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민당(1967년)

대한민국의 민주당계 정당
민중당(1965년)/신한당신민당(1967년)민주한국당/신한민주당

1 개요

1967년~1980년 존재하였던 정당이다. 민중당신한당이 통합하여 창당하였다.

2 역사

1963년 박정희정권 수립 이후, 한국사의 굵직굵직한 민주화운동 뒤켠에서 관조적인 자세로 일관하던 제도정치 내 야당 인사들의 뭉쳐서 만든 정당이다. 한국은 4.19 혁명으로 독재권력을 쓰러트린것 까지는 좋았는데, 그 이후 계속되는 이합집산으로 인해 여전히 민주주의의 성장통을 겪고 있었다. 그러나 이 시기를 절묘하게 타고 박정희 소장이 쿠데타에 성공한다. 박정희의 군정통치와 뒤 이어 지속된 박정희의 독재권력화에 사실상 야권은 손을 놓고 있다시피 했다. 그러던 중 박정희의 대통령 재선 즈음 정치권 일각에서는 위기론이 터져나오기 시작한다. 쿠데타로 나라를 잡은 독재자가 재선까지 성공하였다. 이대로 갔다간 손 놓고 당하게 될 상황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역량을 총 집중하여 여당의 아성에 도전하는 방법이 주 전략일 수 밖에 없었다(예나 지금이나...).

당시 여당은 민주공화당이었고, 야권은 민정당, 민주당, 자유민주당, 국민의 당 등등 다양한 당들이 난입하면서 사분오열된 상태였다.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먼저 민정당[1]이 자유민주당을 흡수했고, 민주당[2]은 국민의 당을 흡수했다. 그리고 나서 두 당의 대단결이 이루어지고 민중당이 탄생하였다. 이후 민중당에서 분리된 신한당이 재합류하게 되어 야권대통합이 이루어지면서 신민당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오셀로?

신민당은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가 끝날때까지 제도정치권 하에서 박정희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이들도 결국 기성정치인이었기 때문에 정치권 밖에서의 일에는 무관심했고, 사회적 변혁의 이슈가 급 부상할때 이슈에 "숟가락을 놓는" 행동도 자주 보였다. 이러한 행태 때문에 소위 말하는 혁신계[3]나 재야/운동권[4]으로부터는 너네도 어차피 똑같은 기성 정치인이니까라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 아주 상징적인 예로, 김수영 시인같은 사람들은 장면같은 사람들을 1960년대 내내 깠다.[5]

여담이지만 이 시절이나 지금이나 야권 정치인이라도 기성 정치인들의 한계는 언제나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60~70년대 내내 재야의 사회운동가/활동가/민주화운동가/학생운동권은 사회변혁의 최전선에 나서서 극렬히 싸웠고 또 목숨을 잃기까지 했지만, 재야 정치인들은 뒤켠에 앉아서 사태를 관조했다. 사실 기성 정치인으로서 굉장히 경직된 사고를 가지고 있었고, 제2공화국 당시의 관료주의적 폐단과 순진함을 그대로 가진 이들이었기에, 급격한 사회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었을 뿐더러 심지어 정권획득 말고는 별 생각이 없는 정치인들도 부지기수였다(...). 이 당시 신문에는 무얼 하는지도 모르고 당에서 결정한 것만 찬성한다는 거수기 국회의원이라는 표현이 등장하기도 했다. 이는 여야할것 없이 어디나 적용되는 행태였다...[6]

하지만 1970년을 전후해서 새로운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바로 40대 기수론을 타고 기성정치권의 새바람으로 등장한 김영삼김대중의 급 부상이었다. 이들은 전에 없던 공개경선의 방식으로 대통령 후보 경선에서 맞붙으면서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출하게 된다. 1971년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이 아주 근소한 표차로 낙선하게 되자 신민당은 독재정권의 대항마라는 좋은 이미지를 얻게 된다. 물론 그 뒤에 매우 크고 무서운 것이 기다리고 있을줄은 아무도 상상도 못하고 있었다.

유신정권 성립 후, 김대중은 일본으로 망명을 떠났고, 김영삼은 가택연금과 정치활동 탄압을 받게 된다. 유신정권의 폭압과 칼바람은 상상 이상이었기 때문에, 기성정치인에 불과했던 신민당의 정치인들은 정치활동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이는 소극적인 정치활동으로 귀결된다. 신민당은 장외집회, 국회내 의회투쟁, 해외 언론을 통한 언론투쟁 등 다양한 방식으로 투쟁을 거듭하게 된다.[7]

그러던 중, 1976년에는 신민당 전당대회에 계파간 갈등이 격렬한 수준에 이르러, 구습 정치의 오랜 추태로 평가되는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일명 각목대회)이 일어나기도 한다. 이는 사실 온건파인 이철승을 총재로 만들고 야당의 이미지까지 깎으려는 박정희 정권의 공작이었다. 이때 재야운동권에서 많은 비난이 쏟아졌고 신민당의 기성정당으로서의 한계가 그대로 드러난 꼴이 되고 말았으니 성공한 공작이랄까...

1979년에는 총재직에 오른 김영삼의 김영삼 총재 의원직 제명 파동으로 인해 국내외의 여론은 다시한번 신민당을 주목했다. 대내외적으로 박정희 정권은 이 때 김영삼이 미국의 타임지를 비롯한 여러 시사잡지에 기고한 인터뷰 및 기사를 통해 그 반민주적 성격이 만천하에 드러난 상태였고, 김영삼은 반유신 체제의 상징적 인물로 등극한다.

그리고 1980년, 신군부에 의해 신민당은 멸망했다.

물론 5년 뒤 옛날옛날 한 옛날에 사라졌던 정치인들이 용사되어 돌아왔다네...

2.1 1969년 자진해산

1980년에 강제해산당하기 전에, 1969년에 자진해산했던 역사가 있다.

1969년 박정희 정권은 3선 개헌 추진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헌법개정안 가결정족수는 117명인데 집권당 민주공화당 국회의원은 109명뿐. 게다가 공화당 내에도 김종필을 위시한 개헌반대파들이 상당수 존재하였다. 박정희 정권은 돈과 권력을 동원해서 집권당내 반대파와 야당 국회의원들을 포섭하는 정치공작을 진행한 끝에, 기어이 총 121명의 서명을 받아서 국회에 제출하였다.[8] 문제는 신민당 국회의원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3명이 중앙정보부의 정치공작에 넘어가서 동참했다는 것이다.

이에 신민당은 3명을 변절자로 규정하고 이들에 대한 제제와 개헌저지 투쟁을 위한 방법을 모색하게 된다.

당시는 지금과 다르게 당이 해산하거나 의원 개인이 탈당하면 자동으로 국회의원 직위가 상실되는 제도였다.[9][10] 그러나 당에 의해서 제명이 되는 경우에는 또 의원직이 유지되었다.[11] 따라서 단순히 당에서 제명처리해 버리면 이들은 국회의원직을 유지한 상태에서 개헌안 표결에서 찬성표를 던질 것이다. 즉 아무런 효과가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일단 신민당 국회의원 47인 중에서 개헌파 3인을 제외한 나머지 44명을 제명하였다. 그리고 개헌파 3인만 남은 신민당을 자진 해산해 버렸다! 당을 자진해산해 버렸으니 성낙현, 조흥만, 연주흠 3명은 자동으로 의원직 상실.

그리고 제명 혹은 합당의 경우엔 의원직 유지를 예외로 한 정당법에 따라 무소속이 된 나머지 44명의 의원들은 원내교섭단체 "신민회"를 구성한 뒤 다시 창당 수순을 밟아 당을 재건하였다. 그야말로 힘에서 밀리고, 머리숫자에 밀리는 야당이 독재정권의 장기집권을 저지하기 위해서 벌인 해프닝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3선 개헌은 결국 통과된다.

한편 이 당시 김영삼 질산 테러 사건이 있었다.

2.2 진산 파동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당수 유진산의 행보와 관련된 사건이다. 해당 항목 참조.

2.3 1973년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 분당

유진산의 지도노선에 김홍일, 양일동 등이 반발하여 1973년 김홍일, 양일동 등을 포함한 일부가 신민당을 탈당하여 민주통일당(약칭 통일당)을 창당하였다.

3 역대 선거결과

4 관련 항목

  1. 구 민주당 구파에 속했다. 대표적으로 윤보선.
  2. 구 민주당 신파에 속했다.
  3. 해방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남한에 잔존했던 사회주의를 비롯한 좌파세력. 대부분 지하조직으로 활동을 했고 이들은 1970년대 유신정권 하에서 대부분 소멸한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것은 김철통일사회당 정도인데 김철도 사실상 1950년대에 들어서 사회주의자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혁신계로 취급하기 조금 애매한 감이 있다.
  4. 1950년대 이승만 독재를 거치고 4.19 혁명의 세례를 받은 민주화운동 세력. 한국사회 전체의 사상적, 정치적 스펙트럼을 면밀히 조망하기 위해 부득이하게 혁신계와 따로 분류하였음을 밝히는 바이다.... 이들은 군사독재 세력에 맞서 반독재 투쟁을 공동으로 이끌어 나갔다는 점을 특징으로 볼 수 있다. 사실상 반독재 세력이라는 것만 공통점이 있을 뿐, 사상이나 관점은 천차만별이다. 그리고 사상계를 이끌었던 故장준하선생을 비롯한 우익세력도 엄청나게 많았기 때문에, 혁신계와는 다르다 혁신계와는!
  5. 그의 시 김일성만세에 보면 아주 극단적으로 나와 있다(...)
  6. 동시에 당시 재야에서는 훗날 80년대 한국사회 구성체논쟁의 씨앗이 되는 매판자본 비판이라든가 봉건적 잔재 논쟁같은 것이 왕왕 논의되고 있었는데, 기성 정치권에서는 정치구조나 사회구조에 대한 논쟁이 별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점에서 일부 학자들은 당시 신민당을 무늬만 다를 뿐, 형태는 똑같은 보수정당으로 평가하기도 한다.
  7. 기본적으로 자유민주주의 틀 안에서 움직이는 기성정치인들이고, 고전적 자유주의가 뿌리인 이들로서는 이런식의 정치투쟁 외에는 상상하기 어려운게 사실이다...
  8. 민주공화당 109명 108명, 정우회 12명 중 11명, 그리고 신민당 47명 중 3명.
  9. 헌법 제6호 제38조 국회의원은 임기중 당적을 이탈하거나 변경한 때 또는 소속정당이 해산된 때에는 그 자격이 상실된다.
  10. 지금은 당이 스스로 자진 해산하거나, 당적이탈(탈당)해도 국회의원 직위는 유지된다. 선거를 앞두고 맨날 당을 만들고 부수고 하는게 이때문에 가능.
  11. 이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국회의원들이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도록 해주는 장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