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賣官賣職
글자 그대로 관직을 돈, 아니면 그에 상응하는 재물을 받고 파는 것을 말한다. 賣官Magic 탐관오리들이 쓰는 마법
부패의 상징이라 할 수 있으며, 이 행위가 성한 국가는 망조가 들었다고 평할 수 있다. 엄밀하게 따지면 무조건 부패의 상징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근데 보통 매관매직을 한 인물들이 벌인 짓거리들이 워낙 안 좋다 보니(…).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에 오른 사람은 당연히 뽕을 뽑기 위해 자기가 바친 이상의 금액을 백성을 수탈해서 모으려 하거나 더 높은 자리로 올라기기 위한 자금을 얻기 위해 백성을 수탈하므로 어떤 경우든 결과적으로 백성들이 피해를 보게 된다. 국가의 기반인[1] 백성들이 받은 피해는 결과적으로 국가의 피해가 되기에 너무나 당연하게도 망국의 기반이 되는 것. 중국의 권신들이 행한 행위가 유명하며, 대한민국의 경우를 봐도 역사적으로 고려말, 조선말 권문세족들이 매관매직으로 정권을 유지한 역사가 있다.
부패의 상징이라고는 하지만, 관료제 시스템이 제대로 만들어진 것이 근대의 일이다 보니 의외로 매관매직이 성행한 역사는 길다. 중세 유럽에서는 아예 제도적으로(…) 인정받는 등 찾아보면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던 국가들도 많다.
엽관제도와는 다르지만 잘못 운영하면 한 끗 차이다.
2 사례
대개 당대의 권신과 그에 기생하는 탐관오리가 자행하지만, 드물게 국가의 군주가 직접 매관매직을 하기도 했다. 군주가 직접 돈 받고 관직을 판 유명한 사례는 후한의 영제와 대한제국의 고종황제와 그의 정실인 명성황후 민씨.
2.1 진시황
특이한 사례로 매관매직이 국가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은 경우도 있는데, 장본인은 바로 그 유명한 진나라 시황제.
재정난에 시달려서 시행하긴 했는데 실무에 영향을 주는 관직은 거래하지 않고 작위만 거래했다. 관직과 다르게 작위는 실무에 손대지 않기 때문에 부정적인 영향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참고
엄밀히 말하자면 진시황의 사례는 '매관'은 아니고 '매작'인 셈이다. 이십등작은 실제 효용성도 어느 정도 없지는 않았는데, 그 효과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코방귀 좀 뀌거나 법을 어겨서 벌받을 때 작위를 대신 까는 정도이므로 미리미리 국가에 기부 좀 해놓고 큰 영향력은 없는 이득을 얻는 것이라 볼 수 있다.
2.2 한무제
가장 낮은 벼슬인 '낭관'에 대해서 매관매직을 했다. 참고
낭관 역시 실무직은 아니므로 영향력은 적었다고 볼 수 있다.
2.3 후한 영제
그 전시기까지 중국에 존재하던 매관매직의 패단을 극한까지 몰아붙인 인물이다.
영제는 원래 장사꾼을 지망하던 사람이라 그런지 모든 벼슬에 정가를 붙이고, 심지어 외상구매까지 장려하는 등 화려하게 매관매직을 벌였다. 그 정가는 다음과 같았다.
직책 | 정가 |
태수 | 20,000,000전[2] |
삼공 | 10,000,000전 |
현령 | 4,000,000전[3] |
이 때문에 자질이 모자라는 관리가 대거 임명되어 황건적의 난, 십상시의 난, 삼보의 난으로 연쇄붕괴를 일으키며 후한을 화려하게 말아먹었다. 하지만 영제는 매관매직으로 벌어들인 돈은 거의 국고에 채워넣었으니 자기 호주머니에 넣는 게 매관매직의 주목적이었던 사마염이나 아래 몇몇 사례들과 비교하면 동기는 좋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국고에 넣은 돈을 죄다 십상시들이 꿀꺽했다
2.4 안락공주
측천무후의 손녀이자 당중종과 위황후의 딸. 매관매직, 뇌물수수를 통해 많은 재물을 축적하였다고.
2.5 조선 고종
고종과 명성황후가 매관매직에 집착한 것은 세수 확보라는 측면도 있지만 비자금 마련이란 목적이 더 크다. 청나라나 일본, 러시아 등 강대국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조선의 입장에서 남몰래 쓸 수 있는 돈이란 매력적인 조건이다. 당시 소문에는 정부 예산보다 고종의 비자금이 더 컸다는 이야기도 있다. 일제강점기 독립군의 주요 자금원이 고종황제의 비자금이었다는 사실을 보면 단순히 카더라가 아닐 수도 있다.[4]
2.6 잉글랜드 육군
나폴레옹이 프랑스 제국의 황제로 군림하던 시기의 잉글랜드 육군에서는 모병제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중 떨어지는 떡고물, 즉, 전리품 때문에 군에 매관매직이 성행해서 입대하기가 상당히 힘들었다. 군대에 들어가기 위해 오늘날로 따지면 최하 몇백만 원[5]의 돈을 당국에 합법적으로 바쳐야 군복무가 가능했다. 대위 계급장은 오늘날의 시세로 약 4억 원에 달했는데도 한 번만 승리해서 이에 따르는 전리품만 챙겨도 이윤을 몇 배나 뽑을 수 있었다.
이 제도를 이용해 부잣집에서는 아들이 태어나자마자 소위 계급을 사서 이름을 올리고 그 아이가 성인이 되면 호봉이 차있어서 대위를 사서 물려주는 합법적인 신분 세습이 가능했다. 소위직도 당시 소위 연봉의 몇 배에 해당하고, 장교들은 군복부터 시작해 각종 품위유지비가 월급보다 더 들어가고 장교들끼리 사교문화에 돈을 쓰는 게 가능해야 했기에 일반 서민층에서는 임용되는것이 거의 불가능했다고 한다.
지금으로 봐선 막장 제도이지만 당시에는 납세자의 세금이 들어가지 않는 합리적인 제도로 각광받았다. 관직을 팔고 나가면서 퇴직금을 땡길 수 잇으니 국가로서는 예산을 아낄 수 있고 납세자들의 세금도 들지 않는다는 것. 나폴레옹 전쟁 시기 수많은 소위들의 병크로 개혁이 진지하게 논의되다가 몇십 년 뒤에 크림 전쟁을 겪고서 폐지된다.
한편 영국 해군은 철저한 실력주의였기 때문에 빈민가 노동자의 자식이든 귀족 집안의 자식이든 장교가 되기 위해서는 맨 밑바닥 계급인 사관후보생(Midshipman)부터 시작해야 했다.[6] 때문에 수병[7] 출신 제독이나 흑인 노예의 자식이지만 함장까지 올라갔던 대령도 나타날 수 있었다. 이를 영국 해군이 전세계를 제패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여기는 학자들이 많다. 육군 중에서도 보병이나 기병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진급이 느리고 인기가 없던 포병이나 공병 등의 장교는 매관매직이 아닌 실적 및 연공 서열에 따라 진급했다.
참고로 프랑스에서도 앙시앵 레짐 당시 육군내에 매관매직이 성행했다. 이쪽은 원래 귀족들이 말단 소위 계급까지 차지하자 귀족들의 군 지위 독점을 막기 위해 돈으로 계급을 살 수 있도록 했지만 이마저도 귀족들 또한 자신들의 재산으로 사는 폐단이 생기기 시작해 점점 심화되어 혁명 전의 군대에선 평민 출신의 장교가 거의 없었고 대부분이 귀족 출신의 장교들이었다.
2.7 대한민국(?)
시각에 따라서 공탁금 제도를 매관매직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아무 선거나 그런 건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만 적용되는 개념이다.
3 여담
노부나가의 야망 시리즈에서는 쿠게[9]를 통해 벼슬자리를 구매할 수 있다.
4 관련 항목
- ↑ 민주적 가치관을 떠나 어떤 시대에도 국가 경제를 포함해 국가 전체를 지탱하는 것은 국민, 봉건시대의 용어로는 백성이고, 국민/백성을 수탈해 그들의 경제적 기반을 파괴하고 국가에 대한 불만을 키우는 것은 나라를 망하게 하겠다는 말이다.
- ↑ 계급은 삼공이 훨씬 높은데 왜 태수가 더 비싸냐고 반문할 수 있다. 태수가 비싼 이유는 세금을 뜯어 돈을 투자한 만큼 뽑아먹을 수 있는 위치이자 뜯어먹기만 하지, 뜯기지는 않는 위치이기 때문이다.
- ↑ 현령의 경우는 완전히 복불복인데, 세금을 백성들로부터 뜯어먹을 수 있음과 동시에 태수에게 세금을 뜯기는 위치이기도 하다. 그러니 태수에게 낼 세금 때문에 똥줄 좀 타는 위치이다.
- ↑ 어떤 학자들은 이 비자금이 독립군을 위해 고종황제가 미리 예비해둔 거라기보다 국립은행 설립을 위해 마련한 돈이라고 한다. 헌데 설립이 무산되고 어찌어찌 하다 보니 계속 고종이 가지고 있어서 나중에 독립군 자금으로 쓰인 거라고.
- ↑ 병 계급이 몇백만 원이고 장교 계급은 기본이 억 단위였다.
- ↑ 단, 함장이나 제독 등의 피후견인 신분으로 사관후보생이 되면 의무적으로 채워야 하는 함정 근무를 반도 안 하고 날로 먹거나(승선 명부에 이름만 올려놓고 육상에서 딴짓하는 경우가 많았다), 임관 순서가 빽 없는 후보생들보다 빨랐던 점 등 당시 체제하의 모순에서 완벽하게 자유롭지는 못 했다.
- ↑ 다만 수병 그 자체는 정상적인 모병 외에도 그냥 항구에서 납치하거나 술집에서 고주망태가 된 주정뱅이를 배에 실은 뒤 항구를 떠나면서 임명하기도 했다.
- ↑ 매관매직 스크램블이라는 조선 시대 마법소녀 이야기 라이트 노벨인데, 탐관로리가 등장한다.
- ↑ 公家, 사무라이들인 부케(武家)와 구분되는, 덴노 밑에서 조정의 일을 맡아 보던 귀족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