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운상가

世運商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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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년에 철거된 현대상가

1 소개

1968년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에서 세운만든 대한민국 최초의 주상복합 건물[1]. 세운상가라는 이름은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이 "세계의 기운이 원기옥이곳으로 모이라"는 뜻에서 지었다. 위치는 최북단이종로3가역, 최남단이 충무로역에 인접하는 약 1km 길이[2]의 초대형 상가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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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 세운상가 준공식에 참가한 박정희 대통령과 김현옥 서울특별시장. 대림상가 앞이다.

건축가 김수근이 디자인한 건물로 유명하다. 다만 엄밀히 말하면 설계의 초안과 총책임만을 김수근이 맡았고 세부 요소는 김수근 아래 젊은 사람들이 맡았다는 듯. 하지만 민간투자를 받아서 건설되는 건물이다보니 각 부분 시공을 맡은 건설회사들이 잇속만 챙기느라 설계를 다 수정해버린 통에 완성된 건물은 초안과 완전히 동떨어진 모양새가 나왔다. 그래서 김수근은 이걸 흑역사로 묻고 싶었다고.[3]

세운상가는 무단방북으로 유명세를 떨친 노수희가 노점을 했었던 곳이기도 하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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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가 들어서게 되는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던 종삼.
멀리 세운상가가 건설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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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가 들어서기 전 종묘 앞과 들어선 후의 종묘 앞.

세운상가는 일제시대때 일제가 미군의 폭격시 화재가 번지는 걸 막으려는 목적으로 비워둔 공터 자리에 세워졌다. 이후 한국전쟁이 종전을 맞고 1960년대까지 이 공터에 무질서한 판자촌이 형성되고 전쟁의 여파로 몰려든 여성들이 생계수단을 위해 모이면서 종삼은 사창가의 대명사로 불릴 만큼 거대한 사창가가 되었고, 이후 1966년 세운상가가 착공이 시작되고 1968년 준공될 때까지 남아있다가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나비 작전"[4]으로 와해되었다.

슬럼화된 판자촌은 당시 김현옥 서울특별시장의 무지막지한 개발 정책으로 1966년 6월에 개발 계획을 박정희 대통령에게 허가받은 후 당해 8월까지 단 몇달 사이에 순식간에 철거되었고, 건축가 김수근의 설계안을 바탕으로 1966년 착공해서 2년 후인 1968년 완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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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운상가군의 건물들 중하나였던 1967년 계획된 을지로상가아파트 조감도

일종의 입체도시를 만들고자 했던 원래 계획은 거창했다. 지상은 차도이자 주차장으로 만들고 3층은 공중복도로 만들어서 인도와 차도를 분리, 종로에서 충무로까지 이을 예정이었으나 이게 완전히 물 건너 갔다. 각 건설사별로 건물을 따로 지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복도가 각 건물별로 끊어져있으니 사람들은 당연히 지상의 차도로 다녔고 건물 내부는 슬럼화가 진행되었다. 유리지붕을 씌우려는 계획과 옥상정원 계획도 무산. 단 공중복도 계획은 2016년 초 들어 이와 같은 내용으로 계획되어 실로 오랜만에 재추진에 들어갔다.

완공된 세운상가군은 아파트도 흔치 않던데다 당시 최고의 시설을 자랑하는 주상복합단지였으며 완전히 새로운 개념으로 지어진 건물인데다 그 규모 또한 거대해서 모든 사람들의 관심을 받으며 당시 유명인사들 또한 이곳에 많이 거주하는 등 인기를 구가했으나, 이후 1980년대를 거치며 서울이 좀 더 개발되고, 세운상가를 대체할 백화점과 같은 고급 유통업체와 주거단지들이 생기면서 사람들이 빠져나갔고, 설계안과 다른 비효율적인 건물의 구조때문에 점점 슬럼화되어 지금의 애물단지 수준으로 전락했다.

파일:세운초록띠공원지도.jpg
2009년 현대상가를 철거하고 '세운초록띠공원'을 세운 상태의 주변 지도.

세운상가는 용산 전자상가가 들어서기 이전까지 각종 전자제품과 컴퓨터 및 컴퓨터 부품 등을 취급하던 곳으로 1987년 저작권법이 시행되기 전에는 완전히 불법 복제의 온상이었다. 2000년대의 중국을 방불케하는 수준으로, 재미나도 이곳에서 롬을 카피했다는 의혹이 있다. 실제로 재미나는 세운상가에 있었는데 매장을 별도로 두지는 않았기 때문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또한 각 가정에 인터넷이 보급되지 않았던 시절, 소년들이 성에 대한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모여들었던 장소이기도 했다(XXX테이프).청소년들이 서성거리고 있으면 어디선가 "빨간 테이프 찾냐?"면서 수상한 남자가 접근해오는 것이 정석. 하지만 경험담을 들어보면, 비싼 돈을 지불하고 집에 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비디오를 재생하자 뽀뽀뽀나 건전 만화영화가 녹화되어 있어서 분루를 삼켰던 경우가 대다수...하지만 비디오 보다는 미국이나 일본에서 들어온 해외 성인 잡지들(속칭 빨간책)을 판매하는 경우가 훨씬 많았는데 으슥한 곳에서는 아예 소매 붙잡고 끌고는 사라고 강매를 하기도 하였다. 여기서 구입한 책들을 학교에 가져가서 급우들에게 푼돈을 받고 1박 2일 빌려주는 친구를 도서관장(...)이라고 부르곤 했다. 성에 관련한 각종 이상한 약들을 파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는데 이 경우엔 어느 으슥한 창고 같은데 끌고가서 잠시 기다리라고 한뒤 물건을 공동창고에서 가져오는 방법을 쓴다. 이외에도 돈만 털리는 경우나, 이러한 청소년들을 노리는 불량 청소년들에게 고스란히 모아두었던 용돈을 빼앗기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있었다.

1987년 용산 전자상가가 생기자 업체들의 이전이 계속되어 1990년대 후반에는 사실상 빈 껍질만 남은 상태가 되었다. 이곳에 있던 아세아 극장은 경영난으로 2001년 폐쇄되는 등 위기가 점점 고조됐다. 결국 2008년 12월 오세훈 서울시장은 세운상가와 주변 블럭을 모두 허물고 고층의 주거와 오피스 건물을 짓고 여기서 발생한 이익으로 세운상가 부지에는 종묘와 남산을 잇는 녹지축을 2015년 완공을 목표로 조성하기로 했었다.

초기에는 사업이 빠르게 진행되어 2009년 5월 세운상가의 종로 쪽 가장 끝 건물인 현대상가가 철거되고 녹지로 바뀌었다. 서울시에서 사업 활성화를 위해 1,400억 정도를 우선 투입해 보상, 철거 등을 진행한 뒤에 빠르게 녹지를 조성한 것이다.만 이후 금융위기와 종묘 문화재 심의로 사업성이 떨어져 수익성이 악화되었고 사업은 3년 넘게 진척이 없었다가 결국 2012년 12월에 이르러 철거 계획은 취소되었다. 결과적으로 종로 길거리에 손바닥만한 공원을 위해 서울시가 1,400억원을 투입한 꼴이 되었다.

참고로, 2009년에 현대상가가 철거되면서 많은 이들이 세운상가 전체가 문을 완전히 닫은 것으로 알았지만 현대상가가 유독 진척 속도가 빨랐던 것일 뿐 다른 상가들은 보상 조건을 협상해 본 적도 없었기에 영업을 중단하지 않았다. 오히려 LP라든가 진공관, 전자부품 등은 아직도 여기서만 구입할 수 있는 제품이 많기에 수리업소 등에서 종종 찾곤했다. 또한 음향기기나 영상기기 수리업체도 슬금슬금 다시 입점했으며 예전 게임을 판매하던 흔적이 남아서 오락기기 제조 및 유통업체도 영세한 곳은 대림상가 등지에 아직 남아 있는 경우도 많다. 돌아다니다 보면 오락기 부품이나 기판 등이 널부러져 있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지금도 이 일대 상가를 둘러보면 좀 오래된 홍콩 주상복합건물[5]의 상업복도 같다는 느낌을 종종 받을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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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세운상가는 최북단 현대상가가 철거되어 공원화되었고, 삼풍상가[6]와 풍전호텔 건물은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슬럼화된 다른 세운상가군 건물과는 확연히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위 사진이 리모델링을 거친 후의 삼풍상가-풍전호텔 건물이다.

3 Catch me if you can: 세운상가 리버스 엔지니어링 전설

90년대 초까지만 해도 일본 비디오게임, 주로 오락실용 기판을 카피하여 전 세계로 수출하고 세계 전자시장의 한 축을 담당하였던 곳이었다. 카피로 유명한 곳은 세운상가 옥상. 원래 사람들에게 세를 주기 위해 마련해놓은 쪽방에 입주한 업체들이 그들로, 이들은 일본에서 전자오락기가 출시되고 얼마후 카피하여 원판의 1/4도 안 되는 싼 값에 공급하기 시작하였다. 당시에는 지적재산권이고 뭐고 없었다보니 아무도 단속하지 않았다고. 사실 한국 오락실 여명기부터 오락실에서 가동된 대부분의 아케이드 게임 기판은 복제기판들로 주로 이루어졌다는게 불편한 진실이다.

사실 전자오락기를 카피하는 방식은 꽤 집중력을 요구하는 방식으로, 초기 방식은 일본에서 전자오락기가 출시되면 IC를 뜯어서 그대로 보이는 대로 회로를 그려서 복제(선의 구성, pnp형, npn형)했다. 일종의 역공학인셈. 그러자 일본에서는 점차 IC의 집적화로 대응했으나 세운상가에서는 이를 계속 카피해낸다. 당시 작업자의 말로는 현미경으로 일일히 구분하여 회로를 그려내었다고.

결국 일본에서는 IC의 회로를 덮는 플라스틱에 점핑회로를 넣어, 복제하기 위해 덮개 플라스틱을 제거할 때 점핑회로도 같이 떨어져나가는 방식을 통해 보이는 회로만 카피해서는 회로를 완성할 수 없게 만든다. 이때문에 세운상가측에서는 한동안 고전했으나 결국 해결하는데 방법은 IC를 오븐에 넣고 열을 불규칙적으로 가하며 화학약품을 표면에 분사하는 방식.[7] 다시금 분루를 삼킨 일본에선 당시 미국에서 상용화되기 시작한 멀티플랫폼(복층방식)IC를 사용하는데 또다시 세운상가에서는 이를 뚫고 복제하는데 성공한다.

이 쫓고 쫓기는 싸움은, 결국 일본이 한국 정부에 압박을 넣고 한국 정부에서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을 근거로 세운상가를 통제하기 시작하면서 세운상가의 패배로 결론지어져 갔다.[8] 이후 세운상가에 입주했던 수많은 기술자들은 모두 흩어진다. 이들중 상당수는 중국으로 건너가 이후 중국이 카피 기술로 세계에 명성(?)을 떨치는데 도움을 주었고 소수는 컴퓨터로 눈을 돌려 컴퓨터회사를 차리게 된다.70년대 말부터 미군기지를 통해 들어온 애플 컴퓨터를 복제하여 판매한 회사들도 많았는데 그 결과 탄생한 회사가 고려시스템[9]삼보컴퓨터. 그러나 이 두 기업은 삼성전자현대전자의 뒷공작에다 IMF 경제위기가 겹치면서 몰락, 고려시스템의 경우 있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이가 대다수이다. 삼보는 TriGem이라는 브랜드를 썼으며, 그나마 이름만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박찬호가 광고에 나온 브랜드정도로만 어렴풋이 기억할 뿐인 형편. 삼보컴퓨터는 TG삼보컴퓨터라는 이름으로 간신히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인과응보?

  1. 참고로 두번쨰로 건설된 주상복합낙원상가이다.
  2. 2009년 철거된 현대상가까지 포함한 길이
  3. 결국 2013년에는 동아일보와 SPACE가 조사한 해방이후 최악의 건물들에 20위 중 18위에 선정되기도 하였다.
  4. 성매매를 하러 오는 사람을 "나비"로 비유하며, 이 "나비"들을 집중적으로 단속하는 정책. 밤마다 경찰들이 골목을 돌아다니며 이곳을 방문하는 유객들에게 온갖 날선 질문을 퍼붓고, 포주에게 갖가지 불이익을 주는 등의 방식이었다.
  5. ex. 충킹맨션
  6. 삼풍백화점을 지은 그 삼풍 맞다. 그런데 아직도 멀쩡하다.
  7. IC 표면의 플라스틱이 부서져내려 결국 온전한 회로만 남게 된다.
  8. 컴퓨터 프로그램 보호법의 시행일인 87년 7월 1일자 동아일보 1면에, 일본 어뮤즈먼트 머신 공업 협회측에서 불법복제의 근절을 호소하는 동시에 법적 조치를 경고하는 내용의 광고를 내보내기도 했다(광고 보기).
  9. 그래도 명색이 대기업인 한화그룹 계열사였다. 마포에 본사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