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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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서 「정곽동류장류전(程郭董劉蔣劉傳)」
정욱곽가동소유엽장제유방

程昱[1]
(141년 ~ 220년)

1 개요

후한 말과 삼국시대 위나라의 인물. 는 중덕(仲德). 본명은 정립(程立). 동군 동아현 출신

정욱전에 따르면 8척 3촌[2]의 키에 아름다운 수염을 가지고 있었다.

2 정사

2.1 황건적의 난

정욱은 연주에서 대대로 살았다. 황건적의 난이 한창일 때 정욱의 고향 동아현에서 황건적에 호응한 몇몇의 반란자가 성문에 불을 지르자 백성들과 현령들이 모두 성 밖으로 피신했는데, 정욱만은 이 반란자들이 소수인 점을 꿰뚫어보고 성안으로 피해 굳게 지킬 것을 현령에게 권한다. 그러나 현령은 응하지 않았다. 따라서 그는 사병인 기병을 풀어 깃발을 사람들이 모인 곳 근처에 세운 뒤 "적이 당도했다!"라고 소리쳐 사람들이 성 내로 돌아가게 한다.

반란자들이 와서 성을 공격했지만 항복시킬 수 없어 떠나고자 했다. 정욱이 관리와 백성들을 이끌고 성문을 열어 급히 공격하니 격파되어 달아났다. 그 결과 동아현은 성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2.2 유대에게 조언

초평 연간(190~193년)에 연주자사 유대가 정욱을 초빙했으나 정욱은 응하지 않는다. 한편 유대는 원소, 공손찬과 모두 친했기에 원소는 그의 처자식을 유대에게 맡겼고 공손찬은 종사 범방에게 기병대를 딸려보내 유대를 돕게 했다. 그런데 공손찬과 원소와의 사이가 나빠지면서 공손찬은 유대에게 원소의 처자식을 내놓고 그와의 관계를 끊도록 요구하고 이를 거부하면 다음 목표는 유대가 될 것이라 협박한다. 당시 공손찬의 세력이 워낙 강했으므로 때문에 유대 진영에서는 연일 의론이 끊이지 않았다.

근심하고 있던 유대는 정욱을 불러 그의 가르침을 청한다. 정욱은 원소는 가깝지만 공손찬은 멀리 떨어져 있고 공손찬은 원소의 적수가 되지 못하는 점을 들어 원소에게 붙어야 한다고 일러주며, 이에 범방은 기병대를 이끌고 공손찬에게 돌아갔다. 범방이 도착하기도 전에 공손찬은 원소에게 크게 패했고, 이 때문에 유대는 정욱을 크게 신뢰하게 되어 재차 정욱에게 벼슬을 주고 부하로 삼으려고 하나 듣보잡 유대 따위에게 붙어봐야 장래가 암울하므로 정욱은 이를 거절한다.

2.3 조조에게 임관

유대가 황건적에게 죽고 조조가 연주에 이르러 정욱을 초빙한다. 정욱이 유대의 초빙은 거절했으면서 조조의 초빙은 받아들이니 그의 고향 사람들이 "어찌 전후의 일이 이렇게 서로 배치되는가!"라고 했다. 정욱은 웃으며 답하지 않았다.

조조는 정욱을 만나본 뒤 크게 기뻐하며 수장현의 현령으로 삼는다. 조조에게 등용될 때는 무려 50대 중반으로 상당히 늦은 나이에 벼슬길에 오른 것이다.

2.4 연주에서의 반란

조조가 서주 침공에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에 정욱은 순욱과 함께 견성을 지키고 있었는데, 조조와 중심 병력이 없는 틈을 타 진궁장막, 여포 등을 끌어들여 모반한다.

정욱과 순욱은 남아 있는 성 세 곳을 지키게 된다. 이때 순욱은 정욱의 출신지와 명성을 고려하여 정욱에게 반란기를 들려는 민중들을 설득하길 권했다. 과연 정욱은 가족이 인질로 잡혀서 모반에 동조하려는 늑윤을 설득시켜 범억을 죽이게 한다.

이 때 그는 진궁의 공격을 강의 다리를 끊음으로써 차단하는데 성공하였고, 조조의 큰 신임을 얻게 된다. 조조는 보답으로 정욱을 동평군의 상으로 임명한다.

일전에 정욱은 순욱에게 자신이 꾼 꿈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꿈 내용은 그가 산에 올라 해를 받드는 꿈이었다. 순욱이 이 얘기를 조조에게 전해주었고 조조는 그의 이름 설 립(立)에다 해 일(日)을 붙여줘 빛날 욱(昱)으로 개명하게 된다.

2.5 원소와의 화친을 반대

그 해 가을 메뚜기 수의 폭등으로 여포와 장막의 공세를 일단락 시켰지만, 사실 지켜내었던 세 성을 제외한 연주 전체를 잃고 자신도 메뚜기 떼로 인해 군량이 전부 바닥났기 때문에 기반이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이 때 원소는 조조에게 사람을 보내 가족들을 업으로 옮겨 살도록 권한다. 정욱전에서는 원소가 '화친'을 권했다고 적고 있는데, 위왕조를 나라의 시조로 보는 진수의 입장상 말이 좋아 화친으로 적어준 것일 뿐, 당시 조조와 원소의 관계는 전혀 대등하지 않았다. 연주 점거 이후 점차 원소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립하는 태도를 취하던 조조에게 인질을 받으며 상하 관계를 확실하게 재확인하려는 시도에 가까웠다.

곤궁한 상황에 있던 조조는 이를 수락하려 했다. 그러나 마침 외지에 사신으로 나갔다 돌아온 정욱이 이를 듣고 조조를 찾아가 다그치며 원소의 제안을 거절하게 하고 조조를 분발하게 만들었다.

"장군께서 일이 닥치자 두려워하신 겁니까, 그렇지 않으면 깊이 생각치 않은 것입니까! 무릇 원소는 연과 조(趙) 땅에 의거하여 천하를 병탄해 차지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그 지혜로는 이룰 수 없습니다. 장군께서 자신을 스스로 헤아려 보면 그보다 아래라고 여기십니까? 장군의 용과 범같은 위엄으로 가히 한신이나 팽월(彭越)같은 일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까! 지금 연주가 비록 쇠잔해졌지만 아직 세 성과 능히 싸울 있는 전사들이 있어 만명이라도 항복시키지 못합니다. 장군의 신이한 무력으로써 문약(순욱)이나 저 등과 함께 저들을 거두어 기용하신다면, 패왕의 대업을 가히 이룰 수 있습니다. 원컨대 장군께서 다시 생각하십시오." - 정욱전

2.6 유비를 경계하다

이후 조조는 헌제를 옹립하고 승상에 오르자 정욱을 상서로 삼고 동중랑장과 제음태수를 겸하게 하여 연주의 모든 대소사를 위임하여 관장하게 했다.

이 무렵 유비가 조조에게 귀순해오자 정욱은 높은 안목으로 조조에게 유비를 미리 처치해 두라고 조언한다. 그러나 조조는 정욱의 조언을 따르지 않는다.

정욱이 공(=조조)을 설득하며 말하길 "유비의 관상을 보니 영웅의 재주가 있고 뭇사람들의 마음을 크게 얻고 있어, 끝내 남의 밑에 있을 자가 아니니, 빨리 그를 도모하는게 낫습니다."라 했다. 공이 말하길 "바야흐로 지금 영웅을 거둬들이고 있는 때인데, 한 사람을 죽여 천하의 인심을 잃게 할 수는 없소."라 했다. - 무제기

나중에 조조가 유비에게 수춘의 원술를 공격하게 하면서 병사를 빌려주면, 출정하고 곧 배반할 것이라고 곽가와 함께 진언했고 이는 그가 예상했던 대로 맞아 떨어져 유비는 차주를 살해하고 서주를 차지한다.

2.7 관도대전

그는 지략 못지 않게 담력도 뛰어났다. 관도대전 무렵 원소가 10만 대군을 끌고 남하하는 도중 정욱이 겨우 7백의 군사로 견성을 지키고 있었다. 조조가 이를 우려해 2천의 군사를 증원해 주려 했으나 정욱은 이를 거부했다.

원소의 대군의 앞에선 7백이나 2천이나 공격당하면 버틸 수가 없기 때문에 증원하지 않는 게 조조군의 병력 보존에 이로우며, 병력이 적으면 원소는 이를 가볍게 여겨 굳이 싸우지 않고 지나칠 것이나 2천이 증원되면 후방의 위협 제거 차원에서라도 반드시 칠 것이라는 이유였다. 과연 원소가 정욱의 병력이 적다는 것을 듣고 견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조조는 가후에게 편지를 보내 정욱의 담력을 칭찬했다.

관도대전에서 조조가 승리한 뒤 원소가 병사했을 무렵 정욱은 여러 험지에 숨어있던 유민들을 거두며 수천의 정병을 얻었고 이들을 이끌고 조조와 합류해 여양에서 원담원상을 격파하는데 결정적인 공을 세워 분무장군의 지위를 얻는 동시에 안국정후로 봉해져 제후의 반열에 오른다.

2.8 위나라의 명신

이후 유비오나라로 도망간다는 소식에 다들 손권이 유비를 죽일 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손권이 유비의 힘을 빌어 조조에게 대항하려 할 것임을 예측하였고, 곧 그가 예측한 그대로 되었다.

세력이 어느 정도 자리 잡은 후, 조조는 그가 연주의 세 성을 지킨 일을 들며 그를 칭찬했다. 정욱은 그를 위한 축하연의 자리에서 '만족할 줄 알고, 욕되지 않았으니 물러나길 원한다.'라며 병권을 내놓고 칩거에 들었다.

그 후 조조가 친히 마초를 공격할 때 조비가 남아 조조의 일을 거들때 정욱을 군을 통솔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했다. 이때 하간에서 반란이 일어나 이를 토벌하는 도중 천 여명이 항복하였는데, 이들을 처형하자고 건의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정욱은 앞으로도 항복을 하고자 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라며 이와 같은 건의에 반대한다. 조비는 그의 의견을 지지하였는데, 마초와 싸우고 돌아온 조조의 의향도 이와 같았다.

정욱은 성질이 괴팍하고 드세어 주위에 적이 많았고 참언도 자주 받았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조는 그를 무척 신임했고 213년 위나라가 건국되자 위위에 임명되고, 중위 형정과 위의를 다투었다가 면직되었다.

220년 조비가 제위에 오르자, 다시 위위로 되고 봉작을 올려 안향후에 봉하고, 봉읍을 3백호 늘려 이전 것과 함쳐 8백호가 되게 하였다. 정욱은 80세 가까운 나이에 죽었는데, 벼슬이 공(公)에 이르기 직전이었다. 아들 정무(程武)가 뒤를 이었고, 손자 정효(程曉)는 황문시랑이 되었다.

2.9 인육?

정욱이 삼공에 오르지 못한 이유를 세설신어(世說新語)라는 책에는 조조가 식량이 부족했던 시기에 정욱이 자기 고향을 약탈하여 3일 분의 식량을 제공했는데 여기에 인육 말린 것이 섞여 있어 조정의 신망을 잃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 물론, 사료의 성격을 보고 생각해 보면 사실일 가능성은 별로 없다.

세설신어는 여러가지 야사를 모아놓은 야사집으로써 조조가 여백사의 일가를 죽인 일화나 조조가 그의 말년에 나무를 벨 때 피가 흘러 조조가 입고 있던 옷에 뭍었다는 등의 일화가 기록되어 있다. 비록 야사집이나 조조의 아버지인 조숭이 장개에게 살해당할 때의 정황이라든지 또는 조조가 원래는 하후씨였다는 사실과 같은 다양한 범위의 정보가 많은 기록물이다. 따라서 어느정도 객관성을 띄고 있다.

재밌는 점은 정욱이 나고 자란 현은 동아현으로 이 현은 조조가 연주목이 된 이래 단 한번도 조조를 배반한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세설신어에 따르면, 조조군이 식량이 부족했을 때는 여포와 싸운 기간 혹은 원소와 싸운 날들인데, 여포와 싸울때 동아현이 배반하지 않은 세 현중 하나였으므로 정욱이 약탈을 감행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원소와 싸울 때는 700명의 병력으로 원소군과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동아현까지 가서 약탈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또한 만약 정욱이 군대를 이끌고 동아현을 약탈했다면 제멋대로 병사를 이끌고 자신의 주군의 영토를 약탈한 셈이므로 이는 조정의 신망을 잃은 정도로 끝났을리가 없다. 이는 극형이 분명한 반역을 치부된다. 따라서 저렇게 정욱이 자신의 출신현을 약탈해서 군량을 조달했다는 말은 아마도 후세에서 지어졌거나 정욱과 사이가 나쁜 사람들에 의해서 꾸며진 험담일 것이다.

다만, 위의 일이 반드시 없었다고 보기 어려우며, 여러 현의 지명의 오기 혹은 혼동일 수도 있다. 조조의 식량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을 때가 많아 식량 조달 과정에서 급한 경우의 무리수로서 일어났을 가능성이 있다. 위의 일화가 꾸며졌다고만 믿기에는 정욱의 정치적 위치와 더불어 그의 정적들에 의해 그가 맡고 있던 고위직에 대한 저런 일화가 어떤 식으로 쉽게 퍼질 수 있었는가 하는 풀리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3 연의

삼국지연의에서는 그의 초기의 자잘한 활약들이 생략되었으나 창정에서 십면매복계로 원소를 격퇴하는 임펙트있는 활약이 창작되었다.

인육으로 군량을 조달했다는 소문, 여포에게 가족이 인질로 잡힌 범현의 현령 늑윤에게 가족을 포기할 것을 권하고, 서서의 어머니에게 동향 친구인 척 접근해 호의를 얻고 필적을 베껴서 서서를 속이는 등 통찰력은 있지만 나쁜 품성이 두드러져 인정조차 이용하는 비정하고 냉혈한 이미지로 그려진다.

4 기타

정욱이 연주에서 대대로 살았다는 점을 미루어 볼 때 그는 연주지방의 호족이었지 않았나 싶다. 정사에서 보면 동아현의 현령과도 스스럼없이 대화를 나눈다. 또한 연주자사 유대가 그를 여러차례 불렀고 조조도 연주를 얻자마자 그를 부른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정욱은 연주지방에서 신망이 높은 자였다고 추정해 볼 수 있다.

관도대전 전후의 행적으로 보아 정욱은 다른 모사들과는 달리 병사를 직접 지휘하는 사령관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관직체계 자체에 약간 그런 면이 있기도 하지만, 정욱은 문-무관의 구별이 명확한 인물이 아니라 어느정도 경계선상에 있는 인물이었다. 사후 장군직인 거기장군으로 추증되기도 했고, 생전의 마지막 직책인 위위 역시 장군직은 아니지만 황실의 경비를 담당하는 군사적인 성격이 있는 직책이었다.

적벽가, 영화 적벽대전을 비롯한 적벽대전을 다룬 창작물들에서는 당시 조조의 책사로 자주 등장한다. 아니, 자주 정도가 아니라 적벽대전 시점이라면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책사로 등장한다. 가후같은 쟁쟁한 애들은 어디다 두고

5 미디어 믹스

  1. 일본에서는 'てい いく(tei iku)'라고 읽는데, 昱자는 일본에는 없는 한자이기 때문에 일본 위키피디아의 정욱 항목은 '程イク(iku)'로 생성되어 있다. 정 가버렷!
  2. 당시에는 한척에 23.7cm였는데 환산하면 196.7cm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