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 Abbasid Caliphate
750~1258
이슬람 제국 | |||||
우마이야 왕조 | ← | 아바스 왕조 | → | 파티마 왕조 |
서기 9세기 경의 최대 판도.
아바스 왕조의 깃발로 검은색 한 가지로 이루어진 깃발이다.
이슬람 문명의 황금기를 이룩했던 당대 최고의 제국
전성기시절 중국부터 유럽까지 전세계의 강대국들을 모두 무찔러본 제국
1 아바스 왕조의 성립
이슬람 제국 아바스 왕조. 압바스 왕조라고도 부른다.
우마이야 왕조 말기, 우마이야 가문의 권력 독점에 반발한 안사르나 하심 계열[1], 아랍인 우대 정책에 반발한 이란(페르시아)이나 호라산 사람들은 무함마드의 혈족을 내세워 우마이야 왕조를 붕괴시키기 위한 활동을 시작했다. 그들이 내세운 이는 무함마드의 삼촌(백부) 아바스의 고손자 아불 알 아바스였다. 747년 반란을 일으켰고 750년 대(大) 자브 강(江) 전투에서 승리하여 우마이야 왕조의 마지막 칼리파 마르완 2세를 살해하고 아바스는 자신이 새로운 칼리프임을 선언했다. 그 후 아바스는 앞으로 친교를 맺을 의사를 표현한다는 구실로 연회를 열고는 우마이야 가문 사람들을 모두 초대했다. 하지만 연회가 끝나갈 무렵 돌변하여 우마이야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이 때 10대 칼리파 히삼의 손자 압드 알 라흐만은 간신이 살아남았는데 스페인 중부 안달루시아 지방으로 후퇴해 '후우마이야 왕조'를 건설했다.
아바스 왕조의 수도는 바그다드였는데 2대 칼리프 알 만수르는 우마이야 시절의 수도였던 다마스쿠스를 버리고 메소포타미아의 크테시폰 인근에 새로운 수도 바그다드를 세웠다. 이후 아바스 왕조는 바그다드에서 그 영욕을 겪게 된다.
2 아바스 왕조의 영향
한 때 하룬 알 라시드와 같은 현제[2]가 등장하여 당 제국과 맞먹는 세계 최강의 제국으로서 서쪽의 북아프리카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거대한 판도를 자랑했다. 특히 중앙아시아에서는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 군대와 맞붙어 대승리한 탈라스 전투가 유명하다. 또한 정복과 영토 확장에만 골몰했던 우마이야 시대와는 달리 정복사업이 어느정도 정리된 후라 문화, 예술, 과학, 종교 분야에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아바스 왕조의 전성기인 8~9세기를 '이슬람의 황금시대' 라 할 정도. 특히 동로마 제국과 사산 왕조 시대부터 남아 있었던 그리스, 로마 문화와 페르시아 문화의 수혜를 톡톡히 받았는데, 이것이 어느정도였느냐 하면 서유럽에서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이 많이 유실되었기 때문에 중세 말 유럽 대학들은 아랍어로 쓰여진 고전을 다시 번역해서 교재로 쓸 정도었다.
건축양식이나 의복 및 생활양식이나 궁정의례는 사산왕조 페르시아와 동로마의 영향을 받았다. 바그다드의 궁전은 근처 크테시폰 궁전의 영향을 받았고, 미술양식에서도 동로마와 오리엔트 양식의 영향을 받았다. 궁정 의식에서도 장엄한 의식이 강화되고, 고급 직물의 수여와 같은 사산조의 풍습이 수용되었다.
하지만 짧은 전성기를 구가한 뒤에는 기나긴 몰락과 쇠퇴의 시기가 찾아왔다. 지방에 있던 하룬 알 라시드의 아들들은 내전을 일으켰고, 내전에서 승리한 알 마문 또한 타히르 조와 같은 지방 왕조의 대두를 막지 못했다.북아프리카에서는 시아파 세력[3]이 봉기하여 아프리카와 이집트를 빼앗아 파티마 왕조를 세웠다. 이란에서도 시아파 세력이 부상하여 지방 통제력을 거의 상실하였고, 마침네 이란계 시아파의 부와이흐 왕조에게 바그다드를 점령당하기까지 하나 적절한 호칭을 부여하면서 관계를 정립하여 멸망당하지 않았다.
알 무타심이 도입한 외국인 용병, 특히 투르크 용병들은 이후 자신들의 세를 키워 권력을 휘둘렀고, 칼리프는 이들의 칼끝에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이 후 동방에서 셀주크 왕조가 물밀듯이 쳐들어와 중동 전체를 석권하면서 종교적인 권위만 겨우 유지하고 세속 권력은 셀주크 왕조의 술탄에게 모조리 내주게 되었다.
셀주크 왕조가 백 년도 채 넘기지 못하고 산산히 분열되자 칼리파들이 재기를 노리기도 했다. 하지만 연달아 실패로 끝났고 셀주크 왕조의 횡포는 극에 달해 이런 칼리파들을 마음대로 죽이기도 했다. 예를 들어 알 무타왁킬은 노예에게 참수당한 뒤 시신이 거리에 버려졌고 알 문타시르는 음식과 물을 주지 않고 땡볕에 며칠 방치했다가 나중에 억지로 물을 많이 먹여 탈수증로 죽었다. 알 무타즈는 암살자로 고용한 노예에게 암살당했으며 알 카히르때 까지 거의 대부분의 칼리파들은 독살 등으로 대부분 비명횡사했다. 이 후에도 알 라디는 눈을 찔려 실명당한 뒤 감옥에 갇혀 죽었고 알 무타키는 추방되어 거지가 되어 죽었다.
셀주크 왕조가 호라즘 왕조에 의해 완전히 멸망한 뒤 잠시 칼리파가 실권을 다시 찾아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했다. 호라즘 왕조의 침입도 어찌어찌 잘 넘기고 한숨 돌렸는데 이번에는 1258년 몽골 제국이 쳐들어왔다. 이미 몽골군은 몽골 고원에서 시작해 고려, 북중국과 중앙아시아, 동유럽 등등을 싹 쓸었고 몽케 칸의 시대에 들어서 이전에 잠시 지지부진했던 세계정복을 막 재개한 상태였다. 몽골군의 지휘관 훌라구는 항복을 요구했지만 마지막 칼리파였던 알 무스타심은 처음에는 "마그리브[4]에서 이라크까지 모든 무슬림들이 날 구하러 올 것이다." 라며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머지않아 답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훌라구에게 몸소 찾아가 부하들과 주민들은 살려달라고 간청했다. 그래서 바그다드는 항복했지만 처음부터 항복하지 않은 적군에 대한 몽골군의 조치는 늘 그렇듯이 대량학살과 파괴로 끝났다. 그래도 알 무스타심 본인은 "군주는 피를 흘리면 안 된다"는 관례에 따라 자루에 넣고[5] 달리는 말들의 말발굽에 밟혀 압사시켰다.[6]
이렇게 1258년 알 무스타심이 죽으면서 아바스 왕조는 일단 멸망했다. 그러나 이집트에서 아이유브 왕조의 용병으로 일하던 맘루크들이 몽골의 침입을 저지하고 아이유브 술탄을 쫓아내 맘루크 왕조를 창건했는데, 정통성이 취약한 이들은 아바스 칼리파의 후예를 그냥 놔두지 않았다. 1261년 알 무스타심의 먼 친척[7] 알 무시탄시르 2세를 카이로로 초빙한 맘루크 왕조의 술탄 바이바르스의 배려로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계보는 부활했다. 이 때부터를 카이로 아바스 왕조[8]라고 하고 이전을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라고 한다. 그러나 실질적인 권한은 술탄에게 있었고 칼리파는 종교적 권위만 있었다. 1517년 카이로 아바스조의 마지막 칼리프인 알 무타와키 3세가 오스만 제국의 술탄 셀림 1세에게 칼리파 칭호를 넘기면서[9] 공식적으로 왕조가 소멸하였다. 이 때부터 오스만 제국의 황제는 공식적으로 칼리프를 겸하게 된다[10].
고대부터 메소포타미아는 '비옥한 초승달 지대' 로 유명했지만 이미 수천 년에 걸친 관개와 집약적 농업으로 인해 아바스 시대에만 해도 토양의 염화가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었다. 하필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은 염도가 높은 편이었고 고온지대라 물의 증발량이 많아 염화가 촉진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는 현대의 이라크를 보면 알 수 있다. [11]
여담으로 대식국(大食國)은 아바스 왕조를 말하는데 넓은 범위로는 아라비아 전체 혹은 한 때 중동, 북아프리카, 서유럽 일부, 중앙아시아까지 차지했던 우마이야 왕조을 말하기도 한다. 대식국이란 중국 당나라 때 표기된 말인데 다양한 유래가 전한다. 하나는 대식의 중국어 음역 ‘Tashi’가 아랍어나 페르시아어로 무역상의 뜻을 가진 ‘Taijr’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고 또 하나는 650년 이후 이슬람 세력이 중국의 서부 변방에서 급속하게 영토확장을 해나가자 이를 군사야욕이라 규정한 중국인들이 아라비아를 ‘영토의 탐욕자(=영토 먹기에 환장한 놈)’라는 모멸감 섞인 말인 대식으로 불렀다는 설, 또다른 하나는 풍족하게 살아서 식사량이 많아서 그랬다는 설이 있다.
3 아바스 왕조의 계보도
4 바그다드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 계보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1대 | 아부 알 아바스 | 750~754 |
2대 | 알 만수르 | 754~775 |
3대 | 알 마하디 | 775~785 |
4대 | 알 하디 | 785~786 |
5대 | 하룬 알 라시드 | 786~809 |
6대 | 알 아민 | 809~813 |
7대 | 알 마문 | 813~833 |
8대 | 알 무타심 | 833~842 |
9대 | 알 와시크 | 842~847 |
10대 | 알 무타와킬 | 847~861 |
11대 | 알 문타시르 | 861~862 |
12대 | 알 무스타인 | 862~866 |
13대 | 알 무타즈 | 866~869 |
14대 | 알 무흐타디 | 869~870 |
15대 | 알 무타미드 | 870~892 |
16대 | 알 무타디드 | 892~902 |
17대 | 알 무크타피 | 902~908 |
18대 | 알 무크타디르 | 908~932 |
19대 | 알 카히르 | 932~934 |
20대 | 알 라디 | 934~940 |
21대 | 알 무타키 | 940~944 |
22대 | 알 무스탁피 | 944~946 |
23대 | 알 무티 | 946~974 |
24대 | 알 타이 | 974~991 |
25대 | 알 카디르 | 991~1031 |
26대 | 알 카임 | 1031~1075 |
27대 | 알 무크타디 | 1075~1094 |
28대 | 알 무스타지르 | 1094~1118 |
29대 | 알 무스타르시드 | 1118~1135 |
30대 | 라시드 | 1135~1136 |
31대 | 알 무크타피 | 1136~1160 |
32대 | 알 무스탄지드 | 1160~1170 |
33대 | 알 무스타디 | 1170~1180 |
34대 | 알 나시르 | 1180~1225 |
35대 | 앗 자히르 | 1225~1226 |
36대 | 알 무스탄시르 | 1226~1242 |
37대 | 알 무스타심 | 1242~1258 |
5 카이로 아바스 왕조
대수 | 이름 | 재위기간 |
38대 | 알 무스탄시르 2세 | 1261~1262 |
39대 | 알 하킴 1세 | 1262~1302 |
40대 | 알 무스탁피 1세 | 1302~1340 |
41대 | 알 와티크 1세 | 1340~1341 |
42대 | 알 하킴 2세 | 1341~1352 |
43대 | 알 무타디드 1세 | 1352~1362 |
44대 | 알 무타와킬 1세 | 1362~1383 |
45대 | 알 무스타심 | 1377 |
복위 | 알 무타와킬 1세 | 1377~1383 |
46대 | 알 와티크 2세 | 1383~1386 |
복위 | 알 무스타심 | 1386~1389 |
복위 | 알 무타와킬 1세 | 1389~1406 |
47대 | 알 무스타인 | 1406~1414 |
48대 | 알 무타디드 2세 | 1414~1441 |
49대 | 알 무스탁피 2세 | 1441~1451 |
50대 | 알 카임 | 1451~1455 |
51대 | 알 무스탄지드 | 1455~1479 |
52대 | 알 무타와킬 2세 | 1479~1497 |
53대 | 알 무스탐식 | 1497~1508 |
54대 | 알 무타와킬 3세 | 1508~1516 |
복위 | 알 무스탐식 | 1516~1517 |
복위 | 알 무타와킬 3세 | 1517 |
셀림 1세에게 선양 |
- ↑ 안사르는 이슬람 초기에 무함마드를 도운 메디나 주민들, 하심은 무함마드의 출신 부족이다.
- ↑ 그의 개인적 능력은 평범했다는 견해도 있다. 아들들에게 나라를 분할통치하도록 하여 끝내 내전이 일어나게 된 것을 봐도...그의 시대가 황금기로 부각된 이유는 문학작품의 영향과 함께, 그의 아들 대에서 벌어진 내전 시기와 대비되어 그러하였다는 설명이 존재.
- ↑ 정확히는 시아파의 한 분파인 이스마일파.
- ↑ 지금의 리비아, 튀니지, 알제리, 모로코 등 아프리카 북서부 일대를 말한다.
- ↑ 혹은 양탄자에 말았다고도 한다.
- ↑ 하지만 이렇게 피를 흘리지 않고 죽이는 것은 몽골식으로 가장 명예로운 사형방식이라고 한다. 만약 오고타이 칸이 죽지 않고 바투의 원정대가 서유럽을 정복했다면 당시 교황도 이렇게 죽었을 것이라고 하는 이야기가 있다.
- ↑ 알 무스타심과는 10촌 사이로 항렬로는 알 무스타심의 증조할아버지 뻘이다. 28대 알 무스타지르의 장남이자 29대 칼리파 알 무스타르시드의 증손자가 알 무시탄시르 2세이고 차남이자 31대 칼리파 알 무크타피의 6대손(고손자의 손자)이 알 무스타심이다. 위에 나오는 계보도를 보면 좀 더 이해하기 쉽다.
- ↑ 또는 후아바스 왕조
- ↑ 오스만 제국은 3대째 술탄인 무라트 1세 이래 계속 칼리프를 자칭하기는 했다. 다만 어느 나라에서나 일개 반란군 수령이 왕을 칭했다고 해서 역사서에 그를 왕으로 기록해주지 않는 것처럼, 셀림 1세 이전까지의 칼리프는
진성 오스만 빠가 아닌 이상은칼리프로 인정하지 않는다. 사실 아바스 왕조가 몰락한 이후 힘을 좀 키웠다 싶은 이슬람 군주들이 으레 하던 행사(?)가, 칼리프 자칭이었다. - ↑ 간혹 중,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서는 이에 대해 '술탄-칼리프제 성립' 이라는 식의 용어를 쓰기도 하는데, 사실 술탄이 곧 칼리프가 되었다는 말을 어떻게든 간지나게(?)써본 것일 뿐 별 뜻 없다.
- ↑ 사실 이라크의 관개 체제가 완전히 무너진 것은 15세기의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