쉴레이만 1세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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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새가 저렇듯 타오르고 있는데도 승리의 북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도다."[1]

쉴레이만 1세의 투으라(Tuğra, 서명). 본문에는 Süleyman Şah bin Selim Şah han el-muzaffer daima (항상 승리하는 셀림 샤의 아들 쉴레이만 샤) 라고 쓰여있다.

I. Süleyman(터키어) 오스만 제국을 최전성기로 올려놓았다는 평가를 받는 제10대 황제. 이명은 '입법자'(Kanuni, 터키) 및 '장엄제'(The Magnificent, 유럽)이다. 한국 등 동아시아권에서도 '대제'(大帝)의 격으로 높여 부른다. 즉 쉴레이만 대제. 그리고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명군이다.

쉴레이만이라는 이름은 그 유명한 이스라엘 솔로몬터키어 표기이다.[2]

문무 다방면에 조예가 깊고 예술을 애호하는 등 명군주의 면모가 모두 혼재된 술탄으로, 심지어 적국인 신성 로마 제국의 대사조차도 "도리에 어긋나는 모든 것들을 맹렬히 공격하고 무너뜨린 인물"이라며 그를 찬양했다. 그리고 작렬하는 천둥과 번개의 모습과도 같다고 비유했다.[3]

2 즉위하기 이전

명군으로 평가받는 셀림 1세의 아들로, 이미 15세에 아나톨리아에 소재한 마니사의 총독을 지냈으며 일찌감치 차기 술탄으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황이 사망하자 26세라는 젊은 나이로 별다른 저항 없이 술탄의 제위에 올랐다. 그를 차기 술탄으로 점찍었던 부황이 아들의 즉위에 지장이 없게끔 일찌감치 경쟁할 만한 친족들을 학살해줬기 때문이다. 참 비정하면서도 다정한 아버지다. 우리나라의 태종-세종라인과 흡사하다[4]

3 부황의 정복 사업 계승

이미 1세기 전에 증조부이자 정복황제였던 메흐메트 2세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겨 제국을 반석위에 올려놓긴 했지만, 쉴레이만 1세는 제국의 영역이 여전히 성에 차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는 재위하자마자 메흐메트 2세가 못 다한 정복 사업을 완성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즉위 초 10개월간 꾸준히 군비를 증강했다.

즉위 10개월이 지나고, 그는 부황이 이루지 못한 베오그라드 공략에 나섰다. 현재 세르비아의 수도인 베오그라드는 당시 헝가리의 영토로, 오스만 제국과 바로 접하고 있는 헝가리 남부의 여러 요새들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큰 곳이었다. 당시 베오그라드를 장악한 헝가리 세력은 오스만 제국의 유럽 진출에 있어 최대의 걸림돌이었다. 쉴레이만은 10만의 군을 편성해 베오그라드를 들이쳤으며, 베오그라드의 헝가리군도 격렬히 항전[5]했지만 채 한달을 버티지 못하고 오스만의 깃발 아래 점령당했다.

그리고 1년이 지나자 이번엔 에게 해의 요충지인 로도스 섬을 공격했다. 이 또한 부황이 공략하려다 미처 이루지 못하고 사망한 곳으로,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긴 세월을 장악하며 요새화시킨 상태였다. 구호기사단은 해상 교역의 요충지인 이곳에서 오스만 제국이 아라비아 반도와 교류하는 것을 번번이 차단하고는 했다. 술레이만은 반년에 걸친 무자비한 공격 끝에, 결국 큰 피해를 기록하면서까지 1522년 이 난공불락의 섬을 정복했다. 이제 오스만이 아라비아로 세력을 뻗는 것에 저항할 세력은 없었다.

이후 로도스 섬에서 쫓겨난 성 요한 구호기사단은 신성 로마 제국을 통치하던 황제 카를 5세의 아량으로 몰타 섬에 이주해 정착하게 된다.

4 헝가리 정복

부황의 숙원을 이루긴 했지만 이 정도만으로 성에 차지는 않았다. 로도스를 정복한 이후 쉴레이만은 동유럽 장악에 있어 늘 거슬렸던 헝가리로 눈을 돌렸다. 헝가리는 증조부 메흐메트 2세 때부터 이미 사사건건 발칸 반도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던 앙숙이었다. 루마니아를 정복할 당시에도 헝가리는 성가시게 개입했다. 여기에 대해서는 야노슈 후냐디 항목 참조.

결국 쉴레이만은 내친 김에 헝가리 본토를 정복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1526년이 되자 술탄의 군대가 마침내 서쪽으로 움직였다. 비보를 접한 젊은 헝가리 국왕 로요슈 2세는 2만의 군대를 이끌고 도나우 강에서 배수진을 쳤다. 헝가리군은 국가의 존망을 걸고 오스만에게 결사적으로 맞섰던 것이다[6].

그러나 긴 시간을 두고 헝가리 공략에 매진해온 쉴레이만의 군대는 경이적이었다. 모하치 전투에서 헝가리군은 문자 그대로 개발살났으며[7], 로요슈 2세는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지만 그 와중에 도나우 강에 빠져 죽었다. 헝가리 영내로 진주한 오스만군은 의례히 살육을 벌였고, 헝가리 왕국은 멸망했다[8].

5 빈 포위

헝가리가 무너졌다는 소식에 유럽 세계는 긴장했다. 당시 서유럽은 이탈리아를 둘러싼 신성 로마 제국프랑스간의 분쟁, 종교개혁, 그리고 독일에서의 농민 반란으로 한창 혼란중인 상태였다. 무엇보다 이제 코 앞에 강대한 이슬람 세력을 맞닥뜨린 오스트리아의 입장은 난처했다. 오스트리아와 오스만 제국은 3년간 헝가리 땅의 지배권을 두고 국지전을 벌였다.

자국군의 강력함을 입증해보인 쉴레이만 1세는 유럽 제국과의 일전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유럽에는 오스트리아에서 스페인, 그리고 신대륙과 필리핀을 아우르는 강대한 카를 5세의 합스부르크 왕가가 버티고 있었다. 쉴레이만 1세는 다시 수년의 시간을 들여 오스트리아 공략에 매진했다. 그리고 마침내, 1529년 유럽 제국의 심장인 빈을 향해 최소 12만으로 추산되는 대군을 이끌고 거국적으로 출병했다. 다급해진 카를 5세도 스페인 등지에서 2만 3천의 군사를 징발해 수도 빈에 투입했다.

신성 로마 제국의 요새수도 빈이 일시에 오스만 군에 포위당했다. 이른바 1차 빈 포위였다. 동방의 이교도가 마침내 유럽 한복판까지 밀고 들어왔다는 사실에 유럽인들은 긴장했다. 자칫하면 제2의 콘스탄티노플 꼴이 날지도 몰랐다. 마찬가지로 쉴레이만 1세에게 있어서도 빈 성의 점령은 증조부 못잖은 위업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빈 성은 뚫리지 않았다. 게다가 여러가지 악재가 겹쳐 쉴레이만의 군대는 난항을 겪었다. 땅굴을 파보기도 하고 포격을 퍼붓기도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제풀에 지친 술탄의 군대는 포위 1개월만에 공성의 무리를 느끼고 퇴각했다. 3년 뒤인 1532년에 재차 침공해보려 했지만 카를 5세의 대군이 버티고 있었기에 포기했다.

빈 공략의 실패는 쉴레이만 1세가 결사적으로 시도했음에도 끝내 이루지 못한 매우 드문 사례 중 하나이며[9], 이는 유럽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결국 그는 헝가리의 지배로 만족해야 했다. 이상의 자세한 것은 1차 빈 포위 항목 참조.

6 지중해 패권 차지

비록 합스부르크의 아성을 꺾을 수는 없었지만 여전히 오스만 제국은 강대했고 쉴레이만 1세의 야심은 강했다. 오스만과 마찬가지로 합스부르크 역시 오스만 제국의 영지를 어찌 할 입장은 아니었다. 이미 동유럽의 지배권은 안정되었다.

다음으로 쉴레이만이 노린 것은 지중해의 패권이었다. 당시 지중해는 베네치아가 에게 해의 섬들을 차지해 해상 제국을 영위하고 있었고 신성 로마 제국 역시 이탈리아를 기반으로 지중해에 영향력을 갖고 있었다. 합스부르크의 황제 카를 5세유럽아메리카는 물론이고 외조부의 정복 사업을 이어받아 북아프리카에도 발을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이집트를 넘어 북아프리카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에 있어서는 도전이자 응전이었다.

1535년 튀니지에서 술탄 측의 군대는 합스부르크 카를 5세의 원정군과 맞붙었다. 그리고 깨졌다. 결국 튀니지 일부가 합스부르크 관할로 넘어가버렸지만 쉴레이만은 이것을 대수롭지는 않게 여겼다.

1538년, 교황베네치아를 주축으로 결성된 신성 동맹과 오스만 제국 함대의 일전이 있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다투기 위한 건곤일척의 승부였다. 이 프레베자 해전에서 오스만은 대승을 거두고 마침내 지중해 패권을 얻는데 성공한다. 비록 튀니지는 쉴레이만이 죽을 때까지도 스페인 땅이었지만, 아무튼 여세를 몰아 오스만의 군대는 북아프리카로 계속 진출해 알제리까지 영역을 확대했다. 이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은 빈 포위의 실패로 체념한 서유럽을 제외하면 예전 로마 제국과 거의 일치하게 되었다.

7 동방 원정

1530년대 중반부터 쉴레이만 1세는 눈을 동쪽으로 돌렸다. 오스만의 대군은 동방의 앙숙인 사파비 왕조페르시아를 들이쳐 오랜 시간 교전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술탄의 군대는 당시 타흐마스프 1세의 치세에 놓여 있었던 페르시아로부터 이라크아르메니아를 빼앗는 성과를 거두었으며, 특히 유서 깊은 도시 바그다드를 획득하는 영예를 얻었다. 또한 남쪽으로도 원정하여 아라비아 반도의 예멘, 아덴까지도 영역을 넓혔다. 아랍 세계가 오스만 제국의 깃발 아래 통합된 것이다.

그러나 1555년까지 이어진 3차례의 원정에서도 끝내 사파비 왕조를 복속시키는 것에는 실패했다[10]. 결국 1555년 오스만 제국과 페르시아 사이에 평화 협정이 맺어졌고 동쪽의 국경은 안정되었다.

그리고 1530년대 경. 인도 구자라트 지역의 이슬람 왕국이 포르투갈을 몰아내기 위한 구원 병력을 요청하자 수십문의 중포를 동반한 1만의 군대를 포르투갈이 당시 점유하고 있던 디우로 원정을 보낸다. 하필 군대가 아직 인도양에 있을 때 이슬람 왕국에서 정변이 일어나 친 포르투갈 정권이 들어서는 바람에 보급을 받지 못한 오스만 군은 디우를 함락시키기 일보 직전에 포기해야 했다.

8 뛰어난 내치

쉴레이만 1세는 헝가리 점령, 빈 포위, 프레베자 해전 등을 통해 정복 군주로서의 인상이 강하지만 실제로는 내치에 있어서도 대단한 군주였다. 괜히 입법자라는 별명이 붙은 것이 아니다. 그는 후대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그러했듯이 법을 정비하는 것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군하총회, 이집트 법전, 쉴레이만 법전 등이 그의 손에서 짜여졌다. 특히 군하총회는 법률로서 오스만 제국 내부의 분란을 진정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게다가 그는 전통적인 이슬람 법인 샤리아가 미치지 못하는 규율까지도 '카눈'으로 정비시켰다[11]. 사유재산도 보장했으며 노예라 하더라도 쓸만한 인재는 관료로 올렸다[12].

그는 예술과 건축에도 관심을 표명했다. 수많은 모스크가 그의 치세에 건립되었으며 회화와 공예, 문학 등 다방면의 예술이 발전했다. 예술인들은 술탄의 후원 하에 아낌없는 지원을 받았으며 국가 엘리트의 지위를 누렸다. 심지어 그 소문을 듣고 멀리 유럽에서까지 찾아올 정도였다. 쉴레이만 1세의 치세 중에서야 오스만의 문화는 비로소 페르시아의 영향을 벗어나 독자적인 틀을 갖출 수 있었다.

게다가 술탄 본인도 문학적인 재능이 있었다. 그는 무히비(Muhibbi, '연인' 이라는 뜻이다)라는 필명을 쓰면서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으며, 터키어와 페르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그리고 재임 내내, 심지어 원정 와중에도 틈틈이 일기를 써서 당시의 정황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들을 후대에 남겼다. 정말이지 정복황제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문화적 군주였던 것이다. 그의 치세 속에서 피어난 문화적 성취는 훗날 튤립 시대의 기초가 된다.

이런 뛰어난 내치 덕분에, 잦은 원정에도 불구하고 신민들은 그를 성군으로 추앙했다. 그리고 역사는 이 시기를 '오스만 제국의 최전성기'라고 평가한다.

9 실책

하지만 내정과 외정 모두 킹왕짱인 것처럼 보이는 쉴레이만 대제의 치세에도, 두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리고 이들 모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는 원인을 제공했다.

먼저 쉴레이만 시대에, 투르크계 개국공신 세력이 완전히 몰락하고 데브시르메 징집자 세력이 정권을 장악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오스만 제국 전기의 역사 전체를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메메드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하기 이전까지는 투르크계 개국공신들의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정권을 장악해 왔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 정복을 주도하여 황제의 권위를 높인 메메드는 재상이자 개국공신 세력을 대표하던 할릴 파샤를 반역죄로 처형하고, 그 후임으로 데브시르메 출신인 자아노스 파샤를 임명했다. 하지만 개국공신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않고, 데브시르메 출신을 여당으로. 개국공신의 후손들을 야당으로 삼아, 서로를 견제하고 황제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했다.

하지만 쉴레이만 시대에 이르러 이러한 균형이 무너지고 데브시르메 출신이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는데, 재상직을 비롯한 고위직을 이들이 독점하다 보니 개국공신 세력이 설 자리가 점차 사라지고. 마침내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메메드 2세가 확립하여 쉴레이만 시대까지 이어진 오스만 제국의 전제군주제는 두 정치 세력을 교묘하게 경쟁시킨 위에 성립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쉴레이만 이후 오스만 황제들의 입지는 상당히 애매해지게 된다. 즉 황권이 약화되기 시작한 것으로, 이는 이후 데브시르메로 징집되는 예니체리들은 황제를 우습게보며 갈아치우는 사태로 이어진다.[13]

다음으로 후궁 가운데 하나인 휘렘 술탄을 지나치게 총애하여, 제국의 불문율을 깨고 그녀를 정식 황후로 책봉했다. 이 부분은 항목을 참고해도 좋고 바로 아래의 '사적인 부분' 문단에 있으므로 여기에서는 생략하겠지만, 쉴레이만의 정책(?)으로 인해 하렘 세력이 정치에 관여하는 선례가 생겨나고 말았다. 그리고 쉴레이만 사후에도, 황제의 모후나 애첩이 정치에 관여하게 되었다.

요컨대 쉴레이만 시대에, 데브시르메 세력의 정권 장악, 하렘 세력의 정치 간섭이라는 두 가지 문제가 나타났다. 그나마도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황제가 유능한 인물이어서 황권을 강화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마련하고 휘렘 술탄은 어디까지나 예외였노라고 했다면 쉴레이만의 실책은 만회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의 뒤를 이은 황제' 가 막장 주정뱅이 셀림 2세. 셀림 2세가 술과 여자에 빠져 사는 동안 그의 누나와 재상이 정권을 농단했고, 오스만 제국은 성장세를 멈추고 정체. 이어서 쇠퇴의 길을 걷는다.

10 사적인 부분

기록에 따르면 쉴레이만 1세는 외모마저도 엄친아였다. 키도 크고 인상도 또렷하며 패션 센스마저 특출한 옥골선풍형의 훈남이었다고. 하지만 박물관에서 그가 입었던 옷을 본 이들은 그가 꼬맹이였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기록을 액면 그대로 믿기는 어려운 것인가.

터키 역사상 가장 유명한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는 오스만의 술탄 중에서 매우 보기 드문 애처가였다. 문제는 오스만 술탄 중에 그가 유일하게 결혼을 했다는 점이지만(...) 공식 황후를 두지 않았던 선대의 술탄들과 달리, 그는 일평생 휴렘 술탄(록셀라나)이라는 여인을 애지중지 사랑하여 오스만 제국 최초의 황후로 책봉했다. 게다가 신하가 헌상한 노예 출신이었다.[14] 쉴레이만은 25년이나 휴렘과의 일부일처를 유지하는 순애보를 보였다. 그러나 휴렘은 상당히 야심이 있는 여자였기에 자신의 자식으로 술탄의 자리를 잇게 하려고 음모를 많이 꾸몄고 그녀의 충동질 때문에 다른 후궁의 아들이었던 무스타파와 바예지드를 처형하는 등의 실책도 저질렀다.[15] 이후 휴렘의 뜻대로 그녀의 아들이 술탄이 되었지만 문제는 그 아들인 셀림 2세는 참으로 한심한 인간......[16] 후대 역사학자들은 후계자 선정에 실패한 것이 쉴레이만 1세의 큰 실책 중 하나로 꼽는다.

이브라힘 파샤라는 신하와의 우정이 유명하다.[17] 예니체리 출신으로 황태자 시절부터 쉴레이만의 밑에서 노예 생활을 하다가 슐탄 제위 후 초고속 승진을 거쳐[18] 총신이 되었으며 술탄과 신하라는 신분의 차이를 넘어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잠을 잘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황제랑 재상이랑 사귄다카더라' 하는 루머가 떠돌 정도였다.(...) 쉴레이만은 자주 자신이 형제를 고를 수 있었다면 이브라힘을 골랐을 것이라는 말을 했으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브라힘을 처형하는 일이 없을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브라힘은 오스만 역사상 최단기간에 재상의 위치까지 올랐으며 1차 빈 포위 당시 오스만군의 사령관으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심지어 쉴레이만은 자신의 여동생인 하티제 공주와 결혼까지 시켜주었다[19]. 그러나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이브라힘의 권세에 쉴레이만은 날이 갈수록 불편해했고 결국 궁중의 암투에 휘말려 이브라힘 파샤는 사형당하고 만다. 살아있는 동안 사형은 절대 없을거라며?[20]


목 부러질라 야도킹

상기 서술대로 내치와 외치 모두 위대한 업적을 이루었기에 기독교 세계의 정신적 지주인 교황보다도 더 위대하다고 자부하며 교황의 삼중관을 능가하는 사중관을 만들어 착용하기도 했다. 사중관 제작에 들어간 비용은 11만 5천 두카트에 달했다고 한다.[21]

11 말년과 최후

쉴레이만의 정복 사업은 그가 죽기 전까지 지속되었다. 페르시아와 평화 협정을 맺은 뒤 그의 시선은 다시 서쪽으로 쏠렸다. 이미 그의 경쟁자였던 카를 5세도 세상을 떠나 유럽 세계는 강한 구심점을 잃었다.

1565년, 술탄의 함대는 전에 로도스 섬에서 버티던 성 요한 구호기사단이 이주한 몰타로 출격했다.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로도스와 달리 몰타에서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깨졌다.

1566년에는 72세의 노구를 직접 이끌고 또 다시 헝가리 원정에 나섰다.[22] 시게트바르 요새에서 격렬한 사투가 벌어졌다. 노쇠해진 상태로 의자에 앉아있던 황제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자신이 젊은 시절 말에 올라타 몸소 성을 공격하던 기억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23].

요새를 함락시키기 직전인 9월 7일, 그는 병이 악화되어 시겟바르 요새의 진영에서 눈을 감았다. 사망 당일까지 일기를 썼다는 점이나 죽음을 극비에 붙일 수 있었다는 점 등을 생각하면 급사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한데, 그의 마지막 일기에는 이런 기록이 남아있다. "요새는 저리도 타오르고 있건만, 승리의 북소리는 여전히 들리지 않는도다". 결국 그가 죽고 난 지 불과 하루 뒤에야 해당 요새는 함락되었다.[24] 그리고 그의 사후 오스만 제국에는 더이상 명군이 등장하지 못했다.

참고로 쉴레이만 1세가 사망했을때 쉴레이만 1세를 보좌했던 재상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는 몇일간 쉴레이만 1세의 승하 사실을 함구했다고 한다.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쉴레이만 1세의 마차 안에 들어가 마치 황제에게 보고를 하는 것처럼 연극을 해서 다른 사람들은 황제가 아직 살아 있는줄 알았던 것으로 착각 했다.

그리고 그당시로서는 장수했던 72세에다 재위기간이 46년이나 되다 보니, 쉴레이만 한 사람이 옥좌에 앉아있는 동안 유럽에서는 왕이 많이 바뀌었다. 가령 스페인에서는 카를 5세가 죽고 펠리페 2세가 등극했고, 헨리 8세부터 엘리자베스 1세까지의 잉글랜드 또한 그의 치세와 겹친다. 프랑스 같은 경우는 발루아 왕조의 문화적 전성기를 이룩한 프랑수아 1세부터 그 아들인 앙리 2세, 다시 그 아들들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의 치세에 해당[25].

12 여러 매체에서

12.1 대항해시대 2

오스만 제국의 궁성에 가면 떡하니 반겨주는 바로 그 분. 실제로 훈남이니 뭐니하지만 작중에선 미중년은 고사하고 그냥 수염 덥수룩한 중년 아랍인의 전형으로 나온다. 실제 나이로도 28살의 청년인데 말이다 영토 확장에 힘을 썼던 실제 모습을 재현하고자 했는지 동맹항 확장에 열을 올리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런데 어째서 궁성에 돈이 쪼달리시는지는 모르겠다. 알 베자스로 플레이하면 금괴 몇 개 던져주고 몇 되지도 않는 전 세계의 동맹항을 수십개씩 늘려 오라고 명령을 내려서 진상을 부려서 유저의 혈압을 올리는 주범이다. 물론 베자스 엔딩의 최종보스는 베네치아 은행장이지만.

12.2 어쌔신 크리드 : 레벨레이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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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게임설정화

영어판 성우는 1편의 말릭 알-사이프와 동일한 하즈 슐레이만. 성이 똑같다 일본판 성우는 오키아유 료타로
왕이 되지 않은 시점이기에 왕자로 등장. 콘스탄티노플로 향하는 배에 에치오와 함께 탑승하여 안면을 튼다. 이 때 에치오에겐 자신이 학생이라고 소개했으며, 여성을 배려하는 신사적인 면모도 보였다. 거기다 꽤 훈남이다. 근데 정작 만나고 나서 뜨는 데이터베이스엔 떡하니 쉴레이만 왕자라고 뜬다.
후에 템플러들이 왕자를 죽이려 한다는 정보를 듣고 잠입한 에치오와 조우. 이 때 에치오는 쉴레이만이 왕자였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그리고 쉴레이만에게 달려드는 자객을, 들고 있던 류트를 뽀개서 자객의 목에 쑤셔 박아 죽인다. 오오 에치오 오오! 이 때 다시 인사를 하는데,

에치오 : 학자에 왕자까지. 안 해본 일이 무엇입니까?

쉴레이만 : 전 모르는 사람과는 이야기하지 않죠. 쉴레이만이라고 합니다.
에치오 : 에치오 아우디토레(라고 합니다).

이후 템플러의 습격을 저지하지 못한 예니체리(예니체리들이 경비를 잘 못선다고 툴툴댄다. 뭐 이새끼야?) 의 대장 타릭 바레티를 감시하는 일을 에치오에게 맡긴다. 에치오와 함께 있는 장면을 아흐메트 왕자가 보자 "제 유럽 쪽 협력자입니다."라고 둘러대기도 한다. 마누엘 팔라이올로고스를 추적할 때는 배편을 마련해주기도 한다.
나중에는 대신전을 열겠다고 소피아를 볼모로 열쇠를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아흐메트 왕자의 말을 듣고 에치오와 세계의 통치자로써의 관점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이때의 대화를 보면 그가 확실히 대제로써의 자질이 충분함을 볼 수 있다.

쉴레이만 : 아흐메트 왕자가 도착한 이후로 계속 미행했습니다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줄은 몰랐군요.

에치오 :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쉴레이만 : 그는 성실한 자이지요. 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템플러들의 환상은 위험합니다. 이는 진실의 눈앞에서 날아다닐 뿐이지요. 세계는 제각각의 색깔과 문양을 가진 양탄자입니다. 진정한 지도자는 이를 축하해야 하지요. 풀어헤치는게 아니라요.
에치오 : 그자는 '다름'이 가져오는 불협화음을 무서워하고 있습니다.
쉴레이만 : 그것이 우리가 살아남기 위해 법을 만드는 이유이지요.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카눈(Kanun, 법)을 말입니다.[26]

여담이지만 막판에 셀림 1세가 예니체리를 끌고 등장해선 "내 아들이 당신을 지지하지 않았다면 여기서 처리해버렸을 것이다."라고 한다. 에치오는 이 말을 듣고 꼭지가 단단히 돌아서(...) 칼을 뽑아 셀림을 찔러 버리려고 했지만 소피아가 말려서 관뒀다. 찔렀다간 에치오는 순식간에 수십 명의 예니체리와 싸워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반대도 되는데 저기서 에치오를 공격하지 않았기에 암살단이 가만히 있었던 것이기도 하다.살았다!! 암살단은 고대부터 높으신 분들을 암살하는 게[27] 일이었다. 만약 셀림 1세가 에지오를 죽였다면, 그의 통치는 1년도 가지 못했을 게 뻔하다. 감히 암살단의 멘토를 죽이고도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이를 볼때 암살단이 얼마나 무서운 조직인지 제대로 몰랐던 것으로 보인다. 까놓고 말하면 병크. 근데 셀림 1세의 제위 기간은 1512년부터 1520년까지 꽤 짧다. 아마 콘스탄티노플의 암살단을 건드린 모양이다.템플러를 2번이나 무너트린 최강시기의 암살단에게 개긴건가[28]

12.3 무흐테솀 유즈이을(Muhteşem Yüzyı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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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에서 방영하는 사극무흐테솀 유즈이을(=위대한 세기)에서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다만 궁정내의 권력다툼과 하렘에만 포커스가 맞춰져있다고 까는 쪽도 있고[29], 지금까지 사극가운데 고증과 시나리오 모두에 충실[30]하다고 보는쪽으로 호불호가 극단적으로 갈린다. 유튜브에서도 볼 수 있지만 한회분량이 1시간 반 이상(...)이고 그런게 139개나 있다. 영어 자막이나 더빙도 없는 터키어 원본이니 주의.
무흐테솀 유즈이을에서 쉴레이만은 겉으로는 이 세계의 주인인 파디샤로 완전체 비슷하게 등장하지만, 인간적인 측면도 상당히 부각시키고 있으며 휴렘 술탄이 본래 알렉산드라 라는 이름을 가진 우크라이나 출신의 노예였다가 타타르에게 잡혀서 노예로 팔리고, 크림 한국의 궁정에 있다가 오스만 제국 궁정으로 '진상' 되었다는 비극적 주인공이라는 설정으로 나온다. 그러다가 궁정 시종장의 "술탄은 세계를 지배하지만 그의 여인은 술탄을 지배한다."는 말을 듣고 회심, 술탄을 유혹하는 모습으로 등장.

12.4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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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세요?
일본 만화 꿈의 물방울, 황금의 새장(夢の雫 黄金の鳥籠)에서는 금발의 미소년[31]으로 나온다. 맨 오른쪽이 쉴레이만이며 중간이 만화의 주인공이자 쉴레이만의 황후였던 휴렘 술탄(록셀란), 맨 오른쪽이 쉴레이만의 충복이었던 이브라힘 파샤이다.

자세한것은 항목 참조

12.5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오스만의 군주로 출현한다. 성우는 한국판은 노민, 일본판은 마츠이 노리오. 본 게임에 등장하는 쉴레이만은 노년의 모습인데, 정작 본인은 젊었을 때 가장 잘 나갔었다는 게 문제...일까?
캠페인 중에 직접적으로 등장하는 경우는 없지만, 일반 대전에서 플레이할 때에는 인공지능의 입담과 재치가 수준급이다. 이 외 사항은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오스만 참조.

  1. 아래의 '말년과 최후' 문단에 쓰여있듯, 사망 당일인 1566년 9월 5일에 쓴 일기다. 당시 쉴레이만은 헝가리 원정을 단행하여 시겟바르 요새를 공략하고 있었는데, '승리의 북소리' 는 그가 눈을 감은 이튿날 울려퍼졌다.
  2. 비슷한 예로 살라흐 앗 딘의 풀네임에 있는 유수프(Yusuf)와 아이유브(Ayyub)는 각각 요셉에서 왔다.
  3. 여기에서의 신성로마제국 대사는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이라는 사람인데, 그는 예니체리와 관료 선발제도인 데브시르메 제도나 여러 종교가 한데 공존하는 모습 등에 감명을 받아 극렬(이라는 표현까지 쓰기는 뭐해도) 오스만 빠였던 사람이다. 그가 남긴 글 가운데에는, 언제고 닥쳐올 오스만 제국의 맹공에 '우리가 얼마나 준비되어 있지 않는가는, 감히 말하고 싶지도 않다' 라는 것도 있다. 물론 동시대인의 증언이니만큼 가치가 있는 글이지만, 적당히 간추려 읽도록 하자.
  4. 사실 친족 살해는 무라트 1세 시대에 처음으로 있었던 일로, 메메드 2세가 아예 법제화한 것이다. 이때 살해하는 '친족' 가운데에는 갓난아이라도 남성이라면 예외가 없었는데, 오스만 제국에서는 장남이 아니라 전임 황제의 아들들 가운데 가장 유능한 자가 제위를 이었기에 황제의 형제라고 하면 언제든지 황위 계승을 주장할 수 있는(반란을 일으켜서 성공하면 '가장 유능한 자' 가 되는 것이므로) 위험인물이었기 때문.
  5. 다만 쉴레이만 당시의 헝가리는 국가 막장 테크를 착실히 밟고 있었기에, 수비군도 7백 명에 불과했다.
  6. 다만 '결사적으로 맞섰던 것' 치고는 전략, 전술이 형편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총과 대포를 다수 활용하는 등 당시로서는 선진적인 전법을 구사하고 있었던 반면, 헝가리 측은 옆에 강이 흐르기는 하지만 탁 트인 평야에서 기병을 앞세우는 작전을 쓰기로 했던 것. 실제로 오스만 제국이 셀림 1세 시대에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정복하고 페르시아의 사파비 왕조를 상대로 기선을 제압한 것이 두 나라 모두 기병을 앞세우다 벌집이 되었기 때문이며, 설령 헝가리가 이 전투들에 대해 몰랐다고 하더라도 바예지드 2세 때에 헝가리와 동군연합하고 있던 크로아티아에서 똑같은 일이 있었다. 헝가리 역사상 중요한 전투임에는 분명하지만, 헝가리군이 괜히 박살난 게 아니다.
  7.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모하치 전투는 총알과 포탄이 비오듯 쏟아지고 있는데 적군의 기병들이 불나방처럼 덤벼드는 싸움에 불과했다. 비록 전투 초반에는 헝가리 기병의 화살이 쉴레이만의 흉갑에 명중(부상을 입히지는 못했지만)하기까지 했지만, 너무도 싱겁게 결판이 난 나머지 쉴레이만은 '뭔가 이상한데?' 라고 판단하고는 헝가리의 수도로 내처 진격하는 대신 며칠동안 모하치 전장에 그대로 주둔했다.
  8. 참고로 이때의 충격이 컸는지, 오늘날까지도 헝가리인들은 힘든 일을 겪으면 '모하치의 패전보다 더하다' 라는 표현을 쓸 정도.
  9. 다만 오늘날 학자들 중에는, 빈 공략이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헝가리가 너무나도 싱겁게 무너진 나머지 '이참에 오스트리아까지...?!' 라는 식으로 다소 우발적으로 공격했다는 주장도 있다. '결사적으로 시도' 까지는 아닌 셈.
  10. 당시 사파비 페르시아는 국력이 열세이고 찰디란 전투에서 오스만한테 개발살난 이후 오스만 제국군과 전면전을 벌이는 대신, 싸움을 피하며 철저히 청야전법과 방어전을 폈다. 그러니 오스만 제국 쪽에서는 싸우기만 하면 이길 것 같은데 적이 싸워주질 않으니 전쟁에서 이겼다고 하기 어려웠고(실제로 당시 군사력은 오스만 제국 쪽이 우세했다), 보급품 부족으로 인해 번번이 군사를 물려야 했다.
  11. 로마법 대전이 이전까지의 로마 법을 집대성한 것이었던 것처럼, 쉴레이만 혼자서 법전을 썼다기보다 이전까지의 오스만 법을 총정리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부황인 셀림 1세에 이르기까지의 역대 황제들이 반포한 칙령을 총정리한 다음 서로 모순되는 것은 적당히 간추렸으며, 메메드 2세가 최초로 반포한 성문법도 영향을 주었을 듯 하다.
  12. 다만 노예도 관료로 등용한 것은 쉴레이만 시대의 특징이라기보다, 오스만 제국의 역대 정책을 그대로 따른 것.
  13. 비슷한 예로 로마 제국의 근위대 프라이토리아니가 있다. 황제의 근위대인 프라이토리아니도 처음엔 황제를 따르게 되었으나 권력이 커지면서 나중엔 황제를 우습게 보아 죽이거나 갈아치우게 된다.
  14. 우크라이나 성직자의 딸이었는데 20대 초반 즈음에 포로로 잡혀 오스만 제국에 노예로 끌려왔다.
  15. 아들들 뿐만 아니라, 무스타파와 바예지드를 지지했던 신하들. 또는 이렇다 할 정견을 피력하지는 않았지만 휘렘의 입장에서 자신의 앞길을 막고 있다고 여겨진 신하들이 반역이라는 죄명을 뒤집어쓰고 처형장으로 보내졌다. 아버지의 발뒤꿈치도 따라가지 못한 셀림과는 달리, 무스타파는 황제로 즉위했더라면 오스만 제국의 전성기를 이어갈 수 있었을 정도의 인물이라는 것이 문제. 당시 신성로마제국에서 파견한 대사 오기에르 기셀린 드 뷰스벡(Ogier Ghiselin de Busbecq)은, '아들들 가운데 무스타파라는 자가 있는데, 놀라울 정도로 잘 교육받았고 사려 깊으며 이제 24세 또는 25세이기에 제위에 오를 만한 나이가 되었다. 부디 신께서 그런 힘을 가진 바르바리인이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해주시길 바랄 뿐이다' 라고 기록할 정도였다. 다만 뷰스벡이라는 사람은 오스만빠 기질이 다분했다는 점은 유의하자.
  16. 술에 빠져 살았다.
  17. 이름이 별로 다양하지 않았는지 오스만 제국 역사상 '이브라힘 파샤' 라고 하면 수십 명이 해당되므로, 다른 '이브라힘 파샤' 들과 구분하기 위해 '파르갈르 이브라힘 파샤(Pargalı İbrahim Paşa)' 라고도 불린다. 이 밖에 '파르갈르(파르가 출신)' 대신 '프렝크(Frenk, 유럽인)', '마크불(Makbul, 총애받는)', '마크툴(Maktul, 처형된)' 등의 별명도 쓰이며, 특히 '마크불' 과 '마크툴' 은 'Makbul Maktul' 로 묶여서 쓰이는 경우가 더 많은 편.
  18. 3년 만에 황실 최하위직에서 최고위직이 되었다
  19. 이전 항목에서는 '넘사벽의 신분 차이' 라 소개되어 있었으나,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쉴레이만 시대는 재상을 비롯해 고위 관료나 장교 거의 대부분이 예니체리 항목에 소개된 '데브시르메 제도'로 징집되었으며, 쉴레이만의 누이뿐 아니라 딸인 미리마 술탄과 손녀딸인 이스미한 술탄도 이들에게 시집갔다. 오히려 쉴레이만 사후에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한 요인 가운데 하나가 데브시르메 징집자만 챙겨주다 보니 제국의 개국공신들인 투르크계 귀족들이 완전히 몰락한 것이었으며(조선으로 비유하자면 탕평책이 무너지고 일당전제체제로 접어들었다고 보면 된다), 예니체리가 황제를 갈아치우는 사태가 바로 이 연장선상에 위치한다. 즉 '넘사벽의 신분 차이'가 아니라, 어느 나라에나 흔히 있는 귀족과 황실의 결혼에 가까웠다.
  20. 사형당하기 몇일전부터 쉴레이만은 여전히 이브라힘과 함께 식사를 하면서 사형선고가 어쩔 수 없는 것이라 주장했고 쉴레이만의 배려 덕에 이브라힘 파샤도 감옥에 수감되어있지 않아 도주의 가능성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도망치지 않고 사형을 받아들였다. 또한 쉴레이만은 말년에 이르러 이브라힘을 처형한 것을 크게 후회했으며, 자작시를 쓸 때에도 우정과 신의가 주제인 시 등 이브라힘을 떠올리며 쓴 듯한 작품이 많다고 한다.
  21. 한화 약 160억 상당. 참고로 사중관은 쉴레이만이 직접 만들어 쓴 것이 아니라, 당시 동맹이었던 프랑스가 선물로 만들어준 것이라고도 한다. 이에 대해서는 https://en.wikipedia.org/wiki/Antonio_Rincon 참고.
  22. 관절염에 걸려 거동이 불편한 상태였으며, 실질적인 지휘권은 재상인 소콜루 메메드 파샤가 행사했다.
  23. 실제로 학자들 사이에서는 노년인데다 몸도 불편했던 쉴레이만이 아들들 사이의 제위 계승 분쟁과 악화되는 지병, 국정운영에 대한 스트레스가 겹쳐 심리적으로 피폐해진 상태였다고 보는 경우도 있다. 즉, 콘스탄티노플에 가만히 앉아 있어도 영 좋은 소식이 안 들어오니 차라리 전투에 관심을 돌리고 싶다는 것.
  24. 하지만 이 전투에서 헝가리 측의 저항이 그야말로 결사적이었기에 오스만 측의 피해도 심각했다. 10만 튀르크 대군 중 2만~3만여 명이 죽었다. 대략 헝가리 군의 10배의 피해가 났다. 물론 요새 내의 헝가리 군(3천여 명)은 전멸했지만...
  25. 여담으로 쉴레이만보다 한 수 더 뜨는 굇수황제가 있으니, 사파비 왕조타흐마스프 1세가 그 주인공이다. 11세의 나이에 황제가 된 덕에 재위기간이 1524년부터 1576년까지 52년이나 되다. 1576년이면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도 죽고 무라드 3세가 황제 노릇을 하고 있던 무렵이다.
  26. 다만 실제 역사로 보면 이때 쉴레이만이 말한 모든 사람이란 모든 무슬림이라는 뜻이다. 무슬림과 짐미(이교도)는 엄연히 차별대우를 받았으며, 그게 오스만 제국의 법. 즉 쉴레이만의 법이었다. 물론 이교는 물론 이단도 용서하지 않았던 동시대 유럽에 비해서는 훨씬 개방된 것이기는 하다.
  27. 높으신 분들이면 그냥 찌르는 게 아니라, 성당기사단을 등에 업은 높으신 분들을 찔렀다. 덧붙여서 암살단은 폭군이나 독재자들을 제거하기도 하는데 이러면 99%는 성당기사단과 연결되어 있다. 그 반대로 성당기사단에게 비판적인, 암살단을 후원하거나 협력관계인 지도자나 통치자에게 암살단은 호의를 보냈다. 물론 이 경우 99%는 최소한 병크를 터트리지 않거나 터트려도 적게 터트리는 지도자들이다.
  28. 다만 실제 셀림의 사인(死因)으로는 오랫동안 원정을 하느라 말을 탄 것에서 유추하여 탄저병이 아니었나 생각되고 있다.
  29. 일단 이슬람주의자가 많고, 그 외에 일부 밀덕이나 역덕들. '하렘물인 건 알겠지만 전쟁은 언제 하나효?' 라든가, '나의 대제님은 이렇지 않아!' 하는 의견이 있다.
  30. 다만 깐깐하게 따지자면, 시나리오는 몰라도 고증은 영...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등장인물만 보더라도 잘못 묘사되거나 사료에 비추어 볼 때 각색한 부분이 많다.
  31. 두말할 필요 없는 고증오류. 다만, 쉴레이만과 휴렘의 아들로 쉴레이만의 뒤를 이은 셀림 2세는 슬라브계인 어머니의 유전자 탓에 정말로 금발이었다. 이 때문에 '금발의 셀림(Sarı Selim)' 이라는 별명까지 얻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