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년월일: 1470 ~ 1520
재위 : 1512 ~ 1520
파일:Attachment/셀림 1세/셀림.jpg
1 개요
'카펫 한 장은 두 명의 수피교도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크지만, 이 세상은 두 명의 왕을 받아들일 만큼 크지 않다.-셀림 1세'[1]
오스만 제국의 제9대 술탄.별칭은 Yavuz(냉혈한)[2].
1512년에 부황 바예지드 2세로부터 제위를 찬탈하고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자신의 형제들을 모조리 죽인다. 바예지드 2세 또한 제위를 양위한 후 1달이 지난 다음 사망했는데, 일반적인 학설은 셀림 1세에게 독살당했다는 것. 역시 권력 앞에서는 형제간에도 비정해 질 수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3]
1514년 그는 이스마일 1세와의 전투를 위해 출정한다. 결국 사파비 왕조와의 찰디란 전투에서 이스마일 1세를 패퇴시킨다. 내친 김에 타브리즈까지 돌진해 이스마일 1세를 사로잡으려 했으나 여러 조건이 맞지 않아 결국 놓치고 귀환할 수밖에 없었다. 1516년에 알제를 신하로 삼았다.
1517년에 이집트를 병합하여,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켰다. 이 때, 아바스 왕조의 마지막 칼리프가 자신의 칼리프 칭호를 셀림 1세에게 양도하였다.[4] 이거 굉장히 중요하다. 시리아-이집트 정복으로 인하여 오스만 제국은 처음으로 인구 비율 중 무슬림이 기독교인을 압도하게 된다. 이 이전에 오스만 제국이 영유하고 있었던 아나톨리아 해안지대, 그리스, 발칸 반도는 근본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유산이 강력하게 남아 인근 유지, 정복 전 귀족 가문 자제 같은 엘리트들은 개종을 하고 데비셰르메 시스템을 통해 제국의 파워 엘리트에 편입 됐지만 일반 주민들은 오스만 제국의 관용 정책에 따라 딱히 개종을 하지 않고, 피지배민도 그래서 기독교인들이 더 많았기 때문이다. 시리아, 이집트를 정복하고 칼리프의 칭호를 받으면서 오스만 제국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 수니 이슬람권 전반의 슈퍼파워급 위상으로 떠오른 것이다. 셀림 1세 시기에도 오스만 제국의 관용정책은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아토스 성산의 수도원들을 수리하기 위한 비용을 대고 교회에 많은 혜택을 주기도 했다. 또한 역사적인 수도원 및 성당들을 보호해야 하며, 이를 훼손 및 파괴를 엄격히 금지하며, 이들이 천재지변 등의 원인으로 완전히 무너져버리더라도 제국은 이를 복원할 책임이 있다. 라고 선포하기도 했다. 실제로 아나톨리아에 남아있는 정교회 성당의 명문들을 보면 셀림 1세를 칭송하는 문구가 붙은 곳을 많이 볼 수 있다.
1520년에 새로운 군사 원정을 준비하던 도중 급사[5]하였다. 이집트를 점령함으로서 오스만 제국을 아시아, 아프리카, 유럽 3대륙에 걸친 대제국으로 만든[6] 뛰어난 군주라고 할 수 있다. 어쩐지 조선의 태종과 비슷한 이미지.[7]
그의 사업은 아들 쉴레이만 1세가 계승[8]해 성공적으로 추진한다.
여담으로, 냉혈한이라는 별명을 얻게 된 것은 계승 문제에도 이유가 있겠지만 신하들을 함부로(?) 다루었기 때문. 신하들에게 내린 명령이 제대로 수행된다면 충분히 포상했지만, 일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경우 중벌은 물론 처형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일화까지 전해진다.
신하 曰: (농담조로) 폐하. 혹시 신을 처형하실 때가 되면, 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갈 수 있도록 사전에 미리 알려주시지 않겠습니까.
셀림 曰: (역시 농담조로)실은, 짐은 오랫동안 그대를 처형하리라고 생각해 왔노라. 하지만 아직 그대의 뒤를 이을 적임자를 찾지 못해, 그대를 살려두는 것이니라. 만일 적임자를 찾게 되면, 그대의 말을 기억하도록 하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넘긴 몰트케급 순양전함 괴벤에 오스만 해군은 이 황제의 이름을 붙였다. 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까지 터키 해군의 대표적인 함선이었던 야부즈 술탄 셀림이 바로 그것.
2 평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그의 저작인 정략론의 제 1권 19장에서 그를 조부의 명성을 능가할 만한 인물인 것 같다고 평한 바 있다[9].
3 창작물 에서
-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 - 예니체리들의 신임을 받고 있는 왕자였으나, 바예지드 2세의 차기 술탄 내정때문에 예니체리들이 반발하고 있다는 쿠데타 떡밥으로만 나오다가 막판에 직접 등장해주신다. 이때 아흐메트 왕자가 예니체리들에게 "너희들은 셀림이 아니라 술탄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술탄은 어디 있는가?!"라고 소리치자 "지금 네 앞에 서 있다네. 형제여."라면서 형인 아흐메트 왕자를 절벽 밑으로 떨어뜨려 버린다.
이게 뭐하는 짓이냐, 동생아? 왕위를 계승하는 중이오, 형님[10][11] 그리고는 에치오에게 쉴레이만 왕자가 말리지 않았으면 지금 죽여버렸을 거라면서 다신 오지 말라고 한다.[12] 이 말을 듣고 빡친 에치오가 칼을 빼드는데 그 뒤에 예니체리 군대 수백 명이 붙어있었다. 소피아가 당신의 싸움이 아니라면서 말리는데 안 말렸으면 정말 예니체리하고 정면승부 한 번 붙을 뻔 했다.
- ↑ 셀림이 직접 쓴 페르시아어 시 가운데 하나. 그는 Mahlas Selimi('마흘라스 셀리미' 정도 되는 듯. 정확한 발음을 아는 분은 수정바람)라는 필명으로 페르시아어로 된 시를 쓰기도 했는데, 그의 작품들은 오늘날까지도 전해진다고 한다.
- ↑ 이 'Yavuz' 라는 별명을 어떻게 번역하느냐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골치아파하는 부분인데, 터키 원어의 뉘앙스를 적절히 살릴 수 있는 단어가 다른 언어에 없는 탓이기 때문인 듯. 일단 문자 그대로 직역하자면 엄숙하다는 뜻이지만 근엄하다거나 완강하다는 정도로 의역하는 경우도 있으며 아예 '강인한 황제' 라고 창작에 가깝제 의역하는 경우도 있다.
- ↑ 다만 당시의 오스만 제국은 "형제살해"라는 것이 기본적인 관행으로 정착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메흐메트 2세는 그가 반포한 법에다가 대놓고 다음 대의 술탄의 형제들은 다 세상의 질서를 위해 죽어야 한다고 써놓았다. 16대 술탄 아흐메트 1세 때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관행이 바뀌는데, 이러다 술탄이 후계자 없이 급사라도 하게 되면 다음 황위는? 이라는 이유로 형제 살해에서 감금으로 방식이 바뀐 것. 참고로, 이때 술탄의 형제를 가두어두는 방을 카페스(Kafes)라고 하는데, 터키어로 새장이라는 뜻.
- ↑ 당대에는 소규모 군주들 역시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있다. 그런 학자들은 셀림 역시 이집트 병합 이전부터 칼리프의 칭호를 사용했다고 본다.
- ↑ 이전 버전에서는 로도스 섬 공략 준비라고 했지만, 당시 사람들 가운데에는 헝가리라고 예측하는 자가 많았다. 다만 로도스라는 예측도 있었던 것은 사실이며, 아들인 쉴레이만이 로도스와 헝가리 모두 정복하는 데 성공.
- ↑ 역대 황제들 가운데, 가장 많은 영토를 정복하거나 합병했다. 물론 지명도 면에서는 워낙에 엄청난 일을 해낸 할아버지에게 밀리지만.
- ↑ 자식에게 방해가 될만한 친족들을 미리 다죽여놓고 나라의 기틀을 닦은 점을 보면 놀라울정도로 유사하다. 참고로 아들인 쉴레이만은 아들이고 다른 자식들은 죄다 딸이었기에 셀림 1세는 친족 살해는 했지만 자식을 죽인 적은 없다. 친자식을 죽이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태종과 똑같다.
- ↑ 쉴레이만은 셀림의 유일한 아들이었다. 셀림은 쉴레이만 외에 하티세 술탄(Hatice Sultan), 베이한 술탄(Beyhan Sultan), 샤 술탄(Şah Sultan), 파트마 술탄(Fatma Sultan), 셰자데 술탄(Şehzade Sultan) 등을 낳았지만 모두 딸이었고, 오스만 제국 역사상 이전 황제의 외아들이기에 황위계승분쟁 없이 즉위한 경우는 쉴레이만이 유일.
- ↑ 나약한 군주가 두 명 이상 나란히 재위하면 나라가 기운다고 주장하며, 이스라엘, 로마 제국과 함께 오스만 제국의 예를 들었다. 메메드와 셀림의 사이에 낀(...) 바예지드 2세는 나약한 군주라고 평하면서, 그의 뒤를 이어 셀림이 즉위하지 않았던들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을 것
물론 과장이다이라고 썼다. - ↑ 덤으로 1509년에도 바예지드 술탄의 자리를 넘보기 위해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적이 있다고 한다.
제위를 계승 중입니다! 아버지! 혹은 바예지드! 당신의 아들이 돌아왔소! 콘스탄티노플을 가지고야 말것이오!!이때는 실패해서 크리미아 칸국으로 도망갔지만서도. - ↑ 다만 이때는 셀림 혼자서 이러한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형인 아메드가 아버지가 가실 때(...)가 가까워 오므로(당시 바예지드의 나이 63세였다) 선수를 친 것에 응한 것. 참고로 바예지드는 처음에 아들들이 콘스탄티노플에 들어오는 것을 모두 저지했지만 얼마 뒤 셀림을 후계자로 낙점, 콘스탄티노플로 불러들였다.
- ↑ 자신의 친구인 타릭 바레티를 죽인 것 때문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