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드워드 6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튜더 왕조튜더 왕조- / 튜더 왕조
헨리 8세에드워드 6세제인 그레이[1] / 메리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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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호에드워드 6세
(Edward VI of England)
부친헨리 8세
모후제인 시모어
생몰년1537년 10월 12일 - 1553년 7월 6일(15년 7개월 25일)
재위기간1547년 1월 28일 - 1553년 7월 6일(6년 5개월)
대관식1547년 2월 20일

영국(정확히는 잉글랜드)의 왕. 그 유명한 헨리 8세유일한 적자.[2]

1 개요

적법한 왕위계승권자를 간절히 원하던 헨리 8세가 3번째 왕비인 제인 시모어에게서 얻은 귀하디 귀한 아들이다. 튜더 왕가에 손이 귀했던 데다가 당시 영아사망률도 매우 높았기 때문에, 헨리 8세가 무척이나 보호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젊었을 때의 아버지와 달리 사냥에 참가한 적이 드물다고 한다.

헨리 8세가 에드워드 6세를 얻었을 때, 그는 당시 기준으로는 한참 늦은 40대 후반이었다. 헨리 8세가 56세를 일기로 사망하자 에드워드 6세는 부왕의 사후에 고작 9살의 어린 나이로 즉위했으나 15세 때 요절했기에 통치 기간은 길지 못했다.[3]

여담이지만 에드워드 6세가 선천적으로 병약해서 요절했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처럼 알려져 있으나 잘못된 것이라 한다. 당대 기록에 의하면 태어날 때부터 건강했으며 자라날 때 잔병치레도 거의 없는 매우 건강한 체질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키도 크고 튼튼했다는 기록도 많이 남아 있다. 다만 갑작스럽게 병에 걸리더니 6개월간 증세가 악화되어 죽음에 이르렀고, 사망 당시에 겨우 16세였기 때문에 병약해서 죽었다는 식으로 와전된 듯하다.

2 재위

왕이 워낙 어렸기에 외삼촌들인 에드워드 시모어와 토머스 시모어가 섭정을 하다시피 했는데, 둘은 서로 사이가 나빴고 조카를 통제하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 외삼촌들이 벌인 정쟁의 희생자였던 에드워드는 두 외삼촌 모두에게 약간 넌더리를 냈다.

특히 성격이 불같고 노골적인 야심가였던 작은 외삼촌 토머스 시모어는,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였던 캐서린 파와 재혼하여 아이까지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 데리고 온 의붓딸 엘리자베스 1세와 결혼해 왕위에 접근해 보고자 그녀에게 추파를 던져, 한때 결혼이 파탄날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결국 그는 어린 왕을 납치하려다가 반역죄로 처형을 당했다.

큰외삼촌인 에드워드 시모어는 토머스보다는 냉정했지만, 결국 자신에게 대항하는 세력이 생기자 조카인 어린 왕을 보호하겠다는 명분 아래 윈저 성으로 데려가서 사실상 감금하는데, 에드워드 6세는 노골적으로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면서 외삼촌을 지지하지 않음을 천명했고, 에드워드 시모어는 몰락하게 된다. 그는 결국 존 더들리의 세력과 대치하다 처형당하게 된다. 처형 문서에는 물론 에드워드 6세가 서명했다.

이복 누나들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와는 생전 사이가 나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나이 터울이 20년 넘게 져서 엄마뻘인 큰누나 메리와 특히 사이가 좋았는데, 메리가 가톨릭을 고집하여 일주일에 4~5번은 미사에 참례하는 바람에 신교도(성공회)였던 에드워드와 충돌을 빚었다. 한번은 이 문제로 메리와 싸우다가 둘 다 울음을 터뜨리기도 했는데, 직후 에드워드는 메리에게 "내가 누나에게 갖고 있는 애정을 시험하려 하지 말라"라고 차갑게 경고하는 편지를 보냈다.

에드워드 6세는 독실한 신교도로, 자신이 후사를 남기지 못하고 죽으면 가톨릭 신자인 누나 메리가 왕위를 이어받아 성공회를 없애려 할 것을 걱정했다. 둘째 누나 엘리자베스가 성공회 신자이긴 했지만 둘째에게 왕위를 물려줄 명분을 찾기는 힘들었다. 갑작스레 병[4]에 걸려 병세가 악화되어 죽음이 확실시되자, 에드워드 6세는 왕위 승계 문서를 수정하여 메리를 왕위 계승권자에서 제외하면서 자연스럽게 엘리자베스도 제외한 뒤 신교도인 친척 제인 그레이에게 왕위를 넘기기로 한다. 이는 결국 엄청난 분란을 낳게 된다.

좌우지간 정통성있는 왕자였던 에드워드 6세가 죽고 나서 사후 왕위를 둘러싸고 메리 1세의 추종자와 제인 그레이를 여왕으로 내세운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의 세력이 충돌했고, 이에 메리가 승리하면서 존 더들리의 세력 대부분이 사형당했다.

요절한 데다가 재위 기간 동안 특별한 업적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아버지인 헨리 8세와 이복누나들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에 비해 존재감이 미미하다. 하지만 헨리 8세를 많이 닮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헨리 8세가 종교까지 가톨릭에서 성공회로 갈아 치우고 몇 번씩이나 재혼하는 우여곡절을 벌인 끝에 가까스로 얻은 외아들인지라 워낙 오냐오냐 자란 탓에 안하무인이었다고. 또한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외삼촌 등 여러 권신들이 벌이는 정쟁을 생생히 지켜보았기에 성정이 잔인한 편이었고 매사에 신경질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한편으로 르네상스 시대의 군주에 걸맞는 교육을 받아 매우 총명했다고.

당시의 성격 그대로 자라 오래 왕위를 지켰으면 "아버지를 능가하는" 왕이 되었을거라는 평가도 있는데,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소지가 있는 분석이다. 그의 사후에 이복누나들인 메리 1세, 엘리자베스 1세가 차례로 왕위에 오르게 된다.

3 트리비아

  • 에드워드 6세는 또한 자세한 일기를 남겼다. 상당히 무미건조한 필치로 씌어져 있는데 특히 큰 외삼촌 에드워드 시모어가 처형을 당한 날 "오늘 8-9시에 외삼촌이 처형당했다." 정도의 짧은 한 문장을 냉정하게 적고 넘어간 대목이 인상적이다.
  • 에드워드 6세가 왕위계승권자로 지정한 친척 제인 그레이는 생전 에드워드 6세의 왕비감으로 혼담이 오가던 사이이기도 했다.
  • 마크 트웨인의 《왕자와 거지》에서 나오는 에드워드 왕자는 바로 이 사람. 에드워드는 병약한 이미지가 강하지만 의외로 차갑고 엄격한 성격이었다고 한다. 나름대로 고증을 충실하게 한 셈. 작중에서도 군주로서의 위엄과 품위를 항상 유지하려 했다. 나이로 따지면 거의 어머니 뻘인(20세 연상) 큰누이 메리에게 정숙하게 행동하라고 훈계를 할 정도.
  1. 제인 그레이를 정식 국왕으로 봐야 할지는 학자들마다 평이 갈린다. 해당 항목 참조.
  2. 헨리 8세는 에드워드 6세 말고 여러 아들을 두었으나 모두 요절했다.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아들을 낳기는 했지만 일찍 죽었고, 이후 정부(情婦)게서 서자 '헨리 피츠로이'를 얻었으나 헨리 피츠로이도 1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3. 단, 재위 기간은 의외로 그 뒤를 이은 이복 누나인 메리 1세보다 조금 길다. 5년간 재위했던 메리보다 1년 긴 6년간 재위했다.
  4. 에드워드 6세를 죽음으로 몰고 갔던 병이 어떤 병인지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결핵, 폐렴 등 여러가지 설이 있다. 출생시 노출된 매독균에 의한 신경매독이라는 설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