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력전

This war differs from other wars, in this particular. We are not fighting armies but a hostile people, and must make old and young, rich and poor, feel the hard hand of war.

특히 이 전쟁은 다른 전쟁과 다릅니다. 우리는 군대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적대적인 국민과 싸우고 있으며, 노인이든 젊은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전쟁의 고통스런 손길을 느끼게 해 주어야만 합니다. - 윌리엄 테쿰세 셔먼

In Japan they would be set up like this: they’d have a factory; and then the families, in their homes throughout the area, would manufacture small parts. You might call it a home-folks assembly line deal. The Suzuki clan would manufacture bolt 64; the Harunobo family next door might be making nut 64, 65, or 63, or all the gaskets in between. These would be manufactured right in the same neighborhood. Then Mr. Kitagawa from the factory would scoot around with his cart and pick up the parts in proper order.

일본의 도시란 이런 모양이다. 공장이 있다. 그 옆에 민간인들이 살고 있고, 그 사람들은 자기네 집에서 조그만 부품들을 만든다. 그걸 가내수공업이라고 할 수 있겠지. 스즈키네는 64호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64호, 65호나 63호 너트나 다른 잡동사니를 만드는 식이다. 그러면 키타가와 씨가 그걸 정리해다가 공장으로 가져가는 거다. - 커티스 르메이

There are no innocent civilians.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 - 커티스 르메이

Wollt ihr den totalen Krieg? Wollt ihr ihn, wenn nötig, totaler und radikaler, als wir ihn uns heute überhaupt erst vorstellen können?

여러분! 총력전을 원하십니까? 역사상 가장 급진적이고 총력적인 전쟁이 되기를 원합니까? - 요제프 괴벨스

1 개요

總力戰. Total War. 국가가 전쟁 수행에 대해 가지는 국력을 총동원해 싸우는 형태의 전쟁. 전면전,[1] 전체전쟁(全體戰爭)으로도 부른다. 완전한 반대말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반대의 개념으로 한정전쟁, 제한전(limited war)이 있다. 소모전과 더불어 약소국이 강대국을 못 이기는 가장 큰 이유. 총력전은 국가가 전쟁할 때 군사력뿐만 아니라 그에 수반하는 모든 능력을 전시의 체제로 운용해 싸우는 전쟁의 형태이다.캐삭빵 이 단어를 처음 쓴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의 동부전선 사령관이었던 에리히 프리드리히 빌헬름 루덴도르프(Erich Friedrich Wilhelm Ludendorff)로, 1935년에 저술한 《총력전론(Der Totale Krieg)》이란 저서에서 처음 썼다. 그러나 전략 사상으로서는 클라우제비츠전쟁론에 그 기원을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총력전은 남북전쟁에서 이미 형태를 볼 수 있어 군사 분야뿐만이 아니라, 경제 동원·해상 봉쇄·전부 동원 등 모든 국력을 전쟁에 모았다. 말하자면 전쟁 수행에 참여할 가능성이 전혀 없는 어린아이나 중증 장애인, 또는 죽을 날만 기다릴 만큼 고령인 노인들을 빼면 무고한 민간인이 없고 전쟁 수행원만 있다. 저기의 스즈키네는 군용 너트를 만들고, 그 옆집의 하루노보네는 군용 볼트를 만든다.

2 성립 과정

2.1 전근대

중세 이후 근대까지만 해도 유럽에서 전쟁은 일상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치는 일은 비교적 적었다. 다시 말해 전쟁에 민간인이 대규모로 휘말리거나 영토 전체가 전화에 휩싸이기에는 전쟁의 규모가 너무 작았고 그 영향도 전투가 벌어지는 곳으로 한정했다. 유럽에서도 고대 그리스페르시아의 전쟁(페르시아 전쟁), 로마카르타고의 전쟁(포에니 전쟁)은 당연히 민간인들도 동원한 광의의 총력전이었다. 이 당시는 '패전국의 국민=노예'가 되는 것이 '상식'으로 여겨지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세 이후 유럽의 소왕국, 공국들은 병력규모부터 상대 국가를 멸절시키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또한 피지배층의 민족의식이 옅었으며, 같은 크리스트교라서 문화도 공유했다. 고대에는 민간인을 닥치는 대로 노예로 삼아서 팔아먹어서 돈을 벌 수 있었지만, 크리스트 교도는 교리상 서로를 노예로 삼아서 팔아먹을 수 없다. 게다가 서로에게 자비도 베풀어야 하는 등 중세의 전쟁은 막상 보면 '전쟁'임에도 아주 많은 '규칙'이 있었다. 규칙이 깨지는 일도 있었지만 상당한 제약이 있었다. 그래서 어차피 점령하면 자국민으로 편입시켜야 하니 불필요하게 민간에 피해를 주는 일은 피했으므로 피지배층들도 전쟁이 일어나도 그냥 지도자가 바뀌는가 보다고 생각했다. 일본 무사정권 아래서의 전쟁, 특히 센고쿠 시대의 전쟁도 이와 비슷하다.

반면 전혀 다른 외세와 전쟁이 있다면 어디서나 거의 피지배층은 격렬히 저항했고 민간인들도 무관하지 않았다. 중세 유럽에서도 오스만 제국과 맞서 싸운 동유럽은 총력전에 가까웠고, 중세 유럽 국가들간의 전쟁과 달리 서로의 병력이 몇 만은 기본에 10만을 넘어가는 때도 있었다. 예를 들어 백년전쟁아쟁쿠르 전투에서는 겨우 잉글랜드군 7,8천과 프랑스군 2,3만을 동원했지만, 같은 15세기 동유럽의 베오그라드에서는 6만이 넘는 헝가리군이 10만이 넘는 오스만군과 싸웠다. 또, 동유럽의 15년 전쟁에서는 기독교 국가 연합군 10만 명이 오스만군 18만 명과 싸웠다. 동양의 전쟁들과 비교해도 규모면에서 뒤지지 않았고, 당연히 이러면 민간인들도 총동원했다.

동양에서는 춘추전국시대 이후 거의 늘 총력전이었다. 이를테면 진나라 백기의 무차별적인 학살이나 고려, 남송, 서하대몽항쟁[2], 조선임진왜란처럼. 고구려와 수·당의 전쟁은 전근대 시기 가장 큰 규모의 총력전[3] 이었고, 고려 역시 요나라와의 전쟁 때 거의 2~30만 규모의 병력을 동원한 걸 보면 사실상 총력전이었다고 봐도 무방하다.[4] 그러나 이런 넓은 의미의 총력전은 민간인들도 전쟁에 무관하지 않다는 점에서 그렇고, 일반적으로 말하는 총력전은 후술하는 19세기 이후 나타난, 국가의 역량을 총동원하는 전쟁을 뜻한다.

2.2 근대

근대 이후 유럽에서 전쟁의 양상은 2번의 큰 변화를 겪는데, 첫 번째 변화는 프랑스 혁명 당시 프랑스에서 징병제를 실시해서 군대의 규모를 폭발적으로 확대한 것이다.[5] 이에 따라 전쟁 자체도 사회에 더 깊은 영향을 미쳤고, 거대한 규모의 군대를 먹이며 입히고 무기를 쥐어주며 훈련시키는 일 또한 중대한 산업적 과제였다. 이후 나폴레옹 전쟁 후반에 프로이센에서 마침내 징병과 예비군을 결합하는 본격적인 징병제를 실시했다. 그러나 이때까지는 아직 총력전의 양상은 없었다. 비록 군대의 규모가 팽창해서 식량 등의 조달을 순수한 약탈만으로 풀기에 어려움이 커졌지만[6] 여전히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고, 무기 쪽도 상대적으로 소비가 적었기 때문이다.[7]

2.3 제1차 세계대전

두 번째 변화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이 때에 이르러서 본격적으로 총력전의 양상이 나타난다. 여기에도 3가지 요인이 있는데, 첫 번째는 프로이센 군대가 당시 유럽 최강으로 꼽히던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군을 보불전쟁에서 격파시킨 이후로 영국을 제외한 거의 모든 나라에서 프로이센의 징병제를 일종의 모범 사례로 여겼다는 점이다. 그 결과 나라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체적으로 군대의 규모가 급격히 팽창했고, 이러한 군대를 무장시키며 먹이고 입히며 재우고 치료하며 매장하는 일 또한 산업적인 과업이 되었다.

프랑스와 프로이센 두 국가 모두 징병제를 운용했지만, 타이틀만 징병제로 같을 뿐 실상은 큰 차이가 있었다. 프랑스는 문자 그대로 성인 남성을 국가의 힘으로 붙잡아 전쟁터에 내보내기 위한 징병제를 운용했다. 하지만 징병제에서 성인 남자 전원이 징집 대상이라고 해도 정말로 전원을 군대에 보내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고 그만한 규모의 군대를 감당할 수도 없으므로, 실제로 군대에 있는 인원은 징집 대상 중 소수이다. 그래서 프랑스는 데파르트망, 즉 징집 대상 지역의 대상 남성들이 제비뽑기를 해서 정해진 숫자만큼 뽑힌 사람이 군대에 가고 일정한 기간마다 제비뽑기를 해서 교대하는 방식의 징병제를 운용했다. 그러나 제비뽑기에서 당첨(…)된 사람은 상호 합의아래 다른 후보자에게 돈을 주고 자기 대신 군대로 보내는 것도 가능했다. 이러한 방식으로는 자연히 가장 가난한 사람이 계속 군대에 가게 되므로 실질적으로는 특정 인원이 장기 복무를 하게 되는 양상으로 돌아가게 된다.

반면 프로이센은 프랑스에 비하면 인구가 적어 같은 방식으로 소수의 인원만으로 군대를 충원하면 병력의 숫자가 너무 적고, 그렇다고 다수를 징집하면 경제적으로 감당할 수 없으므로 예비군을 두었다. 즉 프로이센식 징병제는 일정 규모 이상의 상비군을 유지하는 것 말고도 다수의 예비군을 훈련시키는 것 또한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평상시에는 경제적으로 감당할 만한 숫자의 상비군만을 운영하다가 전쟁이 발발할 시 짧은 기간만 대규모의 예비군을 현역병으로 소집하여 대규모 병력을 운용했다. 장기복무를 하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병사들의 질은 떨어지지만, 프로이센은 장교단의 우수성으로 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었다.

2번째 요인은 전쟁이 길어지고 소모전으로 바뀌었다는 점이다. 이전까지의 전쟁은 각국 군 부대 간에 치러지는 야전 양상이었고, 상대적으로 짧은 시간에 결판이 났다. 그러나 1차 세계대전에서는 슐리펜 계획을 통해서 짧은 시간에 승부를 내려던 독일군의 시도가 마른 전투에서 좌절한 뒤 참호전의 양상으로 전선이 고착했고, 몇 주면 끝나리라 예상한 전쟁이 몇 년을 끌게 되었다. 문제는 각국이 채택한 프로이센의 징병제는 전시에 군대의 규모가 평상시에는 도저히 유지할 수 없는 수준으로 급팽창한다는 점이었다.[8][9] 이는 전쟁이 빨리 끝나면 대단히 효율적인 방식이고, 나폴레옹 전쟁[10]과 보불전쟁에서 그 효과를 입증했다. 그러나 전쟁이 수 년 단위로 길어지자 이대로 군대를 유지하기는 어려운데, 그렇다고 상대방도 징병제로 대군을 동원한 상황에서 병력 규모를 축소할 수도 없는 상황에 몰렸다.

게다가 전쟁에서 소모하는 물자의 양 역시 급격히 늘어났다. 전투가 회전 양상일 때는 포격도 길어야 몇 시간 정도였다. 그러나 참호전이 나타남에 따라 참호와 철조망, 기관총으로 고착된 전선에서 몇 달에서 몇 년씩 계속해서 포탄과 총알을 쏟아부어야 했고, 이전에는 상상도 못하던 수준의 탄약을 소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포나 전함 등의 무기들도 갈수록 거대하고 복잡해져서 더 높은 수준의 산업적 능력을 요구했다. 끝내 군대를 유지하고 전쟁을 지속하려면 국가의 산업 구조 자체를 전쟁을 지원하러 바꿔야 했다. 전쟁이 나면 그 나라 전체가 전쟁에서 승리하러 모든 자원을 쏟아부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3번째 요인은 과학기술과 근대적인 사회조직 등의 발달로 전쟁을 위해 국가 전체의 산업 구조를 개편하고 관리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국가 전체의 산업을 전쟁에 동원하려면 보통 일이 아니다. 우선 과거에 비해 막대하게 커진 대규모의 군대와 세분화된 군내 조직들이 각기 어떤 물자가 필요한지를 정확히 알아야 할 뿐더러, 향후 전황에 따라 어떤 물자가 어떤 비율로 소모할지도 계획을 세울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 전체에서 어떤 물자를 만드는지 뿐만 아니라 다른 물자를 만들도록 바꾸면 어떤 물품이 나오며 그것이 얼마나 효율적일지, 새로운 물품을 개발하고 만들려면 어디에 어떤 식으로 맡기고 기존의 물자 생산은 어떤 식으로 재조정할지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대량의 물자를 관리하고 제때 분배하며 소모량과 필요량을 점검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아무리 총력전이 필요해도 이렇게 복잡한 일을 진행할 능력이 없을 때는 당연히 총력전이란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근대적 관료조직의 발달 및 통신 수단의 발달 등으로 이러한 관리가 가능해졌고, 교통 수단의 발달 덕에 수많은 물자와 인원을 필요한 곳에 분배할 수 있었다. 산업화 이후 비대해진 조직을 관리하기 위해 체계적으로 정립된 관료제의 등장도 총력전이 나타나게 해주었다. 위에 미군이 단 6년만에 군대규모가 4450%등 증가했는데 이는 체계적으로 정립된 관료제가 아니었으면 자체적으로 붕괴했을것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에는 이러한 모든 행정 작업은 컴퓨터 없이 수작업으로 이루어졌다. 2차세계대전 당시 미국 국방부는 전세계 수십개국에 흩어진 1000만이 넘는 병력의 군수보급체계를 관리하러 다수의 경제학자, 통계학, 수학 전문가, 인간 컴퓨터들을 고용했다. 또한 랜드리스 계획에 따른 대외원조도 큰 문제였다. 이 과정에서 쌓은 노하우가 경영학에서 생산관리의 출발로 여겨진다. 당시 이 분야에 종사한 다수의 전문가와 장교들은 전후 미국 대기업에 들어가서 경영효율성을 끌어올린다. 전산 작업에 익숙한 요즘 사람들의 시선에서 보면, 컴퓨터도 없이 이렇게 방대한 작업을 다뤘나 신기할 정도. 물론 이건 교육받은 사람을 마구 부어넣을 수 있는 선진국 미국이니까 가능했던 거고, 결국 그 미국도 문제가 많다고 판단했는지 베트남 전쟁부터는 컴퓨터를 활용하게 된다.

또한 민족주의 등으로 국민들이 이러한 동원을 사상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기반이 갖춰진 것 또한 중요한 요소다.

흔히 총력전이라면 그 나라 인구 전원이 전쟁에 나선다는 뜻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총력전에서 중요한 부분은 오히려 군대 자체보다는 경제적인 부분이다. 즉 농업/공업 생산력을 포함한 국가의 모든 역량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지원하는 것이 바로 총력전이다.

끝으로, 총력전의 특징은 전쟁할 예산을 확보하는 방법이 이전과 다르다는 데 있다. 국채를 발행해 미래 세대의 소득을 담보로 현재의 전쟁자금을 충당하는 것. 그 천조국도 국채를 발행해서 전비를 충당했다.전쟁당시 미국의 톱스타들이 미국전역을 돌아다니며 국채를 사라고 엄청나게 홍보하였다.

3 영향

국가의 모든 역량이 전쟁에 들어가면서 이기려면 상대방의 기반 시설을 파괴할 필요가 생겼다. 따라서 군인이나 군기지가 아닌 시설, 지역,(산업시설, 공업단지등) 심지어는 심리적 효과를 위해 진짜 아무 상관없는 민간주택까지도 공격했다. 따라서 민간인 사상자가 군인의 사상자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 요즘 전면전의 추세라고 할 수 있다. 멀리갈 것도 없이 이미 한국전쟁 때만 해도 민간인 사상자수가 전체 사상자중 50%를 넘었으며 베트남전 같은 경우에는 민간인의 사상자수가 약 90% 이상이었다고 한다.[11]

민간인이 전쟁에 휘말리는 것 자체는 고대중세건 어느 시대나 마찬가지였다. 군대라는 무력을 가진 집단이 민간인의 물자(또는 때에 따라서는 '여자')를 보면 그대로 안 지나가는 법이고, 적에의 복수심이나 적개심 등의 까닭에 일부러 파괴도 했다. 그러나 총력전의 시대에는 그러한 파괴도 감정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군사적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나타났다.

다시 말해 옛날 유럽에서는 두 나라 사이에 전면전이 벌어져도 전쟁에서 한두 번 진다고 해서 나라가 망하는 정도까지는 가지 않았지만, 근대 이후부터는 전쟁에 지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영국, 프랑스, 소련, 독일이나 한국전쟁 뒤의 대한민국처럼 말 그대로 이겨도 박살, 지면 완전 개발살 게임으로 바뀌었다. 병림픽?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총력전의 끔찍함을 겪은 나라들이 전쟁을 꺼리거나, 반대로 단기간에 상대를 제압하러 군사력을 지나치게 강화하는 원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현재 북한군이 전시 쓸 것으로 예상하는 제파식 전술 등도 총력전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빠른 시일에 전쟁 목표를 이루고자 나왔다.

고대의 싸움도 지면 나라가 완전히 멸망한다거나 백성들을 몰살한 예는 있지만, 이는 단순히 나라 전체가 피해를 입었지 나라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전쟁 시스템으로써 돌아갔다고 보기엔 무리이므로 총력전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다. 다만 전쟁 자체가 부족 등의 아주 작은 단위에서 나면 규모가 작을 뿐 총력전과 비슷한 양상도 나타난다. 다시 말해서 국가 전체 역량을 정말로 다 소모할 수 있는 행정, 경영 능력이 있어야 총력전이 나온다는 뜻이기도 하다. 부족 사회 같은 작은 사회의 역량을 모두 알고 다 쓰는 것은 특별한 기술이나 지식 없는 몇몇 사람이 모여 머리를 굴리고 말로 명령해도 충분히 할 수 있지만, 고대 국가 정도의 규모만 커도 이는 매우 힘든 일이다.

사족으로 이 단계까지 전쟁하면 거의 여자고 나발이고 없다고 봐도 좋다. 미테란트 공화국 팔다리 멀쩡한 여자들도 공장에서 탄약갈고 전차만들거나[12] 아예 전쟁터로 끌려간다.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소련이 대표적인 예. 단 비전투임무까지 본다면 영국이 이미 영국본토항공전에서 여성인력을 비전투요원으로 활용한 적이 있다. 인력이 풍부했던 미국조차도 여성 조종사들만인 비행기 배달부대(다만 그 당시 여성은 2등 국민 취급이었으므로, 사상자가 나와도 군인 취급을 못 받았다.)가 있었고, 끝내 B-17폭격기 조종사까지 나왔다. 아니면 그것만으로도 모자라서 전시경제체제인 국가의 모든 재원은 다 군수시설로 몰아넣어 온 국민이 배급제를 비롯한 그야말로 철저한 내핍생활로 빠져든다. 예컨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은 감자를 뺀 모든 식량을 배급제로 분배했고, 이는 다른 국가들도 비슷했다. 의외지만 쇼미더머니로 유명한 미국도 이 당시 베이컨 등을 구운 뒤 나오는 기름을 모아다가 가져다 쓰거나 금속 재료를 수집도 했다.

4 기타

총력전에 가까운 양상은 미국남북전쟁에서 처음으로 나타났지만, 다른 강대국들은 1차 세계대전을 겪기 전까지는 남북전쟁의 이러한 면을 전혀 주목하지 않았다. 이는 남북전쟁에서 장기간에 걸쳐 국력을 총동원해서 전쟁을 벌인 것이 그저 '군사기술이 열등해서 짧은 시간에 결판을 내는데 실패해서'라고 간주해 장기간의 전쟁은 매우 비정상적인 현상으로 치부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미국은 남북전쟁 뒤에는 전쟁을 벌여도 국민들이나 군인들을 굶길 만큼 지독한 총력전을 벌인 적이 단 1번도 없다. 또한 남북전쟁 당시에도 북부는 경제적 궁핍을 경험하지는 않았다. 남부만 말 그대로 파멸이게 다 쑥재배 장군 때문[13].

다만 유럽에 비하면 약했다는 뜻이지 미국도 세계대전, 특히 2차 세계대전 때에는 국민들에게 일부 물자에 한해서나마 배급제를 실시하고 각종 자재를 군수산업에만 넣는 등 부분적으로나마 국가 총력전으로 갔다. 예를 들면 42년 2월부터 전쟁이 끝날 때까지 자동차 왕국 미국도 민수용 차량, 특히 민수용 승용차의 생산을 제한했다. 당시 고무 같은 경우 미국은 태반을 동남아시아에서 수입[14]했기 때문에 일본이 동남아시아를 점령한 뒤에는 루스벨트 대통령까지 나서 각종 중고 타이어, 고무호스, 심지어 고무장화까지 공출하도록 호소도 했다. 전설적인 재즈 색소폰 연주자 찰리 파커는 이 때 색소폰마저도 공출을 겪어 대신 아크릴로 만든 색소폰을 써 연주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일본군태평양 전쟁에서 총력전을 부르짖으면서도 총력전의 개념을 제대로 못 이해하고 "전 국민을 전쟁터로 보내는 것" 수준으로만 생각해서 오히려 스스로 전쟁수행 능력을 막장으로 떨어뜨렸는데, 자동화한 생산라인이 없어 숙련공이 쇠 깎아 무기 만들던 나라에서 숙련공을 죄다 병사로 차출해 전선으로 내보내어 무기 생산에 치명적인 지장을 부르는 삽질을 했다. 이런 숙련공들이 대본영의 한심한 삽질로 전선에 끌려나가자 그 빈 자리는 여고생 등의 비숙련 인력이 맡았고, 당장에 오각형 너트 같은 해괴한 물건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이런 부품으로 만든 물건들 성능이 어땠나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또한 물자를 아낀답시고 몸빼바지를 입기를 강요하거나, 생산중인 옷도 아닌 이미 만든 옷에서 소매를 짧게 자르라고 하는 등 뜻모를 명령으로 자국민만 신나게 괴롭히다가 비참하게 패망했다.[15] 그리고 공업지대와 주거지대를 뒤섞은 주먹구구식 도시계획을 하다가 공업 능력을 마비시킬 전략 폭격의 일환으로 도쿄 대공습을 얻어맞았다.

반면 유럽의 군대는 전쟁 중에 자동화 시설을 더욱 늘리고 숙련공을 철저하게 보호했으며, 심지어 숙련공이 모자라자 전선의 병력에서 숙련공으로 키울 만한 인력을 일부 뽑아다 공장에 보내기까지 했다. 예를 들면 참호전에 필요한 단검의 수요가 급증하자 전선에 복무중인 모든 칼 제조공을 제대시켜 단검제작 공장으로 보내기도 했다. 현대 대한민국도 총력전에 대비하여 국가가 지정한 기술자나 과학자 등 인재들은 징집하지 않고 대신 지정한 공장[16]에서 일하게 하며, 거의 100% 군대로 끌려가는 인문과학이나 사회과학생들과 달리 이공계생들은 산업특례 등을 통해 군복무의 대체도 가능하다.

위해서 말했듯이 총력전은 국가가 동원가능한 모든 인적, 물적자원과 정치적, 경제적 수단을 전쟁 및 전쟁지원에 투입하므로 숙련공도 총력전에 투입한다. 또 이미 말했듯이 총력전은 전쟁보다는 전쟁수행능력이 더 중요하다! 전쟁수행능력은 보급의 상위개념이니, 당연히 더 복잡하다. 전쟁수행능력이 좋으면 좋을수록 보급의 질도 상대적으로 올라가고, 낮으면 낮을수록 보급의 질도 상대적으로 내려간다. 보급의 질은 병사들의 사기 및 전투수행능력에 어마어마한 영향일 만큼 중요하다. 보급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투보다 더 까다롭고 복잡해서 이순신과 나폴레옹도 머리싸고 고민한 문제였다.

어처구니없게도, 이미 일본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기 직전, 총력전을 벌이면 그 결과가 어떤지를 알기 위해 젊은 인재들을 모아서 '총력전 연구소'를 설립해 연구를 시킨 적이 있다. 당연히 이 연구원들이 얻은 결과는 '미국과 총력전 상태에 들어가면 일본은 반드시 패배'였다. 그런데도 일본은 전쟁 시도를 중단하거나 하다못해 이 연구에서 지적된 문제점들을 극복할 생각도 않고 전쟁을 일으켰다.

참고로 해군/해병대에서 총력전이라면, 보통 줄다리기라는 뜻이다. 해군/해병대 가는 위키니트들을 위한 토막상식

현대의 대한민국은 상대가 북한이면 총력전 가능성이 낮다. 경제 및 군사력에서 넘사벽인데다 미국의 배후 지원까지 등에 업어서다. 단 중국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서 부분 개입조차 총력전일 수도 있고, 게다가 중국의 팽창 의지가 공고화하면서 한반도에의 압력도 심화하는 추세라 총력전 자체를 완전히 배제하기는 어렵다.[17]
  1. 여담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현대국제정치에서는 전면전 = 총력전을 동의어로 같이 쓰는 편이다. 예외가 있다면 총력전 없이 전면전이 가능한 미국 정도.
  2. 몽골은 팽창 당시 막대한 민간인 학살로 거의 모든 전쟁을 총력전으로 만들었다.
  3. 수나라는 순수 전투원만 100만에 가까웠고, 고구려도 이정도 규모의 군대를 상대하려면 최소 3~40만의 군대는 있어야 했다. 당시 고구려 인구가 4~500만이었음을 감안할 때 사실상 젊은 남성들은 거의 다 끌려갔다고 봐야 할 것이다.
  4. 위의 고구려는 산성방어체계때문에 수십만의 병력이 각 성에 주둔하여야 했지만, 고려의 경우는 그런 방어병력을 제하고 순수 야전병력만 수십만이었다.
  5. 이 때 국가가 왕의 국가가 아닌 국민의 국가로 바뀌었고, 따라서 전쟁이 왕의 전쟁이 아니라 국민의 전쟁이었다. 이를 통해 국민군이 나타났고, 혁명 전 몇몇 군사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싸움에 동기부여가 제대로인 국민군은 강했다.
  6. 그 이전 시대인 절대왕정 시대의 용병들은 오히려 상대적으로 약탈을 않고 후방에서 받는 보급으로 식량 등의 문제를 풀었다. 근대적 민족주의가 자리잡기 이전 시대의 병사들은 약탈을 허용하면 통제를 못해서 전투력을 유지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7. 그렇다고 근대까지의 전쟁에서 전쟁 비용으로 온 경제적 부담이 작았으리라고 생각하면 안 된다.#참고 근대 이전의 대규모 전쟁의 비용은 국가를 쉽게 휘청이게 할 정도였다. 2천년 전의 손자가 '전쟁은 돈이 많이 드니 함부로 일으키지도 말고 하려면 빡세게 준비해서 빨리 끝내라'고 괜히 경고한 것이 아니다. 위의 본문에 예로 언급한 나폴레옹 전쟁도 전쟁과 원정을 잇자, 끝내 프랑스 재정은 고갈했다. 또한 임진왜란 때 조선을 지원했던 명나라는 본토내에서 벌였던 전쟁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 멸망의 시발점이 되었다.
  8. 단적으로 2차대전의 미국 육군(육군항공대 포함)은 1939년 시점에서 18만명에 불과했지만 전쟁이 끝날 1945년 시점에선 800만명이 넘는 규모로 급팽창했다! 중요한건 이 중 782만명의 장병은 본래는 직업군인이 아닌 민간인이었다는 것이다. 병력 증가수치를 퍼센트로 환산하면 6년동안 4450%!!가 증가한것이다. 소수점이 절대아니다!
  9. 또한 프로이센식 징병제는 ROTC제도의 창설에 영향을 줬을수도있다. 숙련된 장교단을 유지하려면 장교단의 자질도 그렇겠지만 전시동원으로 마구 불어날 병사들(or 신설,증편 부대)을 지휘할 지휘관이나 참모들의 T/O 수요도 역시 매우 늘어날테니.. 물론 이렇게해서 평시에 진급적체에 시달렸던 간부들은 전시에 호강한다..
  10. 나폴레옹 전쟁 전체 기간은 길었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난 개개의 전쟁 자체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1. 다만 한국전쟁은 국력이나 인구 수준에 비해서 전쟁의 규모가 커졌고, 베트남전은 매우 특이한 사례로 베트콩 같은 게릴라들의 활동 - 누가 민간인이고 적군인지 구별할 수 없다 - 때문에 민간인 피해가 심했던 점을 봐야 한다. 어쨌든 민간인의 피해가 급증한다란 사실.
  12. 서양에서 여성인권 운동이 활발해진 계기를 이 당시의 여성의 사회진출로도 본다.
  13. 사실 그 파멸도 애매(?)하니, 분명 남부가 경제적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그런데도 남부의 민간인들이나 남군 장병들은 이전보다 식량 수급이 좀 불안정해도 굶을 정도는 아니었다. 식량난의 상황이 '마음껏 먹을 수 있는 게 닭고기와 옥수수 정도이다', '밀가루 값이 너무 많이 올라서 옥수수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었다' 수준인데, 꽤 힘든 고난이었지만 비슷한 시기 인도나 중국 등의 기근과 비교하면 애교 수준...
  14. 당대에도 석유로 만드는 합성 고무가 많았지만 천연고무의 기존 수요를 완전히 대체하기는 힘들었다.
  15. 참고로 일본군은 전쟁 말기 옥쇄 분위기까지 나오던 시기를 빼면 일반적으로 알던 것과는 달리 인구 대비 병력은 적은 편이었다. 그 까닭의 하나가 개도국이라 농촌에 사람이 많이 필요하니, 청년들을 무작정 전장에 차출하면 당장 식량이 모자라서였다. 그러나 전쟁 말기에는 일단 징집하고 봤으며, 이 때부터 식민지 조선의 청년들이 전장의 총알받이로 내몰렸다.
  16. 군수공장만이 아니라 경공업도 들어간다. 전쟁 중에는 상당수 물자의 자급자족도 나와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일. 또 다른 이유는 국민들에게 필요한 생필품과 물건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총력전을 한 어느 국가에서도 모든 생산시설을 군수로 돌리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국민들이 최소한 필요로 하는 생필품마저 안 만들면 국민들의 불만이 올라가면서 전쟁수행에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 불만이 너무 높으면 전쟁반대나 시위에, 심지어는 반란까지 날 수 있다.
  17. 다만 SUV등은 징발될 가능성이 높다. 알디시피 대한민국 국군의 고질적인 문제인 수송문제는 전시징발이 있어야지만 해결되는 문제라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