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시타 도모유키

야마시타 도모유키
山下 奉文(やました ともゆき)
생애1885년 11월 8일 - 1946년 2월 23일
출생지일본고치오토요
사망지필리핀문틴루파
복무일본제국 육군
복무기간1905년 ~ 1945년
최종계급대장
근무제4사단
제25사단
제1사단
제14방면군
주요참전중일전쟁
제2차세계대전(동남아)
서훈내역훈일등욱일대수장勲一等旭日大綬章(くんいっとう きょくじつだいじゅしょう)


금치훈장金鵄勲章(きんしくんしょう)

(3등급)
묘소
軍事は今や凶器であり、大きな罪悪である。

군사는 바야흐로 흉기이며, 큰 죄악이다.

それは責任回避だと考えられる。 道場が自殺を試みたと言ったが、それは責任回避であり、天皇に対する不忠だ。 私は天皇から自殺するよう命令を受けたことがない。

그것은 책임회피라고 생각된다. 도죠가 자살을 시도했다고 했는데, 그것은 책임회피이자, 천황에 대한 불충이다. 나는 천황으로 부터 자살하라는 명령을 받은적이 없다.

私の命一つで部下たち皆を助けられるなら犠牲することができる。

나의 목숨 하나로 부하들 모두를 살릴수 있다면 희생할수 있다.

指揮官の私が責任がないとすれば誰に責任があるのか? 私は絶対に卑怯にも部下に責任を押しつけることはできない。

지휘관인 내가 책임이 없다고 하면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가? 나는 절대로 비겁하게 부하들에게 책임을 떠넘길수 없다.

私は知らなかったしかし、私に責任が無いとは言えない。

나는 몰랐다 그러나 나에게 책임이 없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1 행적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 육군장군(최종 계급 대장). 그리고 태평양 전쟁의 초기 신화를 쓴 지휘관 중 하나

싱가포르 전투에서 기동전으로 대활약을 펼치며 말레이의 호랑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이때 싱가포르를 함락한 이후 영국군 총사령관이였던 퍼시발 장군에게 '예스냐? 노냐?'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해졌지만, 실제로는 와전된 보도로, 정작 야마시타 본인이나 그 협상에 참여했던 인물들은 그런 발언에 대한 언급이 없었다.

하지만 '항복할 거야, 안 할 거야!!' 라고 발언했다는 증언은 있다. Thames Television에서 만든 World at War, Bazai 편을 보면 협상에 참여했던 일본군 장교의 그 때 상황에 대한 인터뷰가 나온다. 야마시타와 퍼시발이 포드 공장에서 만나서 협상을 하는데 퍼시발 장군이 항복을 언급하지 않고 딴소리만 하며 시간을 끌자 인내심이 바닥난 야미시타가 책상을 쾅 치면서 '항복할 거냐 안 할 거냐' 라고 호통을 쳤고, 퍼시발이 다시 대답을 돌리자 같은 발언을 반복하며 항복하지 않으면 야간공격을 감행하겠다고 협박한 끝에 퍼시발이 항복 의사를 밝혔다는 인터뷰가 나온다.

이에 대해서 야마시타 도모유키 본인이 직접 밝힌 것이 있는데 야마시타 도모유키 생전에 이미 예스카, 노카 라는 일화가 퍼져 있었고 이에 대해서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자신은 그렇게 무식하게 압박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고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 시점이 야마시타 도모유키가 전범으로 사형당하기 직전이었고 야마시타 도모유키는 기자들에게 퍼시발이 시간을 끌자 예스 아니면 노로 대답해줄 것을 요청하였다고 대답했다.

평소에 일본군 현대화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다녔지만, 황도파 출신이라는 이유로 통제파인 도조 히데키에게 견제를 받아 별다른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게다가 2.26 사건의 주동자들에 대해 동정적이었기 때문에 히로히토 덴노도 야마시타를 꺼려해서 싱가포르영웅임에도 불구하고 덴노 접견조차 하지 못하고 한동안 만주로 좌천되어[1] 활약할 기회가 없었다.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만주에서 다시 불려와 필리핀에서 방어전을 지휘하게 되었으나 이미 패전이 거의 확실시된 상태라 그의 능력으로도 어떻게 수습할 도리가 없었다. 최초 방침이었던 루손 결전(혹은 지연전)도 대만 해협 항공전에서 일본이 승리하자[2] 대본영이 계획을 변경하는 바람에 휘하 병력이 레이테 섬 전투에 투입되면서 무산되었다. 병력의 태반은 수송 과정에서 수장당하거나 섬에 고립된 채 아사하는 등 제대로 된 전투조차 해보지 못하고 괴멸했다.[3]

필리핀 방어전에서는 야마시타는 마닐라를 오픈시티로 선언하고 지연전을 위해 잔존부대를 루손 북부로 이동시키려는 전략을 수립했으나, 당시 마닐라에 남아있던 해군소장 이와부치 산지 제독과 그가 이끌던 해군 육전대[4] 병력이 이 명령을 거부하였다.[5] 해군 육전대는 독단적으로 시가전에 돌입하였고, 그 와중에서 수많은 필리핀인들이 살해되며 이를 마닐라 대학살이라고 부른다.[6] 학살과 시가전으로 인해 사망한 민간인만 10만여 명 정도로 추정된다.
결국 해군 육전대는 마닐라 방어에 실패하였다. 해군 육전대 16,000여명의 옥쇄방어측이 압도적으로 유리한 시가전[7]에서 두개 사단 병력의 미군에게 고작 1,000명 이하의 전사자와 3,000명 수준의 부상자의 피해를 입혔다. 이에 반해 일본군은 미군에 포로로 잡힌 인원까지 합쳐서 300명 정도만 살아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마닐라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지는 와중에 일본군은 일본 등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중립국 스페인의 영사관에 의도적으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대검으로 찔러 죽여 50여명의 사상자를 발생시켰다. 당연히 빡칠대로 빡친 스페인은 1945년 4월 일본과 외교관계를 단절해버렸다!

그래도 전쟁이 끝날때까지 40만명 vs 40만명 1:1 드림매치에서 미군에게 1만여명의 전사자를 안겨주고 일본군은 39만여명이 전사하는 사태가 벌어지지만 7개월에 가깝게 맥아더의 부대를 잡아두는데는 성공했다. 결국 꿈도 희망도 없는 상황속에서 부하들의 할복 권유에 내가 여기서 죽으면 다른 사람이 대신 책임을 진다고 하면서 할복하지 않고 연합군에 항복하였다. 결국 이후 자기가 저지르지도 않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형당하게 되면서 그의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되었다.[8]

2 최후와 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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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인 능력은 뛰어났지만, 뼛속까지 제국주의 사상과 천황 제일 사상에 젖어있던 군국주의적 인물이었다. 또한 작전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하들을 가혹하게 다뤘고, 이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인 부하들은 민간인, 포로 학살을 저질렀다. 물론 야마시타가 지시한 것은 아니었지만, 부하들이 저지르는 전쟁범죄를 적극적으로 금지시키지 않고 방관한 것 역시 사실이라, 이는 후일 전범으로 기소되는 명분으로 작용하게 된다.

그는 어느 정도 독일식의 포로 자치를 생각했다고 하지만, 츠지 마사노부의 독단 행동이 보여주는 바와 같이 실제로는 포로 관리를 허술하게 했다. 당연히 이런 짓은 점령지의 국민들이 일본군에 대한 반감을 가지게 만들었다. 덕분에 덤터기를 쓰고 희생양으로 내몰린 인물이 천성 친일파인 홍사익.[9]

야마시타는 마닐라 전범재판에 B급 전범으로 기소되었다. 그는 츠지 마사노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싱가포르에서의 대학살과 역시 해군 육전대가 독단적으로 결행한 마닐라 대학살의 책임 전범으로 기소되었고, 유죄가 인정되어 결국 사형당했다. 그가 직접적으로 학살을 저지르거나 관여한 건 아니지만, 워낙 많은 사람이 생명을 잃었기에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했기 때문이었다.

사실 야마시타 본인도 이 사실을 잘 알았기에 자결을 포기하고 항복했을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자결한다 해도 다른 사람이 책임을 질 게 뻔했으므로, 연합국은 결국 그의 부하 중 누군가를 재판에 넘겨 교수대에 올렸을 것이기 때문이다.[10]

물론 필리핀에서 벌어진 학살은 이미 언급한 대로 해군 육전대가 멋대로 저질렀고, 싱가포르에서 저질러진 학살 역시 나중에 치치시마 섬의 식인종 다치바나 요시오가 저지른 것으로 밝혀져 사후에 어느 정도의 명예는 회복할 수 있었다.

야마시타는 군인답게 최후까지 군복을 입은 채로 총살형을 받길 원했지만, 미국 정부는 전범들을 군인으로 대우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결국 그는 다른 전범들과 마찬가지로 죄수복을 입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죽기 전 마지막 유언으로 "나는 도조 놈에게 속았다!!" 라는 절규를 남겼다고 한다.

동시기 나치 독일에리히 폰 만슈타인과 상당히 비슷한 인물. 일본 제국의 만슈타인이라 할 만한 인물이다. 일단 만슈타인이 뛰어난 전략과 전술로 영.프군과 소련군을 박살낸 것처럼, 도모유키는 영, 미군을 상대로 뛰어난 전과를 올렸고, 그와 동시에 자국에서는 영웅으로 추앙받고 적국에서는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도모유키가 철저한 군국주의적 인물이였듯이, 만슈타인 역시 나치즘을 긍정한 인물이였으며, 둘 다 부정하기 힘든 전범임은 확실히다. 그러나 도모유키는 부하의 잘못까지 자신이 책임자로서 총대를 메고 스스로 죽음을 택한 반면, 만슈타인은 끝까지 잘못을 부인하며, 종전 이후에도 국가유공자 취급받으며 잘 먹고 잘 살았다.

3 트리비아

그 유명한(…) 츠지 마사노부가 싱가포르 전투 당시 그 밑에서 참모로 일했다. 그러나 야마시타는 마사노부에 대해 큰 일을 맡겨서는 안된다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린다. 그 인간이 후에 엄청난 활약(…)을 한 것을 보면 야마시타에게는 사람을 보는 안목은 있었던거 같다. 그러나 도조 히데키는 그런 평가를 무시하고 츠지 마사노부를 중용했고, 그는 그들에게 파멸을 불러온다.

베트남전 당시 미라이 학살 사건이 논의가 되자, 미국에서는 켈리 중위만 처벌하고 끝낼 게 아니라 야마시타 장군의 판례를 들어 웨스트모얼랜드도 기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11] 물론 펜타곤은 이런 주장을 무시했다. 왜냐하면 미국은 패전국이 아니니까.[12]

  • 이외에도 야마시타는 점령지에서 수탈한 재산과 본토에서 받은 군자금을 몰래 은닉해서 필리핀 모처에 매장해 두었다는, 소위 "야마시타 골드"란 도시전설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13]
  • 야마시타 골드 도시전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제 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 미국과 일본이 이 '야마시타 골드'를 거대 규모의 지하자금으로 전환시켜 나누어가졌고 이 자금을 미국이 42개국 176개 계좌에 예치하여 사용하는 대신 일본은 전범책임에서 대거 벗어나거나 묵과받는 혜택을 누렸고 나아가 구소련 및 중국에 맞선 태평양 방위선에 일본을 포함시켜 현재 자민당 정권을 이루게 했다는, 미국과 일본과의 야합을 다룬 이른바 '블랙 이글 트러스트' 음모론이 있다. (출처) 스털링 페기 시그레이브 저 / 김현구 번역 / 옹기장이 출간 '야마시타 골드', 2003
  • 야마시타 골드와는 별개로 재밌는 도시전설이 있다. 일제시기 일본은 조선의 정기를 훼손하여 자손이 해를 입게 할 목적으로 이걸 다른 인간들도 아니고 높으신 양반들께서 진지하게 믿었다는 거에서 뭔가 좀 이상하다는 의심이 들기 시작하지만 어쨌든 조선 땅 곳곳의 혈 자리에 쇠말뚝을 박는 작업을 했었는데, 야마시타가 조선에서 근무하던 시절에 그 작업을 현장에서 수행 내지 감독했었다는 것이다. 나중에 그가 마닐라에서 처형당하기 전, 복역하면서 알고 지내던 한국인 통역관에게 이 사실을 고백하고, 그 중에서도 창덕궁 모처에 매설한 쇠말뚝의 위치와 그 깊이를 구체적으로 언급했는데, 나중에 그 위치를 확인해보니 정말로 야마시타가 말한 깊이에서 쇠말뚝이 나왔다는 것이다. 야마시타가 정말로 여기 관련됐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현재도 일본이 매설한 쇠말뚝의 위치 파악 및 제거 작업이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도시전설은 한국의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공포 웹툰 귀신으로 각색되었다. 물론 쇠말뚝 자체가 도시전설이고, 이 이야기도 카더라일 뿐 신빙성 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실 쇠말뚝은 측량이나 기타 공사 목적으로 박아놓은게 대부분이다. 해당항목 참조.
  • 인도네시아의 스릴러 영화인 데드마인에서도 야마시타골드와 함께 언급된다. 그러나 여기서는 731 부대슈퍼솔져실험을 받아 25사단 병력과 함께 봉인되었다가 풀려난다...
  1. 그것도 싱가포르에서 만주의 벽지로 직행하도록 강요받다시피 했다. 사실상 옷을 벗으라는 압박인 셈.
  2. 하지만 이 승리는 전과 보고 과정에서의 착오였을 뿐, 날아오는 항공기의 숫자는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3. 투입병력 8만 1천명 중에서 1천명 만이 고국의 땅을 밟을 수 있었다.
  4. 한국식으로 말하면 해병대
  5. 당시 일본군에는 육해군을 통합한 지휘 계통이 부재하였기 때문. 따라서 한 방어전에서 육군 측 지휘관과 해군 측 지휘관이 동시에 존재하였고, 이 둘의 권한은 동등하였다. 육군과 해군과의 관계가 얼마나 험악했는지 증명되는 사건이다. 그나마 육해군 공조가 잘 된 작전이 미국에게는 악몽을 가져다준 오키나와 전선이었는데, 사실 해군 측이 상당부분 군령권을 포기하고 육군 측이 주도권을 잡았기 때문. 그나마도 종결 국면에 유격전을 벌이자는 제안을 해군이 해군 보유 요새에서 옥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고, 육군은 이 제안을 지금까지 협조해준 해군에 대한 감사로 수락하였다(...).
  6. 태평양 전쟁 최후의 전투인 오키나와 전투에서도 해군 육전대는 후방으로 후퇴하라는 명령을 거부하고 방어진에서 최후까지 저항한다. 오키나와에서 그렇게 행동한 것은, 명예로운 죽음을 바라는 것을 제외하면, 시간 끌기라는 전략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그렇게 한 것이었다. 또 이 때에는 부상자가 너무 많아서 부대 이동 자체가 힘든 상태기도 했다.
  7. 스탈린그라드 전투의 예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방어측이 제대로 된 전략을 세울 경우는 병력차이와 무장의 차이를 무시하고 거의 교환비가 1대1이 나올 수도 있다. 실례를 들자면 1차 걸프전에서 미군 본대가 만일 바그다드 시가전을 벌일 경우에는 이전 모든 전투의 사상자 보다 더 많은 사상자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었다.
  8. 또는 "천황으로부터 자결하라는 명령을 받지 못했다" 라고도 한다.
  9. 이때 홍사익은 남방총군의 병참감으로 종군했다. 그는 실제로도 전적으로 필리핀에 주둔한 일본군의 후방지원을 책임졌다. 그가 이 곳에 오게 된 이유는 야마시타가 식민지 조선의 경성에 주둔한 20사단 예하 연대에서 근무할 때 홍사익을 만나서 친교를 맺은 인연으로 그 자리에 부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인사는 야마시타가 육군성에다가 "홍사익을 보내주지 않으면 나 제대로 못 싸우겠다!"라는 식으로 나온 것이라는 루머가 돌기도 했다.
  10. 사실 전범재판에서 사형이 확실한 자가 사망하거나 해서 재판 진행이 불가능해지면 그와 관련된 인물이 대신 재판정으로 끌려가는 것은 당연하게 행해지던 것이었다. 일례로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에서 한스 프리체라는 사람이 그가 선전부 라디오 방송부장, 즉 괴벨스의 목소리 대역(...)이었다는 이유로 자살한 괴벨스 대신 기소됬다. 물론 이쪽은 죄가 대리적용되지 않아 무죄로 풀려나긴 했다.
  11. 야마시타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이 아닌데도 관리 소홀로 인해 사형이 정당화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 역시 학살은 그 휘하 소대장인 켈리가 저질렀지만 어쨌든 상관으로써 관리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나온 주장.
  12. 엄밀히 따져서 패전이 아닌 건 아닌데, 그렇다고 베트콩들이 미국 본토로 상륙해서 미국을 개발살을 내 놓거나 국력이 미국을 넘어섰다거나 한 것도 물론 아니기 때문이다. 기권패 여러모로 국제 정치는 약자에게 가혹하다.
  13. 조선버전 야마시타 골드도 있다. 소위 황금백합(金の百合)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떠돌아다니는 부산 문현동 일대에 있다는 일본 해군 기지의 존재. 다만 확실한 검증이 있지 않고 주창자가 특정 정권에 대해 비판적인 논조인 것을 보면 전쟁사에 기반한 음모론일 가능성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문재인 항목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