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상위항목 : 신민당(1967년), 제4공화국, 사건 사고 관련 정보, 흑역사/목록/정치와 행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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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일어난 폭력사건이다.
1971년에 있었던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벌어진 신민당 경선에서, 40대 기수론을 앞세운 이철승과 김영삼에게 당수 유진산은, 이철승이 김영삼을 지지하는 조건으로 대선불출마를 선언했다(김영삼과 이철승은 유진산계 주류, 김대중은 비주류로 분류되었다). 이후 경선 1차 투표에서 1위는 김영삼, 2위는 김대중, 3위가 이철승이 되었다. 여기서 이철승과 김대중이 접촉했는데, 경선 3위인 이철승이 차기 총재가 되는 조건으로 경선 2위인 김대중을 지지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어진 2차 투표에서 김대중이 신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된 것 까지는 좋았는데, 대통령 선거에서 박빙의 차이로 박정희가 이기고 곧이어 유신이 벌어지고 박정희의 견제로 김대중이 정치에서 배제되면서, 신민당내에서는 이철승의 기대와 달리 김영삼이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러던 중 1974년 당수 유진산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그 해 8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이 총재로 선출되었다. 김영삼은 박정희 유신 정권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는 선명 노선을 내세웠다. 그러나 1975년 5월 박정희 대통령과의 영수회담 이후 선명 노선이 약화되고 김옥선의 관제데모 발언 파동 당시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서 당 내부에서 그에 대한 반대가 커졌다.
이에 따라 1976년 5월 신민당의 새 지도부를 선출하기 위해 전당대회가 열렸다. 김영삼은 연임을 통해 당내 불신임 여론을 불식시키고 자신의 단일지도체제를 공고히 하려 했다. 이에 이철승은 최고위원제를 도입하고 집단지도체제로 지도체제를 전환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비주류를 규합했다. 사실 현행 원내 정당들이 모두 최고위원제를 도입한 것에서 볼 수 있듯, 총재 단일체제보다 집단지도체제가 더 민주적인 정당 운영이 가능하긴 하지만, 대여 강경파들의 입장에서 온건파인 이철승이 이를 도입하겠다고 하는 것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정치공학으로 여겨졌다.[1] 그리고 이 때,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은 이철승이 당수로 선출되기를 바라고 정치공작을 수행하였다.
결국 조직폭력배 김태촌은 차지철, 이철승의 사주를 받고 휘하 조직들[2]을 이끌고 종로구 관훈동 신민당사를 공격했다. 친 김영삼 계열의 국회의원들은 김영삼과 함께 총재실로 대피시켜 바리케이트를 치고 버텼다. 김태촌은 김영삼에게 항복하라고 소리쳤지만 김영삼은 항복하지 않고 버텼다. 당시 김영삼은 "깡패놈들에게 맞아 죽어? 내 기어이 박정희 정권을 무너뜨리고 이철승 국회의원을 매장하고야 말겠다."라고 외치면서 저항하다 폭력배들이 도끼로 문을 부수고 들어가자 몇몇 의원들과 함께 창문으로 뛰어내렸다. 결국 김영삼은 다리가 부러져서 병원에 실려갔다. 김태촌은 신민당 대의원 명단을 불태우고, 직인을 강탈했다. 이에 전당대회는 연기된다.
그러나 얼마 뒤에 열린 전당대회에서 다시 김태촌이 동원한 조직폭력배들이 전당대회장이었던 서울 시민회관[3]에 난입한다. 위의 사진이 이때의 사진이다. 사실 이때는 김영삼도 나름대로 조폭을 동원하여 전당대회장을 먼저 점거하려 했지만 이미 정보를 입수한 정부에 의해 점거에 실패했고 김태촌 일당과 경찰에 의해 진압된다. 이들은 김영삼 측 대의원을 전당대회장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막았고,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의원이 대표로 당선된다. 김태촌의 회고.
이에 김영삼계 주류 대의원들은 신민당사에서 따로 전당대회를 개최했고, 김영삼이 총재에 당선되었다. 계파에 따라 따로 전당대회를 치르고 두 명의 총재가 나온 상황이 되면서 신민당은 분당 위기에 처한다. 결국 분당을 막기 위해 양자를 중재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난다. 이에 주류측이 비주류측의 최고위원제 도입에 찬성하고, 이전의 총재 선거는 무효로 하며 이충환을 총재 대행으로 하여 9월 15일 통합 전당대회를 치르는 데에 양측이 합의한다. 그리고 통합 전당대회에서는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45%를 득표하며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을 차지하지 못해 2차 투표로 넘어갔고, 2차 투표를 앞두고 이철승 지지를 선언하며 후보에서 사퇴한 정일형 때문에 역전당하며 결국 이철승이 총재가 되었다.
사실 누가 총재가 되었든 국민들에게 야당이 정치싸움이나 일삼는 집단임을 보여 주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는 성공한 것이었다. 이런 난리가 난 이상 김영삼이 총재가 되었더라도, 그게 다소 껄끄럽기는 할지언정 실패라고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이철승 대표는 참여 하의 개혁이라는 노선을 주장하여 사쿠라라는 비판을 받게 되었으며, 신민당 역시 79년 김영삼이 다시 총재로 선출되기 전까지 낮에는 야당, 밤에는 여당이라는 비아냥을 듣는 신세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