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어: Stalingradmadonna
러시아어: Сталинградская Мадонна
1 개요
독소전쟁 중 독일군 군의관이었던 쿠르트 로이버(Kurt Reuber, 1906-1944)가 그린 성모 마리아 초상. 예술적으로는 그냥 아마추어의 스케치에 불과하지만, 그려진 시기와 의도는 예술적인 것 이상으로 역사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2 작가
헤센 주 카셀 출신의 로이버는 어릴 적 알베르트 슈바이처를 만나 큰 영향을 받았고, 김나지움(고등학교)을 졸업한 뒤 개신교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을 전공했다. 신학교 졸업 후 목사로 목회 활동을 하면서 괴팅엔 대학에서 의학을 배웠고, 틈틈이 취미로 유화를 즐겨 그렸다. 1938년에는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의사 면허도 갖게 되었다. 1년 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로이버는 독일군 육군의 야전 군의관으로 징집되었고 1942년 11월에는 스탈린그라드 전투가 벌어지고 있던 스탈린그라드로 발령받았다. 소련군이 주코프와 바실렙스키가 공동 입안한 대반격 작전인 천왕성 작전을 벌이며 독일군이 수세로 몰리던 시기였고, 로이버는 하루 12시간 씩 전선에서 실려오는 수많은 부상병들의 수술을 집도하는 강도 높은 근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 처절한 와중에도 취미였던 그림 그리기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물론 상황이 상황이었던 만큼 물감과 캔버스는 고사하고 연필도 부족했기 때문에 주로 숯조각을 주워다가 폐지에 그림을 그렸다.
1942년 성탄절을 맞아 목사이기도 했던 로이버는 자신의 신심을 담아 갓 태어난 예수를 품에 안은 성모 마리아의 초상을 그렸다. 가로 105cm, 세로 80cm인 러시아 지도 뒷면에 숯으로 그린 이 초상 주변에는 '빛(Licht)', '생명(Leben)', '사랑(Liebe)'세 단어와 '1942년 포위망 속의 성탄절(1942 Weihnachten im Kessel)', 그리고 '스탈린그라드 요새(Festung Stalingrad)'를 적었다. 목사로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는 전쟁터 속에서 조금이나마 위안을 삼기 위해 그린 그림이었다.
3 이후
하지만 독일군에게 더 이상 승세는 없었고, 결국 로이버가 속한 독일 제9군은 이듬해인 1943년 2월에 지휘관 파울루스의 항복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항복 직전 마지막으로 독일군이 점령하고 있던 굼라크 비행장에서 이륙한 독일군 수송기에는 로이버가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와 그 동안 그린 그림들의 일부가 든 소포가 같이 실렸지만, 로이버는 전선에 남아 있다가 포로로 잡혔다.
로이버는 다른 포로들과 함께 옐라부가에 있는 독일군 포로수용소로 이송되었고, 여기서도 독일군 포로들을 치료하며 수용 생활을 하다가 전염병인 티푸스에 감염되어 사망했다. 유해는 다른 수용자들과 함께 수용소의 집단 묘지에 무기명으로 매장되었다. 죽기 직전 맞은 1943년 성탄절에도 로이버는 성모 마리아 초상을 하나 더 그렸고, 이 초상에는 '포로의 성모(Gefangenen-Madonna)'라는 이름이 붙었다.
4 전후
로이버의 그림과 편지를 비롯한 유품은 유족들이 보관하고 있다가 로이버의 생전 소속 교구였던 비흐만스하우젠(현재 존트라로 편입됨) 교구 회관에서 소유권을 넘겨받아 관리하고 있었는데, 1980년대 초 당시 서독 대통령이었던 카를 카르스텐스(Karl Carstens)가 이 그림을 보게 되었다. 카르스텐스는 로이버의 그림이 전쟁의 참상을 전해주는 중요한 유품이라고 생각했고, 때마침 대전 중 연합군 공군의 폭격으로 대파된 베를린의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Kaiser-Wilhelm-Gedächtniskirche)가 재건되자 유족들에게 교회에 스탈린그라드의 성모를 영구 전시하자고 제안했다. 유족들의 동의를 얻어 그림 원본은 빌헬름 황제 기념 교회에서 영구 전시와 보존을 맡고 있고, 그 외에도 독일 각지의 교회와 독일군 군의학교에 복제품이나 그림을 바탕으로 한 조각품 등이 전시되어 있다. 1990년과 1995년에는 각각 2차대전 종전 45주년과 50주년을 맞아 영국의 코번트리 성공회 대성당과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정교회 성당에 복제품이 기증되어 전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