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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관식 복장을 입은 루이 18세[1], 로베르 르페브르, 1822년 | ||
왕호 |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 루이 18세 (Louis XVIII Roi de France et de Navarre) | |
이름 | 루이 스타니슬라스 그자비에 (Louis Stanislas Xavier) | |
생몰년도 | 1755년 11월 17일 ~ 1824년 9월 16일 (68세) | |
출생지 | 프랑스 왕국 베르사유 궁전 | |
사망지 | 프랑스 왕국 루브르 궁전 | |
재위 기간 | 1차 | |
복위 | 1815년 7월 8일 ~ 1824년 9월 16일[2] |
10만 명의 시체를 밟고 돌아온 사나이[3]
1 험난한 즉위 여정
1.1 형과 조카의 죽음
루이 16세의 동생으로 프로방스 백작의 칭호로 불렸다. 루이 16세가 한동안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한때 추정 상속인 자격으로 왕위계승자였던 적이 있었다. 그러나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를 출산하자 형 부부와 매우 사이가 나빠졌고, 동생인 아르투아 백작과 함께 국왕 부부의 흑색 선전에 열을 올렸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고 바렌느 배신사건이 터진 가운데 형과 형수는 탈출에 실패했지만 그는 혁명이 시작되자마자 위험을 감지하고 빠르게 독일로 망명할수 있었다. 루이 16세가 사망했을 때 왕세자의 섭정을 자처했었고, 나중에 왕세자 루이가 죽었다는 소문이 들리자 스스로 루이 18세로 자칭했다. 왕세자가 죽었다면 왕위계승순위로 따지면 그가 1순위가 된 건 맞긴 하니까...
1.2 나폴레옹의 등장과 몰락
어쨌든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다가 한때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브뤼메르 쿠데타로 권세를 잡자 그가 왕당파라는 것을 확신하고 1800년 2월 20일 그에게 몹시도 거만한 편지를 보내 왕정복고를 촉구했다.
"내게 왕위를 돌려주는 데 꽤나 뜸을 들이는군요. 그러다가는 기회를 놓칠 위험이 있소. 내가 없다면 당신은 프랑스를 행복하게 만들 수 없고 반면 그대 없이 나는 프랑스를 위해 아무것도 할 수 없소. 그러니 서두르시오. 그리고 어떤 지위와 명예가 그대와 그대의 친구들을 만족시킬 수 있을지 알려주시오."
실제로 나폴레옹은 브뤼메르 쿠데타 이후 왕당파이거나 심지어 자신이 왕이 되려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혹을 받고 있었는데 하지만 그는 황제가 되었다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의 제안을 일축했다.
"그대의 편지를 받았소. 친절한 말씀에 감사드리오. 프랑스로 돌아오려는 희망을 품고 있다면 버리시오. 그러려면 시신 10만구를 밟고 넘어야 할 것이오. 프랑스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사사로운 이익을 희생하시오. 역사가 잊지 않을 것이오. 그대 가족의 불운에 마음이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오. 은퇴한 뒤 편안하고 조용히 지낼 수 있도록 기꺼이 할 수 있는 것을 하겠소."
이후 나폴레옹은 1803년에도 그에게 편지를 보내 왕정복고? 꿈 깨쇼.라는 편지를 보내 그를 실망시켰고 루이 18세의 동생이며 훗날 샤를 10세가 되는 아르투아 백작은 이때부터 나폴레옹에게 치를 떨었고 부르봉 왕당파는 나폴레옹을 주깁시다, 나폴레옹은 부르봉 왕가의 원쑤!를 외치게 된다. 이후 기회를 엿보던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맛가고 무리한 전쟁으로 민심을 잃는 것을 보며 기회를 놓치지 않고 1813년 2월 1일 대혁명과 보나파르트의 토지 처분을 수용하고 국유재산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법령을 발표함으로 프랑스 부르주아들의 지지를 확보했다.
1814년, 나폴레옹이 몰락하자 빈 회의에서 지지하고 프랑스 상원이 결의하여 부르봉 왕조가 복고되어 루이 18세는 다시 프랑스로 돌아와 왕위에 즉위했다. 하지만 저 당시, 예전에 섭정을 자처했던 것과 왕세자의 죽음이 확실히 확인된 상태는 아니었던 거 때문에 루이 18세의 공식적인 지위는 일단 국왕이 아니라 섭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나폴레옹의 원쑤 베르나도트가 프랑스 황위를 노렸지만 빈 회의에서 의견이 갈렸고 외무장관 탈레랑과 프랑스 상원의 지지로 몇 달 후, 정식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이후 자신과 손잡길 거부한 나폴레옹에 대한 복수를 시도하는데 나폴레옹을 아조레스 제도로 추방할 것을 주장하기도 했으며 나폴레옹에게 퐁텐블로 조약에 따라 약속된 200만 프랑에 달하는 연금 지급을 거부했고 나폴레옹의 개인재산인 160만 프랑은 꿀꺽했다.(...) 거기에 암살자를 보내어 나폴레옹을 도발함에 따라 나폴레옹을 사실상 엘바 섬에서 끌어낸 장본인으로 보기도 한다.
1815년, 나폴레옹이 엘바섬을 탈출해 남프랑스로 진군해오자 토벌군을 파병했지만 되려 보낸 토벌군마다 항복하거나 소극적으로 저항해서 프랑스에서 도망쳐야 했다. 하지만 백일천하가 끝난 후, 다시 돌아와 프랑스 국왕으로 복귀했다.
2 재위기간
루이 18세의 이후 치세는 민심의 수습에 중점을 두었다. 즉위와 함께 "나는 혁명 당시의 아무것도 배우지 않았고, 혁명 전의 아무것도 잊지 않았습니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혁명 이전으로의 복귀를 예고하는 듯 했고 실제 망명한 귀족들을 다시 프랑스로 돌아오게 했지만 한편으로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혁명 당시에 성립된 제도들의 존속을 약속하였으며,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온건한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부모를 잃고 원한이 컸던 조카 마리 테레즈 샬로트가 공화파 및 보나파르트파들을 제거한답시고 벌이는 백색테러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만년이던 1824년, 조카인 샤를 페르디낭이 자유주의자에게 암살당하자 온건정책을 중단하고 절대왕정으로 회귀했다. 이는 루이 18세의 애인과 남동생 샤를 아르트와 백작의 정치 간섭을 불러 소위 적과 흑의 시대를 열게 되었다.
1824년 9월 16일 사망했다. 유해는 생 드니 대성당 지하묘실에 안장되었는데 프랑스를 통치한 국왕의 자격으로 매장된 사람은 루이 18세가 마지막이었다. 그의 뒤는 남동생인 아르투아 백작 샤를이 계승해 샤를 10세로 즉위한다. 하지만 샤를 10세는 1830년 7월 혁명으로 퇴위되면서 영국을 거쳐 오스트리아로 망명했다. 그는 끝내 고국에 돌아오지 못해 생 드니 대성당에 묻히지 못하고 슬로베니아 노바 크리치아[4]에 묻혔다.
3 평가
그와 특별한 관계를 맺지 않은 다른 이들이 보기에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지만 잘 아는 사람들의 사이에서는 음험한 음모를 꾸미는 야심가로 통했다. 혁명 전에는 형 루이 16세를 깎아내리기 위해 온갖 공작을 동원하였고 루이 16세가 처형당했을 때 가장 기뻐한 인물 중 하나였다.[5] 그래도 왕위에 오른 후에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유해를 1815년 1월 18일 수습해 동년 1월 21일 역대 프랑스 국왕들이 잠든 생 드니 대성당으로 이장했다. 혁명기에 군중들이 생 드니 대성당에 매장된 왕족들의 묘소를 훼손했기 때문에 이를 복구하는 과정의 일환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형과 형수를 포함해 왕족들의 묘소를 복구하는 것 이상으로 엄밀히 보면 왕권 강화와 정통성 확보를 위한 점이 컸다.
루이 18세의 복귀에 중대한 영향력을 미친 탈레랑의 평가도 좋지 못했다. 탈레랑은 루이 18세는 내가 세상에서 본 사람중 최고의 거짓말쟁이다. 1814년에 내가 왕과 처음 대면했을때 느낀 실망감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수가 없다. 내가 루이 18세에게 본 것은 언제나 에고이즘, 둔감, 사치향락, 배은망덕 등 뿐이었다...라고 아주 대차게 까고 있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 자기가 세워놓고선 게다가 거짓말, 사치향락, 배은망덕 등의 성격은 본인의 특징이기도 하다. 동족혐오?
나폴레옹 몰락 이후 국왕에 즉위한 루이 18세가 넘어진 일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세워주기 전까진 일어서지 않겠다고 그대로 주저 앉아있었다고 한다. 탈레랑이 이 모습을 보고 위의 발언을 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어쨌거나 루이 18세는 복고적인 성향이 없진 않았으나 혁명과 제국으로 촉발된 신질서를 인정하면서 타협한 '어색한 볼테르주의자'로 평가되고 전통과 교권주의, 절대왕권에 집착했던 동생 샤를 10세완 달리 프랑스 왕으로서 성대하게 묻힐 수 있었던, 더 현명한 인물로 평가된다.
뒤에 '끼' 붙여서 읽지 말자
4 매체에서의 등장
몽테크리스토 백작에선 빌포르가 루이 18세를 만나서 보나파르트 당을 개발살낼 것을 건의하면서 에드몽 당테스도 겸사겸사 처리해버린다.
레미제라블에선 이후에 루이 필리프 왕에 대하여 한장 가까이 할애하여 상세히 설명한 것과는 달리 특별한 언급은 없고 줄곧 프랑스의 왕으로 자처해온 그의 면모를 조금 엿볼 수 있다.- ↑ 역대 프랑스 왕실의 군주들은 비대한 체형이 거의 없었는데 루이 16세부터 시작해 동생인 루이 18세와 샤를 10세 모두
초상화로도 보정이 안 되는비만이었다. 이는 세 사람의 어머니인 마리아 요제파로부터 물려받은 것. - ↑ 루이 18세 본인은 자신이 1795년 6월 8일 루이 17세가 죽은 이래로 줄곧 프랑스의 왕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실질적인 재위기간은 합쳐서 10년 정도지만 이 양반 기준으론 29년간 6개월 하고도 8일 재위다. 그래서 레미제라블을 보면 1818년에 루이 18세가 자신이 재위 23년을 맞이했다고 으스댔다는 묘사가 있다.
- ↑ 나폴레옹이 쿠데타를 통해 통령 정부를 설치하고 집권하자, 루이 18세는 나폴레옹에게 왕정복고를 몇차례나 청했는데, 나폴레옹은 루이 18세에게 "당신이 프랑스로 돌아오려면 10만 명의 시체를 밟아야 한다."라고 답했다. 그리고 루이 18세는 실제로 그 몇배나 되는 희생을 치른 전쟁 이후 프랑스에 돌아온다(....). 당장 이베리아에서 날아간 25만, 러시아에서 날아간 50만, 독일 전역과 프랑스 전역에서 죽은 사람들, 거기에 동맹군까지 합치면(...).
- ↑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영토였다.
- ↑ 심지어 일설에 의하면 형의 사형이 부결될까 걱정된 나머지 의원을 매수했다는 소문도 있다.(...) 알려져 있다시피 루이 16세의 처형 가결은 아슬아슬했기 때문에, 만일 소문이 사실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