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초고왕(드라마)

KBS 대하드라마
천추태후KBS 영웅군주 트리오
근초고왕광개토태왕
방송기간2010년 11월 6일~2011년 5월 29일
방송시간21시 40분~22시 30분
방송화수60화[1]
홈페이지링크
연출윤창범, 김영조
대본정성희, 유숭열
주인공근초고왕(감우성 분)
분류사극, 전쟁, 정치
캐치프레이즈나, 근초고는 大백제 건설을 요구받은 정복의 왕이다.
평가그래도 비주얼은 괜찮았는데...[2]

본방송 오프닝 타이틀

오프닝은 브금으로도 많이 쓰인다.

1 개요

2010년 11월 6일부터 2011년 5월 29일까지 근초고왕을 소재로 한 KBS막장드라마대하드라마. 총 60부작. 이른바 KBS 영웅군주 트리오의 첫번째에 해당하는 작품으로, 이는 과거 고려시대 시리즈를 만들어오던 KBS가 천추태후를 말아먹은 뒤 삼국시대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었다. 이미 동북공정의 파장으로 3사가 경쟁적으로 제작한 고구려 소재 드라마들이 고대사 컨텐츠에 대한 시장성을 증명한 바 있었거니와, 때마침 충청남도가 공짜 세트장 백제문화단지를 조성하는 등 백제시대의 홍보에 노력하고 있었는데 본 드라마는 이에 힘입은 바가 컸다.[3] 사실 어느 한 이글루스모든 일의 원흉의 원흉이었다 카더라

그런데 본격적인 방영이 시작되기도 전에 이미 이 드라마의 스토리에 대해서는 상당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었다. 본래 이 드라마의 제목이었던 '환서해대백제 근초고왕', 원작으로 설정된 '대륙의 한', 기획의도와 티저 예고편에 묘사된 백제의 판도, 이 모든 것이 명백히 대륙백제설이라는 환빠스틱한 역사 왜곡을 가리키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비슷한 걸 천추태후에서 당했던 사극 마니아들의 지적은 날로 가중되었고, 이에 본 드라마는 부제가 '환서해대백제'에서 '백제영웅'으로 바뀌고[4] 논란이 된 백제의 판도는 오프닝에서 삭제되는 등의 진통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시망해버린 천추태후 이래 정통사극에 목 말라 있던 대다수 대하사극 마니아들의 상당한 기대를 모을 수밖에 없었고, 이에 호응하듯 제작진도 나름대로 야심차게 방송을 개시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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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일이 일어날 것 같은 조짐을 느꼈지. 하지만 제작진이 내 말을 듣지 않았어.

결국 이 드라마는 역사적 전개를 정면으로 무시하고, 그렇다고 대중적인 민족감정에 호소하지도 못했으며, 정치극으로서의 진지함을 놓친 것은 물론이요, 캐릭터들은 너무나도 설득력이 없는데다가, 스토리의 완급 조절마저 실패한 철저한 흑역사로 남게 되었다. 쉽게 말하자면 역사 왜곡막장 드라마의 잘못된 만남이었던 것. 대하드라마를 시켰더니 막장드라마가 배달

가장 근본적인 문제점은 각본가가 50부작이라는 긴 분량으로 인해 한계에 도달했는지 근초고왕대 백제의 사회적 현안과 분위기를 스토리상으로 의미 있게 담아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실 지금까지 주로 극화되어온 조선시대에 비해 고대사회의 특성이라는 것이 생소할 법도 하기에 이는 부분적으로 감안될 수 있는 문제지만, 그럼에도 고작 유사역사학적 개설서 수준의 지식[5]으로 스토리를 쓰려니 제목은 근초고왕인데 각본은 재벌가 뺨치는 상속싸움 일변도가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나중에 나온 이런 것이나 저런 것보다는 낫지만.(...)[6] 갈수록 태산

이처럼 부실한 기반 위에서 내적으로 퓨전사극의 트렌디함을 받아들이려는 시도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당초 그리겠다던 정복군주로서의 모습은 없고 군주의 집안 싸움이나 애정 구도만이 강조되는 사태가 벌어지게 되었다. 기껏 그린다고 그려놓은 게 역사에도 없는 조나라, 연나라와의 전쟁이었으니 이건 이거대로 막장이다. 그 와중에 등장인물들도 전후 일관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면서 시청자들에게 어필하지 못하였으며, 결국 이 드라마는 KBS 대하사극에 대한 마니아들의 기대와 치열한 정복군주의 기상을 바라던 남자들의 로망을 철저히 배반하는 처참한 결과물이 되어버렸다.

그나마 근초고왕이 즉위하기 전까지의 분량은 역사상으로도 고이왕계와 비류왕계 사이의 격렬한 왕위 다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반해 실제 전하는 기록은 턱없이 부족하기에[7] 작가의 상상으로 이루어진 부분이 상당히 관대하게 수용될 수 있었으나, 근초고왕이 즉위한 36화 이후로는 상황이 달라졌다. 내용은 삼국사기일본서기에 그나마 풍부하게 남아있는 근초고왕에 대한 기록들을 정면으로 거슬러 전개되었고, 극의 흐름은 막장 드라마적 분위기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중간의 전쟁 장면을 저예산으로 처리하기 위해 테러 수준에 가까운 CG 합성을 강행한 것은 합판소문의 악명에 비견할 만한 백미.

급기야 막판에 들어서 이를 타개한답시고 투입한 아이돌 배우들은 출생의 비밀을 위해 전면으로 부상한 역사왜곡과 시너지를 일으키면서, 오히려 극에 정말로 헬게이트를 열어버리는 결과를 낳았다.(...) 이 시점에서는 첫회부터 봐온 근성 시청자들도 '사극은 재미고, 역사는 교육이다'라는 마인드로 보기가 힘들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 스토리는 시청자 게시판과 디시 갤러리를 중심으로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으며, 결국 막방 10.2%의 저조한 시청률로 마무리되었다. 주연인 감우성과 김지수는 종방연에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는데 사유는 각자 해외여행과 감기몸살이었다고 한다.[8]

결국 이런 막장사극의 문제점은 차기작에서 폭발하기에 이른다.

2 줄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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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수상세
1~13부여준의 역습과 NTR341~344년
비류왕에게는 본처인 해소술 소생의 부여찬과 후처인 진비 소생의 부여구가 있다. 무능한 부여찬에게 실망한 비류왕이 요서에서 소금장수로 살아가던 부여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자, 이에 해소술은 과거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부여준과 영합하여 남편 비류왕을 독살해버린다. 하지만 부여준은 부여찬을 왕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깨고 그 자신이 계왕으로 즉위하고, 그 대신 해소술을 자신의 왕후로 맞아들인다. 이 와중에 부여준이 진비에게 죄를 뒤집어씌우자 진비는 자살함으로써 자신이 모든 죄를 뒤집어쓴 채 부여구를 살리고, 이에 부여구는 다시 요서로 추방된다.
14~36부여구의 역습과 NTR344~346년
부여준의 딸 부여화는 본래 부여구와 사랑하는 사이였지만, 고국원왕과 정략결혼을 맺음으로써 부여구와 헤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부여구도 요서로 추방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요서에서 칠종칠금과도 같은 대범한 방법으로 부여의 유민들을 포섭한 부여구는 요서군공이라는 국제적으로 무시하지 못할 세력으로 성장하고, 이를 기반으로 진씨 가문과 연합해 계왕을 몰아낸 뒤 자신의 왕위를 되찾는다. 한편 분열된 백제를 침공하려 기회를 엿보던 고국원왕은 역시 부여구에게 관광당하고, 부여화마저 부여구의 품으로 돌아가버린다. 이게 뭔 보르테 같은 전개? 이에 부여구는 근초고왕으로 즉위하며 본부인 홍란이 아닌 부여화를 새 왕후로 맞아들인다.
37~46부여화의 수난과 잃어버린 왕자346~354년
이윽고 부여화와 홍란이 거의 동시에 아이를 임신한 사실이 밝혀지고, 특히 부여화는 고국원왕의 아이를 가졌다는 루머가 퍼지기에 이른다. 이건 주치잖아? 마침 전연이 요서로 침공해 들어오자 근초고왕은 이에 맞서기 위해 도성을 떠나고, 부여화는 아이를 조산하면서 루머에 힘이 실려 점점 더 궁지에 몰린다. 한편 절치부심하던 부여찬은 이 기회에 부여화의 오빠들을 꾀어 반란을 일으키지만 적절히 근초고왕이 돌아오는 바람에 망했어요. 이 난리통에 부여화의 아들은 궁 밖으로 빼돌려지고, 이건 또 궁예네?! 그러나 아들이 죽었다고 생각한 부여화는 근초고왕에게 원한을 품는다.
47~60부여화의 흐콰와 내가 니 아비다369~375년
근초고왕이 마한을 정복하고 돌아와 전제왕권을 내세우자 이에 반발한 진씨 가문은 부여화와 영합한다. 한편 근초고왕은 대장장이로 살던 부여화의 아들을 발견해 왕자 구수로 삼고, 구수는 직후 벌어진 고구려의 침공에서 홍란의 아들 부여근과 경쟁적으로 전공을 세운다. 이 사이 진씨 가문과 부여화가 도성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구수는 비로소 출생의 비밀을 알고 꿈에 그리던 어머니 부여화를 만나지만 그녀는 이미 불치병에 걸려 있었던 상태.(...) 부여화가 죽자 반란군은 붕괴되고 근초고왕은 그들을 모두 용서한다. 부여근이 사랑하는 진구와 함께 야마토로 떠나자 이에 구수가 태자가 되고, 근초고왕은 고구려로의 마지막 진군을 앞두고 천수를 다한다.

이게 사극이야 막장 드라마야

3 특징

3.1 비판점

자세한 비판점들은 근초고왕(드라마)/비판 항목 참고.

제작진 중 자문 역인 김기섭 씨는 연기자. 즉 고증자문이 아니라 연기자문이다. 따라서 제작진 가운데 역사에 대한 고증을 전문적으로 담당한 사람은 없다는 점에서 이 드라마가 얼마나 역사에 무지한 채 전개되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성공을 거둔 정도전이 김영수 교수를 고증자문으로 앉히고 이덕일은 넘어가자(...) 그 저서 '건국의 정치'를 많이 참고했다고 말한 점이나, 이외에도 이영 교수의 논문 '홍산, 진포, 황산대첩의 역사지리학적 고찰', 이상훈 박사의 논문 '고려말 왜구토벌의 전략과 전술' 등의 내용을 극에 적극 반영한 것과 천양지차.

참고로 이때부터 매회 예고편에 '이 프로그램은 시청자 여러분의 소중한 수신료로 제작되었습니다'라는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9] 그런데 극의 낮은 완성도도 그렇거니와 지난 2010년에 KBS 수신료 인상 논란도 있었고, 무엇보다 이것이 MBC에서 제작되었던 김수로의 '실제 역사와는 관련이 없습니다'란 자막[10]과 너무나도 대비되는 모습이라 오히려 양심도 없는 수신료 도둑이라며 시청자들에게 어그로를 끌어버렸다.(...) 아무래도 제작진의 미래는 밝지 않을 듯하다.

3.2 호평받을 만한 점

갑옷을 비롯한 각종 복식과 생활상의 재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대부분의 삼국시대 드라마가 보여준 개판 고증과 다르게 크게 일신된 면모를 보여준 수작이라고 할 수 있다. 중반 이후 시망한 스토리와 역사 왜곡만 아니었으면, 이 점만 봐도 최강의 명작으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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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근초고왕의 백제 조정드라마 근초고왕의 위례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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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무용총의 접객도드라마 광개토태왕(반면교사)

회의나 연회와 같은 여러 공식석상에서 각 신료들이 모두 개인 탁자를 놓고 의자에 앉는 등 입식생활의 모습이 나타나는데, 이는 고분벽화를 바탕으로 사료의 내용을 충실히 복원한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백제의 일각에서는 무릎을 꿇거나 책상다리로 앉아있는 등 좌식생활이 연출되기도 하는데, 이는 고대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로부터 역추적한 것으로 보인다. 전자는 북방계(부여), 후자는 남방계(삼한)의 생활상을 재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단지 이것만으로도 고대적인 분위기가 엄청나게 살아났다. 이는 나중의 대왕의 꿈이나 칼과 꽃의 좋은 선례가 되었다.

또한 용어상 주서(周書)의 기록에 따라 백제에서 왕을 가리키던 '어라하'라는 단어를 충실히 복원해서 쓰고 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데, 조명주 작가의 전작 자명고에서도 백두산을 가리키던 '불함산'이라는 말을 복원해서 "은혜가 불함에 닿았다"는 식의 표현이 등장했음을 상기하면 나름대로의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다만 이와 비교되게도 왕비를 가리키던 '어륙'은 왕후니 왕비니 하는 중국식 용어에 밀려 등장하지 않았고,어육이 떠올라서 그랬을까? 기층민들이 왕을 가리키던 '건길지'는 길지(키시)가 존칭인지도 몰라서 아지키시(아직기)를 하나의 이름으로 사용하는 병맛을 보여주었다. 차라리 그냥 아직기라 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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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구려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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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구려 관모드라마 근초고왕의 백제 관모

의상도 기존의 삼족오와 인동초 일색에서 벗어나 격자무늬, 와당무늬, 불꽃무늬와 같은 다양한 문양을 접목시킨 점에서 의미 있게 평가된다. 고구려의 관모는 사료에 근거하여 왕이 쓰는 백라관(白羅冠)과 대가들이 쓰는 책(幘)을 구현하였으며, 백제의 관모로는 오우관으로 흔히 알려진 변(弁)과 관식을 전면적으로 사용하여 역시 당대상에 가까운 훌륭한 고증을 보여주었다. 다만 고구려의 책은 사료에 근거하여 위의 덮개(屋)가 없어야 하는데,[11] 이것이 구현되었고 구현된 것도 실제 고증과는 거리가 있는 모습이다. 물론 그런데도 엉망진창인 연개소문이나 대조영의 관모와 비교해보면 이쪽이 월등히 우수하다. 주몽은 언급할 가치도 없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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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근초고왕의 고국원왕통구 12호분 벽화드라마 주몽의 주몽(반면교사)
쌍영총 벽화

갑옷의 경우에도 고구려의 갑옷 고증은 모든 시청자들의 찬사를 받았다. 물론 갑찰의 수결법이나 형태 등 세부적인 부분[12]은 오류가 있고, 부분적으로 대조영의 갑옷이 재활용되긴 했지만, 새로 제작한 갑옷들은 찰갑의 전체적인 형태를 고증에 맞추어 매우 훌륭하게 재현한데다가 투구 역시 최대한 벽화에 맞추어서 백제가 주연인 드라마임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군의 본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었다. 더욱이 고구려군 병사들의 모습도 벽화에 맞추어서 잘 재현되었고 갑옷도 일신되는 효과를 맞았다.

그러나 후속작 광개토태왕에서는 이처럼 훌륭한 고증을 보인 근초고왕의 갑옷을 모두 버리고, 대조영과 천추태후 때부터 지겹도록 우려먹었던 중국식 갑옷, 아니 중국식 갑옷도 아닌 정체불명의 갑옷을 재활용하는 악수 중의 악수를 두고 말았다. 틀렸어 이제 꿈이고 희망이고 없어 그나마 다다음 후속작인 대왕의 꿈에서 다시 사용됐다는 점이 위안이라면 위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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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근초고왕의 비류왕과 부여구(나중의 근초고왕)의 갑옷광주 출토 투구
고흥 출토 갑주 복원품

다만 백제의 갑주에 대해서는 너무 일본풍이라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했다. 그러나 백제 갑옷의 경우 애당초 자료가 빈약하기도 하거니와 한반도 남부의 고대 갑옷들이 대부분 판갑 형식이라 드라마에 나오는 갑옷이 반드시 틀렸다고만 할 수는 없다. 정확히 말하자면 고대의 일본과 한반도 남부가 공통적으로 발전시켜 온 것이다.[13] 물론 시간이 흐름에 따라 크고 작은 변화가 나타나지만 일본에서 갑옷의 기본적인 형태는 이 모습을 유지해왔다. 일본 자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 갑옷의 모습을 차용한 중국 84부작 삼국지와는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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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에 나오는 근초고왕의 갑주중국과 한반도 남부의 전형적인 소찰주들

그럼에도 이러한 문제 제기를 비웃기라도 하듯, 비류왕이 사망한 뒤의 극 중반부에 들어서는 판갑과 찰갑을 결합한 형태의 갑옷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 판갑이 백제의 갑옷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는 하지만 거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고, 실제로 당시 백제의 근거지이던 한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유물들,[14] 그리고 고구려와 백제 문화의 관계성을 고려하면 찰갑으로 고증하는 게 더욱 정확한 고증인 것은 맞다. #

또한 이러한 갑옷 고증의 변화와 더불어 백제의 투구도 이른바 '일본식'의 미비부주에서 소찰주(小札胄)로 바뀌었는데, 이러한 소찰주는 중국에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래되는 양상이 확인되는 만큼 백제가 그 중간과정에 있을 것이 유력시되기에 가히 적절하고 유효한 고증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다만 투구를 구성하는 찰갑편들을 끈으로 엮지 않고 리벳으로 고정시킨 점은 옥의 티. # # 이러한 갑옷들은 역시 이후의 대왕의 꿈에서 백제의 갑옷으로 활용되어 역시 이후의 드라마들에 좋은 선례가 되었다.

더불어 이와 관련해 근초고왕의 요서경략 부분에는 진성과 고평성을 수비하는 조군의 모습이 일부 중국에서 제작된 영화 적벽대전의 것을 수입한 것이어서 주목되는데, 애초에 적벽대전의 갑옷이 남북조 시기의 것을 바탕으로 만들었다고 하니 이를 놓고 보면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다만 이후 전연의 갑옷은 대조영 시기 당나라의 갑옷을 그대로 재사용했는데, 이는 이후 광개토태왕에서의 흑역사 고증으로 이어지니 도저히 좋게 평가해줄 수가 없다. 선비족 연나라의 갑주는 차라리 고구려의 갑주를 차용해서 쓰는 것이 고증에 맞았다. #

4 등장인물

이름은 공식 홈페이지 기준으로 작성. 하도 이름을 바꿔대서 말이지

출연진과 시청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위키백과 근초고왕 (드라마) 문서 참고 바람.

4.1 실존 인물

비류왕과 진비 진사하의 아들. 백제 13대 어라하
백제 11대 어라하. 부여찬, 부여휘, 부여산, 부여구, 부여몽의 아버지.
분서왕의 맏아들로 백제 12대 어라하. 부여화의 아버지.
미천왕의 아들로 고구려 16대 태왕.
고국원왕의 맏아들. 훗날 고구려 17대 태왕이 된다.
고구려 국상. 창조리와 함께 봉상왕을 몰아내고 미천왕을 세웠다.

4.2 가상 인물

비류왕과 해비의 적장자. 부여구의 큰형.
비류왕의 아버지[21]이자 부여구의 할아버지.
진씨 가문의 수장으로 내신좌평. 부여구의 고종사촌 동생.
해씨 가문의 수장으로 해건의 아버지. 계왕 대의 내신좌평.
해씨 가문의 수장이자 조정좌평. 해녕의 아들이자 부여준의 양자. 부여화를 흠모하고 있다.
  1. 50부작이었으나 후속 작품 준비 등의 문제로 10부 연장되었다. 처음에 70부작이라고 했던 것은 방송국에서 70부작이라고 홍보했기 때문이다. 70부작으로 홍보하고, 정작 작가, 배우와는 50부작으로 계약했다.
  2. 이 드라마는 갑옷 고증은 엄청난 고평가를 받았다. 후속작 광개토태왕(드라마)에서는 이렇게 기껏 고증한 갑옷을 버리고 도로 바람의 나라(드라마)식의 국적불명의 갑옷을 사용했다가 욕을 엄청나게 먹었고, 이에 뭔가 깨달은 게 있었는지 대왕의 꿈에선 다시 여기의 갑옷이 고구려군 갑옷으로 재사용되었다. 이외에도 생활상 관련 고증은 상당히 볼만한 편이나 문제는 스토리의 개연성였다.
  3. 실제로 이 드라마는 별도로 막 신축된 백제문화단지의 재현 시설을 고스란히 세트장으로 활용하였다.
  4. 하지만 부를 때에는 대체로 부제 없이 '근초고왕'이라고만 하며, 디지털 TV 방송정보와 편성표에도 '근초고왕'으로만 표기된다.
  5. 유사역사학의 주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가 생산수준과 사회의 조응, 사회적인 계층화와 분업화, 국가의 영역화와 투영화 따위의 과정이 모조리 생략된 채 역사의 시작부터 근대적 의미의 대제국을 설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다 보니 강역이라는 외연만 뻥튀기되어, 사회 내적인 역동성이나 다양성 따위에 대한 흥미는 바닥을 기게 된다.
  6. 이 두 작품은 고증 따위는 말 그대로 철저하게 씹어드신데다, 스토리도 자신들이 뭘 언급하고 연출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역사적 사실이 아닌 그야말로 대체역사물을 보여주는 수준으로, 기본적인 뼈대부터가 안드로메다로 날아갔다. 근초고왕은 그에 비하면 초반에는 몇몇 발 CG를 제외하면 그리 나쁘지 않았고 후반부에 들어 보여줘야 할 정복 전쟁은 날로 드신 채 왕실의 막장 드라마만 찍어서 그렇지 스토리의 틀 자체는 날아가지 않은 편. 분량은 많은데 사료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결국 이런 문제점들이 터진 것이다.
  7. 비류왕이 죽었다, 계왕이 즉위했다, 계왕이 죽었다, 근초고왕이 즉위했다. 말 그대로 이게 전부다.
  8. 본 드라마에서 고증과 함께 배우들의 연기력만큼은 꽤 봐줄만은 했다. 대왕 세종부터 그나마 나아지기 시작했던 사극 연출 우려먹기가 상당히 적어졌으며,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9. 비단 KBS 대하드라마만이 아니라 여타 프로그램에도 전반적으로 이와 같은 자막이 뜨기 시작했다.
  10. 근데 그렇게 대놓고 이야기한 때문인지 김수로의 고증은 주몽을 우려먹기한 캐안습이고, 갑옷에 한해서는 근초고왕이 최소한 계백을 압도하는 고증을 보여준다. 고증 지못미 계백...
  11. 이는 중국의 양관(梁冠)으로부터 유래한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양관을 둘러싸는 형태로 발전한 것이 책(幘)이며, 이것이 점차 대형화되면서 배보다 배꼽이 커진 격으로 하나의 독자적인 관모처럼 취급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의 금관조복을 통해서도 그 형태를 확인할 수 있다.
  12. 고국원왕의 종장판투구가 만곡형이 아니라는 점이나 목가리개가 없는 점, 흉갑과 대퇴, 하퇴갑의 갑찰이 외중식으로 교차하지 않고 타일처럼 가지런히 붙어있는 점, 상박갑의 갑찰이 내중식인 점 등 자잘한 오류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 옆 사진의 주몽에 비하면 더없이 훌륭한 고증이다.
  13. 일본과 한반도 남부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판갑(단갑)의 기원에 대해서는 일본에서 단갑의 기원인 목갑이 출토되었고, 단갑의 발전 양상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계속해서 출토되었으므로 일본에서 기원한 갑옷이라는 견해가 있다. 한반도 남부에서 출토되는 판갑들은 후기의 완성된 양상의 유물들만이 보인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는 제철 기술이 없었으므로 철갑옷은 당연히 한국제라는 것이 우리 학계의 의견인데, 일본이 가야 및 백제와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는 것을 생각하면 철괴를 수출하여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다는 추정도 가능하다.
  14. 판갑(단갑)의 최북단 출토지는 화성 사창리고분군과 음성 망이산성이며, 그 이북에서는 더 이상 판갑이 출토되지 않고 있다. 한편 몽촌토성에서는 뼈로 만든 찰갑편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일본에서 단갑의 기원인 목갑이 출토된 것처럼 한강 유역에서는 찰갑의 기원인 골갑을 발달시켜 왔음을 증빙한다.
    파일:Attachment/근초고왕(드라마)/Bone.jpg
  15. 2010년 9월부터 PD들과 싸우고 촬영에 펑크를 내는 등 구설수에 올랐다. 심지어 KBS PD회의에서 하차를 요구할 정도였다고.
  16. 빨간펜 CF를 찍었다.2015년 기준 대화중학교(경기)에 재학하고 있으며 중학교 2학년생이다. 그러나 아역배우 활동을 중단하면서 사고뭉치가 된 듯.
  17. 이 드라마를 촬영하기 직전, 음주운전을 하다와 택시와 박고 뺑소니를 친 사고를 쳤다. 이 때문에 누리꾼들은 이 드라마에서 김지수를 빼버리라고 계속 항의를 했으나...결국 그냥 출연했다. 이후 김지수는 이 사고에 대한 처벌로 벌금 1000만원 형에 처해졌다. 거기다가 한창 드라마 촬영 도중에는 얼굴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 촬영을 하지 못하겠다고 하는 병크를 저질렀다. 결국 김지수의 얼굴의 멍은 KBS 영상효과팀에서 일일이 다 지워야 했다고(...)
  18. 사실 부여화 캐릭터가 욕을 많이 먹은 것은 공감 불가(...)의 이유도 있겠지만 김지수의 출연을 고깝게 여긴 누리꾼들이 편견을 가지고 바라본 탓도 크다. 방영 당시 공식 홈페이지 게시판을 보면, 캐릭터에 대해 공감이 안간다는 비판보다는, 이 배우 왜 계속나오냐는 반응이 대다수(...)
  19. 근초고왕에게 실제로 진씨왕후가 있었는데 드라마상에서는 원래 위씨였다가 진씨가문에 입양돼 진씨가 되었기 때문에 실존으로 봐야할지 가상으로 봐야할지 사실 애매하다. 어쨌든 배우가 귀엽고 당찬 역의 성격과 외모싱크로도 높은데다 연기도 최선을 다해 잘 해 냈고 그나마 공감가게 잘 만든 캐릭터라 시청자들에게 드라마의 모든 캐릭터 중 가장 높은 인기를 끌었다. 홍란이 때문에 본다는 사람도 많았을 정도. 야인시대의 나미꼬 역, 연개소문에서 고소연 역으로 은근히 사극 출연이 잦다.
  20. 선덕여왕의 미생을 연상해서는 안된다. 미생과 위비랑은 모든 면에서 정 반대의 인물이다.
  21. 역사에서는 비류왕이 사반왕의 동생이라고 하지만 비류왕이 구수왕이 죽은 뒤 70년 만에 즉위를 했고 40년 동안 재위를 했기 때문에 사실이라고 보기 어렵다. 드라마상에서 흑강공이 초고왕계의 후손이고, 책계왕과 왕위를 다투었다고 나왔기 때문에 흑강공이 사반왕의 동생이고, 비류왕을 그 아들로 만든 겄 같아 보인다.똑같은 경우인 고이왕은 그대로 초고왕의 동생으로 했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