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1세

역대 잉글랜드 국왕
튜더 왕조 / -튜더 왕조튜더 왕조
에드워드 6세 / 제인 그레이[1]메리 1세엘리자베스 1세
왕호메리 1세
(Mary I of England)
부친헨리 8세
모후아라곤의 캐서린
생몰년1516년 2월 18일 ~ 1558년 11월 17일(42세)
재위기간1553년 7월 19일 - 1558년 11월 17일 (5년 121일)
대관식1553년 10월 1일
장례식1558년 12월 14일
서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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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1세의 문장[2]
"내가 죽으면 심장에 "칼레"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을 것이다."[3]

1 개요

16세기 영국(잉글랜드) 튜더 왕조여왕.

헨리 8세의 장녀로 그의 첫번째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의 딸 이다. 헨리 8세와 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자식이다. 형제로는 에드워드 6세, 엘리자베스 1세가 있는데 모두 이복 형제이다.

블러디 메리라는 별칭으로도 잘 알려져 있는 바로 그 여왕이다.

2 즉위전

헨리 8세아라곤의 캐서린 사이에서 태어난 4남 2녀 중 요절하지 않은 유일한 자녀였다.[4] 그래서 그녀도 어릴 때엔 유일한 적자이기에 헨리 8세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이혼 소송 과정에서 꿋꿋히 어머니 편을 들었던 까닭에 아버지와 사이가 틀어졌다.헨리 8세는 새결혼에서 태어난 자손의 적법성 확보를 위해 메리를 사생아로 선포했다. 이로인해 청소년기에 사생아 취급을 당했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앤의 지시로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일하는 등 굴욕적인 대우를 받기도 했다 아버지 헨리 8세가 어머니와 장기간의 이혼재판 끝에 어머니가 소박을 맞자 그 사이에서 낳은 자식인 메리의 안위도 위태로워졌다.

사실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가 이혼에만 동의 해주면 어머니에게 적당한 대우와 자식인 메리의 적자 지위와 계승권 까지는 인정해줄 용의가 있었으나, 캐서린 왕비는 사탕발림에 굴복하기 보단 정당한 잉글랜드 왕비로 인정받기 원해서 교황청 대사와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혼인적법성 재판 조차 거부해버리고,[5] 동네방네 헨리 8세의 조치가 부당함을 인용해서 조강지처 버리고 새장가 가려는 남편 망신을 거하게 시켰기 때문에 헨리는 캐서린을 압박하는 수단으로 메리를 박대하기 시작한다.

결과는 잘 알려 졌듯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강제이혼당해 소박을 맞고, 무효화된 결혼사이의 태어난 자식 즉 계승권이 박탈된 서자로 격하 되었다. 그러다가 철천지 원수 앤불린이 처형되고 제인시모어가 아들낳고 하는 둥에 헨리의 분노도 사글어 들었고 새어머니 캐서린 파의 건의로 적자 지위를 회복하게 된다. 사실 메리가 커가면서 자의든 타의든 종교개혁에 불만을 가진 가톨릭 성향 신하들에게 메리는 구심점이 었고 헨리 8세는 모르는척 하면서 대단히 경계한게 사실이다. 어쨌든 메리는 정치적으로 매우 중요한 처지가 되었다. 당시 헨리 8세의 종교개혁은 가톨릭 제도를 바꾼 처지가 아니라 단순히 영국 군주를 '영국 내'에서 교회의 수장으로 선포 한것이라. 중세 때 자주 일어난 세속군주와 교황의 다툼 정도로 보는 시각도 있었고, 헨리 사후에는 다시 복고할것이라 보는 즉 교회 분열은 일시적이라 보는 관측도 상당했기에 메리를 적법한 왕위 계승자로 보는 구혼이 많았지만. 아버지 헨리 8세는 왕위 계승권이 외국으로 나가는것을 경계 했기 때문에 결혼은 하지 못 했다.

헨리 8세가 죽고 남동생이 에드워드 6세로 즉위하자 지위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에드워드 시대는 왕의 외삼촌인 시모어가 섭정을 했다가 나중에는 노섬밸랜드 공작이 정권을 잡아 섭정했는데 둘다 개신교 그것도 칼뱅주의 성향이었기 때문에 가톨릭 세력의 구심점인 메리는 경계대상 1호 였다. 에드워드 6세가 사경을 헤메면서 비몽간에 섭정 노섬밸랜드 공작의 아들과 결혼한 레이디 제인을 왕위 계승자로 지명했고, 노섬벌랜드 공작은 메리를 제거하려 했다. 그런데 메리는 이미 지지자들에게 숨어서 서퍼크의 가톨릭 교도가 뭉쳐있는 요새로 도망갔고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섬벌랜드 공작은 반격을 시도하다 정통성에서 심각하게 밀렸기에 이탈자가 많아서 금방 와해 되었고 메리의 런던 입성을 앞에 두고서야 메리 여왕 만세를 외칠 수 밖에 없었다.

3 통치

여왕이 되긴 했지만 37세의 나이임에도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다. 체구는 작고 마른몸에 주름이 많았고 근시였다. 한때 사생아로 내쳐져서 교육도 그다지 높은 수준으로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튜더왕조의 정통성있는 혈통을 이어 받았기 때문에 즉위 당시 거의 모든 세력에 지지를 받았으며 당분간 왕권에 걸림돌이 될 문제는 없었다. 메리는 일단 첫빠따로 일주일만에 자신의 왕위계승을 방해하고 살해하려한 노섬벌랜드 공작과 레이디 제인과 결혼한 그의 장남을 나란히 처형했다. 공작의 며느리 레이디 제인은 일단 런던탑에 감금했다.

그리고나서 일생의 숙원을 펴는데 1520년대 이후 헨리 8세시기와 에드워드 6세 시대 반포한 종교관련 법률은 모두 무효화 시키며 종교 정책의 방향을 정해나간다. 우선 로마 가톨릭에 독립한 영국 교회를 다시 가톨릭으로 되돌렸다. 헨리 시대 개혁은 교황대신 국왕으로 대체한것이라 조직은 그대로 였기 때문에 별 문제 없을 듯 했으나 이미 에드워드 6세시기 종교개혁 세력들이 많이 성장했음으로 당분간은 숨죽이며 있을테지만 반발이 나올건 명약관화였다.

일단 메리는 즉위하자마자 남편감들이 많이 거론되었다. 앞서 헨리 8세가 메리의 결혼을 탐탁지 않아 했기 때문에 그대로 방치되어 노처녀로 늙었는데 메리 자신도 가톨릭 군주로 자신이 죽으면 신교도 엘리자베스가 후계자가 되기 때문에 결혼을 고려하게 된다.

우선 신하들이 추천한것은 레지널드 폴 추기경이었다.(물론 사제이긴 하지만 교황청에서 특별허가하면 환속하는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에 별문제는 안되었다) 플랜태저넷 혈통을 이어받은[6]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나이가 많고 완전 학자타입 샌님이었기 때문에 여왕의 마음에 차지 않았다. 두번째로 여왕이 관심을 보인건 메리가 데본셔 백작으로 봉한 에드워드 코트니[7] 였으나 신하들에겐 별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스페인에서 비밀리에 청혼이 들어온다. 청혼자는 나폴리왕이며 밀라노의 공작이고, 스페인의 왕세자인 오촌 조카 펠리페(펠리페 2세)였다.

펠리페는 무엇보다 자신의 외가 친척이며 가톨릭 군주중에 가장 강력한 세력이기 때문에 고려된 것이었으나, 1553년 여왕의 혼인 계획이 발표되자 반발은 당연했고 여왕의 골수 지지층에서도 반발했다. 잉글랜드 왕국이 외국 스페인에 팔려가는걸로 보는 시각이 상당했기..추밀원, 의회, 여왕의 최고 심복 스티브 가드너 까지 반대했다. 당연히 이에 반발한 음모들이 생겨났는데 여왕의 한때 결혼 상대로 거론된 데본셔 백작 에드워드 코트니와 엘리자베스를 결혼시키려는 시도가 실제로 추진되기도 하고 토마스 와이엇이 여왕의 결혼에 반대하여 4천명의 병력을 데리고 런던으로 쳐들어 온것... 와이엇의 반란은 막상 런던에 오자 겁이 먹어서 막상 여왕을 몰아내기엔 명분이 좀 딸리고 기껏 " 여왕님을 잘못 보필한 추밀원에 간신배를 척결" 드립이나 치고 진입을 머뭇 거리자 반격의 시간을 줬고 가차없이 진압당한다. 이때부터 여왕의 결혼에 극렬 반대한 세력들을 특히 신교도들을 찍어내기 시작하는데 훗날 블러디 메리 소리를 듣게되는 화형 300여명이 거의 1년여새 하루 몇명씩 이어진다.

반면 현실적으로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기 때문에 펠리페를 그냥 명목상의 왕(King Consort)이며 둘 사이에서 합법적 자식이 없는 경우 펠리페의 권리는 없으며, 후계자가 없을 경우 동군연합은 해소된다는 여러 안전장치를 양보한 끝에 결혼하게 된다. 이때 메리는 38세, 펠리페 2세는 27세였다.

한편 결혼은 하였으나 아직 후계자는 없었기에 엘리자베스와 레이디 제인을 회유 시도가 이어졌는데 레이디 제인[8]은 개종을 거부했기에 처형...

엘리자베스는 병력 500을 동원하여 시골에서 병석에 누워있던 동생을 끌어내서 런던으로 압송하여 런던탑 '반역자의 문(Traitors Gate)' 뒤에 감금했다. 그러나 엘리자베스의 처형은 매우 어려웠던게 자매인 점을 떠나서 대책없이 죽이고나면 후계자가 아무도 없는 상황이고, 그 자체 만으로도 나라꼴은 개판이 되고 후계자 없이 나이먹은 여왕 사후를 대비하여 누구를 밀고 누구를 향해 뭉치고 할 병림픽은 앞서 헨리 7세 이전 숱하게 봤던 짓이었고, 더군다나 폭동이 매우 우려됐기에 건의들을 받아들여 죽이진 못 했다. 다만 가톨릭화를 추진하던 여왕의 심복 가디너는 엘리자베스를 공공연히 쳐죽여야 된다고 선동했지만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엘리자베스는 런던탑에서 해방되어 토머스 포프 경의 감독하에 해트필트로 거주지를 이전 시켰다.

여왕의 결혼과 더불어 20년간 교황청에생활을 청산하고 레지널드 폴 추기경은 교황청 대사 자격으로 귀국했는데 교황청에서는 영국이 가톨릭 품으로 돌아온것도 감격이라 기존에 강탈된 교회와 수도원 재산에 대한 현재 소유권을 그대로 인정하며 귀족 젠트리들의 민심을 사려고 했으나 여왕의 심복이던 스티브 가드너가 그간 쌓여왔던 한풀이(?)를 하며 신교도들에게 공격ㅇ을 이어 나갔다. 일단 당시 잉글랜드 사제의 1/4에 해당하는 2천명의 사제들을 쫓아냈고, 주교중에서 가장 개신교 성향이 뚜렷한 글로스터 주교 존 후퍼와 세인트 폴 성당 사제 로저스를 체포했다. 후퍼와 로저스는 예상대로 "가톨릭 미사는 사기다!" 라며 죽기를 자처했고 이들은 곧 화형에 처해졌다.

이제 표적은 기존 영국교회 수뇌부로 옮겨 갔다. 런던과 웨스트민스터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로체스터 주교 휴 라티머를 체포하여 배교를 권유했으나 거부... 이들은 역시 화형이었는데 알려지기론 리들리와 라티머 두 사람은 같이 처형되어 죽기전에 " 까짓거 남자답게 화끈하게 죽읍시다" 외치면서 장렬히 사망했다고 한다.

다음 표적은 기존 영국 교회에서 가장 대표적인 인물인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 였다. 아무래도 체통상 켄터베리 대주교를 돼지잡듯이 두들겨 팰순 없었고 미리 포섭된 지인들을 이용하여 지속적인 회유책을 폈었고, 협박도 따른 끝에 토머스 크랜머는 결국 항복 하고 말았다. 개신교를 포기한다는 서명을 여러차례 했고, 민심을 안정 시키기 위해 크랜머를 설교단에 올렸는데 크랜머는 조용하게 기도문을 읽고 예배를 진행하다 돌연 이게 다 훼이크다! 라며 자신이 협박에 넘어가 배교를 했고, 큰죄를 지었다.화형당하면 이 손모가지를 가장 먼저 태우겠다!. 교황은 적그리스도다!를 외치다가 도중에 끌려나가고 만다. 곧 평사제로 강등 당하며 화형을 당하는데 불길이 일어나자 역시 오른손을 내밀어 먼저 태웠다고 한다.

이러는 판국이니 메리의 인기가 좋을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외정책의 실패로 완전히 민심을 잃게된다.
.
메리의 대외 정책은 남편사랑이 지나쳐서 국익과는 상관없이 최대한 펠리페 2세의 생각을 따랐다. 1556년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영국이 참전한 것도 펠리페 2세를 위해서였다. 갑작스런 전쟁으로 돈을 긁어모았기에 역시 이과정에서 인기는 바닥을 쳤고 결과도 1558년 프랑스 기즈공작[9]에게 칼레를 빼앗기며 잉글랜드의 마지막 대륙 거점을 뺏기게 된다. . 그런데 펠리페는 칼레를 되찾으려는 시도도 없이 프랑스와 단독 강화해버리고 잉글랜드는 돈만 쓰고 처참한 패배를 맛보게 된다. 1558년 여름부터 건강이 급속하게 악화된 메리는 남편에게도 버림받고 국내 인기도 바닥을 친채 11월에 쓸쓸히 사망한다.

4 개인사

펠리페 2세와 결혼했지만 어디까지나 영국의 여왕인지라 조국을 떠날 수 없었던 메리는 스페인에 있는 남편에게 영국으로 좀 오라[10]고 애원하는 편지를 썼지만 펠리페는 온갖 핑계를 대며 요청을 묵살했다. 가뭄에 콩 나듯이 오는 남편 마음을 얻으려고 온갖 마음고생을 하다가 결국 그녀는 상상임신까지 하고 말았다. '임신했으니 영국에 와 달라.'고 편지도 보냈지만 그럴 리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던 펠리페 2세는 비웃으며 무시해버렸다는 야사도 있다.

워낙 심한 근시라 늘 눈을 찌푸렸기 때문에 얼굴에 주름이 많았다고 한다.[11] 건강이 전반적으로 좋지 못했는데 특히 자궁이 고질적으로 안 좋아서 늘 고생했다고 한다. 자궁 근종이 심해서 월경을 거르는 증상이 나타났는데 이걸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주장이 있다. 사실상 불임인데도 자신의 어머니를 내친 앤 불린의 딸이자 자신의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왕위를 주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자녀를 낳아 자신의 자녀로 하여금 왕위를 이어 받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당시 임신하기엔 나이가 상당히 많았던 데다가 자궁이 좋지 않았고 결정적으로 남편도 아이를 갖는 데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그렇게 바라던 아이는 낳지 못했다. 그래서 임종을 맞던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를 왕위계승자로 지명해야 했다.

여담이지만 필리파 그레고리가 쓴 소설 '블러디 메리'에서는 두 번이나 상상임신을 했다고 나온다. 첫번째 상상임신을 했을 땐 설레는 마음으로 유아용품과 산실까지 준비했으며 성 밖의 백성들도 왕자의 탄생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왕자가 태어났다는 잘못된 소식이 전해져 모두가 축하하는 해프닝이 벌어지기도 했다고. 그러나 정작 산달이 한참 지나도 아이가 나오지 않는 바람에 '폐경을 임신으로 착각했다.'는 조롱을 받았다고 묘사된다. 두번째 상상임신을 했을 땐 더 안습스런 상황이었다. 펠리페 2세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으며 심지어 궁에서 메리 곁에 있어야 할 시녀, 시종도 거의 없는 상황이라 메리 혼자 절망하고 있었다고.(...)[12]

5 블러디 메리 논란(?)


사실,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는 후세에 과장 된것이고 영국이 종교적으로 개신교가 되자 후세에 덧 붙여졌다는 의견도 있다. 저 섬뜩한 별명과 달리 사람들을 어마어마하게 사형시킨 것도 아니라 고작 300여명에 불과(?)하다는 것... 이 정도는 큰 탄압이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은 크게 지지 받지 못한다. 대륙의 수천명 수만명의 종교적 갈등으로 인한 처형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지만. 그동안 또 그후에도 종교적 갈등이 적었던 영국에 종교재판을 들이대 외국인들이 활개치며 자국민들을 탄압하는걸 용인한 군주이며 종교정책에 매몰되어 별다른 치적도 없이 실정과 숙청만을 즐겨 사용하다 짧은 치세를 마감했기 때문에 그전에 비해 다소 온정적인 평가는 있을지 몰라도 호의적인 평가는 드물다.

영국 역사에서 대체적으로 호의적인 헨리 8세를 역사상 가장 혐오스러온 악당, 잉글랜드는 물론이고 현대까지 평가가 높은 엘리자베스 1세를 별 능력 없이 그저 운빨이 조금 좋은 군주로 격하하는 디킨스 조차도 메리는 폭군이며 불행한 개인사를 감안해도 공포와 혐오의 대상이며 평가할때 다른 잣대를 들이대기 어렵다고 볼 정도.

일단 헨리 8세엘리자베스 1세의 치세는 각각 38년과 45년으로 5년에 불과한 메리의 치세와는 상당히 차이가 난다. 그럼에도 불과하고 처형한 숫자를 비교하자면 메리 1세 치세 5년간 처형자가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시기를 합한 것보다 많고, 메리가 5년의 재임 중 처형한 개신교 신도가 1534~1680년 150년동안의 가톨릭 순교자 숫자랑 비슷하다. 메리시대 개신교도 284명 처형, 34명 옥사, 1534~1680년 사이 가톨릭 순교자 게다가 헨리 8세는 루터주의와 칼뱅주의 성향 복음주의자를 처형한 숫자가 가톨릭 신자 처형보다도 많을 정도.[13]

그리고 헨리 8세는 가톨릭 교회에서 영국 내 수장 지위를 교황 대신 자신으로 대체한것이지 온전한 종교개혁이라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반가톨릭 성향의 개혁가들을 탄압했고 오히려 개신교 성향 복음주의자들을 가톨릭 교리를 부인한다는 명목으로 화형시켰다. 말년에 들어서는 완전하게 가톨릭 교리로 회귀했기 때문에 헨리 8세의 종교정책이 일단 가톨릭만 탄압한것은 아니며 왕권 강화의 수단일 뿐 그나마도 기존 영국교회의 반로마적 성향 때문에 고위 성직자들도 대부분 찬성하여 순식간에 넘어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헨리 8세는 단순히 가톨릭 교회를 버리고 개신교인 성공회(당시는 영국 국교회)로 개종했다고 알고 있지만, 헨리 8세는 교황의 영국외에서 교회의 수장과 세속적지위를 누리는데 아무 관심이 없었고 명목상 영국 문제의 부당한 세속적 간섭을 배격하여 교황은 로마의 주교일뿐이며 그에 대한 권한만 있다는 입장이었다.

헨리 8세는 이미 로마 교회와 단절하기 전에도 마르틴 루터의 주장에 반박하여 7성사를 옹호하는 논문을 써서[14] 교황청에서 세속군주에게 수여하는 영예 중 가장 큰 업적인 '신앙의 수호자(Fidei Defensor)'란 칭호까지 하사 받았다. 때문에 화체설을 부인한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학자들 집단을 훗날 가톨릭 성인이된 토머스 모어를 대법관으로 기용하여 탄압에 나서서 신학자 6명을 화형시키고, 40여명을 고문했으며 루터파 신학에 영향받은 윌리엄 틴틀의 영어번역성경을 밀수하거나 소지한 이도 역시 화형시켰다. 물론 토머스 모어와 로체스터 주교 존 피셔가 훗날 사형 당했지만 가톨릭 인사들을 처벌한것은 영국 내에서 교황수위권을 부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지 다른 교리문제 때문은 아니다. 그나마도 종교적인 화형이 아니라 실정법을 들어 참수한 것이다.[15]

결국 영국 교회에서의 수장은 신에게 수여된 권한 받은 영국 왕이라는 주장만을 했을 뿐 헨리 8세는 교리적으로는 가톨릭으로 완전히 기운 사람이었다. 실제로 영국교회에서 교리적인 문제나 교회행정에 대해선 혼자 교황 노릇, 공의회 노릇을 혼자 했다. 영국 내에서 교황 수위권 문제는 종교적인 면도 있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컸기 때문에 다른 가톨릭 인사들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는데 교황과 세속군주가 다투는 건 중세 때부터 워낙 흔한 일인데다가 교리적면에서 헨리 8세는 일관되게 가톨릭편(화체설, 7성사, 영어성경 금지, 사제제도)을 들어줬기 때문에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헨리 8세는 복음주의자[16](루터파, 칼뱅주의)들을 일관되게 탄압했기 때문에 권력 강화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지. 메리 1세의 일단 붙잡아서 태우고 보는 식의 종교적 목적의 탄압과 방향은 달랐다.

헨리 8세의 종교 정책중 가톨릭에서 분노한것은 수도원 몰수령인데 도시 지역과 달리 북부와 남부는 아직 반 로마 가톨릭 정서가 미약했기 때문에 극심한 반발을 부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수도원들은 당시 잉글랜드의 토지 1/6을 보유할 정도로 특권 집단이었고 르네상스시대 여느 유럽 처럼 수도원의 부패도 상당 부분 있었다.[17] 수도원의 부패가 유럽 어느지역보다 더 심했다는건 아니지만 런던지역을 중심으로 지식인들과 상공인들은 르네상스와 인문주의 영향으로 교회에 대한 비판을 서슴치 않았다. 런던은 잉글랜드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인데 조금 이후지만 17세기 무렵 인구가 50만을 돌파했을때 영국내 2위에서 50위 인구 도시를 합친것보다 런던이 인구가 더 많을 정도로 런던이 사회 경제 정치적 중요성이 컸고 여론을 주도하며 학식과 재산을 갖춘 젠트리 계층이 집결지로 보면 된다. 런던의 젠트리들은 사채놀이, 도박자 운영, 밀주 제조, 범죄자 숨기기등 온갖 특혜를 무기로 게으르고 음탕하며 혐오스러운 짓을 일삼는 수도원을 작살내는걸 대 환영 했으며 농민들도 수도원과 교회의 수탈에 질린 나머지 최소 방관하거나 환영했다. 은총의 순례라고 알려진 봉기는 사실 수도원과 교구수입을 몰수 당한 고위 사제들이 부추겼으며 사실 종교적이라기보단 경제적인 문제였다.[18]

엘리자베스 1세도 가톨릭 탄압만으로 나오는데 즉위 초기에는 메리시대 탄압받던 국교회와 복음주의자들의 소망(?)과 달리 가톨릭 교회의 전례를 그대로 유지하고 강대국 스페인을 자극하지 않을 입장으로 종교 타협 정책에 나섰다. 대표적으로 1558년 2차 수장령을 내려서 영국 교회의 수장직을 포기했고[19], 1559년 프로테스탄트 통일령(Protestant Act of Uniformity)를 선포하여 귀족들은 종교적 맹세를 면제받고, 사실상 종교의 자유를 누렸다. 영국 국교회 예배에 참석하지 않으면 한달에 1실링만 내면 종교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이는 메리의 치세 덮어놓고 태워죽이는 병크와 한참 차이가 나는 종교정책이다.
그리하여 즉위 이후 엘리자베스 1세의 치적과 성과는 이런 배경에서 나온 것이다. 이 때문에 생모 앤 불린이 가톨릭 교회와 신도들에게 바빌론의 창녀나 이세벨급 마녀 타령을 들었고 엘리자베스도 악마의 사생아 취급을 받았지만 엘리자베스 1세가 12년 넘게 1570년까지 가톨릭 교회에서 파문을 받지 않았다. 이것은 정치적 고려도 작용 했지만 더군다나 이시기에는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개신교 탄압 성향과 이단에 대한 무관용 원칙을 주장하던 교황 바오로 4세 시기였다는 것... 엘리자베스의 종교 정책을 봐서 교황청에서는 영국교회가 가톨릭으로 복귀가 언제든지 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가톨릭 탄압은 잔존 가톨릭 세력의 부추김에 자신을 적법한 잉글랜드 여왕이라 주장하며 노퍼크 공작과 결혼하여 즉위하고 엘리자베스 1세를 퇴위 시키려는 반란 음모가 터지고, 형부(?)였던 펠리페 2세의 영국 침공 전후로 하여 가톨릭 교도는 반역도이며, 매국노이고, 외국 세력의 앞잡이 역할을 한다고 국민적인 공분이 일어 났기 때문에 섵부른 원정으로 영국에서 가톨릭 교회는 오히려 큰 탄압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앞서 즉위 초반부터 연간 60명을 태워죽인 언니의 치세와 달리 집권초 1570년 까지 12년동안 단 한명의 가톨릭 처형자는 나오지 않았다. 그후 33년 동안 9명을 처형하고 9명이 옥사했는데 엘리자베스 시대는 편견과 달리 상대적으로 종교적 관용이 있었다.

또한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는 종교적 갈등을 넘어서는 치적을 세웠고, 영국의 강대국으로 발 돋움 하는데 두 군주의 역할은 의심할 여지도 없다. 헨리 8세의 경우 재정낭비와 대륙 대외 정책이 실패했다는 평도 받지만, 내전으로 황폐화된 영국을 강하게 만들고 전통 귀족들이 아닌 신진 엘리트들을 기용하여 사회발전을 이루었다는 평을 받고, 엘리자베스는 내치 외치면에서 그런 비판도 드물다. 메리는 상대적으로 종교적 박해를 상쇄할 만한 업적이 없다는 주장은 당연하다. 메리의 치적이라고 얘기하는건 어디까지나 "그랬을지도 모른다" 수준의 IF 떡밥으로 진지한 역사적 평가는 없다.

메리시대에 가톨릭 복귀가 환영을 받았으며 대부분의 국민들이 순종했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다. 1553년 펠리페 2세와 결혼을 발표했을때는 거의 모든 신하들이 반대했고 1554년 결혼에 반대하여 런던에서 토마스 와이어트가 수천명 병력으로 폭동까지 일어났다. 물론 이 폭동은 당연히(?)도 무력으로 진압했다.

물론 헨리 8세 시기 수장령 이후 상당히 많은 수가 가톨릭 교도로 남았고 인구의 3분의 2 이상이 가톨릭을 지지했다.후술하는 부정론의 근거로 쓰인 것을 그대로 인용하자면

헨리 8세가 종교 개혁 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다. 종교란 게 하루아침이 그렇게 확 바뀌지 않는다. 버튼 한 번 눌러주고 반란군 한번 때려잡아주면 종교가 휙하고 바뀌는 게임하고 현실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같은 근거로 다른 주장이 나오는게 아이러니 하지만. 이와 같이 당시에는 개신교 가톨릭 구분의 정체성이 약했다. 특히나 가톨릭 교도들이 많은 농촌지역은 문맹률이 95% 이상이고, 도시지역도 70~80% 이상이 문맹이던 시대이라 인구 대다수를 구성하는 평민들은 국교회나 가톨릭이나 그 차이를 느끼지 못했다. 개혁신앙이 지지를 받은건 도시의 상공인, 법률가, 교수 집단 개혁성향 신학자 사제등이 강하게 지지했는데 이들이 수도원 재산을 냠냠하려는 유혹 때문에 중세시절 절대권력이던 왕이나 교회를 거스를 위험을 감수하며 모난돌에 정맞을 위험을 감수하고 지지했나? 그건 아니다.. 성공회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앞서 헨리 8세 시기 수장령을 선포함에도 반발이 극히 적었던것은 잉글랜드 교회는 로마교회와 독자적인 입장을 낼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독일과 이탈리아와 달리 영국 교회 운영은 교황청에 큰 간섭을 받지 않은데다가[20] 헨리 8세 시절 교회정책은 정치적인 면만 제외하면 가톨릭 신앙을 유지하는것을 방관했다. 그리고 헨리 8세는 개혁적 복음주의자들의 권력과 목소리가 커지자 다시 가톨릭 성향 교도[21]들을 중용하여 다시 탄압하며 자신의 권력을 강화했다.

반면 메리의 가톨릭 회귀정책은 반가톨릭 정서에 부딪혔다. 이것은 단순 개혁신앙을 가진 일부 지식인뿐만 아니라 영국인들의 민족감정까지 합쳐진 것이었다. 대부분의 농촌의 가톨릭 교도(?)들은 뭘 했냐 라하면 이시기는 아직 대중운동이 나올 시기가 아니었고 통치자나 통치권력의 힘이 강할 때였기 때문이다. 앞서 서술했다시피 이시기에서 런던의 젠트리 계층의 여론이 중요한게 농촌지역은 대부분 문맹이라 농민들은 잉글랜드 종교개혁의 산물 영국국교회나 로마가톨릭인지 제대로 구분하지도 못 했다.리가 죽고나서 순식간의 재가톨릭화가 무산된것은 이 때문이다. 그리고 이시기가 종교 갈등기라 하더라도 통치세력들 사이에서도 극단적 가톨릭 성향은 거의 남지 않았고, 친가톨릭 성향 사제나 신도들도 기존 영국교회가 가톨릭 전례를 유지하는 것에 만족했고, 자, 청교도들로 대표되는 개혁세력들도 소수이며 상황에 따라 왕이 옳다며 "영국인이면 제발 국교회 믿읍시다" 라고 하는 정도의 영국교회의 자치성정도면 충분하다는 비종교적 국교회 신도들이 대다수였다.

메리가 죽고 6년 후 1564년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 추밀원(Privy Council)의 조사에 의하면 행정관 중 431명이 영국 국교회(성공회의 전신)에 호감을 표명했고, 264명이 중립, 157명만 적대감을 표시했다. 엘리자베스 시대 초기만 하더라도 랭커셔와 요크셔에 가톨릭 세력이 우세했으나 집권 말년으로 가면 극소수로 전락하고 대부분이 영국 국교회와 여왕을 지지하는 세력으로 바뀌었다.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뒤이어 제임스 1세 시절까지 일관된 정책은 가톨릭 교도나 국교회의 중도적 개혁에 대해 반감이 있는 대륙신학의 개혁성향 즉 청교도들을 양극단의 멍청이 취급하며 중도적인 입장을 취한것이다.

메리의 치세의 치적이라고 하는것도 메리의 공적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가장 큰 오점이라곤 정치적인 면에서도 종교와 관련된 것과, 에스파냐에 호응해 프랑스를 공격했다가 거꾸로 칼레를 빼앗긴 점을 들수 있다. 칼레는 영국의 대륙 진출 거점으로 중요한 항구였고, 칼레의 관세가 재정수입의 30%를 차지했으니 5년 임기 동안 이정도책이면 별거 아니다란건 너무 나간 주장.

메리의 또 다른 치적(?)이라 써놓은 해군증강도 실은 다른게 이미 헨리 8세시절 헨리 7세시절에 비해 4배나 증강하여 이미 잉글랜드는 유럽에서 해군 강국 이었다. 헨리 8세가 나이들고 맛이 좀 간상태에서 토마스 크롬웰을 덜컥 처형하고 재정이 일시적으로 개판이 되자 조금 위축 되있을 뿐이었지 잉글랜드 해군의 재건은 메리가 한게 아니라 헨리 8세시절 이미 키워놨고 덕을 본건 후대 왕들(엘리자베스 1세 포함) 이었다. 그리고 일시적으로 메리가 해군 재건에 투자했다고 하는것은 에드워드 6세시절 섭정 노섬벌랜드 공작이 교회와 수도원을 또한번 공격하여 탈탈 털어먹고 그나마도 돈이 궁해서 은화의 순도를 낮춰 악화를 유통하여 얻은 차익을 싹싹 긁어모은 재정으로 해군 재건 예산을 확보해놓은것으로 그다지 메리의 공도 아니었다.

게다가 메리 1세는 처형당한 사람들의 숫자도 숫자지만 화형을 집행한 것 때문에 더 반감을 샀다. 앞서 제시한 근거에서 볼수 있듯이 일단 재위기간이 짧은데도 불구하고 5년간 300명이 적은 숫자는 아니고 켄터베리 대주교 토머스 크래머, 워체스터 주교 휴 라티머, 런던 주교 니콜라스 리들리 같은 고위 성직자를 화형시킨것은 정치적 목적만이 아닌 종교적 탄압에 해당했다... 게다가 300여명의 화형자중에 60명은 당시 사형을 면제받던 여성이었고 40명은 어린이들이었다.. 메리 1세의 처형이 정식 재판을 거친 사법 집행인데 비해, 헨리 8세, 엘리자베스 1세 대량 학살을 저질렀다곤 하는 주장도 있는데 메리 1세의 철저한 종교적 정책덕에 정식 재판에 회부되지 않은 사적인 제재도 역시 상당했다. 은총의 순례 진압의 잔인함만 강조하지만 메리의 혼인에 반대한 런던 폭동시 4천명의 운명도 역시 재판없이(?) 그시대 폭동에 무슨 재판을 바라는지? 처형되었고 그 당시 왕권에 반대한 봉기나 폭동은 재판없이 처형하는게 다반사였기에 굳이 은총의 순례만(?) 잔인했다 주장할 건덕지도 못된다. 그리고 개신교 색출과 탄압을 스티브 가드너 주교 종교 탄압을 견디다못해 개신교도 800여명의 가족이 대륙으로 탈출했고 메리의 명에 따라 대륙에서 적대국인 스페인등지의 외국인들이 앞잡이 역할을 맡아서 개신교도들을 색출하고 고문 학살 하자 가톨릭 성향 신자들조차도 못 마땅해 했다. 스페인인들은 펠리페 2세가 스페인 종교재판에서 무어인과 유대인의 씨를말리고, 스페인령 프랑슈콩테와 베네룩스 지역에서 마녀사냥으로 다져진(?) 전문가(?)들이 었기 때문에 외국인이 완장차고 설치는데 상당한 반발이 있었다. 부정론의 if 논리대로라면 메리 치세가 5년으로 끝나지 않았다면 남편 성향을 따라 영국 전체가 마녀사냥종교재판으로 도배되었을 수도 있다.

결론은 기존의 통설과 상반된 내용을 주장하는 학자의 의견은 있을수 있으나 그것이 새로운 의견이라해서 항상 옳은것은 아니다란 것.

5.1 반론

한편 다른 주장도 있다.

근본적으로 엘리자베스가 즉위했을때의 종교적 기반이 곧바로 개신교화를 추구할만큼 튼튼하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아래에도 나오지만, 최근의 연구 결과는 메리 1세가 즉위했을때, 잉글랜드에서 스스로를 프로테스탄트라고 여기는 이들은 소수에 불과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심지어 프로테스탄트 비율이 가장 높은 런던과 남부 잉글랜드에서도) 이러한 경향은 메리 1세 치세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었고, 따라서 메리와 달리 엘리자베스는 타협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근대 초의 종파 국가(confessional state)의 본질상, 한 국가에서 두 종파가 공존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웠고, 엘리자베스의 궁극적인 목표도 잉글랜드 국교회의 프로테스탄트화였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엘리자베스 즉위 이후, 메리 1세가 임명한 신학 교수들과 각 사목구 사제들을 점차 프로테스탄트로 교체했는데 이것 자체가 장기적인 프로테스탄트화 정책이었다.

사실, 잉글랜드의 종교개혁에 대해 대중들의 최초 반응은 냉담한 편이었다. Peter Cunich 교수가 지적하는 바에 따르면, 수도원 폐쇄 및 옛 전례의 변화(가톨릭 전례를 상당부분 유지했다고 해도, 대중 신심 행위의 상당부분이 폐지된 것은 엄연한 사실이고, 헨리 8세 이후 에드워드 치하의 짧지만 급진적인 개신교화 정책의 영향도 컸다)는 대중들에게 상당한 상실감을 남겼다. 이 영적 공허감을 새로운 프로테스탄트 교리가 대체하기까지는 수십년의 긴 세월이 걸렸다. 이런 상황에서 엘리자베스가 다소 온건한 방향으로 종교정책을 세운 것은 당연한 선택이었고, 특별히 그가 관용적인 성격이어서라고 보기는 어렵다.

메리 1세의 종교정책이 과장되었다 주장은 일각에서도 나오는데 제프리 파커 교수를 비롯한 많은 현대 학자들은 메리 1세의 가톨릭 부흥책은 많은 호응을 받은 성공적인 정책이었고, 그것이 장기적으로 실패한 것은 오로지 여왕의 예기치 못한 죽음 때문이었다고 보고 있다.
일례로, 헨리 8세 시대에도 수도원 해체에 반발하는 민중봉기가 일어났고, 엘리자베스 시대에도 반가톨릭 정책에 저항하는 봉기가 일어났지만, 대신 많은 개신교도들이 대륙으로 도망갔는데 헨리 8세시절 정치적으로만 헨리 8세를 인정하면 그다지 이견이 없었던 가톨릭 교회와는 대비된다.

또한 눈에 띄는 치적이 없다고 단정할 수도 없다. 우선, 재정 확대를 위해 교역을 장려했으며, 화폐 개혁정책을 입안하였다(짧은 치세로 인해 그녀의 죽음 이전에 시행되지는 못했다). 흔히, 영국이 세계 곳곳에 탐험가들을 보내 교역로를 개척하기 시작한 것이 엘리자베스 1세때로 알려져 있으나, 이 역시 메리 1세때 시작된 정책이었다. 또한, 헨리 8세 이후로 자금 부족으로 인해 쇠락해가던 영국 해군을 재건한 것도 메리 1세의 업적이다. 제프리 파커 교수에 따르면, 이 정책은 부군이던 펠리페 2세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추진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이 이후 개신교 국가가 된 탓에, 헨리 8세와 엘리자베스가 저지른 대량 학살(특히 아일랜드에서의)이 메리의 처형보다 상대적으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은 엄연히 현대 역사가들이 지적하고 있는바다. 또한, 마을 공동체 단위로 이루어지는 사적제재와 엄연히 군대를 동원한 대규모 학살(엘리자베스의 군대가 아일랜드 수도사들을 학살한 것과 같은)을 동일선상에 놓고 비교하는 것도 억지다.

그러나 어찌되었건 현대 역사학계는 메리 1세에 대해서 이전보다 훨씬 더 중립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Susan Doran and Thomas S. Freeman (eds.) Mary Tudor: Old and New Perspectives (London, 2011) 위와 같은 책들에서 메리 1세에 대한 최근 역사학계의 관점 변화를 찾아볼 수 있다. 잊지 말하야 할 점은,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 교회의 일방적인 주장이 아니라 근대 초 영국사를 연구하는 최근 역사학자들 상당수의 주장이라는 사실이다.(위 책의 총편집자들은 각각 옥스퍼드 대학과 에식스 대학의 사학과 교수들이다) 메리 1세애 대해 현대 역사학자들은, 흔히 생각되어오던 것보다 덜 광신적이었고, 더 유능한 군주였다고 평가하고 있다.

다만 고집이 조금 세서 그렇지 메리는 신하나 시녀들, 백성들에게 매우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고 전해진다. 즉위할 당시만 해도 살해 위협을 피해 런던에서 도망쳤다가 다시 민중의 지지로 런던으로 재입성한 걸 보면 일반 대중들의 충성도도 엄청나게 높았다. 즉위 이후 다시 터진 반란 때도 펠리페 2세와의 결혼문제로 냉담했던 런던 시민들 앞에서 호소하여 수비대를 구축해 반란을 진압하는 등 민심이 그녀를 외면하지는 않았고, 많은 가톨릭교도들과 보수적 성공회 신자들(반쯤은 가톨릭 신자)은 그녀에게 최소한 미온적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윌리엄 세실을 비롯한 극렬 개신교도 소수만 메리를 적극적으로 비토했으나 그 세력은 미약해 반란은 계속 진압되었다. 이는 메리가 적장녀이며, 모계 역시 카스티야 왕가로서 고귀했기에 정통성이 강했던 탓도 있었다.

다만 전왕 헨리 8세나 후임 엘리자베스나 당시 가톨릭 vs 개신교 양극화 구도로 치닫는 유럽의 국제 관계에서 로마교회와 스페인,독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국익을 챙긴반면 반면 그 사이에 낀 메리 혼자 가톨릭으로 돌아서 친가톨릭의 외교 정책을 추구했다. 이 점이 후대 역사학자들과 개신교인들에게는 영국 외교사의 '정상적' 흐름에서 이탈한 것으로 보여져 까인 측면이 꽤 있다. 이것은 20세기 초반까지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한 휘그 사관의 영향인데, 이 관점은 영국의 개신교화를 역사의 정상적인 흐름으로 보았다. 당연히, 현대 역사학에서 이런 결정론적 사관은 통하지 않고, 이 휘그 사관의 극복이 메리 1세 치세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열었다.

사실 메리는 그저 종교적 열의가 강하고 고집이 좀 셌을 뿐, 사실 그렇게 나쁜 군주도 아니였고 정치적으로도 외교적인 측면만 제외하면 딱히 처참하게 실패한 것도 아니다. 무엇보다 블러디 메리라고 할 만큼 잔학하고 사람을 많이 죽인 무시무시한 폭군은 확실히 아니었으며, 오히려 당시의 여왕치고는 너그러웠던 편이라고. 물론 백성들에게도 관대하고 자비롭게 대했다. 보수적이었던 가톨릭을 따르긴 했지만 그렇게 비평받아 마땅한 인물도 아니다. 오히려 자기 동생이 너무 뛰어난 업적을 세워버리는 바람에 상대적으로 절하되어 악역으로 묻혀버린 불쌍한 케이스. 사실 역사적 연구성과들이 보다 축적되면서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의 위상에 대해서도 많은 비판이 제기되었다. 표면적으로 강력해 보이는 왕권은 항구적인 재정적 기반이나 인적 기반이 허약했고, 외교 정책에 있어서도 무모하거나 과잉적 반응으로 전란 및 재정 소모를 자초했다는 비판들이다. 메리는 오히려 사형에는 소극적인 편이었으며 고문을 많이 활용하지도 않았다고. 헨리 8세나 엘리자베스 1세 시대처럼 고문이 횡행했거나 귀족들이 음모에 말려 희생되는 일도 없었던 시절이었다.

메리의 숙청을 '케케묵은 이데올로기적 관점에서 자행된 한풀이'라는 오해는 16-17세기 유럽 정치역학을 완전히 무시한 발언이다. 17세기까지도 종교적 이데올로기는 반란 세력과 국가 양쪽 모두에게 이용된 막강한 것이었고, 종교적 탄압은 정치에 뗄 수 없는 것이었다.

여담으로 메리 1세의 여왕 즉위 시 아일랜드는 가톨릭, 잉글랜드와 런던은 성공회로 칼같이 나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최근 연구에 따르면 메리 1세 즉위시 잉글랜드 인구는 여전히 대다수가 가톨릭 신자였으며, 프로테스탄트 인구는 가장 강성한 지역에서도 3분의 1을 넘지 못했다. 아직 성공회는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했고, 헨리 8세가 매각한 수도원 토지를 구입한 귀족들은 성공회를 지지했지만, 앤클로우저 운동의 진행으로 땅을 잃고 수도원으로부터 구빈 등의 혜택을 받던 민중들 입장에서는 전혀 아니었다. 헨리 8세 말년에 벌어진 '은총의 순례' 반란과 같은 대규모 반란은 당시 전반적인 민심이 헨리 8세의 개혁에 그닥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증거다. 최근의 연구들은 중세 말 잉글랜드의 가톨릭 교회가 필연적인 종교개혁으로 이어질만큼 부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고 있다.(J.J. Scarisbrick, Henry VIII (1997))

제프리 파커 교수의 주장에 따르면 메리 1세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부흥 계획은 상당히 성공적이어서, 메리 1세가 더 오래 살았다면 잉글랜드는 확고히 가톨릭으로 돌아왔을 가능성도 높았다고 보고 있다. 메리 1세의 정책이 잉글랜드 민심을 거스르는 행위였다면 이것이 가능했을까? 역으로 엘리자베스 1세가 즉위 이후 가톨릭에 대해 잔혹한 탄압을 가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애초에 헨리 8세가 종교 개혁 하기 전까지만 해도 가톨릭 국가였던 잉글랜드다. 종교란 게 하루아침이 그렇게 확 바뀌지 않는다. 버튼 한 번 눌러주고 반란군 한번 때려잡아주면 종교가 휙하고 바뀌는 게임하고 현실하고는 전혀 다른 것이다. 당연히 이런 주장은 헨리 8세 시기와 엘리자베스 시기 종교개혁으로 순식간에 영국교회가 가톨릭에서 벗어난 근거가 되기도 한다.

6 사후

한편, 죽으면서 자신의 장지에 대한 유언을 남겼다. 죽으면 피터부르에 있는 어머니의 무덤 곁에 묻히고 싶다했다.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정말 남달랐음을 알 수 있는 부분. 사실 아버지에게 어머니가 버림받는 경험과 자신까지도 버림받아 혼담이 깨지고 여러 고생하다가 복위된 후에 결국 숱한 위기 끝에 왕위에 오르나, 사랑하는 사람도 무관심했던 메리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유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유언은 실현되지 못한 채 결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는데...그 옆자리가 다름 아닌 그녀가 그토록 애증의 대상으로 삼아왔던 엘리자베스 1세였다. 외나무다리에서 다시 만난 자매

흔히 "메리 스튜어트"라 불리는 스코틀랜드 여왕 메리 스튜어트 역시 스코틀랜드 여왕으로서 부를 때는 "메리 1세"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묘하게도 두 명의 메리 1세는 재위기간이 약간 겹치며, 친척 관계다(본문에서 설명하고 있는 메리 1세(메리 튜더) 큰 고모(헨리 8세의 누나)인 마거릿이 스코틀랜드로 시집가서 낳은 제임스 5세의 딸이 메리 스튜어트이다. 즉, 메리 스튜어트는 메리 1세(메리 튜더)-엘리자베스 1세의 5촌 조카).

참고로, 메리 1세의 본명은 메리 튜더인데, 작은 고모(헨리 8세의 여동생)도 메리 튜더(1496~1533)이다. 헨리 8세가 여동생과 사이가 좋아서 딸에게 메리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하는데, 헷갈릴 수 있으니 주의.

7 현대 매체에서의 메리 1세

스퀘어 에닉스의 RPG 천지창조에서도 '블러디 메리'라는 이름의 보스몬스터가 등장한다. 단, 이쪽은 영국 여왕이 아니라 스페인의 여왕이었다고. 작중에서는 세 명의 아들이 탐험을 위해 떠났다 차례로 죽자 미쳐버렸다고 한다.

7.1 튜더스에서의 메리 튜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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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 볼거가 연기한 메리 튜더.

시즌 전체에 걸쳐 등장, 시즌 4에서는 히로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드라마의 한 축은 메리 튜더의 성장기이며 그간의 블러디 메리의 이미지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동생 엘리자베스보다 비중이 크고 아름답고 영민한 공주로 묘사된다. 시즌 4에서는 본격적으로 오프닝 크레딧까지 차지하는데, 이 오프닝 크레딧에서 묘하게 어머니 캐서린과 겹치는 분위기다. 사실 오프닝 크레딧에서 메리가 들고 있는 묵주는 극 중 어머니가 남긴 유품.

독실한 가톨릭 교도로, 어머니 캐서린과 헤어져 그녀가 죽을 때까지 다시 보지 못하고 어머니의 유품을 받아들었을 때도 홀로 울다가 다시 자신을 다잡았고 자신이 헨리의 사생아라는 것을 끝까지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가 결국 서명을 하게 된다.[22]

이런 모습에서 볼 수 있듯이 무슨 일이 있어도 당당하고 강단있는 성격으로 그려지고 극 중 왕비들과의 관계에서도 할 말은 하고 사는 공주. 특히, 자신의 어머니를 내쫓은 왕비 앤 불린을 서녀 취급 받는 한이 있어도 끝까지 인정하지 않고 그녀와 신경전을 벌였고, 4번째 왕비인 클레페의 앤과는 종교가 다른 것 때문에 탐탁치않아 했지만 앤이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했다. 그리고 다섯번재 왕비인 캐서린 하워드가 왕비답지 않게 경박하다고 여겨 그녀에게 차갑게 대한다. 게다가 안나를 밀어내고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한 상황은 자신의 어머니 아라곤의 캐서린과 앤 불린과 유사한 상황이었다.[23] 또한 무척이나 총명해서 프랑스어와 스페인어를 능숙하게 사용하며 프랑스 대사와 스페인의 공작과도 별 무리없이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버지인 헨리 8세의 애정을 되찾은 뒤에도 고난은 여전해서 여러 번 혼담이 오가지만 프랑스스페인간의 국제관계와 헨리의 변덕 때문에 줄줄히 엎어진다. 그중에서도 클레페의 앤의 사촌 바이에른 공 필리프가 메리에게 구혼을 하러 오고 서로 첫눈에 반하지만 필리프의 종교(루터파)에 갈등하고 이미 안나과 혼인을 무효화 시키려고 마음먹었던 헨리가 그를 돌려보내고 말아서, 자신과 필리프는 이어질 수 없을 것이라 안나에게 못박으면서도 슬퍼했다.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내심 결혼을 하고 싶은 소녀같은 면모도 있는데 위와 같이 계속 혼담이 파기되는 등 20대에 접어들어서도 결혼하지 못하고 있는 자신의 상황에 초조함을 느끼고 있으며 이것을 가지고 캐서린 하워드가 막말하자 끝내 참지 못하고 차푸이스 대사에게 털어놓고 울어버리는 여린 모습도 있다.

그녀의 어머니 덕분에 정치적으로 그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여럿 있지만 그중에서도 진정한 편이라 할만한 사람은 스페인 대사인 차푸이스 대사로, 어머니 캐서린 때부터 여러 가지를 도우려고 동분서주했고 여러가지에 힘들어하는 메리를 따듯하게 감싸주는 버팀목인 사람이지만 시즌 4에서 스페인으로 돌아가고 사망한다.[24]이 때 메리가 차푸이스가 돌아가는 것을 말리는 와중의 대화에 메리가 즉위한 후 행한 가톨릭 복권과 개신교 탄압, 즉 블러디 메리가 되는 이유를 메리의 "만약 제가 여자가 아니라 남자아이였다면 이런 일들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잉글랜드는 여전히 신심이 두터웠을 텐데"라는 예상치 못한 대사로 짐작하게 한다.

메리는 헨리 8세의 종교 개혁이 자신이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자신 때문에 일어난 모든 것을 되돌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 것. 차푸이스의 앞에서 '잉글랜드를 다시 신앙심이 강하게 만들겠다.'라고 맹세한다. 이후 잉글랜드를 떠난 차푸이스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통보받은 뒤 자신이 홀로 남았다고 생각한 메리는 스티븐 가드너 주교 등의 조력자들을 만나게 되지만 이 때부터 이전보다 차가운 인상이 되어버렸고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헨리의 6번째 왕비 캐서린 파가 개신교도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안 뒤로는 냉랭한 기류가 감돈다.

하지만 여동생 엘리자베스와 남동생 에드워드에게는 계속 다정한 누이이자 언니인 면도 있다.. 앤 불린의 핍박으로 엘리자베스의 시녀가 되었을 때에도 어린 아기인 그녀를 살뜰히 챙겨주었던 것을 보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아이인 엘리자베스를 앤 불린과 연관지어 증오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듯 하다. 대인배 그리고 시즌 4에서 어린 에드워드 6세가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자 울며 '제 남동생을 살려 주세요.'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모습을 보였다.[25] 그러나 차푸이스와 가톨릭 사제가 은밀하게 남동생 에드워드를 제치고 메리의 계승을 시도한다고 하자 묘한 웃음을 지으며 지지한다.[26]

개신교 성향 캐서린 파 덕분에 헨리 8세에 의해 계승권을 다시 회복했을 때에는 미묘하지만 엘리자베스에게 자신과 마찬가지로 너 역시 여왕이 될 것이라고 농담조로 다정히 말하기도 했다. 다만 결혼을 간절히 원하는 자신과는 반대로 엘리자베스는 '캐서린 하워드께 있었던 일 때문에 결혼하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진지하게 고백했는데 이 고백을 듣고 상당히 복잡한 심경이 담긴 표정을 짓는다.

7.2 영화 엘리자베스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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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버크가 연기한 메리 튜더. 여기서는 블러디 메리 설을 차용해서인지 과대망상증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중증의 살인광으로 그려진다. 덤으로 초상화처럼 주름투성이로 나온다.


스페인의 펠리페 2세를 열렬히 사랑하여 결혼한뒤 그의 아이를 갖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나 펠리페의 사랑을 얻지 못하여 정신병에 걸려버린 측은한 사정의 여왕으로 나온다. 독실한 로마 가톨릭 교도로 개신교를 믿는 백성들을 마구잡이로 탄압하고 이복동생인 엘리자베스까지 죽이려 하나 엘리자베스의 간곡한 설득으로 차마 사형 집행장에 서명을 하지는 못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자신이 죽고 난 뒤 잉글랜드에서 가톨릭을 말살하지 말라고 부탁하는 인간적인 면모도 보인다. 엘리자베스에 반대하는 노포크 공작 세력은 그녀에게 엘리자베스를 처형할것을 강력히 청원하나 이를 무시하고 엘리자베스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사망한다.

  1. 제인 그레이를 정식 국왕으로 봐야 할지는 학자들마다 평이 갈린다. 항목 참조.
  2. 문장에서 스페인 제국의 문장과 독수리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다름아닌 남편 때문이다.
  3. 1558년 1월 7일, 211년만에 칼레는 도로 프랑스에게 돌아갔다. 당시 영국의 마지막 대륙영토로, 주력 수출품인 양모의 집산지로서 걷히는 관세가 왕실 재정 수입의 35%를 차지했기에 경제적 의미도 컸다. 그래서 별명이 "영국에서 가장 빛나는 보석". 메리가 남편 때문에 스페인-프랑스 전쟁에 얼떨결에 참여했으나 난공불락의 요새라는 것을 믿고 신년 행사(...)나 벌이고 있었다고 한다. 메리 역시 구원 요청을 묵살했다. 결국 함락으로 충격에 빠진 메리 1세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고, 그 해 말에 사망했다.
  4. 다섯 자녀는 영유아기를 넘기지 못하고 단명했다.
  5. 이는 결정적으로 토머스 울지 추기경의 실각 사유가 된다.
  6. 어머니 솔즈베리 백작부인이 요크가 혈통을 물려받았다.
  7. 에드워드 4세의 외증손, 헨리 7세의 왕비 엘리자베스의 여동생이 할머니었다. 종교문제로 집안이 10살때부터 런던탑에 15년이나 감금
  8. 사실 제인은 노섬밸랜드 공작 일가가 처형당할 때부터 운명은 정해졌었다. 어쨌거나 왕위를 참칭한 반역도라서.. 본보기를
  9. 스코틀랜드 여왕의 남동생
  10. 펠리페가 정식으로 스페인 왕이 된 건 메리와 결혼한 후 2년 뒤인데, 왕이 되어 바쁘기 전에도 메리에게 마음이 없었던 탓에 영국에 잘 오지 않았다.
  11. 이래서 인상이 나빠지는 바람에 못생겼다는 인상을 준 반면에 이복여동생인 엘리자베스 1세 역시 뛰어난 미인이라 할 수는 없어도 큰 키에 활달하고 자신감 넘치는 성격이라 대조됐다고 한다. 메리 1세의 남편이던 시절에 엘리자베스 1세를 형부와 처제 사이로 처음 만난 펠리페 2세는 그녀의 저런 당당함에 끌렸고, 그래서 훗날 정치적, 외교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사심으로도 옛 처제인 엘리자베스 1세에게 청혼했다는 야사가 있다. 물론 엘리자베스 1세는 거절했다.
  12. 실제로 메리의 상상임신으로 소동이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13. 1534~1547년 사이 종교적으로 처형한 가톨릭 교도는 62명이고 개신교도는 68명이다.
  14. 사실 본인 저작은 아니고 영국 주교들이 대필한 것. 그런데 이시기에는 저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주장이 더 힘을 싣기에 흔한 일이었다.
  15. 존 피셔, 토마스 모어 달랑 둘이다. 그마저도 모어는 이혼과 새 결혼에서 후계자의 왕위 계승에는 찬성했고 수위권에 침묵을 지켰고 선서만 거부했다.
  16. 개신교라 하지 않은것은 이당시엔 아직 개신교란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다. 루터파나 칼뱅주의 재세례파 각각 서로를 다른 집단으로 여겼고 스스로를 진정한 기독교인으로 여겼다.
  17. 가령 수도원에서 몰래 세금을 안내고 불법 양조장을 운영한다던가, 사채놀이를 한다던가, 치외법권 특권을 이용하여 도박장을 운영하고, 문맹이나 범죄자 출신 같이 자격미달 수도자들 덕분에 성적 금전적 타락은 당연했다.
  18. 고위 사제들이 교구여럿 보유하는걸 금지하고 해산된 수도원의 수사와 수녀들을 주교들보고 먹여살리라고 한게 큰 불만 이었다.
  19. 수장대신 최고통치자 직위를 썼다. 가톨릭 교도와 청교도들의 반발 중에서 타협을 고려한것이다.
  20. 독일과 이탈리아 지역을 제외하면 명목상으론 교황청의 동의가 있긴 하지만 유럽의 세속군주들은 성직 임명에 대해 실질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프랑스 또한 800여개 대주교, 주교, 수도원장 서임권을 행사하는것을 교황청과 합의로 허가 받았다.
  21. 로마 수위권만 부인한 가톨릭 신도 중국천주교애국회랑 비슷하다 보면 된다.
  22. 서명을 요구하러 온 프랜시스 브라이언이 만약 저의 경우 제 자식이 이런 식으로 고집을 피우면 머리를 으깨버렸을 겁니다.라는 폭언을 할 정도였지만 그 말에 떨면서도 굴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숨을 걱정한 차푸이스의 충고에 끝내 고집을 꺾고 서명을 한 뒤엔 평생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거에요.라고 중얼거린다.
  23. 캐서린 하워드가 자신을 향해 '의붓딸' 운운하자 그녀를 노려본다. 그도 그럴 것이 이 때 캐서린 하워드가 10대였고 메리는 20대 초반이었다. 자신보다 어린 계모가 어머니 대접을 받으려 하니 짜증나는 건 당연하다.
  24. 실제로는 스페인으로 돌아가지 않았고 10년 후에나 죽었다고 한다. 마가렛 공주에 이어 또다른 커다란 옥의 티(...)
  25. 여담이지만 이 때 당시 왕비였던 캐서린 하워드는 시종인 컬페퍼와 불륜을 저지르고 있었다.
  26. 에드워드 왕자의 친모 제인 시무어가 왕비로서의 대관식을 거행하지 않은 채, '국왕의 배우자' 자격만을 가진 상태에서 갑작스럽게 죽었기 때문에 법적으로 에드워드의 왕위 계승에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는 논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