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고대
석기시대부터 인류가 거주한 흔적이 보이며, 기원전 7세기경에 여러 고대 켈트 왕국들의 흔적이 문헌에 등장하기 시작했다. 로마 제국이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 해당하는 브리타니아를 점령했을 때에도 아일랜드에는 손을 대지 않아 켈트족의 고유 문화가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다. 당시 로마에서는 아일랜드 섬을 '히베르니아(Hibernia)'[1] 라고 불렀다.
2 중세
로마 제국이 쇠퇴하는 4세기경에는 아일랜드의 켈트인들이 오히려 웨일즈, 콘웰 지역까지 침략하기도 했다.[2] 이들은 해적질을 하기도 했고, 로마의 용병으로 고용되기도 했는데 앞에서 아일랜드에 가톨릭을 전파했다고 알려진 성 파트리치오도 노예로 잡혀갔다가 가톨릭에 귀의하여 켈트인들에게 가톨릭을 전파했다고 한다. 대략 5~6세기경까지 아일랜드는 기존의 드루이드 신앙 체제가 소멸하고 거의 완전히 가톨릭화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들이 활약하기 시작했던 8세기 말에 아일랜드도 바이킹의 침공을 받는데, 795년 바이킹이 처음 아일랜드를 공격한 이래 여러 지역에 바이킹들이 점령한 거점이 생겨난다. 더블린도 9세기 중반 경 바이킹들이 원주민인 아일랜드 켈트인들을 쫓아내고 건설한 거점들 중 하나였다.
아일랜드 동부 지역에 분포하는 라운드 타워[3]는 망을 보거나 바이킹의 침략을 피하기 위한 토착민들의 방어 시설이었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게르만 족의 이동으로 온 유럽이 암흑기였던 시절에 많은 성직자와 학자들이 아일랜드로 망명하여 아일랜드의 중세는 문예의 부흥기였다. 하지만 바이킹의 침략과 약탈로 아일랜드의 학문적 전통이 끊어지고 방대한 기록 유산들이 멸실된다.
3 영국의 침략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침략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1167년이었다. 당시 아일랜드는 여러 작은 왕국들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서부 지역의 코노트 왕국이 힘을 얻어 동남부의 렌스터 왕국 국왕을 추방하자, 렌스터 국왕이 잉글랜드의 헨리 2세에게 지원병을 요청한 것이다. 이때부터 잉글랜드의 아일랜드 지배가 시작되었는데, 이 당시의 잉글랜드 국왕의 지배력은 몇몇 거점에 한정된 것이었고 대부분의 지역에는 여전히 켈트인의 소왕국들이 건재하고 있었다.
그랬던 것이 헨리 8세의 시대부터 아일랜드를 완전히 정복하고 성공회를 내세워 종교탄압을 했으나 크롬웰에 비하면 그 정도가 극단적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교도 정권이 들어선 후 아일랜드인에게 이주민 3천명이 학살당하자 올리버 크롬웰은 피로 물든 반란처단 및 탄압을 하였다.[4] 아일랜드 본토 켈트인들과 대립시키기 위해 청교도 스코틀랜드계 켈트인들을 데리고 온 것도 이때. 이때 원래 그 땅에 살던 가톨릭교도들을 내쫓으며 크롬웰은 '지옥이나 코노트로 가라' 라는 말을 했다고 하는데, 코노트(Connacht)는 아일랜드 서부의 척박한 지대이다. 앞에서 말한 게일어 거주구역이 이곳에 분포하는것이 이런 이유에서 연유하는 것이다. 이 때 크롬웰이 이주시킨 청교도 스코틀랜드계 켈트인들은 스코틀랜드에서 가까운 북동부 얼스터 지방에 모여 살면서 완전히 정착하게 되는데 이들이 토착민들보다 머릿수가 많아지면서 훗날 북아일랜드 문제의 원인이 된다.
잉글랜드의 지배에 시달리던 아일랜드인들은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1798년 대규모 독립운동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였고, 더욱 혹독한 탄압에 시달리게 된다. 1801년 연합법에 따라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는 영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Ireland : 그레이트 브리튼 및 아일랜드 연합왕국)으로 공식적으로 한 나라가 된다. 그 이전까지는 형식상 동군연합이었다.
4 근대 : 감자 대기근과 아이리시 디아스포라
아일랜드인들의 반영 감정을 결정적으로 자극하게 된 감자 대기근이 일어난 것이 19세기 중반이었다. 감자가 전래된 후로 아일랜드인들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는데,[5] 경제적인 이유로 럼퍼[6]라는 이름의 한가지 품종의 감자만 키우다가 이 품종을 숙주로 하는 전염병이 생겨 1848년에 대기근이 벌어졌다. 1840년대의 아일랜드 인구가 850만 가량이었는데 이 때 200만 명이 병사/아사하고 200만여 명이 이민가서 인구가 반토막 난 이후로 남북 아일랜드 합쳐도 아직까지 인구 회복이 안됐다. 이 때 다수의 아일랜드인들이 굶어죽는 것을 피하기 위해 배에 타고 대부분 미국으로 건너갔으며, 미국 뿐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 퍼져서 전세계에 아일랜드인 그룹이 생기는 계기가 되었다. 영국은 시장 질서를 교란하는 밀의 무상 원조를 지양하고 '보이지 않는 손'에게 맡긴다며 아일랜드인들의 구호를 반대했다고 알려졌지만 이것은 사실이 아니다. 이 시기의 상황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아일랜드 대기근 항목을 참고할 것.
당연한 일이지만 미국으로 이주한 아일랜드인들도 순탄한 삶을 산 건 결코 아니었다. 아일랜드계 미국인들은 하얀 흑인이라 불릴 정도로 대우를 받으며 차별당했다. 딱히 미국이 아니더라도 아일랜드 이주자라면 고장을 불문하고 핍박받는 것이 예사였다. 70,80년대까지만 해도 No Irish, No Blacks, No Dogs 라는 구호를 보기 힘들지 않을 정도였으니. 아일랜드 사람들은 paddy라고도 불렷었는데 paddy wagon은 속어로 경찰차를 뜻하는 말이다. 출신 자체가 기근을 피해 피난온 빈민층 출신이기도 했으며, 영국계의 WASP들이 유난히 아일랜드인들을 천시했기 때문...[7] 하여간 미국에서 백인들끼리 유럽 나라 출신으로 인구 가르는게 마지막으로 가능했던 1976년에 독일계 미국인이 5천만명이였고
아이러니하게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이 수십년 후에 집중적으로 오기 시작한 이탈리아계 이민자들에게 엄청 텃세부리고 차별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어떻게 보면 가해자가 된 피해자.
일제강점기의 조선처럼 감자대기근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아일랜드에는 밀과 고기 등이 넘쳤기에 그것들만 풀면 대기근이 그렇게 심하지는 았았을 것이다. 그러나 영국은 아일랜드에서 재배한 모든 곡식들을 배에 실어서 브리튼 섬으로 운반했고,[8] 이 때문에 아일랜드인들의 반영감정은 심각해졌다. 이 과정에서 입헌 투쟁을 벌였던 오코넬(Dónall Ó Conaill, Daniel O'Connell)[9]의 운동이나, 아일랜드 고유어를 살리기 위한 아일랜드 문예부흥운동(예이츠와 존 싱 등이 주도)이 일어나기도 했다.
5 현대 : IRA와 독립
민족주의 열풍이 거세게 불자 아일랜드인들의 독립의지는 점점 강해져갔고,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수많은 무장 봉기가 일어났으나 번번히 진압되어 독립은 좌절되었다. 1910년에는 아일랜드 의회당이 영국 의회에 진출하여 자치를 청원하였고, 이리하여 1914년 아일랜드 자치법이 통과되었으나 이 법의 실시는 제1차 세계대전의 종전 이후로 미루어졌다.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북아일랜드(얼스터)를 아일랜드 자치구에 포함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얼스터 지역에는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출신의 신교도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들은 아일랜드 자치구에 포함되는 것을 결사적으로 반대했다.
이렇게 '합법적' 자치운동이 지지부진하자 1916년에는 독립전쟁의 서막으로 불리는 '부활절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제1차 세계대전 무렵에는 일부 아일랜드 출신 군인들이 독일군에 협조하여 영국을 뒤에서 치는 계획이 시도되기도 했다.[10]
결국 아일랜드 공화국군(IRA)이 조직되어 대영 독립운동을 벌이기에 이르렀다. 영국은 1921년 협상 끝에 사실상의 독립에 가까운 아일랜드의 자치를 인정하여 아일랜드 자유국이 성립했지만, 영국에서 아일랜드로 간 이민자의 자손인 신교도가 많이 사는 북부 지방은 영연방 하에 남게 된다. 이 문제 때문에 아일랜드는 조약 찬성파와 조약 반대파로 나뉘어 또다시 내전(아일랜드 내전 1922~1923)을 치르게 된다. 이 와중에서 독립 영웅 중 하나인 마이클 콜린스가 조약 반대파에 의해 살해당하기도 했다.
결국 내전은 조약 찬성파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영국으로부터 이탈은 더욱 가속화 되어 아일랜드 자유국은 1937년 에이레로 이름을 바꾼 뒤 신헌법을 선포하여 완전 독립을 이룩하였으며, 1949년에는 영연방 탈퇴[11] 뒤 아일랜드 공화국으로 이름을 바꾸어 지금에 이른다.
그러나 이후에도 서유럽의 빈국으로 남아 있던 아일랜드는 1980년대 후반 들어서는 실업률이 17%에 육박하며 다시 수많은 사람이 이민을 떠나는 지경이 된다.[12]하지만 1995년 여성 총리가 취임하며 시장 개방을 통해 외국의 투자를 유치하고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면서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가 된다. 다만 이 과정에서 엄청난 버블이 형성된 탓에 2008년 금융위기의 타격을 꽤나 심하게 받았다. 그래도 구제금융도 가장 먼저 탈출하고 현재는 꾸준한 회복세를 보이는 중.
2011년 5월, 조지 5세의 방문 이후 100년 만에 영국 국왕인 엘리자베스 2세가 공식 방문함으로써 영국-아일랜드의 오랜 갈등을 해결하는 디딤돌이 될 거라고 기대를 받고 있다.
- ↑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에서는 클라우디우스황제와 도미티아누스 황제 때 정복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다고 언급한다.
- ↑ 그래서 아일랜드 전통문자인 오검문자가 콘월과 웨일즈 해안가 곳곳에 발견된다.이들이 브리튼에 세운 왕국중에 단명하지 않은 유명한 나라는 dyfed 왕국과 brycheinniog왕국으로 둘다 오백년 넘게 유지되었다.
- ↑ 원통형의 석탑
- ↑ 17세기 크롬웰이 아일랜드 연맹의 독립운동을 진압할 때 죽은 아일랜드인의 수가 25만 정도로, 지금도 아일랜드인들은 크롬웰이라 하면 히틀러만큼 치를 떤다.
- ↑ 영국인들이 감자 빼고는 다 가져갔다.
- ↑ 생산량이 매우 많다.
- ↑ 영화 '타이타닉'에서도 이러한 면이 자세히 드러난다. 주인공 잭 도슨이 아일랜드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칼 헉슬리에 의해 천대받고 로즈와의 교제를 금지당하는 것이나, 그 외 모든 아일랜드인들은 3등석에서만 탑승하도록 격리조치를 취한 설정 등이 좋은 예시.
- ↑ 영국상인들은 시장주의의 원칙에 따라서 밀을 구호품으로 쓰지 않았다.
- ↑ 현재 더블린에 그의 이름을 딴 오코넬 거리(Sráid Uí Chonaill, Daniel O'Connell Street)가 있다.
- ↑ 1차대전이 끝나고 독일이 나치에 치하에 들어갔을때, 아예 독일군에 블루셔츠라고 불리는 아일랜드인으로 구성된 부대가 설립되기도 했다. 이들은 스페인 내전에도 파쇼 세력으로 참여했다. 이 경우는 스페인 공화정부군의 반가톨릭적 성향에 대해 보수 가톨릭이 지배적이었던 이들이 프랑코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이와 반대로 공화정부군에 참여한 아일랜드인들도 있었는데, 이들은 IRA소속으로 공화정부를 지지했기 때문이었다.
- ↑ 이것도 사실 1937년 신헌법 선포 뒤에는 아일랜드에서는 영연방에 더 이상 속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1949년은 영국에서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한 해이다.
- ↑ 이때 3일정도 버틸 짐과 돈을 가지고 50분거리의 가까운 영국으로 페리를 타고 일자리를 찾아 무작정 떠나는 아일랜드 젊은이들이 많았다. 이와 관련된 영화 싱 스트리트의 초반부 BBC 뉴스는 당시 실제 보도된 것을 따온것이다. 영화에서도 여주인공 라피나도 그렇게 영국으로 떠나지만 실패하고 털레털레 돌아오는 장면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