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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一亨
1904년 2월 23일 ~ 1982년 4월 25일
대한민국의 관료이며 정치인이다. 대한민국 최초 여성 변호사인 이태영의 남편이자, 전 새천년민주당 대표 정대철의 아버지이다. 호는 금연(錦淵)이다.
1904년 평안남도 용강군에서 태어났다.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하고 1936년 이태영과 결혼하였다. 이후 1937년부터 연희전문학교, 숭실전문학교 등에서 교수로 재직하였다.
8.15 광복 후인 1945년 9월 송진우, 김성수, 장덕수, 조병옥, 윤보선 등과 한국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미군정기 미군정청 인사행정처장과 물자행정처장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이승만의 단독정부 수립론과 중도파의 좌우합작론이 나올 때 이승만을 지지하였다. 역시 1947년 12월부터 나온 남북협상론에 대해서도 이승만의 지지를 선언하였다. 한편 이 무렵 강남대학교의 초대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이승만 집권 후인 1949년 11월 한국민주당이 대한국민당 탈당파와 연합, 민주국민당이 창당되자 그도 참여하였다. 1950년 5월 서울 중구에서 제2대 국회의원에 당선된 뒤, 제2대 ~ 제9대 국회까지 8선의 의정생활을 하였다.
이승만의 독재가 노골화될 무렵인 1954년 호헌동지회가 결성되었을 때는 관망하다가 1955년부터 그는 조병옥, 곽상훈, 장면 등과 민주당 창당 준비 회의를 하였다. 1955년 9월 민주당이 창당되자 참여하여 활동했다.
1960년 4.19 혁명 후 장면 내각에서는 외무부(현 외교부)장관에 기용되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계속 민주당, 민중당, 신한당, 신민당 등의 야당에 소속되었다. 1965년 한일기본조약 비준에 반대하여 의원직을 사퇴하였다. 1969년 3선 개헌 반대범국민투쟁위원회 지도위원으로 참여하였다.
1976년 3월 유신정치에 반대하는 3.1 민주구국선언 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되었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하고, 공민권까지 박탈당하였다. 그리하여 1978년의 제10대 국회의원 선거에는 자격정지로 입후보하지 못하여 1977년 보궐선거에서 아들 정대철에게 선거구를 물려주어 당선케 하고 이후 재야에 머물렀다. 1979년 10.26 사건 이후 복권조치 되었다.
1980년 5월 5.18 민주화운동과 신군부가 조작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 재판으로 사형선고를 받은 김대중의 구명을 호소하기도 했다.
1982년 4월 23일에 고혈압으로 사망했다. 국립서울현충원 국가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었다. 4월 27일에는 정부로부터 국민훈장 무궁훈장에 추서되었다. 1990년 일제강점기 동안의 독립 운동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되었다.
그의 비서들 중 조홍규는 3선 국회의원을 역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