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

부모의 관점에서 본 자식 명칭
맏이외동딸장녀차녀3녀딸/4녀 이상고명딸막내
외동아들장남차남3남아들/4남 이상고명아들

1 개요

子息 / Child

양육의 과정이 너무 힘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 자체로 기쁨입니다.

- 어떤 어머니

자식은 부모의 등을 보고 자란다.

- 일본 속담

키우는 부모의 입장에서는 가장 큰 골칫거리이자 애물단지이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는 애증의 존재.[1][2]계륵

내 뿌리를 이어받았고 앞으로도 계속 이어줄 미래의 나.[3]응? 이건 장남만 그런거 아님?[4]

부모의 반댓말. 부모의 아이를 부모에 상대하여 이르는 말. 빈말로 웬수와 이음동의라는 말이 나돈다.[5]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불효인 존재. 진짜 불효다. 부모는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6]

부모가 자식을 사랑하지 않으면 인간은, 호모 사피엔스라는 종(種)은, 자연에서 멸종하고 만다. 번식은 인간이 우주에서 지금까지 생존하게 할 수 있게 해준, 유일하고 반박불가한 수단이기 때문이다.[7] 번식의 결과물이 자기보다 먼저 죽어버리면 절망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도 모두 누군가의 자식이고, 누군가는 자식을 낳을 것이다. 또 누군가는 자식이 있을 수도 있다. 어쨌든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자식을 낳으면 그 자식은 부모의 인생에서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모든 부모들에게 있어 자식이란 나이를 몇을 먹어도 어린애인 존재로서, 부성애모성애가 향하는 대상이다. 부모 앞에서 그 자식을 욕하면 큰일나는 이유.

품 안의 자식이란 말은 자식이 어렸을 때는 부모의 뜻을 따르지만 자라서는 제 뜻대로 행동하려 함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철이 들어서 바르게 행동하면 좋지만 밖에서 사고나 치고 다니면 속이 탄다.

더불어 부모입장에서는 언제 어디서나 늘 어린아이 같은 존재.

자식의 본질을 제대로 알고 싶다면 부모의 본질도 같이 이해하도록 하자.

1.1 욕설로써 사용

이처럼 부모-자식간의 연결 때문인지, 이 단어는 욕설로 많이 쓰인다.(ex : 이 자식, 저 자식, 개자식 등등[8]) 이게 욕으로 쓰인다는 건 그 부모를 욕보이는 것인데, 그런 소리 웬만하면 하지 말고 듣기 싫으면 행동을 좀 똑바로 하자.[9]

2 출산과 자식에 대한 고찰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거의 모든 문화권에서 마치 기독교인이 신에 대비해 스스로를 극도로 낮추는 것처럼 부모가 신에, 자식이 그 피조물에 해당하는 포지션에 위치해있었고, 현재도 그렇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자신이 이 사회에 걸맞는 인간임을 간증하기 위해 저렇듯 과장해서 자식이 부모에 효를 다해야 한다는 것을 표현하게 되는 것. 조금이라도 이에 회의를 보일 시엔 패륜으로 매도 당하기 쉽고 완전히 매장을 당하므로..
인류 문화적으로, 21세기 이전까지는 우리 관점으로 아동 학대로 보일 일이 흔했고 그런 일에 전혀 자각이 없었다. 우리나라만 해도 당장 10살도 안 된 아이한테 무거운 봇짐을 모두 들게 하는 게 양반의 풍속이었다.

현대에 대두된 개인주의적 관점에 의거하면 근대까지만 해도 자식은 번식 본능의 부산물 내지 부양을 위한 일꾼, 그리고 가문 세습을 위한 것이었다. 가문 및 재산, 관계의 세습을 위한 유기적 관계로서 부모와 자식 사이의 관계성을 의거하는 이러한 의식은 최근에서야 흐려지고 있다. 현대 들어서는 핵가족화되면서 개개인에 천착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여태까지는 그저 의문 없이 당위로 여겨지던, 소위 대를 잇고 수발을 받는 시스템에 회의를 품게 된 계기가 되었다.

자식이 태어남에 있어 자식의 의사는 전혀 반영될 수가 없고 순전히 부모의 의사에 의해 강제적으로 태어났단 사실을 자각한 부모의 도덕적, 심리적 부채가 대두되기 시작한 것이다.[10]

실제로 선진국일수록 출산율이 급격하게 저하하는 건 이런 이성적 사고가 크게 작용한다. 이 부분에 대한 연구가 진행될수록 출산률의 저하 및 급증은 그 세대의 생의 욕구, 즉 생을 영위하게 되는 상황 및 개인적인 삶의 만족 등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다. 일례로 한국의 베이비붐 세대는 6.25 전쟁 이후 국가 및 국민 전체에게 있어 망가진 삶을 재건하는 과정에서 '다시 일어서겠다' 혹은 '절대로 내 자식들은 이런 꼴을 당하게 하지 않겠다'는 갱생에 대한 의지가 자연발화된 과정으로서 발견되고 있다. 즉 출산율은 현 세대(부모가 될 수 있는)의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 및 앞으로 더 나아질 것이라는 희망의 증감여부(예를 들어 아이를 낳았을 때 이 아이를 잘 키울 수 있는가? 이 아이의 행복한 삶이 보장되어 있는가? 지금보다 더 나은 상태와 상황을 줄 수 있는가? 등의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이 본인에게서-사회에게서 얼마나 나올 수 있는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이런 현상은 극히 최근의 일로, 자식이 어느 정도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책임질 수 있을 자신이 있을 때만 낳고 그럴 자신이 없으면 아예 낳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 이른바 '낳은 죄'를 자각하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제3세계에서 낳은 아이가 굶어 죽든 말든 별 생각 없이 섹스하고 임신하면 낳고 보는 경우가 많다. 자식이라는 존재를 아예 의도하지 않고, 본능대로 살다보면 생길 수 있는 존재라고 보는 것.[11]

자식에 대한 책임의식의 결여로 인해서 고대사회부터 출산은 그들을 책임질 수 있는 온전한 형태의 '가정'이라는 공동체에서 시작하는 것을 당연시 여겼으며, 이 가정은 '결혼'에서 시작하였다. 즉 '결혼'을 한 상태의 성인은 상대방에 대한 책임을 질 수 있으며, 이러한 책임 의식을 가진 상황에서만 '자식'을 낳는 것이 올바른 형태였던 것.[12]

한국의 경우, '덮어놓고 주렁주렁 낳다 보면 거지 꼴을 못 면한다'는 식의 70, 80년대의 슬로건은 가정 및 인간의 몸에 대한 사회 이데올로기적 억압의 표상으로 연구되는 주제이지만, 먼저는 극도의 사회-문화-경제적인 발전 하에서 '한 가정이 책임질 수 있는 자식의 수'를 네 명, 세 명, 두 명으로 규정하는 의식을 엿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이기도 하다.[13]

시민의식이 발달한 사회의 경우, 자식이란 곧 내가 개인으로서 책임져야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한 만족도, 혹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 및 상황에 대한 만족도가 떨어질 경우 도리어 더한 무게를 짊어지게 될 여부가 있기 때문에 되도록 피하려고 하는 경우도 발생한다. 한국 사회에서 자식에 대한 애정은 높지만 도리어 시간이 지날 수록 출산율이 저하되는 이유는 바로 이것. 자신의 반신과 같고, 자신의 삶을 이어서 살아갈 존재(자식)를 귀하게 여기고 할 수 있는 한 가장 좋은 것을 주고 싶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식을 하나의 삶에 있는 부채로서 여기기보다, 또한 노후를 위한 보험으로 여기기보다 삶에서 맛볼 수 있는 가장 큰 즐거움, 기쁨, 환희의 대상으로 여기는 시각 또한 여전히 존재하며[14] 물론 이것도 결국 부모의 자기 만족을 위해 낳는다는 것을 강하게 긍정할 뿐. 사실 본능적인 혈연에 얽매이지 않는다면 이미 세상에 흘러 넘칠 정도로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는 입양을 하는 것이 진정 선행이 될 것이다. 한국은 혈연 중심의 사고 방식이 유독 강해 입양아 수출율(...)은 높은데 입양률이 낮은 편.

제3세계의 경우 선진국 및 개발도상국들과의 문화적/사회적 차이가 분명히 존재하며, 이에 따라 '버려지는 자식'에 대한 태도 또한 매우 다르다. 아프리카라의 심각한 빈곤국 등을 살피면 보건 및 윤리의식 자체가 선진국과는 다르다. 자식을 낳는 것이 온전한 형태의 가정에서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흔한데, 미숙한 피임 및 책임의식이 결여된 상황에서 자식이 발생하는 경우가 전체 출산율에서 막대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15] 현실적으로 본인의 삶을 유지할 경제력 마련도 힘든 상황에서, 출산한 아이를 책임지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는 십중팔구 아이 유기로 이어진다. [16] '자식'에 대한 의식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존재 내지는 내 삶의 아주 큰 보람'인 선진국 및 시민사회와는 매우 다른 양상일 수밖에 없다.

과거에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는 개념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릴 때는 부모의 말을 들어야 하고, 성장한 후에는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자식의 의무로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현대 사회학 및 심리학에서는 자식을 부모의 소유물로 보지도 않고, 그렇게 했다가는 부모자식 관계가 파탄나기 십상이라고 한다. 실제로 교육 문제로 인한 부모자식 간의 고충을 해결하기 위해 방송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부모가 부모 스스로의 목표를 정해 두고 자식에게 그것을 강요하면서 생겨나는 갈등이 많다.

특히 배움에 한이 맺혀서 자식에게 공부를 강요하는 경우가 많은데, 문제는 이 경우 부모의 교육에 대한 신념은 강하지만 자기도 안 해본 공부이기 때문에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올바른 길인지를 잘 모른다. 그나마 공부 잘하는 자식을 뒀다면 큰 탈은 없겠지만 자식이 공부에 소질이 없을 경우 엄청난 갈등과 스트레스를 일으키게 된다. 이럴때에는 부모와 자식 양측 모두 공부가 인생의 전부가 아니며, 공부의 속성에 대해 이해하고 합의하는 것이 가장 좋다.[17]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공부 자체를 강요하기보다는 공부를 해야 하는 이유를 아이에게 올바르게 납득시켜서 스스로 공부를 하게 만드는 편이 좋다. 뿐만아니라, 부모도 자식 못지않게 공부법, 적성, 전망 등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3 일부 불완전한 관계

3.1 생이별

자식과 부모가 이별하는건 정말 슬픈 일이고,특히 생이별하는 건 더욱 더 비극이다. 그래서 어려서 헤어지고(특히 키울 형편이 안되어서 교회 앞에 업둥이로...) 나중에 찾는 것은 수많은 매체에서 나왔으며, 눈물을 자아내게 한다. 특히 자식들이 어려서 헤어진 부모들을 찾는건 더욱 더 슬프다.

대부분의 자식은 부모의 슬하에서 키워지는 게 당연하지만, 일부는 부모에게서 버려지는 경우도 많다. 이 경우 이 버려진 자의 인생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위험은 생존이 어렵다는 것이다. 이를 이겨내고 성공한 케이스도 많지만, 전 세계와 모든 문화권을를 막론하고 삶이 불우한 케이스를 찾을 경우 손꼽히는 위치는 바로 이 "버려진 자식"이다.

현대 사회에서는 복지와 인권에 대한 인식 때문에, 뉴스에 나올법한 말그대로 '버린다'기 보단, 더 좋은 양부모를 만나라고 다른 곳에 입양을 보내는 경우가 많다. 우리나라의 경우는 미혼모/미혼부에 대한 인식과 당사자들의 육아에 대한 현실적인 어려움 때문에 양육을 포기하여 '고아 수출 상위권 국가[18]'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으며, 특히 입양절차의 비현실성 때문에 베이비 박스를 통해 아이를 포기하기도. 제발 계획과 마음의 준비 없이 자식을 만드는 일은 절대 하지 말자. 계획과 마음의 준비 없이 부모가 되면 반드시 막장부모가 되기 마련이다.

그래도 혈육과 뿌리를 알고 싶은 마음은 어쩔 수 없는지, 해외입양아들이 후에 장성해서 자신의 생모를 찾아 오는 뉴스도 간간히 볼 수 있다.

3.2 아동 학대

아이를 낳고 무책임하게 버리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악독한 짓으로 자식의 인생을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최악의 경우도 있다. 이건 불완전이 아니라 비정상에 가까운 범주. 항목 이곳, 저곳 참조.

4 자식에 관한 관련 항목

  1. 있으면 골칫거리라고 부모들이 오만가지 짜증을 내지만, 없어졌을때 소중함을 깨닫는다 카더라.
  2. 자식도 자신의 의지가 아닌 부모의 의지로 세상에 태어난지라 부모에게 투정을 부리거나 원망을 하는 경우가 많지만 막상 없어지면 소중함을 느낀다. 단 막장부모는 예외다.
  3. 그렇다고 자식은 부모의 분신에 불과하다는 논리를 가져서는 안 된다. 자식은 엄연히 독립된 인격체라는 사실을 항상 자각해야 한다.
  4. 이건 해당 항목에 들어가면 왜 그런지 알 것이다(…)
  5. 사실 어떻게보면 원수보다 더 못된 존재다. 원수야 미워하기만 하면 그만이지만, 자신의 자식을 끝까지 미워만 할 수 있는 부모도 막장부모들을 제외하면 별로 없다. 다만 자식은 본인이 태어나는 과정에서 자신의 의사를 반영할 수가 없어 순전히 부모의 의사로만 태어나게 되는지라 사실상 부모의 자업자득이다. 게다가 자식한테 문제가 있는 경우 그 원인은 십중팔구로 부모다. 즉 자식은 부모를 비추는 거울이라는 격언은 단순한 빈말이 아니다.
  6. 자식도 자신의 부모가 막장이 아닌 이상 부모가 죽으면 가슴에 묻기는 마찬가지며 보통은 부모가 먼저 죽기에 자식이 부모를 가슴에 묻는 경우가 태반이지만 불행한 사고로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항상 인지해야 한다.
  7. 사실 대부분의 생물 공통사항이다.
  8. 더 많이 쓰는 새끼 또한 자식을 낮잡아 부르는 말이다.
  9. 사실 똑바로 해도 인신공격의 용도로 욕먹는 경우가 있긴하다. 그때의 기분은 당연히 더럽고...
  10. 더불어 자식이 부모에게 감사함을 느끼는 이유가 단순히 낳아줘서가 아니라는 사실도 대두되기 시작했다. 실제로 모든 사람이 단순히 낳아준 사람이라는 사실만으로 감사함을 느낀다면 막장 부모라는 말이 존재할 수가 없다.
  11. 현재도 미국 등의 빈민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에서는 오히려 이를 악용해서 양육비 셔틀로 자식을 낳는 저소득층들의 문제가 크게 대두되고 있다.
  12.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여 이러한 결혼관계 외에서 태어난 사생아 등은 비정상적인 것으로 여기며 터부시한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것도 옳은 건 아니다. 사생아가 무슨 죄가 있겠나, 오히려 그런 사생아를 만든 막장 부모의 잘못이지. 영아사망율이 높던 시절의 소위 '인지'한다는 개념도 이와 관계가 있다. 인지하지 않은 아이는 제대로 사람 취급도 받지 못했다. 성의 없는 집단 돌무덤이라든가.. 아이들이 툭하면 죽어 나가는 상황에서 '감정 효율성'의 논리로 저런 식으로라도 억지로 정을 떼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13. 지금은 오히려 출산율 저하 때문에 문제지만
  14. 모리와 함께 한 화요일에서 모리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자식을 낳고 기른 경험이 스스로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복이라고 여겼으며, 다시 과거로 돌아간다하더라도 그 경험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대변했다.
  15. 이는 자식의 존재 자체가 중요하게 여겨지는 결혼한 부모, 가정과는 다르다.
  16. 50, 60년대에 극빈국이었던 한국에서는 수많은 아이를 낳아도 기를 수가 없어서(혹은 낙태 및 유산시도가 실패해서) 아이를 고아원에 보내는 상황이 매우 많았으며 '최다 아이수출국'이라는 오명을 가지게 되었다. 정상적인 결혼을 통해 이루어진 가정에서도 낳은 아이를 입양보내는 마당에 의도하지 않은 출산으로 인한 경제적/사회적 어려움을 감당할 수 없는 상황이 많았기 때문이다.
  17. 일단 공부를 출세의 수단으로 여기는 순간 타락한다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18. 유기된 아기들의 수가 국내의 입양수요보다 더 많아서(…) 해외로 보내서 그렇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