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역대 국왕 | ||||||
루이 18세 | ← | 샤를 10세 | → | (루이 19세) (앙리 5세) 루이 필리프 1세 |
샤를 10세, 프랑수아 파스칼 시몽 제라르, 1829년 | |
왕호 |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샤를 10세 (Charles X Roi de France et de Navarre) |
이름 | 샤를 필리프 (Charles Philippe) |
생몰년도 | 1757년 10월 9일 ~ 1836년 11월 6일 (79세)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사망지 | 오스트리아 제국 고리치아 |
재위기간 | 1824년 9월 16일 ~ 1830년 8월 2일 (5년 9개월 15일) |
"영국왕과 같은 조건으로 왕을 하느니 차라리 숲에서 도끼질을 하는 것이 낫다."[1]
하는짓만 보면 10세가 아니라 10새라 카더라
루이 15세의 아들 황태자 루이 페르디낭의 아들, 부르고뉴 공작 루이[2](1751 ~ 1761, 루이 16세의 형)와 루이 16세(1754 ~ 1793)와 루이 18세(1755 ~ 1824)의 동생이다. 즉위 이전에는 아르토와 백작(comtes d' Artois) 작위를 받았다.
형제 중에서 가장 향락적이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활달한 성격이라 마리 앙투아네트와 함께 노는 일이 많았는데 이 때문에 마리 앙투아네트와의 사이에서 스캔들 소문이 돌기도 했다.
1789년 7월 14일, 프랑스 혁명이 발발하자, 형 루이 16세가 혁명파에 굴복한 것에 실망하여 가장 먼저 영국으로 망명했다. 망명지에서 혁명 반대를 열심히 외쳤지만[3]딱히 자신이 나서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1795년 프랑스의 키브론 섬에 왕당파의 군대와 함께 상륙할 예정이었으나, 마지막 순간에 취소하고 대신 1개의 칼을 주었다고 한다.입스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집권하자 나폴레옹을 암살하기 위해 왕당파를 지원하고 자객을 프랑스에 보냈다. 하지만 성과는 얻을 수 없었다.
루이 18세의 왕정복고기에는 자식이 없는 루이 18세의 후계자로 여겨졌다. 보수주의자이며 복고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기 때문에 공화주의자와 혁명주의자에게는 많은 비판을 받았으며 1820년에는 차남 샤를이 암살당하기도 했다.
1824년, 루이 18세가 사망하자 67세의 나이로 왕이 되어, 의회를 해산하고 신문 발행을 금지하는 등 절대왕정으로 돌아가려는 압제 정치를 벌였다. 즉위식에서부터 왕의 손길이 닿으면 병을 낫는다는 기적을 보이는 쑈를 벌였고[4] [5] 프랑스 혁명 중에 살해된 폴리냐크 부인의 아들인 폴리냐크 공작을 수상으로 삼아 과격 왕당파로 구성된 내각을 출범시켜 귀족들의 특권과 재산을 대거 회복하려 했다[6].
당연히 이는 프랑스 정치인들과 국민 전체를 분노하게 만들었고 결국엔 시민군이 결성되어 1830년, 7월 혁명이 일어났다. 마침 군대 대부분을 알제리로 보낸 터라 혁명에 제대로 된 대응이 불가능했던[7] 샤를 10세는 정치권력을 박탈당하고 전제군주에서 입헌군주가 된다는 통고를 받는다. 이에 샤를 10세는 실권없는 군주 되길 거부하고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양위하여 앙리 5세로 즉위시킨 다음에 오를레앙 공작을 섭정으로 삼으려 했지만 했으나 이미 대세가 완전히 기울어졌고 오를레앙 공작은 섭정에 만족할 생각이 없어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부르봉 왕가의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샤를 10세는 망명길에 오른다.
샤를 10세는 영국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했으며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하고 1836년 사망했다. 따라서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슬로베니아[8] 노바 그리치아에 묻혔다.
1773년 비토리오 아마데오 3세의 딸 사보이의 마리 테레즈[9]와 결혼해 2남 2녀를 보았는데 장남 앙굴렘 공작 루이 앙투안(일명 루이 19세[10]), 장녀 소피, 차남 베리 공작 샤를 페르디낭, 차녀 마리 테레즈가 있었다. 딸들은 모두 요절했는데 장녀 소피는 7세, 차녀 마리 테레즈는 태어난 그 해에 죽었다. 그나마 아들들은 비교적 오래 살았는데 루이 16세의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자 사촌이었던 마리 테레즈 샤를로트와 결혼한 장남 루이 앙투안은 자손이 없었고 암살당한 차남 샤를 페르디낭만이 외아들이자 샤를 10세의 손자 샹보르 백작 앙리 5세[11]가 있었다. 그러나 앙리 5세는 역시 자손이 없어서 부르봉 왕조 직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그래서 방계이자 루이 13세의 후손으로 먼 친척인 오를레앙 공작 루이 필리프 1세가 뒤를 잇게 되었다.
- ↑ 그의 절대왕정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발언이다. 실제로 그는 입헌군주정 전환을 통보받자 주저않고 퇴위해버렸다.
정작 도끼질 하런 안 갔다 한다 - ↑ 루이 16세가 장남이 아니라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볼드체로 작성.
- ↑ 신성로마제국의 레오폴트 2세와 프로이센 왕국에게 님들 우리 혁명 났으니 침공해주삼(필니츠 선언-사실 원래는 레오폴트와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사이에서 폴란드 분할에 대한 얘기만 오갔지만 이놈의 요청으로 프랑스 침공이 일어난다.)이라고 지껄였다.
- ↑ 이미 우스갯소리로 전락한 미신까지 내세웠으니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 ↑ 연주창이라고 하여 목 주변의 림프선이 결핵균에 의해 감염되는 질환이 있다. 이 연주창은 손길이 닿거나 할 경우 부어오른 부위가 일시적으로 가라앉는 현상이 일어나며, 중세기에는 이를 성유로 축복받은 왕만이 일으키는 기적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왕의 즉위식에서는 연주창 환자들에게 왕이 직접 자신의 손을 환자의 목에 갖다 대는 식전이 있었다. 당장 셰익스피어의 <맥베스>에서 맥베스가 거짓 왕이라는 증거로 내세운 것 중 하나가 바로 연주창을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맥베스>의 집필 배경 중 하나는 제임스 1세의 왕권신수설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한 연주창 치유의 기적을 선전하기 위한 것이다.
- ↑ 귀족들의 재산 회복을 위해 국채를 대규모로 지급했다. 하지만 조상 대대로 대토지를 상속받은 소수 대귀족을 제외한 대부분의 중소 귀족들은 얼마 되지 않은 국채 매각 대금으로는 도저히 조상 전래의 토지를 매입할 수도 없었고 자연스럽게 국채 이자로 생활하는 연금 생활자가 되었는데, 이것이 샤를 10세의 의도와는 다르게 중소 귀족들을 도시 부르조아지로 재편하면서 자연스럽게 왕당파에서 입헌 군주정이나 민주정으로 사상을 전환하게 만들었다.
- ↑ 마르몽 원수가 지휘하는 부대가 시민들에 대한 사격 등으로 강경 진압에 나서긴 했지만, 중과부적이었다.
- ↑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
- ↑ 남편과 달리 오스트리아의 그라츠에 묻혀 있다.
- ↑ 원래 샹보르 백작 앙리에게 물려주려고 했는데 계승법상 이 양반을 뛰어넘어 계승하는 게 불가능해서 20분가량 왕위에 있었다.
그래봐야 둘 다 왕으로 인정 못 받는 건 똑같다는 게 함정 - ↑ 아버지가 죽었을 때는 아직 어머니 뱃속에 있었으므로 그가 태어났을 때는 "기적의 아이"라고 부르며 초왕당파의 숭배 대상이 되었다. 정작 모친은 루이 필리프 시대에 정권 타도 음모에 연루되었다가 체포되었을 때 임신중인 사실이 드러나 정통파의 명분에 타격을 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