束伍軍
조선 후기 속오법에 따라 편성된 군사 제도와 이를 토대로 창설된 군대의 명칭.
임진왜란은 조선 역사에 있어서 최초로 전면전, 총력전의 양상을 띤 전쟁이었고 조총같은 신무기와 새로운 전술이 등장한 전쟁이었다. 따라서 조선은 포수를 양성한 필요성을 느꼈고 전국적으로 군사조직을 재건하려 하였다.
이런 필요성에 따라 창설된 것이 중앙군에는 훈련도감으로 대표되는 오군영, 지방군으로는 속오군이었다. 1594년 (선조 27년) 유성룡의 건의로 처음 창설되었고 진관체제가 재정비되면서 전국적인 편성이 이루어졌고, 정유재란 때 왜군을 저지하는데 효과를 발휘하였다. 그러나 쌍령 전투로 대표되는 운영의 미숙함으로 전면전에는 별 쓸모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고, 결국 병자호란 당하기만 하다가 사실상 붕괴되었다. 이후 양-천으로 분리되고 조선군의 주력은 모병제 중심의 오군영(중앙군)으로 넘어갔다.
각 지방의 주민은 대부분 속오군에 편성되었는데 이들은 농병일치제에 따라 평시에는 농사와 훈련에 전념하다가 유사시 소집되어 국방에 동원되었는데 물질적 급여는 없었고 부분적으로 보인의 지급이 이루어졌다. 다시말해 전국의 남성을 사실상 예비군화 시켜놓고 국가의 월급은 없었다는 말. 사실 조선에서의 군역은 세금의 일종이다. 세금을 내는 마당에 월급을 받는다는건 말이 안되기에 당연한 일이긴 하다.
겨울철 농한기에 속오군을 소집하여 무예훈련과 진법훈련을 시행하였고 이들을 이끄는 영장(營將)은 무관이 임명되었고 군사훈련에만 종사하였다. 이런 영장제도가 실시되면서 지방의 수령이 독점했던 행정권과 군사권이 일부 분리되었다. 수령은 속오군의 소집과 동원만을 전담하고 훈련과 실전 부분은 영장이 전담한 것이다.
그러나 이후 재정문제와 무관의 부족 등으로 전담영장제도가 폐지되면서 속오군의 훈련은 유명무실해졌고, 훈련하려고 모여도 양란 전처럼 훈련보다는 성곽 수리 등 여러 잡일에 동원되는 모습을 보였다. 여기에 농민들의 경제적 문제와[1] 운영경비가 부족해짐에 따라 소집훈련이 거의 폐지되다시피 했고 영조 이후에는 속오군에 양인은 거의 빠져나가고 천인만이 남아 아예 국가 공식문서에조차 천예군(賤隷軍)[2]이라 기록될 정도가 되었다. 물론 천예화된 이후에도 양인과 천인의 합동 편성 자체가 바로 없어진 건 아니지만, 기본 관리부터 엉망이니[3] 제대로 된 전투능력은 기대할 수 없었다. 더욱이 노비들을 데려간다는 것은 노비들의 주인들 입장에선 자신들의 경제력과 직결되는 노비들이 군역을 지느라 생산활동이 중단되니 노비들이 동원되는 것을 결코 달가워하지 않았고, 국가에서 노비들을 동원하기 위해 주인에게 양해를 얻으려 오면 갖은 편법으로 회피하거나 심지어는 쫒아버리기도 했다. 물론 역으로 노비들이 속오군에 입대하는 것으로 자신의 위신을 과시하기도 했지만, 이런 경우에도 주인집과 떨어져 사는 외거노비, 그것도 집안이 한미해 노비를 거느렸음을 드러내 집안을 과시하고 싶은 자들을 중심으로 이런 현상이 있었을 뿐 주인과 같이 사는 솔거 노비들은 동원 징발되는 비율도 낮았고 잘 걸리지도 않았다.[4]
이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 후기 지방군의 주력이었던 속오군은 점차 주력 자리에서 밀려나게 되었으며, 표하군[5], 아병[6], 마병[7]이나 이노작대[8] 등의 각종 보충병들이 늘어나게 된다.[9] 하지만 이들 보충병들은 대부분 각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긁어모은 병사들이며, 속오군을 완전히 대체하지는 않았다.
거기에 중앙군과 감영, 병영, 수영에서 다투어 군적 자원을 확보하려 하면서 이미 속오군에 편제된 사람들을 이중으로 편제하여 이중부담이 지워지고 점차 속오군은 제2의 군세처럼 되어 양인은 쌀 20두, 천인은 15두를 납부하고 군역을 면제받으려 하였다. 조정도 이를 묵인했는데 어차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자들을 소집해 봐야 쌍령 전투 같은 일만 다시 벌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10] 이로 인해 이인좌의 난이나 홍경래의 난 같은 대규모 반란을 맞았을 때 지방에서는 동원가능한 병력이 없어 초기에 진압하지 못하고 의병과 중앙군의 지원으로 난을 진압하여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보충병들이 마냥 종이 호랑이는 아니었다. 당장 홍경래의 난 때도 의주와 안주에서 관군들이 작정하고 붙자 10년이나 준비했다는 반군이 패배했고 홍경래군 최후의 전투인 정주성 전투에서 동원된 관군도 서울 순무영[11]의 정예군과 각 지방군의 연합군이었다.
비슷한 것으로 수군에는 능로군(能櫓軍)이란 것이 존재했다. 이들은 해리(海利)만을 담당했고, 1년에 한 번 점검사열이 있을 뿐이었다.- ↑ 농민들이 자기 스스로 먹거리와 활동경비를 가지고 와서 군복무를 하는 게 속오군이니, 자연히 농민이 기근 등으로 경비를 부담할 여력이 없는 상태가 되면 객관적으로도 운영이 제대로 될 수가 없고, 규정상으로도 이럴 때는 속오군으로 동원하지 않았다.
- ↑ 해석하자면 천한(賤) 종(隷, 혹은 죄인)들의 군대라는 뜻.
면제받지 못한 죄인. 예나 지금이나 군인은 참 서럽다... - ↑ 이건 속오군 제도의 근본적인 모순이었다. 돈은 없는데 국방을 포기할 순 없고, 근데 그러자니 병사 개개인이 군 유지비를 감당해야 하는 꼴이니 안정적인 관리가 불가능해지고...정작 조선 중기부터 국민들의 노동력을 징발하는 부역은 점차로 나라에서 동원자에게 임금을 지급하는 형태로 변한 것하고는 대조적.
- ↑ 해당 부분 참조글 링크. 해당 글은 손병규 저, 휴머니스트 출판 <호적 1606-1923, 호구기록으로 본 조선의 문화사>를 참조하고 있다.
- ↑ 標下軍. 어영청의 대장이나 각장관에 딸린 수하병을 말한다.
- ↑ 牙兵. 아하친병(牙下親兵)의 준말. 조선조에 각 군사기관이 다른 부역을 면제받는 대신 관할하는 지방의 양인이나 공노비/사노비를 징발해 만든 병사. 각 군사기관의 대장의 수행이나 둔전 관리/경작을 맡았다.
- ↑ 馬兵. 기병을 말한다.조선후기 문헌의 마병은 훈련도감 소속 기병을 말하지만, 조선시대 군사 문헌인 '해서군병총록성책'에 따르면, 황해도 지역 마병의 경우 아병과 마찬가지로 대장 직속으로 보인다.
- ↑ 吏奴作隊. 조선시대에 속오군과는 별개로 각 고을의 노비와 구실아치(조선시대 각 관아의 벼슬아치 밑에서 잡다한 일을 맡는 사람)등을 모아 편성한 부대.
- ↑ 참조글 링크. 해당 글은 유동호 박사의 충북대학교 2014년 박사학위 논문인 '조선후기 지방군제의 변화와 하삼도 병영 운영'(朝鮮後期 地方軍制의 變化와 下三道 兵營 運營)을 참조하고 있다.
- ↑ 실제로 쌍령 전투의 패전 이후 조선은 훈련도감을 비롯한 모병제 정규군 위주로 급속히 바뀌어간다. 문제는 그게 19세기 이전까지만 유지가 됐다는 것과 전근대 시스템의 개선에 실패하여 수만의 모병 병력 이상의 군인 확보가 어려웠다는 것이다.
- ↑ 참고로 순무영은 반란이 일어났을 때 임시로 조직되는 군영이었다.
결론은 전문가 앞에서는 10년 갈고닦은 걸로는 답이 없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