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나사카 히로시


1944년 3월 1일, 남방 동원령이 내려져 이동하던 날 찍은 사진.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에 수록된 원본 사진에서는 본인을 포함하여 6명의 병사가 찍혀있다.

tumblr_mkfsjanyWa1qewr02o1_500.jpg
1966년 4월 17일, 포로시절 자신의 간수이자 친구였던 버논 포레스트 크렌쇼(우)와 21년만에 다시 만난 후나사카 히로시(좌)

여진구 닮았다
김연우도 보인다

舩坂 弘 (ふなさか ひろし)
(1920.10.30 ~ 2006.02.11)

일본의 오토 슈코르체니, 존 바실론, 잭 처칠
일본군 최강의 인간 흉기이자 진정한 사무라이[1]

1 개요

일본 육군 하사관으로 괴물 같은 활약상 덕분에 "독일에 오토 슈코르체니가 있었다면, 일본에는 후나사카 히로시가 있었다"고들 말한다. 그리고 영국엔 잭 처칠이 있다 미국엔 람보의 선배가 있다

한 마디로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전투력의 소유자이자 모범적인 양식, 인품까지 갖춘, 구 일본군을 통틀어 몇 안되는 인간적인 선을 지키려했던 진정한 군인이자 시대를 잘못 태어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이야기를 정리한 블로그

2 초기의 활동

1920년 10월 30일 도치기 현 니시가타 출생. 어렸을 때부터 인근에서 유명한 싸움꾼으로, 혼자서 8명을 상대로 싸워 이길 정도였다고 한다. 소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일을 거드는 것에 염증을 느끼고 독학으로 와세다 중학의 강의록을 베껴 가면서 공부해 검정고시를 패스, 이후 1939년에 만몽(滿蒙)학교 전문부에 입학했다.

1941년 3월, 육군 우츠노미야 제36부대에 입대했으며 만주 치치하얼의 제219부대로 배치받았다.

북만주, 치치하얼에 사령부를 둔 219부대는 에구치 하치로(江口八郎) 연대장이 지휘하는 우츠노미야 보병 59연대가 주축이 된 부대로, 당시 가상적국이었던 소련군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노몬한, 하이랄, 아얼산, 눈강 일대의 국경지대를 수비했다. 후나사카는 59연대 1대대 1중대 척탄통 분대로 배속받았다.

3 만주에서 남해로

  • 후나사카 히로시의 자서전,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에서 내용을 발췌함.

1944년 3월 1일, 남부 방면의 전황이 악화되면서 동원령이 내려지자 후나사카를 포함한 59연대 1대대는 제14사단의 직할에 있던 2연대, 15연대와 함께 남방으로 이동하게 된다.

3월 12일, 뤼순에 집결한 59연대는 뉴기니 전선에서의 역상륙과 물가에서의 전투 훈련을 받았으며 이후 25일부터 공식적으로 제31군 중부태평양파견군 사령관인 오바타 히데요시(小畑英良) 중장의 지휘를 받게 되었고 28일, 부대는 다롄, 진해, 모지(門司)항을 거쳐 4월 3일 요코하마에 입항했다.

오랜만에 일본의 항구와 자연을 눈앞에 둔 병사들은 감개무량했다. 도쿄의 건너편 도치기 현에는 부모와 형제가 살고 있었다. 한번 만나고 싶었다. 한번 만나고 나면 미련없이 죽을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 소망은 이룰 수 없었다.

이후 4월 6일에 요코하마를 출항, 다테야마에 입항한다.

다테야마의 산과 도시를 보고 있으면 다시는 못 보게 되지 않을까 하며 일본에 대한 끊기 어려운 정이 북받쳐 왔다. 일본에서 태어나 자란 이십여 년의 다양한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북만주의 얼어붙은 풍경에서 탈피해 고향의 또렷한 녹색을 접하면 생각을 잊기가 어려웠다. 제공권도 제해권도 이미 미군에게 빼앗기고 있을 때였다. 남방의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바닷속에 매장당할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4월 7일에 다테야마를 출항, 부대는 토산마루(東山丸), 노토마루(能登丸), 아소산마루(阿蘇山丸)라는 세 척의 수송선에 나눠 타고 해군 호위함의 호위를 받으며 남태평양으로 향하던 도중 치치시마[2]에 11일 간 기항한다.

내남양(內南洋)은 일본군에게 있어서 무방비 상태와 마찬가지였다. "미군의 각 섬 상륙은 가을 즈음일 것이다."라는 일본 수뇌부의 예상을 깨고 미군은 사이판, 티니언, 등에 중폭격을 반복했다. 동시에 미군의 잠수함은 내지와 내남양을 잇는 항로에 나타나 육군의 파견선단을 노리고 공격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보내진 수십 척의 선단이 침몰당해 이미 수만의 육군이 바닷속 물귀신이 되어 사라졌다. 예를 들어, 괌으로 급행했던 제29사단 18연대는 잠수함 공격을 당해 모두 바다에 내던져져 다수가 사망하고 얼마 안되는 생존자들마저 전투가 불가능한 상태로 사이판에 헤엄쳐 상륙하는 꼴이었다.

4월 18일에 치치시마를 출항, 24일에 팔라우 본섬의 관문 역할을 하는 코로르 섬에 도착한다.

이 섬은 남하하는 일본군의 선단이 꼭 들르고, 상가의 성황도 심야까지 이어지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보았던 것은 무엇이었던 것인가, 아름다운 카나카 족의 미인도 아니고 야자의 녹색도 아니었다. 거기에는 3월 말 미군의 대공습의 흔적이, 악마의 발톱으로 긁어낸 듯한 파편의 코로르 섬이 눈에 비칠 뿐이었다. "이건 엄청난 것이다...." 우리는 그 참사를 보고 처음으로 전쟁을 직접 느껴, 등골에 냉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북만주와 내지에서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전황은 심각했던 것이었다.

이후 59연대의 선발대는 코로르 섬에서 남쪽으로 51km를 나아가[3] 4월 27일 오후 2시에 앙가우르 섬에 도착한다. 그리고 다음 날에 본대와 군기가 도착한다.

이 날로부터 넉 달 뒤, 똑같이 행동한 페리류 섬[4]의 제2연대와 함께 적의 기습 상륙을 받고 옥쇄할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음을 누가 알았겠는가.

4 본격적인 활약과 여생

앙가우르 섬 주둔 당시 후나사카의 나이는 24세였으며, 이미 중대에서 가장 뛰어난 모범병사로 유명했고 부하들에게도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30차례의 사격 대회에서 상장과 상패를 수상했으며 특히, 사격 훈장과 총검술 훈장을 동시에 수상했는데 이런 기록은 종전을 맞을 때까지도 후나사카가 유일한 사례였다.

4.1 앙가우르 전투에서의 활약

후나사카 히로시/앙가우르 전투 문서 참조

4.2 전후

괌, 하와이, 샌프란시스코, 텍사스[5]의 포로수용소를 전전하다가 전쟁 이후에도 살아남아 1946년 귀국했다. 고향에서는 이미 전사 처리한 지 오래라 위패까지 마련해놓은 상태였고, 자기가 살아있음을 알리려 이를 걷어차버렸다(!)는 일화가 있다. 난 살아 있다구, 이 니기미 씨부랄것들아!

그리고 후나사카의 전투기록은 개인기록으로는 유일하게 전사총서에 게재되었다. 이후에는 1평짜리 땅을 얻어 대성당서점이라는 이름의 서점을 경영하기 시작했는데 다행히 사업은 번창했다. 서점을 경영하며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를 비롯하여 본인의 참전 경험이나 주변 명사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한 저서를 여러 권 썼다.

특히 1981년에 펴낸 《옥쇄의 섬에 대의는 없었다》라는 책에서는 팔라우 제도에서 복무한 다른 일본군 출신자의 동남아 지역 위안부에 대한 증언까지 실었다. 저술한 책들의 인세는 후술되는 위령비 건립에 쏟았으며 위령비 건립 이후에는 국제적십자사에 로열티를 전액 기부했다.

후나사카는 앙가우르 섬에 위령비를 세우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 여겼다. 이것은 뒷날 본인의 저서에서 나오는 인세와 애독자들의 후원금으로 실현했고, 이후 태평양의 여러 에 위령비를 세웠다. 또, 그는 서점 경영과 부상의 후유증에 시달리는 바쁜 와중에도 앙가울 섬의 영령위령제에 매년 참석했다. 그 뒤 팔라우 원주민의 원조 및 일본간의 교류사업에 힘을 쏟았다.

2006년, 신부전으로 사망했다. 향년 86세. 전쟁에서 입은 심한 부상이 많았음을 감안한다면 굉장히 말도 안될 정도로 장수한 셈이다. 사실, 부상이 없었어도 장수한 것이 맞긴 하지만... 이런 사람이면 정말 장수할 만 하다.

5 미시마 유키오와의 관계

201005201224539f8.jpg
앞줄 왼쪽 끝에있는 앉아 있는 흰 도복을 입은 사람이 미시마 유키오, 그 뒤에 서있는 사람이 후나사카 히로시다.

미시마 유키오는 후나사카가 서점을 경영하며 다니던 검도 도장의 후배로, 미시마의 말에 따르면 그 도장에서도 후나사카는 대단히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었다고 한다.

후나사카는 소설가인 그에게 자신의 자서전인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를 펴낼 때 서문을 부탁했다.[6] 이 때의 유키오는 군국주의에 물들지 않았던, 병약했던 시절의 정상인(히라오카 키미다케)이었다. 후나사카는 후에 군국주의자가 된 유키오를 아주 한심하게 여겼다고. 후나시카는 그 지옥의 제2차 세계대전을 독하게 겪어오면서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폭주를 직접 경험했기 때문에, 전쟁을 직접 겪어보지도 않은 미시마 유키오가 군국주의 체제였던 구 일본을 찬양하자 상당히 실망했다고 한다.

후나사카는 미시마 사건에서 미시마가 자결 당시 쓴 칼인 마고로쿠 카네모토(孫六兼元)를 증정받기도 했다. 이때 했다는 말이 걸작인데 "한심한 작자 같으니라고. 차라리 이 칼로 야쿠자나 베지 그래? 뭣하러 자살을 하나?"며 비꼬았다고 한다. 그리고 후나사카는 이 칼을 자살밖에 못 하는 칼이라 이름지었다고 하며, 《세키노 마고로쿠―미시마 유키오, 그 죽음의 비밀》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미시마 사건에 대한 개인적인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6 사상

앙가우르 전투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부상과 더불어 식수, 식량 부족의 고통, 그리고 전우들의 죽음을 경험했던만큼 그의 회고에서는 반전주의적인 대목이 곳곳에서 나타난다.

본인이 일본 육군 하사관 출신이었던 만큼 일본군의 전몰자들이 일방적인 비난의 대상이 되는 것만은 싫어했던 모양이었는지,

전후 군대에 대한 일방적인 비판이나, 태평양 전쟁의 희생자들을 개죽음에 이르는 논리가 이어졌지만,[7] 그것들은 모두 군대에서 낙오자였던 자들인 인텔리병의 시류를 탄 발언이다. 당시의 우리 청년들은 "고국을 위해 죽는다."라는 것을 숙원으로 적군에게 나아갔었다. 특히 지방출신자가 많은 우츠노미야 14사단은 그 소박한 믿음의 소유자가 대부분이었다.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

라고 본인의 자서전에서도 그 점을 나타내고 있다. 다만 복무자들의 대부분이 본인과 같은 도치기현 출신이라는 점 때문인지 본인이 복무했던 육군 우츠노미야 제 14사단 59연대에 대한 애착이 특별히 깊었던것으로 보이는데, 그 때문에 자서전 전반에서 해당 사단의 복무자들을 높게 평가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살쾡이 부대(와일드 캣츠)라고 불리는 미 육군 제 81 보병사단으로, 뉴기니, 하와이에서 특별한 상륙훈련을 받은 표범같은 민첩성과 집념을 지닌 강력한 병사들이었다.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

그렇다고 앙가우르 전투에서 자신과 싸웠던 미 육군 81사단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는 않았다.

그 외에도 전술한대로 전후 위안부에 대해 본인의 자서전으로서 관련제보까지 했는데, 그 기록은 일본군 위안소 현황에 있다. 위안부 만행을 부정하던 세력들이나 몇몇 참전군인과는 상당히 비교되는 대목이다.

7 평가

이처럼 전장에서는 악명 높았지만 정작 무고한 자들에게는 위해를 끼친 적이 없었던, 일본군 내에서도 굉장히 보기 힘든 제정신 박힌 '군인정신'의 소유자였다.

애당초 그의 손에 죽은 사람은 미군을 포함한 군인들이었다. 포로들을 죽인 것도 아니며, 엄연히 전장에서 싸웠고 저항하면서 총을 쏘는 적군을 죽인 것으로, 이것을 모두 전쟁범죄로 취급하면 군인 전체가 전범이나 다름없다.

물론, 애초에 일본이 일으킨 전쟁 자체가 도의적으로든 국제법상으로든 정당성이 없기 때문에 정치, 사회학적 의미로는 전쟁범죄의 참여자인 것을 부인할 수 없긴 하다. 그러나 국제법상으로는 학살을 저지르지 않은 말단 군인까지 전범으로 처벌하지는 않으며 만약 정말 연합군이 그렇게까지 했다면 아마 전쟁은 10년 이상 길어졌을 것이고 오히려 추축국들이 쉽게 항복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일전에는 존경하는 것 자체가 위험한 발상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따지면 이마이 다케오나 후세 다쓰지를 존경하는 것마저 위험한 발상이 되며 자신들 스스로가 전쟁을 수행하는 군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정당성을 주장했던 독립운동가들마저 단순한 테러리스트다.

당연하지만 전통적으로 국가를 위한 애국은 선이며, 전쟁에서 서로가 '기사도' 정신으로 정당하게 싸워서 죽이는 것은 모두 정의라고 설명하기는 했으며 C.S. 루이스 같은 기독교 작가들도 그렇게 2차대전 중에 연설을 하며 돌아다녔다. 물론 정당하지 않은 전쟁이 국가를 위한 군인의 충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찬양받을 이유는 없다. 전쟁에 대한 책임은 많은 이들이 모두 짊어져야 하며, 해군선옥론 등이나 일본의 피해자 행세, 독일 국방군의 이미지 세탁 등이 문제가 되는 이유이다. 하지만 그가 전범으로 비난 받을 이유는 하등 없다. 그는 전쟁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게다가, 전술한대로 그는 위안부를 부정하기는커녕 오히려 가해사실이 있다고 증언까지 했다. 당연하다만, 국제법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극악한 전범들에 대한 비난과 처벌은 당연히 주장하겠지만, 전쟁과 반평화의 원인을 좀 더 근본적이고 고착화된 권력, 갈등, 체제의 문제로 보는 것이 반전주의의 방법론이다. 그러나 근본적이고 고착화된 권력, 갈등, 체제의 문제로 보는 것과 전범도 아닌 사람을 전범으로 모는 것은 차원이 다르다. 이런 식이라면 츠노다 도모시게, 다카기 소기치 같은[8] 비인간적인 행위를 혐오한 군인들까지 모두 전범이라는 무모한 발상이 되고 민간인들을 구해낸 군인들까지 전범이라는 소리가 된다.

8 한국에서 퍼진 '근거없는' 낭설들

  • 리그베다 위키에 본 문서가 있을 때부터 후나사카 히로시에 대한 근거없는 낭설들이 작성되어 국내 인터넷 상에 널리 퍼졌는데, 이 문단에서는 그 낭설들을 정리한다.

8.1 할힌골 전투시 소련군 1개 분대 전멸

한국에서는 후나사카 히로시에 대하여 "할힌골 전투에 참전하여 단신으로 소련군 30여 명을 군도로 쓰러뜨렸고, 이 사건에 육군과 대립관계이던 해군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마저 그를 높이 평가했다." 라는 이야기가 퍼져 소드 마스터등의 별명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이 일화는 본 문서의 r2 버전에서 처음 작성된 출처없는 내용으로, 정작 본인의 자서전과 일본에서는 이에 대한 아무런 언급도 없다.

후나사카 히로시는 1941년에 3월에 군복무를 시작했다고 자서전에서 밝혔으며, 본 문서에 할힌골 전투에 대한 일화가 작성될 때에도 그렇게 기재되어 있었으나 할힌골 전투1939년 5월과 7월에 발발했고, 그가 복무한 59연대는 할힌골 전투에 참전한 적도 없었다.

게다가 후나사카 히로시 본인은 자서전인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에서 미군의 공습을 받은 코로르 섬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그 참사를 보고 처음으로 전쟁을 직접 느껴, 등골에 냉기가 흐르는 것을 느꼈다.

라고 진술했다. 그리고 본 문서의 r6버전에서 처음 작성된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 후나사카 히로시에 대해 하였다는 발언인

총으로 쏘고 두들겨 패도 물에 빠져도 죽지 않는다니...육군에 그런 인재가 있단 말인가?

- 야마모토 이소로쿠, 할힌골 전투에서의 행적을 듣고 놀라며

라는 부분은 할힌골 전투에서의 일화와 함께 일본에서도 전혀 언급되지 않는 부분으로, 딱 한 군데에서 이 글의 원문으로 추정되는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의 발언이 나오는데, 바로 일본어판 언사이클로피디아위키의 후나사카 히로시 항목이다.[9]

해당 항목에서는 후나사카 히로시를 "일본군미군에 대항하여 비밀리에 개발한 인조인간 초인 병기"라며 그를 터미네이터마냥 표현하고 그의 친구인 크렌쇼 상병은 "히로시의 작전을 항상 어딘가에서 나타나 방해하므로 텔레포트 능력을 가진 것으로 추정됨"이라고 기술한데다,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의 미시마 유키오가 쓴 서문도 아주 괴악하게 비틀어 놓은 만큼 사실성이라곤 조금도 없지만, 굳이 이 발언을 후나사카 히로시의 앙가우르 전투에서의 전적을 생각해서 진지하게 생각해도 말이 안되는 것이, 앙가우르 전투는 1944년 9월 17일에 발발했고,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은 1년도 더 전인 1943년 4월 18일에 사망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후나사카 히로시가 대단한 전공을 올렸으며 검도 유단자인 것까지는 사실이나 할힌골 전투와 관련된 일화는 모두 한국에서만 퍼져 있는 잘못된 정보로 아직까지도 이러한 내용이 적힌 글들을 인터넷 곳곳에서 찾을수 있으니[10] 이를 사실로 오해하지 않기를 바란다.

8.2 포로 참수 저지와 100인 참수 경쟁 비난

할힌골 전투 이외의 내용으로 후나사카 히로시가 포로를 무단으로 학살하려는 부하들을 아이키도로 제압하고 목관절을 꺾어버렸다거나, 100인 참수 경쟁의 주범들인 무카이 토시아키(向井敏明) 소위와 노다 츠요시(野田毅)를 맹비난했다고 하는 이야기가 있으나 이 역시 각각 본 문서의 r2 버전r38 버전에서 처음 작성된 출처가 불분명한 내용이며, 이 주장을 뒷받침 해주는 그 어떤 증거도 찾을 수 없다.

8.3 단신으로 전차 무력화

해당 내용이 포함된 이미지가 있는 링크

리그베다 위키나 나무위키에서 작성된 것은 아니지만 '맨손달인 vs 무기'라는 이름으로 최배달, 비슈누 쉬레스타 등을 열거하다 맨 마지막에서 후나사카 히로시가 단신으로 미군 전차안으로 들어가 전차 승무원들을 도륙하여 전차를 무력화 시켰다는 내용이 적힌 이미지가 떠돌곤 하는데, 당연히 출처조차도 없으며 거짓인 할힌골 전투의 일화를 적어둔 등, 언사이클로피디아의 정보 보다도 못한 거짓 정보다.

해당 내용은 '기관총 사수의 목을 비틀어 죽였다.'라 설명한 것으로 볼 때 후나사카 히로시가 포로를 무단으로 학살하려는 부하들을 아이키도로 제압하고 목관절을 꺾어버렸다는 거짓 정보를 토대로 작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9 참고문헌

  • 《영령의 절규, 옥쇄의 섬 앙가우르전기》(《英霊の絶叫 - 玉砕島アンガウル戦記》)
  1. 일본군에게 이런 호칭이 붙는 것에 의아한 위키러도 있겠지만 일단 뒤를 읽어보면 수긍할 것이다.
  2. 훗날 치치시마섬 식인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곳이다.
  3. 자서전에선 이렇게 서술되어 있지만 앙가우르 섬은 코로르 섬의 남서쪽에 위치하며 거리도 직선으로 59km가 조금 넘는다. 일개 병사가 작전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극히 미미했을 것이므로 체감거리를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4. 펠렐리우의 일본식 표기이다.
  5. 이때의 인연으로 훗날 후나사카는 텍사스 주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았다.
  6. 여담이지만 이 서문에 따르면 후나사카는 자신이 경영하는 서점에서 일하는 젊은 사람들에게까지 검도를 권유하고 다녔다고 한다.
  7. 태평양 전쟁 전반에 걸친 희생자가 아닌 일본군 전몰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8. 이들은 쿠데타를 일으켜서 주전파 수백 명을 죽일 것을 도모했는데 그 죽여야 할 주전파 목록에는 일본군/인물 항목에서 인간말종으로 분류된 자들이 거의 다 들어있었다.
  9. 여기에서도 할힌골 전투와 관련된 이야기는 없다.
  10. 나무위키의 몇몇 문서들도 포함된다. 혹시나 발견하거든 수정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