杉田一次. 1904-1993.
1 개요
일본의 군인 겸 육상자위관. 3대 육상막료장을 지냈다.
2 생애
1904년에 태어나 1921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해 1925년에 37기로 졸업했다. 주미 일본대사관의 주재무관으로 재직한 경력 때문에 미국과의 전쟁을 반대했다. 개전 후에 제25군 참모로 참전, 야마시타 도모유키의 통역장교로 근무했다. 영국군에게 항복하라는 문서를 만들기도 했다. 종전 직전에 귀국 명령을 받아 대본영에서 근무하던 중에 패전을 맞았다. 대본영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대본영이 정보를 무시한다고 생각해 직접 전략과 업무에 관여했다가 직책을 강등당했다. 최종계급은 일본육군 대좌였다.
항복문서 조인식에 참여했다. 뒷줄 오른쪽의 수염 안 깎은 육군 장교가 스기타 이치지이다. 전범 혐의로 싱가포르 교도소에 들어갔고 영국군이 가혹행위를 한다고 항의성으로 자살 기도를 하였다. 이 인간이 개고생한 이유 중 하나는 당시 도망 중인 작전참모 츠지 마사노부 때문에 싱가포르 전투 당시의 책임을 정보참모인 그가 죄다 뒤집어썼기 때문이었다. 무죄로 풀려나고 일본으로 돌아와 GHQ에서 복원 업무와 전사(戰史) 연구를 했다. 요시다 시게루가 신임했다고. 1952년에 자위대의 전신인 경찰예비대에 입대했고 동부방면대 총감을 거쳐 1960년에 같은 일본육사 출신인 스기야마 시게루에 이어 육막장에 오른다.
1962년 퇴임하며 후임 육막장으로 일본군 육군 출신을 앉히려고 했지만 실패해 오모리 간이 보임된다. 당시만 해도 내무군벌의 수장인 하야시 게이조가 아직 통합막료회의의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