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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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壽根
1931년 2월 20일 ~ 1986 년 6월 14일

1 개요

대한민국건축가. 1931~1986.
국민대학교 조형대학[1]의 초대 학장.
김중업과 함께 한국의 현대 건축을 대표하는 사람이다. 박수근이랑 헷갈리지 말자. 그 분은 화가이다. 여기까지 와서 양평타짜하고 헷갈리지는 않겠지. 해담선생이랑 헷갈리는 멍청이는 없으리라 믿는다

2 건축가로서 등장과 왜색 논란

1950년에 서울대학교 건축공학과[2]를 들어갔고, 이때 교수였던 김중업을 만나기도 했으나 전쟁이 나서 2년 후 중퇴하였고, 이후 일본에 건너가서 건축을 거기서 다 배웠다[3]. 그리고 영원히 왜색으로 까였다 1958년 도쿄예술대학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1960년 3월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취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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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근의 국회의사당 설계안

대학원 재학할 때 남산에 국회의사당을 짓자는 설계공모가 있었는데[4] 여기서 1등을 하였다. 하지만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백지화되고 우리가 아는 그 현재의 국회의사당여의도에 있다.

여의도 항목에도 있지만 초기 여의도 입체도시 설계안에서부터 그의 은사였던 단케 겐조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종로-마포-여의도-영등포-인천으로 이어지는 도시계획안은 단게의 도쿄계획 1960과 판박이였기 때문. 사실 김중업과 함께 한국 건축계 태동기를 이끈 인물이고, 김수근 이전에는 사실상 선배 건축가가 없다시피한 게 당시 한국의 실정이었다. 이런 와중에 제대로 된 건축학개론서 하나 없던 한국에서는 일본에서 그나마 현대건축이란 걸 배워 온 김수근이 크게 중용되게 된다. 그리고 1967년 그가 설계한 구 국립부여박물관 건물은 엄청난 왜색 논란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 이 건물이 딴에는 한국 전통 건축을 바탕으로 지은 것인데, 건물은 일본 신사를 닮았고[5] 정문은 신사의 토리이를 닮았다고 대차게 까이게 된 것이다.[6] 이 사건 자체는 어떻게어떻게 마무리되었으나,[7] 차후 박정희 암살 이후 80년대가 되며 한국의 대형 건축에서는 (왜색을 이유로) 그가 배제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또한 김수근 그 자신도 왜색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이 필요하게 되어, 이 부여박물관 사태는 한국 현대 건축사에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된다.

국립부여박물관 사태는 잘나가던 그를 끌어내리려는 다른 건축가들의 소행이라는 주장도 없지는 않다. 사실 왜색이라고 할 만한 건물을 김수근 혼자 만든 것도 아닌데도[8] 그런 주장이 나온건 박정희 정부에서 건축가로서 대형 프로젝트를 맡으면서 잘나가던 그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는 해석.(부여박물관과 여의도 계획안 당시 김수근은 불과 30대(!)였다.) 판단은 각자가 알아서.

하지만 이 사건이 한국 건축의 맥을 크게 틀었다는 사실에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한옥처럼 지어서 왜색이라 욕먹으니 외관에 한옥을 접목하는 사례는 거의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 사건으로부터 타격을 입은 김수근부터가 외관에 한옥을 접목하는 시도를 완전히 포기하고 이후로는 빨간벽돌로 지은 현대적인 건축에 집중했다. 아쉬운 것은 부여박물관이 욕먹은게 외관이 왜색, 즉 일본 건축물 같다고 욕을 먹은 것이지 조잡해서 욕먹은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왜색만 제거하고 계속 한옥의 모습을 따왔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했다. 덕분에 한옥 외관을 따올라면 세종문화회관처럼 거석구조로 만들어 한옥의 특징을 희미하게 만들거나 아니면 예술의 전당처럼 건축이 아니라 처럼 건축이 아닌 그 무엇으로부터 따올 수 밖에 없게 되었다.

3 이후 김수근의 건축 세계

3.1 독재정권에 영합한 건축가인가?

일단 그의 건축이 크고 아름다운게 많아서 한국 건축에 끼친 영향은 부정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근데 따져 보면, 이 건축들은 독재정권의 프로파간다를 위한 건축인 경우가 많다.#

그 극단적인 예시가 1976년 치안본부(현 대한민국 경찰청) 산하의 남영동 대공분실 건물이다. 독재시절 악명이 높았고 1987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나기도 한 바로 그곳이다. 이 건물은 고문실로 사용된 5층의 창문들이 극단적으로 좁게 설계되어 있고,[9] 복도를 따라 마주보는 방의 출입문들이 서로 어긋나게 열리도록 되어있는데[10] 김수근이 의도적으로 노린 것으로 보인다. 모든 방에 욕조를 설치하여 물고문 수단으로 사용되었다.[11] 거기에 오르는 계단을 나선형으로 설계, 피고문자가 몇 층인지 헷갈리게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김수근은 의도적으로 사람을 고문하여 그 육체와 정신을 파괴하는데 최적화된 설계를 한 것이다. 악마새끼가 따로 없다

또한 1963년 건축한 자유센터는 반공 이념이 총본산으로 건설되었다. 여기에는 건축당시 발견된 서울성곽의 돌을 전부 가져다 축대로 쓰는 문화재 파괴도 저질렀고, 북을 향해 돌진할 듯 한 파도치는 형상을 담아냈다.#

3.2 종교 건축

김수근이 설계한 종교 건축물 중 가장 뛰어난 것을 꼽으라면, 서울의 경동교회를 들 수 있겠다. 창문 하나 없이 깨어진 벽돌로 만들어진 투박한 외형과, 건조하지만 신비한 느낌을 받을 수 있는 암굴 같은 내부 공간을 통해 신성함 경건함을 표현한 수작이다. 전체적인 조형은 기도하는 손 모양에서 떠올렸다고 한다.
여담으로 저렇게 벽돌을 쪼개는 것은 일거리도 많이 늘었지만 무엇보다 상당한 기술력을 필요로 했다고 한다. 서투르게 쪼개면 나머지 반쪽은 쓸 수 없어지기 때문. 김수근의 장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12]근데 벽돌을 쪼개는건 김수근의 일이 아니라 현장의 미장이 아저씨들이잖아 한국의 우수한 미장이 아저씨들에게 박수를

3.3 한국적인 건축

대학로의 샘터도 그의 설계인데 한국적인 골목길과 구불구불한 시골길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한국적 건축에 대한 집약은 공간 사옥에서 드러난다. 한국의 전통적 건축 양식과 근, 현대적 양식이 함께 나타나있는 공간 사옥은 독특한 건축물로 평가받고 있다.

4 문화예술의 후원자

자기는 아니라고 하지만 문화예술의 후원자로도 손꼽이고 있다. 1977년 타임지가 그를 로렌초 메디치에 비유했을 정도. 한국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되면서 한국적 문화예술의 진흥에 많은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공간사옥 지하에 소극장 "공간사랑"을 만든 것이 대표적인데, 여기서 공옥진의 병신춤과 김덕수사물놀이가 탄생하여 건축 이외의 예술로도 거대한 족적을 남기게 되었다.

그의 최종목표는 한국 문화예술을 연구하고 교육하는 학교를 짓는것이 목표였다고 한다. 부지까지 구입했고 학교 건물의 설계도 해놓았지만 한창 나이인 만 55살에 그가 죽으면서 물거품이 되었다.

5 고층빌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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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역 동편에 위치한 흰색 고층빌딩인 "게이트웨이 타워"는 김수근의 마지막 설계작이다. 김수근의 작품 치고는 독특한 유선형의 외관 스타일을 가지고 있는 편.

비슷한 시기에 설계된 김수근의 또다른 작품 역삼동 르네상스 호텔과 많이 닮아있다.

6 김수근의 주요 작품

추가바람
  1. 국민대학교 조형대학은 서울대, 홍익대와 함께 디자인 계열 최고 학교로 잘 알려져있다.
  2. 당시는 건축공학과였다. 건축학과로 바뀐 것은 1975년이다.
  3. 당시 6.25 전쟁으로 인해 한국인을 보는 시선이 곱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벙어리로 연기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의사소통은 스케치북으로 했다고.
  4. 일제강점기 있던 조선신궁을 허물었는데 터가 탄탄해서 이걸 재활용한 것이다. 나중에 이 자리에는 남산공원이 조성되고 안중근의사기념관이 건립되었다.
  5. 구 부여박물관의 처마는 거의 땅에 닿을 만큼 길게 내려오는 독특한 형식이었는데 이것이 묘하게 일본의 일부 고대 신사를 닮았다.
  6. 이때 김중업도 김수근 비판에 힘을 실어주는 판이었다.
  7. 한국건축학회는 이 일로 세미나를 열어 회원들의 의견을 수렴했다. 이 세미나의 첫 번째 발제자가 김수근이었다. 세미나에는 김중업도 참가하여 의견을 제시했다. 이후 부여박물관 건축심의위원회는 "일본적인 감각을 풍기는 인상이 없지는 않으나 정형적인 일본의 신사건축은 아니다." 라고 결론을 짓고, 설계자가 알아서 수정하라고 권고했다. 부여박물관은 이 때문에 완공이 늦어져 건축비가 처음 예산보다 2배 이상 불어났다고 한다.
  8. 당시는 한국 건축의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간신히 시작된 시기였기 때문이다. 한국의 근대건축은 1945년 해방 이전까지는 일본의 교육체계에 의해 지배되었고, 50년대는 성찰의 여유가 없는 전후 복구기간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60년대의 건축가 대부분은 일본 건축의 영향 하에 있던 사람들이었고, 심지어 서울대학교나 홍익대학교에서 나름 배우고 건설부에 있는 고급 관료나 학자들에게도 도시건축 개념 교과서 한 권 없어서 일본 출장가면 구해 오는 서적으로 독학을 하여 현장 행정에 그대로 적용해버리던 주먹구구식 시대였다. 슬픈 현대사의 일면.
  9. 투신자살 방지와 최소한의 태양광을 채광하기 위해 사람 어깨의 1/3정도만을 냈다고 한다.
  10. 문이 서로 대칭되게 마주보고 있으면 고문 받는 사람들이 끌려 들어오고 나가면서 맞은편 방의 동지들과 스쳐지나갈 경우 서로 신호를 주고 받아 입을 다물 수도 있기 때문이라고.
  11. 당시 욕조를 보유한 가정집도 매우 드문데, 피의자의 편의를 위해 목욕을 위해 설치했을 리가 당연히 없다.
  12. 누가 여기다가 "경동교회의 건축 컨셉은 아무리 봐도 안도 다다오의 빛의 교회의 영향권에서 벗어날수 없다는 느낌이 든다."고 써놓았는데, 빛의 교회가 1989년, 경동교회가 1981년 작품이고, 김수근은 1986년 죽었다. 다만 두 작품을 비교해서 연구해볼 수는 있을 것이다.
  13. 인도의 샹디가르 국회의사당과 거의 유사하게 생겼다. 노출 콘크리트로 건축된 건물인데 페인트를 발라버려서 좀 안습하다.
  14. 이 경우, 해당 건물의 사용목적이 문제였지, 건물 자체는 사용자의 취지에 부합하는 건축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