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일랜드 단식투쟁

1 개요

Irish hunger strike[1]

1981년 3월부터 IRA 재소자들이 당시 영국을 이끌던 마가렛 대처 내각에게 자신들을 일반 범죄자가 아니라 정치범으로 대우할 것을 요구하면서 벌인 단식 투쟁. 200일 이상 진행된 끝에 같은 해 10월 3일에 종료된다. 수십 명이 참여한 가운데 이 중 주도자 바비 샌즈를 비롯한 10명이 결국 기아로 사망했으며, 이 사건 이후 북아일랜드 분쟁은 한층 격화된다.

2 배경

영국에 대항하는 IRA 측의 단식 투쟁은 그 역사가 깊었다. 1921년 마이클 콜린스의 주도 하에 독립 투쟁이 한창이던 와중에 테렌스 맥스위니(Terence MacSwiney)가 73일의 단식 투쟁 끝에 숨을 거둔 것을 시작으로 IRA 조직원들은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단식 투쟁을 벌였으며, 이 와중에 12명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는다.

이후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IRA의 세력은 점차 약화되고 있었지만 영국 정부는 1971년 드미트리우스 작전이라는 초대형 병크를 터뜨린다. 무장 군대를 동원하여 IRA에 가담한 인물로 의심되는 자[2]들을 별다른 사법적 절차[3] 없이 강제로 구금시킨 드미트리우스 작전은 북아일랜드 분쟁에 다시 불을 붙였고, 이듬해의 피의 일요일 사건이 터지면서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확대된다. IRA가 다시 활성화되면서 관련 수감자들도 늘어만 갔고, 이들은 단식 투쟁을 벌인 끝에 영국 정부로부터 IRA 관련 재소자들을 전쟁 포로와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약속받는다. 이러한 특별 대우를 통하여 IRA 재소자들은 죄수복을 입지 않으며, 강제 노역에도 동원되지 않는 것과 같은 권리를 얻게 되었지만 1976년 3월 해럴드 윌슨 내각이 기존의 특별 대우를 폐지하고, 이들을 일반 죄수와 동등하게 대우할 것을 지시하면서 다시금 갈등이 시작된다.

수감자들은 곧바로 이에 대항하는 모포투쟁(blanket protest)을 시작한다. 수감자들이 나체 또는 모포를 두른 상태로 지내면서 죄수복을 입는 것을 거부하는 모포 투쟁은, 죄수가 죄수복을 입지 않으면 감방 밖을 나갈 수 없도록 규정한 당시 영국 교도소 내 규칙과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다. 영국 당국은 곧바로 감형을 취소해버리고, 식사를 형편없이 제공하는 등 맞대응에 들어간다. 그 와중에 1978년 3월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폭행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모포투쟁은 불결투쟁(dirty protest)로 진화한다. 교도관들의 폭행에 분노한 재소자들은 감방 내에 비치된 각종 가구들을 모조리 때려부쉈고, 이에 영국 당국 역시 감방 내 가구들을 싹 다 빼버리는 것으로 맞대응하자, 재소자들이 감방에서 나가기를 거부하면서 각종 생리현상을 자신의 감방에서 처리하고 배설물을 벽에 바르기 시작했던 것(...)

재소자들이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내세운 조건은 5가지였다.

1. 죄수복을 입지 않을 권리.

2. 노역에 동원되지 않을 권리.
3. 교육적 오락적 목적을 위해 다른 죄수들과 자유롭게 교류할 권리.
4. 주 1회 면회·편지·소포의 권리.
5. 시위 과정에서 상실된 감형의 완전한 복구

3 진행

이러한 막장 상황은 처음에는 별로 대중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지만, 재소자들을 면담하기 위해 수감소를 방문한 카톨릭 사제 토마스 오피어크가 큰 충격을 받고 수감소의 현실을 언론에 발표하면서 세상의 이목을 끌게 된다. IRA가 재소자들이 수감된 교도소를 공격하는 일도 빈번했으며, 이에 대항하여 왕당파 준군사조직 역시 IRA를 향해 빈번히 테러를 자행했다.

1979년 집권한 마가렛 대처의 보수당 정권은 "테러리스트와는 협상하지 않는다."는 기조를 고수하면서 어떠한 협상도 거부한다. 다음해 6월 유럽 공동체 산하 인권위원회에서 재소자들의 모포/불결 투쟁을 "정치적 목적을 위해 동정심을 유발하기 위해 기획된 것으로(designed to enlist sympathy for the political aims) (..중략..) 이러한 상황은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conditions were self-inflicted)."라고 정의내리면서 대처 내각의 태도는 한층 더 강경해진다. 이에 재소자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10월 27일 단식투쟁을 시작한다.

IRA와 아일랜드 민족해방군(INLA)의 주요 간부 7명[4]이 참여한 단식 투쟁은 초반에는 영국 정부와 투쟁자 사이의 팽팽한 기싸움으로 점철된다. 하지만 두 달 가까이 진행된 투쟁 끝에 12월 중반 참가자 션 맥켄나(Sean McKenna)가 중태에 빠지면서 양측은 부랴부랴 합의에 도달하고 이에 따라 12월 18일 단식투쟁은 일단 종료된다.

하지만 대처 내각이 합의 사항을 이행할 마음이 없다는 것은 곧 분명해졌고, 이에 따라 수감자들은 다시 한 번 단식투쟁을 결의한다. 재소자들은 (7명이 동시에 단식을 시작한 지난 1차 투쟁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릴레이 형식으로 단식을 진행하여 좀 더 강경하게 대처 내각을 밀어붙일 것을 기대했고, 3월 1일 IRA 출신의 바비 샌즈가 단식을 시작한다. 연이어 프랜시스 휴즈, 레이몬드 맥크리시 등이 단식 투쟁을 시작한다. 한편 4월에 열린 보궐선거에서 샌즈는 영국 하원의원 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이에 따라 수감자 측에서는 영국 정부와 좀 더 원활한 협상이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였으나......... 대처는 눈도 깜짝 하지 않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까지 특사를 보내서 양측의 협상을 촉구했지만 영국 정부는 "만약 샌즈가 자살하려한다면 그건 그의 선택이다. 우리도 굳이 의학적인 치료를 그에게 강요하지는 않겠다(If Mr. Sands persisted in his wish to commit suicide, that was his choice. The Government would not force medical treatment upon him)"라면서 비타협 의사를 명확히했고 결국 5월 5일 샌즈는 66일의 단식 투쟁 끝에 사망한다. 전세계적으로 비난의 목소리가 커지는 가운데서도 철의 여인 대처는 "그 폭도들은 최근 몇달 사이 자신들의 그릇된 신념의 실패에 직면하여서 자신들의 마지막 카드를 꺼내들었을 뿐이다(Faced with the failure of their discredited cause, the men of violence have chosen in recent months to play what may well be their last card)."라면서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이후로도 단식투쟁은 10월까지 진행됐으며, 23명이 참가한 가운데 무려 10명이 목숨을 잃고 만다.

4 결과

영국 보수파들과 정부는 원칙을 고수하여 테러리스트들을 제압했다며 한껏 의기양양했다. 하지만 그것은 아주 큰 착각이었다. 북아일랜드 내 가톨릭 신자들에게 대처는 이제 불구대천의 원수가 되었으며, 1970년대 후반에 들어가며 겨우 다시 진정될 기미를 보이던 북아일랜드에는 다시금 유혈 사태가 빈번해진다. 대처 본인 역시도 IRA의 주요 타겟이 되어 1984년 브라이튼 호텔 폭파사건 당시 목숨을 잃을 뻔 했다. 북아일랜드에 마침내 평화가 깃든 것은 이 사건 이후 20년 가까이 지난 1998년 성금요일의 협약을 통하여 IRA와 신페인당이 무장 투쟁을 포기하고나서 부터였다. 또한 바비 샌즈의 옥중 출마에 주목한 신페인 당은 이후 적극적으로 대의정치에 참가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든 뒤로는 북아일랜드 내에서 주요 정당 중 하나로 확고히 자리를 잡는다.

단식투쟁에 앞서 재소자들이 내건 5개 조항은 결국 시간이 흐르면서 사실상 모두 수용된다. 이미 단식투쟁 와중에 3~5조는 영국 정부와 합의가 이루어졌다. 끝끝내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재소자들의 강제 노역 동원 문제였는데, 이것 역시 1983년 9월 IRA 대원 38명이 집단으로 탈옥한 메이즈 교도소 탈옥 사건 이후로 노역장이 영국 정부에 의해서 폐쇄되면서 사실상 해결된다. 물론 대처 내각은 입을 싹 다물었다.\

바비 샌즈를 비롯한 단식 투쟁의 희생자들은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에게 순교자로 남았고, 오늘날에도 해마다 5월이 되면 그들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 이 사건으로부터 30년 가까이 지난 2008년에는 스티브 맥퀸이 감독을 하고 마이클 패스벤더가 바비 샌즈 역을 맡은 영화 <헝거>가 개봉되면서 다시 한번 이 사건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1. 게일어로는 Stailc ocrais(스탈크 오크라스)라고 읽는다.
  2. 당연하지만 단순히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라는 이유만으로 억울하게 체포된 이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3. 영장재판 같은 건 없었단 말이다.
  4. 부활절 봉기 당시 아일랜드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숫자와 맞추기 위해 7명으로 정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 참여한 게 이 7명이고 그 외에도 자발적으로 참여한 조직원들도 수십명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