어서게 되었다. 하지만 샤를 4세의 외조카이자 필리프 4세의 외손자 잉글랜드 국왕 에드워드 3세가 프랑스 왕위계승을 주장함에 따라 백년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6 창작물에서
필리프 4세와 자식들을 다룬 저주받은 왕들(Les rois maudits)이라는 대하 역사소설이 있다. 조지 R.R. 마틴이 얼음과 불의 노래를 영감을 많이 받은 작품 중 하나로 꼽았다.- ↑ 그의 잘생긴 외모에 의한 미남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것은 이미 왕자시절의 일이었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Belle이라는 단어의 또다른 뜻, '공정(평)한'이라는 의미가 중의적으로 추가되었다는 말도 있다. 그는 공개적인 자리에서 사적인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 변함이 없는, 언제나 한결같은 표정으로 상대방을 대했다고 한다. 당대의 어떤 인물은 이러한 그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그는 사람도, 짐승도 아니다. 그는 석상이다. Ce n'est ni un homme ni une bête. C'est une statue." (...)
- ↑ 1306년 한번에 추방된 유태인만 10만에 달했다고 한다.
- ↑ 사실 일반범죄라고 따지면 저지른 죄는 꽤 됐다. 다만 이런 짓은 대부분의 영주나 귀족들이 한두번씩은 저지르던 행위로, 문제가 되는 건 나중에 그가 권력자에게 단단히 찍혔을 때다. 예를 들어 일반 농노를 재판 없이 죽일 경우라도 적당히 넘어가는 데 별 문제가 없었지만, 나중에 다른 영주들을 적으로 돌리거나 왕에게 찍힌다면 그걸 근거로 살인죄로 기소해서 참수, 영지 몰수 동시 콤보를 먹게 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