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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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車智澈. 이름이 찰지다.(...) 1934년 11월 16일 ~ 1979년 10월 26일. 대한민국군인, 정치가. 경기도 이천시 출신. 박정희 정권에서 경호실장을 역임하였다(1974~1979). 이승만 정권 당시의 곽영주보다 더한 권력지향적 경호실장의 결정판. 이 사람 친구도 이천 출신인데 다만 곽영주처럼 탐관오리, 인간말종 이미지는 덜하였다.

2 일대기

2.1 군인

어머니가 소실이어서 서자로 태어났다. 이로 인해 정실 소생인 형제들에게 설움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용산고등학교 [1] 졸업육군사관학교 12기에 시험을 쳤으나 불합격되었다(11기에 전두환 등의 하나회 창설멤버가 있었다.).

비록 육사 입학은 실패했지만, 동창들의 증언에 의하면 지금 널리 알려진 무식한 이미지와 달리 공부를 꽤 잘 했다고 한다. 거기다가 무술실력도 상당하여 태권도 합기도 각각 5단, 검도 3단의 실력을 가졌다고 한다.

그리고 우락부락한 경호실장 시절과는 달리 학창 시절에는 의외로 내성적이고 조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후 대한민국 육군 포병간부시험을 보아 합격하여 포병간부후보생 출신으로 군생활을 시작했다. 이 때문에 육사 출신에 대한 컴플렉스가 상당했고 경호실장 시절 육사 출신 현역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실 차장으로 임명하는 제도를 만들기도 했다. 또한 항상 경호실 훈련때 마치 총사령관인양 군복을 입고 아예 수경사령관 등의 장군들을 지휘하기도 했다. 1959년 공수특전단에 배치받았고, 이듬해인 1960년에 선진 고등유격훈련을 배우기 위해 미국에 유학 가서 미합중국 육군 기지인 포트 베닝의 레인저 학교에 입교했다.

이 코스에서 같은 팀 소속 미 육군 교육생이 인종차별을 하자 말 그대로 반죽음까지 두들겨 팼는데[2], 이때 맨손으로 훨씬 덩치가 큰 미국인을 떡실신시킨 무술실력을 높이 산 미 육군측에서 교육생들한테 태권도를 시연해보이는 것으로 무마시켜줬다고 한다. 어짜피 동맹국 육군 장교를 먼저 인종차별한 가해자 입장이라 미 육군도 큰소리칠 입장이 아니었다.

아주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전해진다. 항상 반질반질 광이 나는 전투화를 신고 다녔으며 입고 다니던 전투복이 주름지지 않도록 항상 신경쓰고 다녔다고. 방바닥에 먼지 하나 떨어지지 않도록 청소를 하는 깔끔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결벽증? 전역 이후에도 이 성격은 변하지 않아서 입고 다니는 양복이나 깔끔하게 탈모머리모양에 신경을 많이 썼다고.

5.16 군사정변 때는 대위 계급으로 공수특전단에 근무[3]하고 있었으며, 정변에 적극 참여했다.

2.2 국회의원

육군 소장 박정희의 경호대 중 한 사람이 되었고 박정희 집권 후 소령으로 진급, 바로 예편하였다. 1963년 제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공화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30살의 나이로 국회의원이 되었다. 이때 한양대에서 2년만에 박사학위도 땄는데 이건 당시 엉망이었던 대학원 과정 + 정계인사에 학위를 남발하는 학계관행 덕이었다. 이후에는 국회 외무위원장, 내무위원장까지 맡으며 승승장구한다. 여담으로 외무위원장 맡을 때의 나이가 36세. 이것은 박정희의 빽이란 말도 있다.

이만섭KBS 1TV 인물현대사 차지철 편에서 권오석 등과 현역 정치인들을 폭행하는 등 주먹으로 정치활동했다고 말했다. 그런데 차지철도 못 건드린 인물이 있었는데 그 인물이 김두한이었다. 4.19 혁명 학생운동 참여, 6대 국회에서 김두한의 비서로 지냈던 서용화는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 웃통을 벗어던지는 일화를 소개했다. 당시 김두한은 40대 후반, 차지철은 30대 초반. 게다가 김용채에게 손찌검을 당하기도 하였다.

베트남 전쟁 파병 때 여당 내에서 가장 강력하게 반대했던 인물 중의 한 명. 그런데 그 이유는 미국이 참전의 대가로 들어주기로 한 약속을 이행하지 않자, 여당 내에서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이는, 이른 바 쇼를 위해 박정희가 지시한 것.

드라마 제3공화국에서는 박정희의 지시로 월남파병을 반대하기 위해 월남 전쟁을 연구하다가 심취해 필요 이상의 반대를 하다 박정희에게 찍힌다. 실제 그런 모습도 있었다고. 사실 참전의 정당성 문제를 떠나서 월남 공화국의 상황이 상당히 막장이기는 했다. 최소한 대한민국 국민이란 자각이 있던 우리나라완 달리 월남 국민이란 공통 정체성도 없는 판이었다.

이후 1967년 제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현역 지역구 국회의원인 신민당 신하균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1년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공화당 후보로 해당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유기준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1973년 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민주공화당 후보로 경기도 광주군-이천군-여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신민당 오세응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2.3 대통령경호실

1974년 문세광의 저격으로 육영수가 사망하자 이에 책임을 지고 물러난 '피스톨 박' 박종규 대신 경호실장이 되었다. 그리고 경호실장 임명에 따라 국회의원직을 사퇴하자 지역구는 정동성이 물려받았다,

사실 박종규나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은 전 국세청장 오정근을 경호실장으로 추천하였으나 박정희의 의지로 결국 마흔살의 차지철이 내정되었다. 당시 신문기사는 차지철를 박정희의 친위 중의 친위라고 소개하고 있다.

차지철을 강력하게 추천한 것은 바로 육영수였다. 여자 관계가 깨끗하고 술담배도 하지 않으며, 우직하게 박정희에게만 충성하기에 경호실장에 맞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2.3.1 월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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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실장 당시 경호실 작전차장보 육군준장 전두환 , 행정차장보 육군준장 노태우 와 함께 3대 마왕 정모 사진

경호실장이 된 뒤 위상을 높인다고 경호실장을 차관급에서 장관급으로 격상했다. 심지어 현역 육군 중장 또는 소장을 경호차장으로 두었으며 현역 육군 준장을 차장보에 임명하였다. 비상시에는 수도경비사령부도 지휘할 수 있게 법까지 바꿔놓았다. 위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11·12대인 전두환과 13대 대통령인 노태우 둘 다 경호실 차장보 출신이다. 한마디로 차지철보다 기수와 나이도 위인데다 한국전 참전 용사인 3성 장군인 육군 선배 장교들이 일개 예비역 포병 중령인 민간인 차지철에게 매일 군인 상관 대하듯이 거수경례를 해야 했다. 이때 비서실장과 동일한 장관급으로 격상된 경호실은 수십년이 지난 2008년이 돼서야 차관급으로 환원되었다. 정확히는 비서실에 경호실이 흡수되는 형식으로 명칭 또한 비서실에서 대통령실로 바뀐 것. 그런데 박근혜의 정부조직 개편으로 2013년 3월부터 다시 경호실이 독립하면서 실장이 장관급으로 또 격상된다.

비서실장이 김계원으로 교체된 1979년부터 비서실 업무에 간섭하기 시작했다. 이때 김계원은 육군대장 출신으로 중앙정보부장을 거쳐 비서실장에 임명됐는데, 이것은 김계원이 부총리급인 중앙정보부장에서 장관급인 비서실장으로 좌천되어서 차지철이 김계원을 알로 보고 깝쳤다는 말이 있다.

월권의 정점은 중앙정보부와의 갈등으로, 차지철은 경호실 공금으로 대규모의 사설 정보팀을 운영했다. 경호실이 박정희에게 물어다 주는 정보가 중앙정보부를 통한 정보보다 더 신빙성 있었기 때문에, 박정희는 점점 차지철을 김재규보다 신임하게 된다. 더 웃긴 것은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에게 보고할 때도 경호실장이 동석해야 한다고 억지를 부렸다고 한다. 김재규는 이런 월권행위를 상당히 불쾌하게 생각했으나, "내가 중장 출신인데 어찌 저런 예비역 중령이랑 옥신각신하겠나"라고 분을 삭였다고 한다.정신승리 하지만 이걸로 끝나지 않고 차지철은 김재규가 박정희에게 뭔가 말을 하면 중간에 잘라먹고 자기가 하고 싶은 말들을 지껄여대서 김재규가 머리끝까지 빡치게 만들었다.

또한 박정희를 지키겠다며 상식 밖의 일들을 벌여댔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한밤중의 전차 시위였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육군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킨 것이다. 서울 시민들이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전차 여러 대가 요란스러운 소리를 내며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는데,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네에 난리가 났다. 인근 주민들이 처음엔 전쟁이 난 줄로 알고 불안해할 정도였다.

이런 일을 한 이유가 궁금했던 기자가 차지철에게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누군가 묻자 차지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난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서다.” 한마디로 위압감을 심어줘 대통령은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이야기다.(출처:중앙일보 2015.08.12 기사 김종필의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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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호실 산하 부대들을 창설한 뒤 특제 제복을 입혀 완벽하게 박정희의 친위대로 만들려 하였다. 이들 경찰·군부대들의 101, 22, 202, 33, 55, 88 등 같은 숫자가 두 번 쓰인 독특한 이름들을 지은 것도 차지철이다.

참고로 민주화 이후에도 이들 부대는 여전히 있다. 특유의 화려한 복장 또한 다소 변화하긴 했지만 여전하다. 다만 현재는 복장이 보안사항이라 공식적인 루트로는 어떻게 생겼는지 볼 수 없다...는 개뿔, 구글에서 검색하면 많진 않지만 나온다. 운이 좋다면(?) 삼청동 인근에서 종종 볼 수 있다. 혹자는 나치 친위대 제복같다고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나치 친위대 제복을 베낀 건 아니다. 상기 사진의 전두환과 노태우가 입고 있는 한국 육군 정복과 기본적으로는 같다. 근래에 와서 부착물들이 간소하게 바뀌긴 했지만, 일부는 지금도 한국 육군 예복 등에서 볼 수 있는 부분들이다. 하지만 경호실 산하 병력은 SS와 행동이 같잖아.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은 박정희의 국군의 날 사열식을 본따 국기하강식이라고 해서 장관, 차관 등을 초청해 아주 삐까번쩍 무력시위행사를 치렀다. 이 행사가 매우 유명해져, 장관이든 4성장군이든 초청을 받고 오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일화가 있다. 각하의 친위 중의 친위가 초청한다는데 가지 않을 배짱이 있나? 거의 유일하게 초청을 받고도 가지 않은 것으로 밝혀진 사람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다. 자신이라도 줏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가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당시 육사 출신이 별을 달면 작전차장보 전두환에게 인사를 왔는데 전두환은 꼭 이들을 차지철에게 데려가 인사를 시켰다. 차지철은 이를 매번 흡족히 여기며 자기 이름이 새겨진 지휘봉을 하사했다. 이건 일개 경호실장이 할 짓들이 아니다. 오죽했으면 당시 차지철을 두고 부통령 각하라고 비꼬는 말도 나왔다. 이를 보고 정부에서는 반발이 심하였으나 워낙 박정희가 총애하였기에 무서워서 간언도 할 수 없었다고. 이에 반발하던 사람 중에는 경호실장(장관급)보다도 더 높은 중앙정보부장(부총리급)으로 육군 중장 전역자이자 박정희와 육사 동기(육사 2기)인 김재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2.3.2 기업 압박

  • 교보생명광화문 사옥을 건설하려 할 때 층수를 낮추라고 압박을 주었다. 그러자 오히려 대산 신용호 창업주가 그럴 바에 할복자살하겠다고 하여 역관광당하였다.
  • 을지로 호텔롯데 건설에서 40층 이상 지으려 하자 청와대가 내려다 보인다고 안 된다고 하였다. 결국 김종필 국무총리의 힘으로 37층으로 타협을 보았다.

2.3.3 정치 개입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 등에 개입하였다. 그리하여 이철승의 온건 노선을 지지하였다. 그리고 1979년 5월 신민당 전당대회에서 이철승 체제의 유지를 목적으로 신도환에게 접근하였다. 또한 이택돈 등도 자기 사람으로 만들어 밀월관계를 유지하였다.

민주공화당 내에서는 박찬종 등을 자기 사람으로 만들었다.

같은 해 3월, 제10대 국회가 개원하였을 때 민주공화당 이만섭 의원이 여당, 정부의 각성을 촉구하는 발언을 하자 이를 자신의 계열인 민주공화당 모 의원으로부터 보고받고는 박정희에게 과장 보고하여 박정희가 이만섭을 제명하려고 하였다. 다만 김계원 대통령비서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4], 류혁인 정무수석비서관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었다.

2.3.4 '행사'

육영수가 사망한 다음날부터 차지철은 TV 드라마 매니아가 되어 있었다. 연속극을 웬만한 아줌마들보다 훨씬 많이 시청하면서, 하지만 그러면서도 드라마 테이프를 달라는 요청을 안했는지 당대 방영된 드라마 자료는 남아있지 않다.[5]마음에 드는 배우들을 손가락으로 찍으면 경호실에서는 해당 배우들의 집으로 가서 거의 강제로 청와대에 데려갔다. 그리고 나서는 대행사와 소행사를 준비했는데 대행사는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저격당하던 그날 있던 술파티와 동일한 형식이라 보면 되고[6] 소행사는 박정희와 동원된 연예인들끼리만 진행했으며 소행사에는 차지철도 관여하지 않았다.

대행사에는 김재규, 차지철 외에도 보안사령관전두환 장군도 참석한 적이 있다. 이 대행사에서 전두환 장군과 차지철은 겉으로는 웃으면서 친분을 과시했으나 속으로는 치열한 견제를 했다. 나름대로는 아내를 잃은 박정희를 위로한다고 하는 행동이었으나, 윤리적으로는 지탄을 면치 못할 짓거리였다. 당시 여자 연예인들의 공공의 적 차지철

물론 이 부분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와 중앙정보부 의전과장 박선호가 주로 한 짓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차지철이 그들에게 대신 시켰는지는 확인이 필요하다. 차지철 본인이 "김재규가 자꾸 여자를 각하께 소개하는데 나는 교회 다니는 몸이라 그런 짓 못하겠다."고 말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그럼 다른 짓거리는 교회 다니는 몸으로 해도 되는 짓거리냐?

육영수 또한 이미 사망 전에 윤필용 장군에게 박정희의 여러 부하들에 대한 우려를 표시하면서 왜 남편에게 맨날 배우만 소개하냐고 말했다는 진술이 있다. 꽤 오랫동안 있었던 일인듯. 다만 육영수 사망 이후 그 빈도수가 훨씬 늘었음은 분명하다.

차지철이 했든 안했든 간에 공식적으로는 중앙정보부와 경호실의 이름으로 이런 일이 자행되고 있었고 그 때문에 차지철이 이런 일에 완벽하게 연루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즉, 차지철은 좋게 말해봐야 방관자, 극단적으로 말하면 주동자다. 상식적으로 봐도 박정희의 유흥에 관한 일을, 박정희의 신변을 책임진 경호실이 구경만 하고 중앙정보부가 주동이 되어 할 리가 없다. 그러므로 차지철이 부하들에게 한 말은 그저 자신의 채홍사 노릇에 대한 책임을 그냥 김재규에게 전가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

2.3.5 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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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가 부마항쟁을 박정희에게 보고한 뒤, 박정희가 강경진압을 지시하자) 차지철은 이 말 끝에 '캄보디아에서는 300만명 정도를 죽이고도 까딱 없었는데 우리도 데모대원 1∼200만 명 정도 죽인다고 까딱 있겠읍니까?'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을 함부로 하는 것이었읍니다.

- 김재규. 79고군형항제550호(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후) 항소이유보충서

1979년도가 되자 정계뿐만 아니라 사회계에도 차지철이 박정희의 후계자를 노린다 혹은 결정되었다는 설이 파다했다. 차지철은 대권을 잡았을 때 휘호를 쓰기 위해 명필을 개인선생으로 두고 붓글씨 연습을 한다는 이야기도 돌았다. 10.26 직후 상황이 불분명할 때 차지철이 박정희 살해범으로 의심을 받은 것은 이런 근거에서 추측된 설이었다. 박정희도 그 전까지는 통칭 '2인자 박치기'를 통해서 수하들의 충성경쟁을 유도했지만, 차지철 한 사람을 유독 편애(?)하자 그만 미묘한 권력의 균형추가 붕괴해버렸다.

1979년 10월 18일 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고 부산에서 사태를 목격한 김재규가 청와대에 보고하러 왔을때 박정희 옆에서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을 죽였다는데 우리가 1, 2백만명 정도 죽이는게 대수겠냐"는 정말 미친 개소리를 한다. 심지어 이런 미친 소리가 터져나와도 차지철이 두려워서 누구도 태클을 날리지 못하고 박정희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를 못했다.

이 사건 이후 부산에 내려가 사태를 목도한 김재규와 점차 알력이 생기고, 김재규는 계속 반말투로 자신을 무시해온 차지철을 마뜩지 않아 했다. 차지철은 박정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윗사람이 없다는 식으로 행동했다. 비단 중앙정보부장 김재규 뿐만 아니라, 국무총리조차 자기 아랫사람인양 마구 대했다. 특히나 김재규는 박정희의 육사 동기임을 감안할 때, 기수를 매우 중요히 여기는 군부 출신으로서 이를 고깝게 여기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그 고름은 1979년 10월 26일 결국 차지철을 쏘고 박정희를 쏘는 10.26 사건이라는 이름으로 터진다.

이 때 김재규 외에도 정계 전반에서 차지철에 대한 반감이 얼마나 심했는지, 사건 직후 박정희의 죽음이 알려졌을 때 처음엔 '차지철이 박정희를 살해했다'고 여긴 인사들이 많았다. 정승화 총장은 차지철이 쿠데타를 일으키려 한다고 오판해서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서 청와대를 원거리에서 포위하게 했고, 육군본부에서 비상 국무회의를 소집했을 당시 김치열 법무부 장관은 "그 놈의 새끼가 기고만장하며 까불더니 결국 일을 저질렀구나!"라며 분통을 터뜨렸는데 여기서 '그놈의 새끼'는 당연히 차지철을 지칭했다. 훗날 반란을 저지르는 전두환도 10.26 사건 직후 친구인 노태우에게 사적으로 암살을 알려주면서 차지철이 범인인것 같다고 말했다. 이 정도로 차지철의 전횡은 심각했다.

전직 중앙정보부장이자 미국으로 망명해서 박정희를 디스하던 김형욱의 납치 살해에도 차지철이 관여했다고도 한다(다른 설에는 차지철이 아니라 김재규가 관여했다고 한다.). 어쨌든 둘 중 한명이 연루된 것은 확실하며, 10.26 직전인 그해 10월 8일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김형욱은 살해되었고, 이것을 본 김재규가 자신도 권력을 잃은 후 이렇게 될 것을 우려하여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설도 있다.

그리고 10월 26일 차지철은 박정희를 따라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한 후 그날 저녁 박정희의 지시에 따라 중앙정보부에 대행사를 알린다. 그리고 그날 저녁 궁정동 안전가옥에서 대행사가 시작되고 궁정동에서 차지철은 김재규 손에 최후를 맞는다 좀더 자세한 사건내용은 10.26 사건 항목 참조

암살 직전 김재규는 "차지철, 이 새끼 너 건방져!"[7]라는 말을 던지고는 품속에 숨겨둔 발터 PPK로 차지철의 팔을 쏘았다.

당시 차치절은 박정희의 경호실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총을 차고 있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박정희는 술자리에 총이 보이는 것을 매우 싫어해서 일부러 차지철에게 총을 차고 오지 말라고 지시했기 때문이라고 한다.[8] 그리고 이것이 차지철과 박정희의 운명도 결정해 버렸다.

그나마 총기 문제는 이해해줄 여지라도 있겠지만, 진짜 문제는 경호실장이라는 인간이 총격이 시작되자 박정희를 버리고 도망갔다는 것이다. 차지철은 위에서 언급한대로 팔에 총을 맞았는데, 총 맞은 직후 바로 화장실로 도주해버렸다. 경호실장이 자기 목숨 위험하다고 경호대상인 박정희 앞에서 총 뽑는 자를 내버려두고 도망쳐버린 것이다. 물론 차지철은 전문 경호원도 아니었고 김재규가 자신만이 아니라 박정희까지 죽일 줄은 몰랐겠지만, 적어도 청와대 경호실장이라면 박정희 앞에서 무단으로 병기를 뽑아드는 상대는 어떤 일이 있어도 제압하거나 저지해야 한다는 건 경호실장이라면 상식적으로 해야 할 일이었다.

그렇게 차지철이 화장실로 도망간 사이 김재규는 박정희마저 총으로 쏘았다. 그 직후 안전가옥 전체의 불이 꺼졌고,[9] 김재규는 PPK가 고장이 나는 바람에 다른 총을 가지러 밖으로 나갔다. 차지철은 그제서야 총에 맞은 팔을 움켜쥐며 (이미 김재규의 부하들이 다 죽이거나 무력화 시킨) 경호원들을 찾는 추태를 보이다가, 김재규가 다른 총을 가지고 돌아오자 사방이 뚫린 장식장을 들고 저항하였다. 그러나 김재규가 쏜 총알은 차지철의 를 관통하였고 그렇게 차지철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그러나 일설에 의하면 그때 숨이 끊어지진 않았고 상황이 끝난 후에 중앙정보부 경비원이었던 김태원이 M16 소총으로 사망자들을 하나씩 확인사살할 때까지 살아있었다고도 한다.

차지철이 죽고난 뒤 채포된 김재규의 재판과정에서 경호실장이라는 작자가 박정희를 두고 도주한 것과, 이유야 어찌됐든 총을 차고 있지 않은 것 때문에 죽은 차지철은 엄청나게 비판을 받는다. 이것 때문에 정부는 원래 차지철의 시신을 현충원에 안장하려 했으나 취소하고, 결국 차지철 시신은 그의 어머니가 다니던 교회 묘지에 안장되었다.

3 사생활

개신교 신자로서 여성관계에 있어서는 대단히 깨끗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내만 바라볼 뿐 다른 여성은 쳐다보지도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전처와는 모종의 이유로 6개월만에 이혼했다. 차지철측의 주장으로는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했다거나, 혹은 사생활 문제가 있었다고 하나 이혼 사유는 당사자들만 알고 있기 때문에 확인할 방도는 없다.

차지철의 측근들은 차지철이 청렴했다고 주장하고 있었고, 나무위키의 이전 버전에도 그런식으로 씌여 있었다. 그중 한 일화에 의하면, 알고 지내던 육군 선배가 전역 후 사업을 하는데 사업이 어려워지자 아는 사람을 통해서 차지철에게 은행대출 청탁을 넣었다고 한다.[10] 그런데 차지철은 이야기를 듣자마자 청탁을 전달한 사람의 손을 잡고 집무실 옆에 마련된 기도실로 들어가 함께 그 육군 선배의 장래를 위한 기도만 올리고 청탁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하지만 차지철의 금전문제가 깨끗했다는 측근들의 주장은 상당히 가려들어야 한다. 이렇게 차지철이 청렴했다는 주장은, 경호실에서 차지철을 보좌했던 부하들이나, 측근들이 소스인데, 신빙성이 상당히 의심된다. [11] 차지철 사후 미국으로 이민간 후처의 경우, 미국에서 2천만달러 상당의 저택을 소유하였다. 아내뿐만 아니라 처남도 비슷하였다. 심지어 차지철 사망 직후에 차지철의 아내가 사기를 당했는데, 액수가 14억이었다. 이 액수가 얼마나 큰 것이냐면, 당시 막 분양된 40여평형 압구정 현대아파트의 가격이 약 3천만원에 불과했다. 14억원이면 지금도 거금이지만, 당시 가치로 환산하면 수십억~수백억으로 환산될 수 있는 거금이며, 피아노 연주자에 불과했던 차지철의 후처가 별다른 이유없이 이를 소유했다면, 출처는 차지철밖에 생각할 수 없으니 청렴했다는 것은 말이 안된다. 거기다가 그렇게 사기당하고도 미국에 2천만달러짜리 저택을 구입한 것을 보면, 더 많은 자금을 보유했다는 유력한 증거가 된다. 애당초 그당시는 대통령부터 정치자금이라는 명목으로 뇌물을 공공연히 받던 시대인데다가, (이런 관행은 김영삼 때부터 사라졌다.), 부정부패를 추방하겠다던 5.16 주도세력 대부분이 부정부패에 연루되었는데 (김형욱은 엄청난 유산을 가지고 미국으로 도피해 현재 유족들이 미국에서 잘살고 있고, 이후락이 남긴 재산만 수백억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차지철이 돈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위에도 나왔듯이 개신교도라는 이유로 박정희의 '채홍사' 행동도 거절하였는데, 이것이 김재규에게 넘어가면서 김재규에게 더 미움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태국을 방문했을 때 불상을 보고 우상숭배 운운하여 물의를 빚기도 했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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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사가로 활동한 경력도 있다. 윗 짤방의 EP 음반에 담긴 '조국의 찬가'와 '민족의 노래'가 차지철 작사로 표기되어 있다. 물론 대학 학력과 마찬가지로 이것도 누군가가 작사를 대신 해주고 차지철은 이름만 올렸을 수도 있다.

둘 다 평범하다면 평범한 건전가요 수준의 노래들이지만, 박정희와 차지철 사후 이 노래들을 누가 불렀다는 기록이 전혀 없다. 작곡가 김희조에게도 마찬가지로 불명예스러운 기록이 되었다.

두 곡 중에서 '민족의 노래'는 여기서 들어볼 수 있다. 70년대 초반쯤에 '국립영화제작소'에서 만든 영상물인데, 이 영상의 맨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곡이 그 곡이다.

박정희가 진도군로부터 진돗개를 받아 키운적이 있는데, 그 개에게 엉덩이를 물렸다(...). 의견(義犬) 이후 그 개는 격리조치되었다. 개가 엉덩이를 물었을테부터 박정희가 알아차렸어야 한다. 진도군수의 안위가 심히 걱정된다

3.1 모친

1990년에 한 여성월간지에서 차지철의 어머니인 김대안(1898.12.06~1998.12.23) 씨가 살아있다고 하여 보도한 바 있다. 당시 아흔 둘이던 어머니는 홀로 가난 속에 병마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차지철이 어릴적부터 가던 교회 목사가 그나마 경제적 도움을 줘가면서 살아가고 있었다고 한다. 차지철은 어머니에게만은 효자였는데, 어린 시절이 불우했기에 믿을 사람이라곤 어머니뿐이었기 때문이다. 어렸을땐 배다른 형제들에게 무시당하고 맞고 살았는데, 그가 출세하자 이 형제들이 꼬리흔들며 찾아왔지만 차지철은 "형제? 나에겐 어머님 밖에 피붙이가 없는데 뭔 개소리냐? 다시 찾아오면 그 땐 제대로 살아남기 어려울테니 얼씬도 하지마라."라는 차가운 목소리로 문 앞에서 내쫓았다고 한다. 잡아쳐넣지 않은게 어디냐?

더불어 차지철이 살아있을 시절에는 어머니도 호강을 누렸다. 불편한 어머니를 위해서 집에 에스컬레이터를 달아줬을 정도라는 이야기도 있다. 이러다 보니 김대안 할머니는 당시 이 월간지 인터뷰에서도 "내 아들이 남에게 죽일 놈 욕을 먹는 거 알지. 하지만 나에겐 하나뿐인 아들이었어. 그리고 이 에미에겐 지극정성하던 효자였고."이라며 아들을 그리워했었다.

그가 얼마나 효자였는지는 노태우 회고록에도 어느 정도 엿볼 수 있다. 어느날 박정희의 여름 휴가에 차지철과 함께 대동한 노태우는 박정희 가족들과 함께 수영을 즐기고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차지철 보고 물에 들어올 것을 권유하자 차지철은 즉각 거부했다. 박정희가 다시 강권하자 차지철은 마지못해 바닷물에 종아리를 담궜으나 파도가 얕게 치자 즉시 질겁하며 물밖으로 달려나갔다. 거의 공수병 환자같은 모습에 의아해진 박정희가 이유를 묻자 차지철이 "어머니가 물에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다."라고 대답했다 한다.

그리고 어느 골프장 오픈 기념 행사로 초청이 되어 이동하던 중에, 우연히 일을 하던 어머니의 모습을 목격하고는 그대로 차를 돌려 돌아간 일도 있었다. 어머니가 땡볕에서 일을 하고 계시는데 자기가 놀러 갈 수는 없다는 것. 실제로 차지철은 죽을 때까지 골프를 치지 않았다.

그외에도 전 중앙정보부장이자 나중에 비서실장을 지내는 김계원의 모친이 편찮아서 안절부절 못할 때, 박정희에게 대신 보고하고 헬리콥터까지 빌려주는 등 어머니가 관련된 문제에는 평소와 다르게 매우 친절하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지철이 어머니를 위하여 마련한 큼직한 집이나 차와 돈은 어머니가 생전에 죄다 사기당하여 모조리 잃었다고 한다. 그런데 당시 어머니의 지인들은 차지철이 믿던 그 목사야말로 사기꾼이라며 비난했다. 차지철이 그나마 어머니를 위하여 준비한 재산을 야금야금 다 먹었다고 비난했는데 당시 이 월간지에서 인터뷰하려고 하자 피했을 정도. 참고로 당시 이 월간지에 나온 어머니는 달동네에서 볼 법한 허름한 집에서 텔레비전도 없이 이불자리와 정말 간단한 주방살림과 전자제품이라곤 커피 포트 하나 뿐인 극빈층 신세였다. 치아 상태도 말이 아니라 도 못먹고 커피 포트로 쑨 만 겨우 먹을 수 있던 비참한 신세였다. 지인들은 이런 할머니에게 그 목사가 경제적 도움이라고 주는 돈이 겨우 하찮은 용돈이나 던져주는 수준이라고 비난했다. 결국 김대안 할머니는 1998년 12월 23일 경기도 하남시 영락노인복지센터 양로원에서 101세의 나이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났다. 여담으로 1997년 9월에 김영삼 대통령 부부추석을 맞아 영락노인복지센터를 방문했다가 김대안 할머니를 만났다고 한다.

4 평가

3, 4공화국 시절, 즉 박정희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에게도 차지철은 그다지 평가가 좋지 않다. 그런 사람들에게 2인자 차지철은 '막나갔던 GUN☆BANG진 간신'으로 취급받으며 박정희가 욕먹는 이유로 차지철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3, 4공화국을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측에선 그런 간신을 오냐오냐하던 박정희도 결국 똑같은 자라고 비웃는다. 이에 3, 4공화국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은 일단 윗선을 현혹시켜 권력라인에 붙어 있어야 간신 타이틀이라도 붙지 그렇지 못하면 진작에 짤린다고 반박한다. 그리고 이런 주장은 1, 2공화국 시절 이승만이기붕을 두고도 똑같다.

5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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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5.16 군사정변 뒤에 박정희와 차지철(우측)둘리? 가지 상판[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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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 5월 23일 군부대에 격려금 전달. 육군 중장이 너무 없어 보인다. 개그 콘서트 감수성에 등장하는 오랑캐를 많이 닮은 모습불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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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선거 포스터. 김두한 VS 다찌마와리 임원희? [13]

6 창작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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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근이 열연하였다. 이때의 연기가 워낙 강렬해서 이후 박정희 시대를 다룬 드라마에서 차지철의 모습은 어느정도 정형화된 감이 있다. 5.16 군사정변 당시 갖고있는 소총의 개머리로 헌병의 얼굴을 가격했다. 국회에선 외무위원장이라고 깝치자 이에 반발한 야당 국회의원과 청문회장에서 대판 싸우기도 했다. 경호실장이 된 뒤에는 교회에 가서 십자가에 무릎꿇고 "주여! 청와대 안에서는 각하가 저의 하나님이십니다!"라는 명대사까지 하기도 했다. 그 후 말년에 김재규(박근형)에게 "김부장"이라며 김재규의 부아를 아주 제대로 돋구게 하였고 결국 10.26 때 "이 새끼 너 건방져!"라는 말을 듣고 저격당했다. 이때 옥의 티가 있는데, 카메라 앵글을 제때 조절 못해서 그런지 김재규가 총을 쏘기도 전에 차지철의 손목에 피가 보인다. 현대사 정통 정치 드라마의 딱딱한 특성상 분위기를 전환할만한 개그 캐릭터로서의 활약 역시 두드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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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였다. 다만 현대극에서는 친근하면서도 능글맞은 아저씨를 주로 연기하는 정한헌이 차지철을 연기하기에는 뭔가 어울리지 않았다는 평이 있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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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임꺽정에서 임꺽정 역으로 연기한 정흥채씨가 연기하였고 머리숱이 너무 많다? 박정희 사진 앞에 무릎을 꿇으며 그를 찬양하는 대사는 코미디 백미. 극중 무식한 행동대장 기믹이여서(실제도 그랬지만) 알게 모르게 개그 캐릭터화. 드라마가 조기종영하는 바람에 죽는 장면은 안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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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 맞습니다. 캄보디아에서도 3백만명을 죽였다는데 우리가 백만이나 2백만정도 희생시키는거야 뭐가 문제가 되겠습니까? 우리가 보릿고개를 넘은지가 얼마나 됐습니까? 이제서야 겨우 먹고살만 해지니까 정신 못 차리고 데모나 하는 자식들. 초장부터 세게 밟아버려야 합니다.
정호근이 연기했으며 저격당하기 전 "이 따위 버러지 같은 놈!"이라는 말을 들었다. 제4공화국에서 나온 말은 당시 김재규가 차지철을 쏠 때 한 말로 소수설이고, 제5공화국에선 공식 수사기록인 다수설을 바탕으로 재구성하였다. 공식 수사 기록과, 사건의 목격자인 심수봉 씨나 김계원 씨의 증언 중 서로 다른 내용이 조금 존재한다. 참고로 공식 수사기록은 최근에 당시 수사기관의 강압적인 압력에 의해 나온 거짓진술임이 드러나면서 심수봉의 말이 사실로 확인되었다. 신재순과 중앙일보의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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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선 다른 작품들에서 개그 캐릭터를 자주 맡은 정원중이 치졸하고 유치한 모습을 연기했다. 상의는 화려한 제복을 입었는데 정작 바지는 입지 않은채 '각하'에게 전화를 받는 모습이나, 명색이 경호실장이라면서 혼자 살아보려고 추태를 보이는 모습이 포인트. 덤으로 쪼인트를 굉장히 현란하고 맛깔나게 깐다. 원! 투! 자 보세요 두대 맞았죠? 하지만 아직 안 끝났어요. 뒤로 돌아서, 안 보고 뒤차기! 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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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조연 손병호가 연기했는데 작중에는 '장혁수'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작중 김재규 보다 더 비중있게 나오며, 주인공 아들과 박지만이 싸웠을 때 화가 치밀어 주인공 머리에 총을 겨눈다.

7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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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그림자의 등장인물인 장철환은 차지철을 모티브로 만든 가상 인물이다. 전광렬이 연기하였는데 권력에 집착하는 다혈질적인 인물상은 차지철과 매우 흡사하다.

김진태의 만화 시민 쾌걸에는 동명의 정보요원이 나오지만 생김새나 성격까지 모델이라고 하긴 어려워 보인다.

모에화(...)가 등장했다. 여기 코렁탕 한사발. 그런데 공주님 입장에서 차지철은 자기 아버지를 버리고 지 혼자 튀어버린 배신자니 별 신경 안 쓸듯.

차지철의 딸이 국가유공자 등록 소송을 했다.기사 1심에서 법원은 차지철의 딸이 국적을 포기했으므로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원고 패소 판결을 내렸으나 항소를 했다고 한다.
  1. 평준화 이전 서울에서 커트라인으로 5위안에 들던 고교였다. 현재로 비유하자면 상위권 외고정도 된다.
  2. 둔기로 두들겨 팬 게 아니냐고 의심을 받을 정도로 엄청나게 패놨다고 한다.
  3. 오늘날과 달리, 1980년대까지 육군 특전사에는 보병 병과 외 포병이나 기갑 등 다른 전투병과 장교도 특전교육을 받고 특전사 전투원으로 근무할 수 있었다. 진급점수 확보 기회 등의 일환이었으나, 비보병 장교들은 병과 특성상 효율이 떨어져 현재는 지원 자체가 안된다. 전투병과 중 특전사 전투원이 되려면 보병 외엔 병과나 일부 극소수 공병(시설단), 통신 등 만이 가능하다. 따라서 헌병같은 병과는 불가능하다.
  4. 이만섭이 5년제 대륜중학교 학생일 때 체육교사였다.
  5. 농담같지만 실제 이 당시에 방영된 테이프가격이 비싸다는 이유때문에 드라마를 한번 녹화했다 재방때까지만 쓰고 이후로는 다른 프로그램 녹화하는데 테이프를 재활용했기 때문에 당시의 드라마 자료는 많이 남아있지 않다고 한다.
  6.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경호실장, 비서실장은 기본이고 국무총리, 초청받게 되면 장관이나 장군, 제독들도 참석하는 자리였다.
  7. 본래 이 발언은 소수설이고 목격자 신재순의 증언에 따른 "각하, 차지철 저 버러지같은 놈을 데리고 정치를 하니 올바로 되겠습니까?"라는 발언이 다수설이였지만, 2011년 신재순씨가 중앙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이 버러지 발언이 합동수사본부의 강압에 의하여 진술하였다고 털어놓았다.
  8. 아마도 육영수 암살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추정된다.
  9. 이는 당시 직원이 총소리를 듣고는 전류가 터진 것으로 착각하고는 임시조치로 전원을 내려버렸기 때문이다.
  10. 당시 은행대출은 권력자가 중간에서 청탁을 받아 은행을 소개하고, 대신 대출받은 사람은 대출액의 일정부분을 청탁의 대가로 바치는 것이 거의 관례였음.
  11. 이런 인사들의 차지철의 전처에 대한 흑색선전성 주장 (남자관계가 복잡했다고 주장)을 기사화하여 지면에 실은 중앙일보 기자는 그 전처의 고소미에 걸려 1991년당시 명예훼손 위자료로서는 엄청난 액수인 2천만원을 물어준 바 있다. 즉 법원이 이런 인사들의 주장을 허위라고 판단한 것이며, 이런 소스의 신빙성에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12. 역대 대통령 중 관련 유머가 거의 없기로 유명한 사람이 바로 박정희와 김대중이다. 첫째, 두 사람 다 유머소재로 쓰기에는 재미가 없게 보였을 것이고, 둘째, 주요 유머생산계층이 당시 관련 지지자들이요(특히 김대중), 셋째, 수류탄을 찬 차지철 사진을 보고 유머 만들 생각이 저 멀리 달아났을거라는 추측이 있다. 이게 유머가 아니면 뭐가 유머냐?
  13. 제 7대 국회의원 선거(1967년) 당시. 둘이 직접 맞붙은 것은 아니었다. (김두한은 수원, 차지철은 광주/이천) 참고로 이 선거에서 김두한은 낙선(그래도 45% 득표), 차지철은 당선됨
  14.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권정달역을 맡았는데 오히려 권정달 역할이 잘 어울린다는 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