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파비 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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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세 이란을 지배한 시아파 왕조[1]
(1501~1736)

1 개요

시아파 7대 이맘의 후손으로 일컬어진 이스마일 1세(1501~1524)에 의해 타브리즈를 수도로 하여 건국되었다.[2]

사파비 왕조의 뿌리는 이슬람 신비주의 수련조직인 수피즘 단체에서 시작되었다. 그 단체의 지도자 이름이 '사파비'였으므로 단체 이름도 사파비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일개 영적 수련단체였으나 교주 자리가 아들에게 세습되고, 교주의 호위무사들은 군대로 성장했다. 시아파로 개종한 후 페르시아 지역에서 핍박받는 시아파들을 자극하여 투르크족 영주들(수니파)에게 도전했고, 여기에 놀란 투르크족은 사파비를 토벌했다. 사파비의 지도자도 살해당했으나 그 아들인 이스마일이 살아남았다. 사파비의 잔존세력은 비밀 지하단체로 몸을 숨긴 채 어린 이스마일을 실질적인 지도자로 추앙했다. 세력을 재건한 사파비 일파는 자신들을 핍박했던 영주들에게 복수하는 데 성공했다. 이스마일은 이스마일 1세가 되어 사파비 왕조를 세웠다.

사파비 왕조 이전에 이란 고원을 지배하고 있던 백양 왕조를 제압하고 위의 지도에 달하는 영토를 차지하였으나 수니파가 아닌 시아파를 표방하였기 때문에 당시 수니파 계통이었던 오스만 제국과 적대관계에 놓일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다가 사파비 왕조는 당시 이집트와 시리아를 지배하였던 맘루크 왕조와 연합하여 오스만 제국을 견제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 둘은 메소포타미아 지역 북부에서 찰디란 전투(1514)을 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는 애초부터 국력에서 열세인데다[3] 화약 무기로 무장한 오스만 제국과 달리 구식 무기로 무장하였기 때문에 이 전투에서 패배하였다. 이후 사파비 왕조는 오스만 제국과의 확장 전쟁을 포기하고 방어전 모드에만 돌입해야만 했고 오스만 제국은 먼치킨의 시대로 들어갔기 때문에 오스만 제국이 쉽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확보할 수 있었다.[4]

그런데다가 동쪽으로는 우즈베크 족의 침입과 내분으로 인해 국가가 흔들렸지만 이후 사파비 왕조 최대의 명군인 아바스 1세(1587~1629)의 치세 이후 수도를 1555년 이후로 국가의 수도였던 카즈빈에서 이스파한으로 천도(1597)하고 오스만 투르크와 우즈베크 족을 격퇴하였으며 다소 불안정하지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시 회복하게 된다.

하지만 이후 다시 벌어진 내분과 외부와의 전쟁으로 국력은 약화되었으며, 이후 사파비 왕조의 가혹한 통치에 폭발한 아프간 족의 반란에 의해 수도가 일시 점령되었으며 이후 이러한 국가 내외의 혼란을 수습한 나디르 샤에 의해 멸망하였다.

2 역대 황제

이스마일 1세1501~1524
타흐마스프 1세1524~1576
이스마일 2세1576~1578
무함마드 호다반다1578~1587
아바스 1세1587~1629
사피1629~1642
아바스 2세1642~1666
술레이만 1세1666~1694
술탄 후세인1694~1722
타흐마스프 2세1722~1732
아바스 3세1732~1736

3 의의

사파비 왕조는 기본적으로 시아파 국가이었다. 사실 이란 북부의 산지 지역은 이슬람의 중심지로부터 상당히 먼 지역이었고 지형도 험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이슬람의 통치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이러한 이유로 이슬람의 도래 이후로 지금도 그렇지만 소수파였던 시아파가 많이 활동하였으며 이후 이란에는 몇 차례 시아파 왕조가 세워지게 되었다.[5]

하지만 이런 이란의 성향과는 달리 수니파 성향이었던 투르크족의 도래로 인해 시아파는 다시 정치적으로 억압을 받게 되었으나 이러한 투르크 족을 물리치고 세워진 왕조가 사파비 왕조였다. 이슬람의 도래 이후 이란에는 시아파 왕조가 몇 차례 세워졌음에도 불구하고 원래 페르시아 인들 대부분은 수니파였다. 하지만 사파비 왕조 이후로 이란은 시아파 국가가 되었다. 즉 현재의 이란이라는 나라의 정체성을 규정한 데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역할을 한 것. 또한 이들은 기존의 이란을 지배했던 이민족들과는 달리 이슬람적 가치보다는 고대 이란의 황제의 칭호였던 를 자칭하는 등 페르시아의 전통을 계승하려고 했기 때문에 이란 역사에서 사파비 왕조는 상당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6].

역사적 의의와는 별개로 군사적으로는 역대 페르시아군과 달리 일부 황제를 제외하고는 깨진게 많아서 그다지 큰 역량을 가지지 못했다. 제국 초기에는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상실하였으며[7], 또한 오스만 제국 초창기의 술탄들이 투르크계 개국공신들의 대표자에 지나지 않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쪽에는 투르크 계통의 키질바시[8]에 의해 제국의 국정이 좌지우지되는 면이 강했으며[9] 인도에 대해서는 아프가니스탄 지방을 분할하여 지배하는 등 꽤나 강세를 보였다. 하지만 후반기에는 아프간 족에 의해 제국이 멸망하고 일시 점령당하기도 했다. 오스만뿐만 아니라 중앙아시아의 우즈베크 족에게도 자주 침략을 받았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사파비 왕조의 군대는 전대의 페르시아 왕조들 군대보다 위상이 매우 낮다.
  1. 사실 이 영토는 최대 영토이며 전반적으로 사파비 왕조 치세 상당수 동안 아나톨리아 동부, 메소포타미아 지방은 오스만 제국의 지배하에 놓였다.
  2. 하지만 정말로 이맘의 후손인지 아닌지는 불분명하며 실제 여기에 의혹을 가진 사람들을 처형했다고 한다. 현재의 연구 결과에 의하면 투르크어를 쓰는 쿠르드족 출신으로 밝혀졌다.(...)이놈이 약을 팔았어!
  3. 오스만 전성기 인구가 3천만인데 사파비 왕조는 전성기 인구가 고작 8백만이다.
  4. 이 전투의 패배 이후로 당시 이스마일 1세는 큰 충격을 받아 한 번도 웃지 않았다고 하며, 찰디란에서 승리한 오스만 황제 셀림 1세는 그에 대해 언제나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시며 정사에는 완전히 무관심하게 되었다고 평했다고 한다.
  5. 대표적으로 부와이 왕조
  6. 하지만 '' 가 페르시아 문화권에서만 독자적으로 쓰이는 칭호인에 대해서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페르시아 계열이라고 보기 어려운 이슬람 국가에서도 샤라는 칭호가 두루두루 쓰였기 때문. 대표적으로 오스만 황제의 칭호 가운데 하나가 '파디샤'. 즉 '왕들의 주인' 이라는 점을 들 수 있으며, 오히려 이슬람이 페르시아 문화의 영향을 받아서 샤라는 칭호를 쓰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다.
  7. 다만 이 부분만은 군사적 역량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사파비 왕조는 창건자 이스마일 1세 사후 내전에 휩싸여 있었는데, 내전이 가까스로 수습되자마자 적국이 국경을 넘어온 꼴이었기 때문.
  8. 오늘날의 아제르바이잔에 거주하던 투르크 부족들의 통칭. 'Qizilbash' 라는 말을 직역하면 '붉은 머리' 라는 뜻인데, 이는 그들이 즐겨 쓰던 붉은 모자에서 유래했다. 사파비 왕조 창건 이전까지는 소수파였던 시아파를 믿는다는 공통점이 있었으며, 창건자 이스마일을 군주이자 교조로 받들었다.
  9. 다만 제국 후기까지 영향을 끼치지는 않았다. 오스만 제국이 개국공신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데브시르메 제도를 도입하고 예니체리 군단을 창설했듯이, 2대 황제인 타흐마스프 1세 때부터 키질바시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코카서스인을 등용하기 시작하였으며, 5대 샤인 아바스 1세 때에 결정적으로 세력이 위축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