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가우르 전투 | ||
제2차 세계대전 중 태평양 전쟁의 일부 | ||
앙가우르 섬에 포격을 가하는 미해군의 함선들 | ||
날짜 | ||
1944년 9월 17일 ~ 1944년 10월 22일 | ||
장소 | ||
팔라우 제도 앙가우르 섬 | ||
이유 | ||
비행장 건설을 위한 미군의 상륙 | ||
교전국 | 미국 | 일본 제국 |
지휘관 | 폴 J. 뮐러 윌리엄 H. P. 브랜디 | 고토 우시오 † |
결과 | ||
미군의 승리 | ||
영향 | ||
일본 제국은 팔라우 제도를 미군에게 완전히 탈환당함 | ||
병력 | 22,000명[1] 10,000명[2] | 1,382명[3] |
피해규모 | 전사및 실종 264명 | 포로 48명, 이외의 인원 전원 사망 |
목차
1 개요
일본 제국이 점령한 팔라우 제도의 앙가우르 섬에 비행장을 건설하고자 했던 미군이 철저한 사전 준비하에 앙가우르 섬에 상륙하여 섬에 주둔한 일본군을 상대로 벌인 전투. 미군이 진행한 팔라우 제도 탈환전의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섬에 주둔한 일본군들은 미군이 상륙한지 얼마지나지 않아 괴멸당하고, 이후의 전투는 생존한 일본군 인원들에 의한 농성전이 주를 이룬다.
2 앙가우르 섬
앙가우르 섬은 팔라우 제도 남단에 위치한 섬으로, 본래 독일 소유의 식민지였으나 1차대전 직후 일본의 소유로 넘어가고, 1922년 부터 일본의 남양청이 대규모의 인광석 채굴을 시작했다.[4] 이때까지만 하더라도 크게 전략적인 입지를 가진 섬은 아니었으나, 1944년 부터 일본제국의 태평양 전쟁 전선의 전황이 점점 악화되자 참모본부가 제창한 "절대 방어선"에 팔라우 제도가 포함되면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입지를 지닌 섬이 되었다.
3 양측의 병력
3.1 미군
미군 제 81 보병 사단, 일명 살쾡이 사단으로 불리는 와일드 캣츠(wild cats)의 휘장.
미군 제 81 보병 사단장 폴 J. 뮐러 소장
폴 J. 뮐러(Paul J. Mueller) 소장의 지위 하에 상륙의 선봉에 선 미군 제 81 보병 사단은 1차대전기에도 존재했으나 한번 해체되고,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재구성된 사단이다. 대부분의 인원들은 강도높은 훈련을 받았으나 실전 경험은 없었다.
휘하의 321연대와 322연대 또한 대부분이 신병으로 구성되어있어 전투 초반에는 앙가우르 섬에 서식하는 박쥐와 육지게들이 내는 소음에 놀라 오사하는 일이 잦았으나 빠르게 적응했다고 한다. 323연대는 지원부대로, 섬에는 상륙하지 않았다.
윌리엄 H. P. 브랜디 소장
이 외에도 미해군의 윌리엄 H. P. 브랜디(William H. P. Blandy) 소장의 전함 펜실베니아와 테네시, 경순양함 4척과 구축함 5척으로 구성된 함대가 미군의 상륙 이전부터 시작해 상륙 이후에도 앙가우르 섬을 향해 지원사격을 가했고, 함재기또한 섬에 폭격을 가했다.
3.2 일본군
우츠노미야 보병 제 59연대 1대대장 고토 우시오 소좌
섬에 주둔한 일본군은 고토 우시오(後藤丑雄) 소좌의 지위를 받는 제 14사단 59연대, 그 중에서도 1대대의 병력이었다. 이들은 본래 관동군 소속으로 만주에 주둔하며 소련군을 경계하는 국경경비대였으나 태평양 전쟁 전황의 악화로 제 14사단의 지휘를 받는 2연대, 15연대의 병력과 함께 팔라우 제도로 배치되었다. 2연대와 15연대는 펠레리우 섬으로 보내져 펠레리우 전투를 치르게 된다.
차출된 59연대 1대대는 관동군에서 특별히 선발된 정예병력이었으나, 앙가우르 섬에 상륙한 미군과 마찬가지로 대부분이 실전경험은 없었다고한다.
4 양측의 사전 준비
4.1 일본군
1944년 4월 27일에 앙가우르 섬에 도착한[5] 일본군 병력은 미군이 상륙할만한 섬의 해안에 대전차호와 토치카등을 건설하고 철조망을 설치하는 등 섬의 해안에 방어선을 철저하게 건설했으며, 고토 소좌는 8월달 부터 이 방어선들이 미군에게 돌파당하는 최악의 상황이 온다면 앙가우르 섬 서북고원의 동굴들을 이용해 미군을 상대로 농성전을 벌일것을 휘하의 병력에게 명령했다.
4.2 미군
일본군들이 앙가우르 섬에 방어선을 건설하고 있는 중에도 종종 미군의 폭격기가 나타나 방어선을 건설하는 일본군들을 향해 공격을 퍼부었으며, 1944년 9월 6월 에는 마크 A. 미처 중장이 지휘하는 항공모함 11척, 전함 2척, 순양함 10척, 구축함 35척에 달하는 대규모 함대가 앙가우르 섬과 펠레리우 섬 사이의 바다에서 양 섬을 향한 공격을 퍼부었고, 12일 부터는 필리핀으로 떠난 마크 A. 미처의 함대를 대신해 윌리엄 H. P. 브랜디 소장이 이끄는 함대가 앙가우르 섬에 본격적인 함포사격을 개시했다. 14일에는 앙가우르 섬의 해안선을 파악하기위해 소해정들이 앙가우르 섬주위를 돌았다.
미군의 사전 공격으로 인해 일본군들이 철저하게 건설한 방어선들이 약화되었으며, 동시에 섬에 있던 정글과 일본군의 식량과 식수저장시설, 야전병원, 통신용 전선들이 파괴되어 일본군들은 비둘기를 이용한 통신을 해야했고 이후 농성전에서는 만성적인 식량과 식수, 의료 물자 부족에 시달렸다.
5 전투의 시작
미군의 앙가우르 전투 상황도
1944년 9월 17일 오전 5시 경, 날이 밝자 미 해군의 함선들이 앙가우르 섬을 향해 함포사격을 시작했고, 뒤이어 섬의 서쪽에 미군의 수송선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에 고토 소좌는 섬의 서쪽으로 3중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이는 미군의 양동작전이었으며, 실제 미군의 주 병력은 동쪽 해안(블루 비치)과 동북쪽 해안(레드 비치)으로 상륙해 들어온다는 것을 정오 즈음에야 깨달은 지휘부는 2중대를 동북해안으로 보내 상륙을 저지하려 했으며, 1중대는 섬의 중앙에 집결해 있다가 미군이 방어선을 돌파하고 들어올 것을 대비했다.
앙가우르 섬에 상륙하는 미군 제 81사단의 병사들
6 전투의 경과
앙가우르 섬의 일본군 전선은 빠르게 붕괴되어 전투는 살아남은 일본군 주요 병력이 서북고지(살로메 분지)의 동굴들을 진지로 삼아 농성전을 벌이고, 이 일본군들을 미군이 공격하는 양상을 띄게 되었다.
앙가우르섬 서북고지에서 식량과 식수 부족에 시달리던 일본군들은 소변과 피를 받아 마시면서 정글에 서식하는 온갖 동물들과 나무뿌리까지 먹고, 미군에게서 식량과 식수를 탈취해가며 공격해오는 미군을 번번이 격파했으나, 결국 10월 19일 지휘관 고토 우시오 소좌가 사망하고, 미군이 마지막 일본군 거점을 점령한 뒤 10월 23일부터 소탕작전에 돌입하는 것으로 전투가 종료된다.
앙가우르 섬에 있는 고토 우시오 소좌의 무덤. 사후 대좌로 추서되어 묘비에는 대좌로 표기되어있다.
미군은 고토 소좌와 일본군들의 시신을 매장하고 목표로 했던 비행장을 건설한다.
자세한 전투의 경과는 후나사카 히로시/앙가우르 전투 문서와 대사의 태평양 전쟁 이야기, 앙가우르 전투 참조[6]
7 기타
이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몇 안되는 일본군 병사인 후나사카 히로시는 단독으로 미군 지휘부를 향한 자살공격을 감행하다 실패하여 포로로 잡혔다.
이후 미국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후나사카는 자신의 간수였던 버논 F. 크랜쇼 상병과 친하게 지내게 되고, 미국의 발달된 문물을 경험하며 "일본으로 돌아간다면 서점을 경영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고 일본으로 돌아와 서점을 경영하게 된다.
그리고 20여년 뒤, 후나사카는 앙가우르 섬에 유골 수습단의 일원으로 참가한 뒤 이 전투에 대한 본인의 자서전,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를 집필하고 앙가우르 섬에 위령비를 건립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