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의 역대 황제 | |||||
9대 폐제 유하 | ← | 10대 중종 선제 유순 | → | 11대 고종 원제 유석 |
묘호 | 중종(中宗) | |
시호 | 효선황제(孝宣皇帝) | |
연호 | 본시(本始, BC 73년 ~ BC 70년) 지절(地節, BC 69년 ~ BC 66년) 원강(元康, BC 65년 ~ BC 61년) 신작(神爵, BC 60년 ~ BC 58년) 오봉(五鳳, BC 57년 ~ BC 54년) 감로(甘露, BC 53년 ~ BC 50년) 황룡(黃龍, BC 49년) | |
성 | 유(劉) | |
휘 | 순(詢) | |
생몰기간 | BC 91년 ~ BC 48년 1월 10일 | |
재위기간 | BC 74년 9월 10일 ~ BC 48년 1월 10일 |
생몰년은 기원전 91년 ~ 기원전 49년, 재위기간은 기원전 73년 ~ 기원전 49년.
전한의 10대 황제. 묘호는 중종(中宗). 효선황제(孝宣皇帝). 자는 차경(次卿).
전한 무제의 증손자로 원래 이름은 병약하다는 것에서 지어진 병이(病已)로 좋은 이름이 아니었고 피휘를 위해 즉위 후에는 순(詢)으로 개명했다. 할아버지는 여태자(戾太子) 유거(劉據)[1], 아버지는 여태자의 아들인 사태손(史太孫) 유진(劉進)[2]으로 어머니는 왕씨(王氏)[3]이다. 작은할아버지 소제 사망 후 그 뒤를 이었지만 결국 폐제가 된 창읍왕을 뒤이어 황제가 된 사람이다.
민가에서 자라 공정하고 현실적인 통치를 펼친 전형적인 중흥군주이자 명군.
1 무고의 화
기원전 91년 강충(江充)이 일으킨 무고의 화에 말려 할아버지 유거는 강충을 죽였지만 이를 모반으로 여긴 무제가 체포를 명하자 거병했다. 무제의 반격에 밀려 결국 증조모 황후 위씨(衛氏)[4]는 폐후가 되어 자살했고 조부 유거, 조모 양제(良生) 사씨(史氏)[5], 아버지 유진, 어머니 왕씨 역시 자살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때 선제는 가까스로 증조할머니의 집안인 위씨 일족에 의해 구출되어 목숨을 이어갔다.
2 즉위와 통치
폐제가 방탕하여 대장군 곽광[6]이 폐하고 위씨 집안에서 성장하던 그를 찾아내 즉위시킨 황제이다. 참고로 폐제는 창읍왕 유하인데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음탕한다는 이유로 곽광이 폐한 인물로 곽광의 음해를 받은 황태후[7] 는 창읍국을 없애고 그곳에 산양군(山陽郡)을 설치했다. 그리고 유하를 잘못 보필했다는 이유로 창읍의 신하 200여명을 죽였다. 그러나 유하에게는 창읍왕가의 재물을 그대로 물려주었고, 2천 호의 탕목읍(湯沐邑)도 주었다.[8] 선제는 기원전 63년(선제 11) 유하를 해혼후(海昏侯)로 봉해 다시 제후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했다.[9] 선제가 유하에게 재위 11년에야 이를 내릴 수 있었던 것은 곽광은 기원전 68년 죽고 그의 사후 곽씨 집안은 한선제에게 멸문을 당하게 된다. 재위 11년에는 그동안 권세를 장악하던 외척 곽씨의 잔존세력을 모두 제거하고 권력을 장악했기에 자신의 뜻대로 유하에게 해혼후를 내린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선제 즉위 초 한나라 정계는 곽광이 실권을 잡고 있었는데 기원전 68년 곽광이 사망하자, 선제는 곽씨 일족의 권력을, 특히 군사의 지휘권을 서서히 박탈하여, 외척인 허씨(許氏) 등의 자제에게 주었다. 이것에 반발한 곽광의 유아가 반란을 계획하였고, 그것을 이유로 곽씨 일족은 처형되었다. 이 외, 반란 성공 후에 제위를 찬탈할 예정인 대사마 곽우(霍禹)는 요참형에 처했고, 황후 곽씨(곽광의 딸)도 폐위하여 유폐하였고, 곽광의 죽음으로부터 2년 후에 친정을 개시하였다. 선제가 곽씨 일족을 권력에서 배제하려고 한 근본계기는 민간에서 자라면서 이미 결혼해 금슬이 좋은 허황후를 곽광의 처가 선제의 후궁인 자신의 딸 곽성군을 황후로 앉히기 위해 벌였다는 기록이 있다[10]
선제는 법가주의적 정치 신조에 준거하여, 감세나 상평창을 설치하고, 국민에게 작위를 수여하고, 중앙과 지방에서 행정을 개혁하고, 범죄 예방을 위해 형벌을 강화하고, 국민의 경제력을 휴양하면서 중앙정부의 권력 강화를 도모하는 내정 중시 정책을 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 무제 이후의 국내의 피폐한 경제를 완화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이것들은 민간에서 성장하여 민중의 실정을 아는 선제만이 가능한 시책이었다.[11]
기원전 63년, 강족들이 흉노족과 연합하여 한나라를 공격하였다. 나라 선제 유순은 신하들을 불러모아 대책을 의논하였다. 강족-한인간에 충돌이 잦아 조정의 근심이 깊었다. 이 근심을 제거하기 위해 한선제는 광록대부 의거안국을 서쪽 강족에게 사신으로 보내서 그들을 위로하게 했다. 결국 외교면에서는 오손과 제휴해 서역에 진출, 흉노를 약체화, 분열화해, 기원전 51년에는 흉노의 호한야 선우(呼韓邪單于)를 항복시키는 등, 약체화되고 있던 한왕조의 국력을 부흥시키는 것에 노력했다. 이 외에 내외 정치에 있어서의 성과로부터, 선제는 한나라 중흥의 선조라고 하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러나, 중서(中書)를 통한 직접적인 통치는 중서의 역할에 해당한 환관의 권력을 강화시키는 원인이 되어, 원제의 시대에는 환관과 외척이 제휴하여 정치에 큰 영향을 미치는 한 요인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현실주의자였기 때문에, 이상주의, 회고주의인 유교를 싫어하여, 유교에 심취하는 황태자(후의 원제)와는 뜻이 맞지 못하고 폐위도 생각했지만, 원제에게 후손이 태어난 것을 이유로 폐위를 보류했다. 그 자신이 할아버지 여태자 유거를 무제가 폐하고 유거의 반란이 실패하면서 유거의 친족이 모두 죽고 당시 테어난 자신만 살아남아 황제가 되었기 때문에 그런 일이 다시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없는데 그러한 패륜은 한 번이면 족하므로 조서에서 이러한 이유로 조상과 같은 전철을 밟지 않겠노라고 공언하고 유후의 태자 자리를 보전해준다. 사망 후 두릉(杜陵)에 안장되었다.
- ↑ 손자 선제 즉위 후 황제로 추존되었으나, 시호는 전해내려오지 않는다.
- ↑ 아들 선제 즉위 후 도황제(悼皇帝)로 추존되었다.
- ↑ 아들 선제 즉위 후 도황후(悼皇后)로 추존되었다.
- ↑ 흔히 위자부(衛子夫)라고 하는데 이름이 아니라 자부(子夫)는 자이다. 무제 말기에 신원되고 증손자 선제가 즉위하자 무사황후(武思皇后)로 추존되었다.
- ↑ 양제는 후궁의 칭호로 손자 선제가 즉위하자 여황후(戾皇后)로 추존되었다.
- ↑ 선제의 증조모 위황후의 처조카이자 곽거병의 동생으로 선제에겐 인척이 된다.
- ↑ 곽광의 딸 곽씨가 아닌 상관씨로 소제의 제일황후로 상관봉아 라고도 한다.
- ↑ 선제 즉위후 일어난 역모에도 선제에게 충성을 다했다는 포상적 측면이 컸는데 창읍국을 없애 창읍왕의 자리를 빼앗은데다 당시에도 유하가 음탕하다는 구실로 황제에서 내쫒은 것은 과하다는 평이 있어서였다.
- ↑ 왕보다 후가 높은데 먼저 황제에 잠깐이나마 있었고, 즉위 초의 역모에 가담하지 않고 군량미를 보내는 등 선제를 보필하였기 때문이다.
- ↑ 2001년 중국에서 제작된 드라마 오룡틈정관(乌龙闯情关)에서는 곽성군을 곽수선이란 이름으로 바꾸는데 실제 역사와 달리 선량한 인물로 그려지기에 역사왜곡이라 이름을 바꾼듯하다.
- ↑ 당시 한나라는 엄격한 유교주의로 지나치게 형식적인 예만 추구하여 법과 현실이 동떨어진 면이 있었고 당시에 정적을 제거할때 예의가 없거나 음탕하다는 무고를 하는 일도 적지않았다. 그러한 인물들 중 가장 큰 피해자가 창읍왕 유하였다. 선제는 유교 외에 법가를 접목시켜 법을 정비하고 공이 있는 백성에게 상을 내려 백성도 법을 잘 지키고 공이 있으면 벼슬에 오를 수 있다는 희망을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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