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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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哲承
1922년 5월 15일 ~ 2016년 2월 27일 (향년 93세)

1 개요

대한민국정치인이다. 종교불교다.

2 상세

1922년 경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자란 곳은 전북 전주부(1935년 승격)였다.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재학하던 당시 일본 제국 학병에 반대하였다. (이 과정에서 조선총독부 총독 고이소 구니아키와 면담하면서 당돌한 언사를 날린 적도 있다.) 그럼에도 결국 학병으로 징집당했다가 탈출하였다.

8.15 광복 이후, 극우진영에서 학생 운동활동으로, 반탁 운동 '행동대장'격으로 활동하였다. 반탁학련 활동시기 좌익과 중도파를 대상으로한 '테러'에 나서면서 정치깡패로 불리었다. # # #. 이 때 김성수, 유진산과 가까운 관계였다.

해방정국 시기 극우파 정치활동하였음에도 이승만과의 관계는 그다지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그 이유와 배경은 '친일파 청산'에 대해서만큼 이철승은 '청산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가졌던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이 때문에 친일경찰 세력이 반민특위 요인 암살 음모계획 했을때, 이철승도 친일경찰세력으로부터 '암살대상 가운데 한 명'으로 지목될 정도#였다.) 이를 계기로 그는 이승만과 결별한다.

6.25 전쟁 중에는 학생들을 모아 학도의용군을 편성, 낙동강전선과 대구에서 참전하였으며, 1951년 국민방위군 사건 비리, 횡령의 실상을 국회에 폭로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편, 전쟁 초기 3개월간 인민군 점령지인 서울에 있던 그의 아버지가 퇴각하던 공비들에게 살해당하는 비보를 접하기도 하였다.

제헌 국회의원 선거, 제2대 국회의원 선거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낙선하였다. 반면 백부 이석주는 제헌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1954년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전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이후 이승만 정부의 독재에 반대하였다. 사사오입 개헌 파동 때는 자유당 소속의 최순주 국회부의장의 멱살을 잡았다. 이후 민주당에 입당하여 장면 등과 함께 신파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58년~1959년 터진 자유당에서 개악한 '국가보안법 파동' 당시 필사적으로 반대[1]하기도 하였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 제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민주당 소속으로 전주시 을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다만 고대생 습격 사건 때는 민주당 소속이면서도 친 자유당 계열 정치깡패인 임화수 등과 친하다는 이유로 후배들에게 타도 대상이 되었다. 1961년에는 대한체육회 회장도 겸직하였다.

5.16 군사정변 직전 외국에 가 있다가 정치규제를 겪고 외국에서 민권 운동을 하였다. 그러다가 귀국하여 1970년 신민당에 입당하였다. 이후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김영삼과 함께 40대 기수론을 내걸고 출마했다.[2] 신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서 1차 투표에서 김영삼, 김대중에 이어서 낮은 득표로 3위를 차지하였다. 이후 김대중과 협상하여 당총재 선거에서 자신을 밀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자신의 계보 표를 밀어주어 김대중이 2차 투표에서 역전 당선되는게 기여하였다.

제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김용진 후보를 꺾고 당선되었다. 그 해 있던 진산 파동 과정에서 범 진산계에서 갈라져 나와 독자 계보를 형성하였다. 10월 유신 직후 치러진 1973년제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공화당 유기정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제9대 국회가 개원하자 야당 몫의 국회부의장에 선출되었다. 이 때 여당 몫의 국회부의장인 김진만과는 한 때 사돈 관계를 유지하였다[3].

1974년 8월 신민당 총재 선출 전당대회에 출마하였으나 김영삼에 밀려 낙선하였다. 이후 비주류로서 정일형, 정해영, 신도환, 고흥문 등과 함께 김영삼의 당 운영을 독선적이라고 비판하는 한편 차지철 대통령경호실장의 은밀한 지원을 받고 김태촌의 조직폭력배를 동원하여 1976년 신민당 전당대회 각목 난동 사건을 사주했다. 결국 그 해 9월 치러진 신민당 수습 전당대회에서 김영삼을 꺾고 대표최고위원에 선출되었다. 이후 11월 사무총장에 이기택, 원내총무에 송원영, 정책위의장에 박일을 임명하는 당직 개편을 실시하였다.

이후 박정희 유신정권에 대한 온건한 노선의 협조적인 태도로서 참여 하의 개혁, 중도통합론[4]을 주장하면서 군사독재정권과의 투쟁을 포기하고, 정권과 유화적인 태도를 취하였다. 이러한 모습 때문에 김영삼을 위시한 대여강경노선 선명야당파들과 재야 인사들에게 사쿠라라고 비판받았다.

신민당이 관훈동 건물에 세들어 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와 교섭하여 서울 마포구에 새 당사를 건립하려고 노력하였다.

1978년 제10대 국회의원 선거를 진두지휘하면서 자신도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서 당선되었다. 신민당이 공화당보다 1.1% 더 득표하자 당을 잘 이끌어 온 자신의 공로라고 하였다. 그러나 1979년 3월 백두진 국회의장 선출 파동에서 김영삼의 강경 여론이 우세하자 지도력이 흔들렸다. 결국 1979년 5월 전당대회에서 자신의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기택이 김영삼을 지지함으로써 총재에 선출되지 못하였다.[5]

1980년 5.17 내란 이후 정치활동 규제를 당하였다. 그러자 전라북도 진안군에서 나무꾼으로 칩거하며 살았다.

1984년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었다. 정치규제에서 해금되자 신한민주당 창당에 참여하여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완주군 선거구에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내각제 개헌인 이민우 구상에 동조하고 양김의 '선명야당'노선에 반기를 들었다가 통일민주당 분당으로 정치적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결국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전주시 을 지역구(현재의 완산구)에 출마하였다가 평화민주당 손주항 후보에 낙선하였다.# 정치적으로 완전히 몰락하면서 정계에서 은퇴하였다. 손주항도 김대중에 반기를 들었다가 결국 몰락한다.

김대중 정부 이후 자유민주비상국민회의 단체 의장직 등 여러 단체들에 몸담으면서, 관변 집회에 자주 모습을 보였다.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의 유족들에게 막말을 하고 야인시대 방영 당시 정치깡패 임화수를 옹호해서 물의를 빚었다. 임화수의 아들과 같이 고소한다고 나서다가 되려 임화수가 저지른 더러운 짓이 더 드러나면서 데꿀멍했다. 그럼에도 임화수가 반공영웅이라고 죽을때까지 옹호했다. 또한 서울평화상 시상을 담당하는 '서울평화상문화재단' 활동에 참여했었다가 2012년에 물러났다.

2016년, 2월 27일 향년 94세로 타계했다. 역시 "양김"에게 밀린 영남 출신의 이기택 전 의원과 7일 간격으로 사망.

3 기타

  • 성우 김태훈이 이철승 전문 배우이다.
  1. 이철승은 철저한 극우 반공주의 성향의 인물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국가보안법에 대하여 존치론을 강력히 주장하는 인물들 가운데 한명이었다. (#)
  2. 40대 기수론은 이철승과 김영삼이 주장해 유진산의 퇴진을 요구한 데서 시작했고 김대중은 뒤에 합류했다. 유진산은 이철승이 김영삼을 밀어주는 조건으로 이것을 받어들여 불출마했다.
  3. 이철승의 딸 이양희가 김진만의 차남 김택기와 한 때 부부였다가 이혼하였다.
  4. 당시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외교학과 교수 노재봉이 이를 제안하였다고 한다. 노재봉은 훗날 노태우 정권에서 대통령 비서실장을 지냈으며, 이후 관변 활동을 계속 하고 있다.
  5. 당시 정권의 탄압 때문에 제도권 정치에서 밀려나 있던 김대중은 이철승의 타협적인 태도를 보고, 자신의 측근들한테 어떻게든 김영삼을 지원해서 신민당 대표 경선에서 승리할 수 있게 하라고 지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