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 필리프 1세

프랑스의 역대 국왕
샤를 10세 (루이 19세) (앙리 5세)루이 필리프 1세나폴레옹 3세
  • 관련 항목 - 루이 필리프 - 이 항목의 군주와 그 아버지를 포함해 루이 필리프란 이름을 가진 프랑스 왕족들 / 7월 왕정
프랑스의 왕 루이 필리프 1세, 프란츠 사버 빈터할터, 1839년
왕호프랑스 국민의 왕 루이 필리프 1세
(Louis Philippe I Roi des Français)
이름루이 필리프 도를레앙 (Louis-Philippe d'Orléans)
생몰년도1773년 10월 6일 ~ 1850년 8월 26일 (76세)
출생지프랑스 왕국 파리 팔레 루아얄
사망지영국 서리 클레어몬트
재위기간1830년 8월 9일 ~ 1848년 2월 24일 (17년 203일)

프랑스마지막 왕[1]
프랑스 부르봉-오를레앙 왕조[2]의 왕이며,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제프의 아들이다. 루이 13세의 6대손으로 루이 13세의 차남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후손이다.[3] 방계 중에서도 꽤나 촌수가 멀었지만 부르봉 왕가 직계 후손이 끊긴 후에는 그나마 가까운 왕족이었다. 사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1세의 형 루이 14세의 손자이자 스페인 부르봉 왕조의 펠리페 5세의 후손도 있었지만 위트레히트 조약으로 프랑스 왕위 계승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에 해당사항에 없었다.

1 생애

1.1 어린 시절

1773년 출생. 태어나면서 발루아의 공작(duc de Valois) 작위를 받았고, 이어 샤르트르의 공작(duc de Chartres) 작위를 받았다.

1.2 혁명 시대

아버지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 조제프를 따라 그 아들인 루이 역시 프랑스 혁명에서 혁명파로 가담했다. 오를레앙 공 루이 필리프가 스스로 귀족임을 부정하고 '평등한 자(에갈리테)'를 자칭하자, 아들인 루이 역시 '평등한 자의 아들(Égalité fils 에갈리테 피스)'이라 불리게 된다.

혁명 프랑스 공화국에서 사령관으로서 프랑스 군을 이끌고 여러 전투에 참전했다. 1790년에는 자코뱅 당에 들어가기도 했다.

1.3 망명 시대

1792년 쿠데타 음모를 꾸미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이 처형당하자, 1793년 스위스로 망명한다. 지리학, 수학, 현대문학 교사를 하면서 박봉으로 가난하게 살았다.

1795년에는 독일 함부르크, 1795년에서 1796년에는 북유럽, 1797년에서 1799년 동안은 미국필라델피아에서 망명했다. 1801년에서 1807년 까지는 영국 런던 교외에서 살았다.

망명 시대의 루이 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친척들에게 왕따를 당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다.(…)

망명 생활 중 나폴리의 공주 마리아 아말리아와 결혼했는데 문제는 아말리아의 어머니 마리아 카롤리나가 프랑스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언니로 그것도 앙투아네트와 가장 사이가 좋은 자매였다는 데 있었다. 여동생이 처형되자 당시 유럽의 외교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평생 쓰지 않을 정도로 프랑스를 증오했던 카롤리나는 여동생의 원수의 아들[4]과 자신의 딸이 결혼하는 것을 매우 싫어했지만 결국 받아들였다고 한다.

1.4 귀국

1814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퇴위하고 나서야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로 돌아올 수 있었다.

부르봉 왕조의 왕정 복고로 프랑스 혁명으로 재산을 잃은 귀족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법이 만들어졌다. 루이 필리프는 이 법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았다. 대대로 물려받아 오던 오를레앙 공작(duc d'Orléans)의 작위와 많은 재산을 되찾고, 아버지의 저택이던 팔레 루아얄까지 다시 얻었다.

혁명에 가담했으면서도 아버지의 쿠데타 음모 때문에 망명까지 했으나, 루이 필리프의 성향은 그리 바뀌지 않았다. 죽은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유주의를 후원하고 왕정 복고와 함께 혁명 이전으로 모든 것을 되돌리려는 복고주의에 반대하였다. 대귀족임에도 겸손하고 평범하게 행동했으며, 자신의 자녀들 역시 일반 고등학교에 보냈다.

이러한 처신 덕분에 루이 18세샤를 10세 치하 동안 루이 필리프의 인기는 지속적으로 높아졌고, 인기를 바탕으로 그는 샤를 10세로부터 왕위계승권을 얻었다.

1.5 즉위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이 발발하여 복고 왕정은 무너져 내렸다. 샤를 10세는 퇴위하는 한편 손자 앙리 5세에게 왕위를 물려주었으나, 프랑스 하원은 샤를 10세의 퇴위만 받아들이고 대신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선포하여 7월 왕정이 수립된다. 이 때, 이전부터 쓰던 '프랑스와 나바르의 왕(roi de France et de Navarre)'이 아닌 '프랑스 국민의 왕(roi des Français)'이라는 칭호를 쓰게 된다. 민중왕

의회로부터 왕위를 받은 루이 필리프는 스스로 시민들에게 옹립되었다 하여 '시민왕'을 자처했으며 이렇게 불리는 것을 좋아했으나, 그의 즉위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각국의 군주들은 '폭동왕'이라고 불렀다. 그의 즉위 과정에서 있었던 1832년 6월 봉기레 미제라블의 배경으로 유명한 그 혁명이다.

1.6 치세

대외적으로 제국주의 정책을 진행하였다. 1830년에 알제리에 출병하여 알제리를 병합하고 식민지로 삼았다. 이 과정에서 프랑스 국민의 사상자가 많아 여론이 악화되자 이에 대비하여 1831년 프랑스 외인부대를 만들게 된다.

멕시코에 압력을 걸고, 아편전쟁으로 굴복당한 청나라와 불평등 조약을 맺었다. 인도네시아에도 함포외교를 걸었다. 또한 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를 점령했다.

그리고 조선에도 집적거린 바가 있다! 1846년과 1847년(헌종 13년)에 걸쳐서 루이 필리프는 세실 제독을 시켜 군함을 보내 기해박해에서 프랑스 신부들을 죽인 일을 항의하고 조선을 개항하려 했으니, 불과 십수년 후에 일본에서 벌어진 쿠로후네 사건과 매우 흡사했다. 그런데 프랑스 군함들은 죄다 암초에 걸려 전멸하고 말았고(...) 수백의 프랑스 군대는 충청도에 고립된체 떨고 있다가 상하이에서 빌린 배를 타고 돌아가버렸다.(...)

정치적으로는 입헌군주제내각책임제를 도입했으며, 귀족의 세습 제도를 폐지하여 진보적인 정책을 취했다. 루이 필리프는 망명 생활 도중 영국의 정치에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고 있다. 또 1840년엔 세인트 헬레나에서 나폴레옹의 무덤을 지금의 앵발리드로 이전케 하였다. 자신이 이전 부르봉 왕들과 다르다는걸 보여주고 싶은 일종의 정치적 이벤트라 평가되고 있다.

하지만 보통선거를 거부하고 일정 액수의 재산을 가진 사람에게만 선거권을 주는 제한선거를 채택하는 등 보수적인 면모도 강했다. 심지어 영국처럼 선거권을 갖는 재산의 기준을 내리는 것도 정부와 여당이 매번 반대할 정도. (물론 이것도 차티스트 운동 덕이지만..) 결국 이 때문에 지속적으로 불만이 팽배했으며 재위 기간 내내 시위가 수시로 일어났으며, 마침내 혁명이 일어나게 된다.

1.7 퇴위

1848년, 공화파들의 2월 혁명으로 프랑스 제2공화국이 성립되면서 퇴위하였다. 그 뒤에 루이 나폴레옹이 제2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가 1852년 쿠데타로 황제(나폴레옹 3세)가 되면서, 루이 필리프는 프랑스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마지막 군주이자 황제는 루이 나폴레옹.)

영국으로 망명했으며, 클레어몬트에서 지내다가 1850년 8월 26일 사망했으며 클레어몬트에 묻혔다.

이후 그의 자손 앙리 도를레앙이 현재 부르봉 왕가의 수장으로 정통 후계자로서 앙리 7세를 칭하고 있지만 왕정복고가 될 가능성은 사실상 없다.

2 평가

오를레앙 가문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대한 호감은 루이 14세의 조카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부터 있었던 것이라 전해진다. 오를레앙 공 필리프 2세는 사적인 자리에서는 자신이 영국의 입헌군주제와 자유주의에 호감을 느끼고 발언했다고 한다. 이러한 일화가 얼마나 그 후손에게 영향을 미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대에 이르기까지 오를레앙 공작가는 앙시앵 레짐의 혜택을 가장 많이 받는 대귀족이면서도 자유주의를 적극적으로 후원하는 기묘한 전략을 유지했다. 아무튼 정통 부르봉 왕가에 대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노리는 전략적인 입장도 있었던 듯.

조상의 생각처럼 앙시앵 레짐 문제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에 대한 루이 필리프의 대안은 영국식 입헌군주제를 프랑스에 이식하자는 것이었다. 이 '오를레앙 공에 의한 입헌군주정'은 프랑스 혁명의 혼란기 시기 하나의 대안으로서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 복고 왕정 시대부터 오를레앙 가문 지지자는 지속적으로 늘어났다. 이들은 대부분 자유주의자였다. 복고된 부르봉 왕조는 여전히 시대착오적인 절대왕정을 내세우며 자유와 법치를 억압하며 혁명 이전의 봉건적 사회로 돌아가려 했기 때문에 당연히 자유주의자들에게는 지지를 얻지 못했다. 또한 자유주의자들에게 보나파르티즘은 "민주주의를 내거는 권위주의"에 지나지 않다고 여겨서 지지를 얻지 못했다.[5] 그러므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의 생각은 오를레앙 공이 이상적인 정부를 만들어, 질서를 지키는 한편 관용으로서 정치적 자유를 보장해주는 중도적인 대안이었다.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입헌군주정 공화제를 선호하였으나 그 반면에 전면적인 민주주의 도입은 두려워했다. 그 이유는 부르봉 왕조를 지지하는 골수 왕당파가 아직도 많이 남아 있었고,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부르봉 왕조에 대한 지지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상 민주주의와 공화정에 대한 굳건한 지지는 '혁명의 수도' 파리에 국한된 것이었으며 프랑스의 각 지방은 전통적으로 왕당파에 대한 지지가 강고했다. 프랑스의 중심이라는 파리의 특성 때문에 공화제의 구심점은 유지되고 있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로 왕당파까지 포함된 '공정한 선거'를 하게 되면 파리의 인구만로는 지방의 방대한 인구를 억누를 수 없다. 따라서 만일 전면적인 민주주의를 실행하게 된다면 프랑스는 선거에 따라 합법적으로 왕정으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었다.

그러므로 프랑스의 공화정 정부는 민주주의를 내걸면서도 왕당파의 폭발을 막기 위해서 민주주의를 억제하는 모순을 지속적으로 안고 있었다. 또한 소위 '프랑스의 영광'을 건설한 나폴레옹 신화에 기초한 나폴레옹 지지자, 보나파르티즘 역시 굉장한 폭발력을 가지고 있어 민주주의 체계에서는 막기 어려웠다. 실제로 후일 보나파르티즘을 내세운 나폴레옹 3세는 70%라는 압도적인 지지율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결론적으로 오를레앙주의자들은 이 때문에 입헌군주제를 선호하는 중산층에 해당하는 '법정 인구(pays legal)' 25만명(실제 유권자는 17만명 정도)을 유권자로 하여 의회를 구성하고 국정에 적용했다. 이들은 중산층의 대표자인 의회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주의 입헌군주제를 선호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인구에서 빠진 대다수 프랑스 국민들은 정부가 특권 계급의 모임으로 이루어져 있어서 옛날의 왕정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이렇듯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루이 필리프의 정치는 프랑스 혁명기의 여러 이념들 가운데서 나름대로 '중도'의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아무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고 죽도 밥도 되지 않은 애매한 위치의 이념이었다. 부르봉 왕조의 복고주의보다는 한 발자국 나간 것은 분명하지만, 개혁에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일단 왕이기는 했지만, 루이 필리프는 부르봉 왕조 골수 왕당파에게는 '찬탈자'나 다름 없는 취급을 받아 인정을 받지 못했고 외국의 왕들에게도 그와 비슷하게 보여져 '폭동왕'이라고 폄하당했다. 입헌왕정을 지지한 중도적 자유주의자가 아닌, 완전한 공화정을 추구하는 진성 공화파, 나폴레옹 제국을 지지한 보나파르트파는 각기 왕정을 뒤엎을 음모를 꾸몄다. 중도파의 한계를 보여주는 사례....

치세에 대한 객관적인 평가와는 별도로, 루이 필리프 본인은 선량하고 너그러운 문자 그대로의 신사였다. 루이 필리프의 선량함에 대한 일화. 뭐 '왕으로 모시자'고 지지할 정도의 파벌이 있을 정도이니 그 나름대로 인간적인 매력은 있는 인물이었을 것이다.

또한 혁명 이전부터 팔레 루아얄을 자유주의자들의 거점, 혁명의 근거지로 만들어준 오를레앙 가문의 '공적'도 당시로서는 상당히 가치있는 요소였다. 루이 필리프 자신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대귀족 신분임에도 그 권력을 자유주의자와 혁명가들을 보호하는데 적극적으로 사용하였다.

정말로 백년만 더 일찍 왕위에 올랐으면 명군으로 역사에 남았을지도...[6]

프랑스의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빅토르 위고도 루이 필리프를 높게 평가했다.

3 여담

아버지 루이 필리프 오를레앙은 오를레앙 공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라 줄여서 오를레앙 공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대원군흥선대원군의 대명사이듯 말이다 하지만 굽시니스트는 졸지에 아들 루이 필리프를 빌리 해링턴으로 패러디까지 하면서 오를레Ang(...)으로 만들고 말았다. OME 헷갈려

그의 두상이 서양배와 닮았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그의 문장도 배라고 조롱했다고 하지만 루이 필리프는 대범하고 받아넘겼다고 한다. 얼마나 대범한지 서양배 머리의 왕을 그린 만평도 나돌아도 멀쩡했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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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만평. 배머리(…)로 데포르메되는 과정이 적나라하다.

심지어 궁궐 벽에 배를 그리면서 왕을 조롱하는 부랑아들과 같이 배를 그리고는 아이들에게 금화까지 쥐어주면서 이 금화에도 배가 새겨져있다고 농담까지 해주었다. 진짜 백년만 일찍 태어났어도 성군이었을텐데

그의 대인배적인 기질을 엿볼 수 있는 또다른 일화로 왕을 몰아내려던 1832년 봉기가 처참하게 실패한 이후에 파리의 경찰청장 앙리 지스케는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으러온 반역자들을 내놓지 않으면 재미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했는데 루이 필리프는 살려고 의사들을 찾아간 환자들을 의사 손으로 단두대에 보내는 그따위 비인도적인 처사가 어디있느냐고 반역자들을 보호해 주었다.

1835년에는 나폴레옹 제국의 병사였다가 전역 이후에 생활고 때문에 각종 절도 행각을 벌여 10년을 복역한 코르시카 출신의 쥬제페 마리오 피에스키란 사람이 가석방 후에도 계속되는 감시와 생활고 때문에 분노하여 루이 필리프와 정부 각료들에게 특수제작된 25개의 총신이 달린 총을 발사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사건으로 국왕이 부상당했고 왕의 말이 죽었으며 에두아르 모르티에 원수를 비롯하여 17명의 고관이 살해당했다. 루이 필리프는 자신도 이마에 총알이 스쳐 피를 흘리는 와중에도 피에스키의 사정을 듣고 몹시 가슴아파하며 나 하나만 다쳤다면 사면을 해줬을 건데라고 했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그의 6대손인 앙리 도를레앙은 앙리 7세라 칭하면서 프랑스 왕위 계승을 주장하고 있다.
  1. 군주 전체로 따진다면 나폴레옹 3세가 마지막이다.
  2. 부르봉 왕조의 방계로 루이 필리프 1세의 1대 왕조.
  3. 루이 14세는 루이 13세의 장남이다.
  4. 루이 필리프의 아버지 오를레앙 공작은 루이 16세의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왕실 가족의 처형에 일조했다.
  5. 물론 100일 천하 시기 나폴레옹의 지켜지지 않은 약속인 '자유제정' 때문에 보나파르티즘도 어느 정도 인기는 있었다.
  6. 당시의 정확한 분위기는 링크의 설명에도 잘 나와있듯이 루이 필리프여 당신에게 개인적인 원한은 없습니다! 한대화?였다고 보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