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의 역대 황제 | ||||
6대 폐제 동혼후 소보권 | ← | 7대 화황제 소보융 | → | 소량 초대 양무제 소연 |
묘호 | 없음 |
시호 | 화황제(和皇帝) |
연호 | 중흥(中興, 501년 3월 ~ 502년 3월) |
성 | 소(蕭) |
휘 | 보융(寶融) |
자 | 지소(智昭) |
생몰기간 | 488년 ~ 502년 |
재위기간 | 501년 4월 14일 ~ 502년 4월 30일 |
1 소개
소보융(蕭寶融 488년 ~ 502년, 재위 501~502)
재위 기간 동안 중흥(中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
묘호는 없고 시호는 화황제(和皇帝).[1]
2 개요
영명 6년(488년) 소란의 8남으로 태어난 소보융은 소보권의 동복동생이다. 자는 지소로 남강왕, 서중랑장, 형주 자사가 되어 7주의 군사를 감독했다.
영원 2년(500년) 11월, 소보권은 서중랑장사 소영주에게 소연을 토벌하게 하고 보국장군 유산양을 구원병을 이끌고 협조하게 했는데 소연은 소영주에게 편지를 보내 이해 관계를 정중하고 명확하게 설명하고 연합하여 건강을 공격하자고 건의했다. 이에 망설이던 소영주는 소연을 따르기로 하고 유산양을 죽이고 그의 수급을 소연에게 바치고 투항했다. 소연은 소보융을 옹립하고 건강(난징)을 포위했는데 내부 호응으로 소보권을 죽이고 정변에 성공했다.
소연은 군사들에게 국고를 봉하고 지도와 호적을 감시하게 하고 소보권의 측근 41명을 죽였으며 궁녀 2천여명을 풀어 장병들에게 시집보냈다. 또한 스스로 중서감, 대사마, 녹상서사, 표기대장군, 양주자사, 건안공이 되어 대권을 장악했으며 소보융에게 황제에 즉위하라고 권했다. 소보융은 거절하다가 결국 이듬해 정월에 상국에 오르고, 3월에 강릉에서 즉위했다.
그러나 그의 재위는 오래가지 않았다. 중흥 2년(502년) 정월에 소연이 상국, 양공에 책봉되었고 2월에 양왕이 되었으며 3월에는 소연의 강압과 협박에 의해 선양했다. 이때 제나라는 24년 만에 멸망했다.
소보융은 파릉왕으로 강등되어 고숙에 감금되었으나, 제나라의 정삭(달력)을 쓰는 것을 허락받았다.
사실 소보융은 살해당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원래 소연은 요순 시대의 이야기와 조비와 헌제 유협, 조환과 무제 사마염의 이야기를 들어 자신도 그 아름다운 이야기(...)의 주인공이 되고 싶어했으며, 자신도 제나라의 방계 황족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피를 흘리지 않을 수 있었는데, 좌우에서 소보융을 처리하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거라면서 처리하라고 부추겼고, 결국 4월에 소연은 심복 정백금에게 금설주(금가루를 넣은 술)를 내려 소보융을 죽이게 했다. 하지만 소보융은 '나를 죽이려면 금을 쓸 필요가 없다. 죽으면 가져가지도 못하는 금을 뭐하러 쓰는가? 그저 독한 술이면 충분할 걸세.'라면서 독한 술을 연거푸 마시고 깊이 취해있을 때 정백금이 그를 죽였다.
이때 그는 15세였으며 황제의 예로 공안릉에 안장되었다.
이렇게 오랜 막장 학살극 끝에 소도성 계보의 제나라 황족은 오직 말을 못하는 사술공 소보의[2]와 파양왕 소보인, 예장왕 소종[3] 세 명만이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4] 소보의는 양나라 천감 8년(509년)에 죽었는데 천수를 누리지 못한 편이었고, 나머지 두 명은 북위로 망명했다.
그나마 멀쩡했던 인물인 소보인은 소란의 6남으로 소연이 소보권을 죽이자 북위로 망명했다. 그는 북위 효문제 원공의 딸 남양장공주 원씨와 결혼해서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낳았다. 그러나 모반을 일으켜 황제를 자칭하며 제나라를 다시 세웠으나, 토벌당하자 흉노로 도주했고, 결국 잡혀 처단되었다. 장남 소열도 아버지처럼 부마였으나, 아버지의 난에 휘말려 처형되었고 차남 소권은 아우 소개와 활쏘기 놀이를 하다가 화살에 맞아 죽었다(...). 막내 소개는 장손치의 딸 장손씨와 결혼했으나, 부인 장손씨가 시어머니 남양장공주 원씨와 사이가 좋지 않자 소개와 손잡고 가노를 시켜 원씨를 죽였다. 그러나 이게 탄로나서 소개는 거열형에 처해졌고 장손씨는 참수되었다. 훗날 양나라도 멸망할 때 괴뢰정권 후량이 세워지게 되었으니 역사는 역시 돌고 돈다고 하겠다. 여하간 이로서 소도성의 후손들 역시 모두 불운한 운명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