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리 필리프 페탱

레몽 푸앵카레 정권의 삼원수
앙리 페탱페르디낭 포슈조제프 조프르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베르됭 전투의 영웅

조프르, 포슈와 함께 1차대전 종전시 단 3명뿐이었던 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그러나 나치에 무력하게 굴복함으로 역사에 그 오명을 남긴 인물이기도 하다.[1]

파일:Attachment/앙리 필리프 페탱/petain of 1926.jpg
1차대전기의 페탱 원수 리즈시절
이름앙리 필리프 베노니 오메르 조제프 페탱
(Henri Philippe Benoni Omer Joseph Pétain)
생몰년도1856년 4월 24일 ~ 1951년 7월 23일 (95세)
계급프랑스군 원수(Maréchal de France)
직위비시 프랑스 국가수반1940년 6월 11일 ~ 1944년 9월 19일
프랑스 제119대 총리[2]1940년 6월 16일 ~ 1940년 7월 11일
프랑스 국방장관1934년 2월 9일 ~ 1934년 11월 8일
프랑스 국무성장관1935년 6월 1일 ~ 1935년 6월 7일

1 생애 초기

1856년 4월, 파드칼레 지방의 작은 농촌 마을의 자영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큰할아버지가 나폴레옹 전쟁 당시 이탈리아 전역에 종군하였고, 그의 아버지와 삼촌이 이 무용담을 열심히 아들에게 전파하여, 페탱은 어릴 적부터 군대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자라났다. 여기에다가 그가 자라나던 무렵 터진 1870~71년의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의 참패와 그로 인한 제2제정의 붕괴, 독일에 대한 전국가적인 굴욕감까지 더해지면서 페탱은 인생의 진로를 군대로 결정, 1876년 생시르 육군사관학교에 입교하고, 1887년에는 우수성을 인정받아 군사 부분의 그랑제콜에 진학할 수 있었다.

페탱은 이 과정에서 프랑스군 특유의 똘기충만한 무조건적인 공격교리 엘랑비탈을 거부하고 화력제일주의를 설파했으나, 이에 대한 프랑스군 주류의 반발로 꽃을 피우진 못했다. 이런 이유로 프랑스군을 비롯하여, 당시 유럽 제국주의 열강 군대의 출세 루트라는 식민지 파견근무 기간은 매우 짧았다.[3] 덕분에 1890년에야 대위 진급했고, 1900년에야 소령 계급을 달았다. 이후 대령까지 진급하긴 했지만 사실상 인생의 끝자락이나 다름 없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발발 직전에는 퇴역 이후 노후를 보낼 준비를 군 생활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이 시기에 주목할만한 점이 있다면, 1911년 그가 33보병 연대장이었을 때 연대에 소속된 젊은 장교 중에 샤를 드 골이 있었다는 것이다.

2 제1차 세계대전

한창 퇴역을 준비 중이던 1914년 여름,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페탱은 전장으로 내몰린다. 개전 초, 프랑스군이 이곳저곳서 신나게 죽을 쑤며 독일군에게 신나게 털리는 동안 페탱은 무의미한 보병 닥공 중심의 엘랑비탕을 거부하고, 효율적인 지휘를 하며 최소한의 피해로 독일군의 진격을 여러번 저지하였다. 이 공으로 개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준장으로 진급하여 장군이 되었고, 제1차 마른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후 또 다시 승진하여 군단장으로서 1915년 전역에 참가했고, 1916년이면 제2군 사령관까지 진급하였다. 그리고 1916년 독일군에 의해 개시된 대규모 공세인 베르됭 전투에서 마침내 전면에 등장한다.

페탱은 베르됭에 부임하자마자 아군의 보급로를 열고 동시에 포대 위치를 재조정하여 독일군에 최대한의 타격을 주기 시작했다. 그리고 성공적인 방어로 독일군의 거센 공격을 막아내고 지연시켰으며, 오히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대적으로 반격을 가하는 적극적 방어로 나서서 독일군에 빼앗긴 고지 및 요새를 하나씩 되찾으며 독일군에게도 막대한 출혈을 강요하여 궁극적으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내며 전 프랑스의 영웅으로 떠올랐다.

여담이지만 베르됭 전투에서 바로 그 샤를 드 골 중위가 참전했다 포로로 잡힌다.[4]

이 공훈으로 마침내 1917년에는 육군 참모총장이 되어 전쟁을 지휘했다. 비록 전임자인 니벨 대장이 1917년 춘계 공세를 말아먹고 막대한 인명피해를 내어 경질되고 그 후임이 된 거긴 하지만 개전시 퇴역을 준비하던 말년 대령이 전 프랑스군의 총지휘를 맡게 된 것이다.

당시 페탱은 내외부 양쪽으로 적을 두고 있었다. 외부의 적은 당연히 독일군이었고, 내부의 적은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프랑스군 병사들의 한계에 다다른 분노였다. 실제로 서부전선 곳곳에서 프랑스군은 집단항명과 탈영, 폭동에 시달리고 있었다.

페탱은 이런 항명 및 폭동을 엄벌로 다스리면서도 엄벌만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라고 정확히 인지했다. 그리고 불만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전선의 사병들에게 좀 더 많은 휴가일수를 약속하고 실제 이를 보장하였으며, 1917년 전선에서 추가적인 대규모 공세를 중단하여 병사들을 죽음의 공포에서 조금이나마 덜게 해주었다. 또 전선 전체를 방어전으로 재편하면서 투입부대들을 순환시키며 전선에 투입된 부대가 전선에서 빠진 다음 충분한 휴식을 취하게끔 해주었다. 이런 일련의 조치로 프랑스군은 병사들의 불만을 억누르면서 전열을 정비할 수 있었다.

이후 1918년 전역에는 포슈에게 총지휘권을 넘긴 후 제2차 마른 전투에서 다시 한 번 독일군을 저지했으며, 미군과 함께 대대적인 반격작전, 백일 전투에 나서 궁극적으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

이후 양측간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10일이 지난 1918년 11월 21일, 페탱은 영예로운 프랑스 원수가 되었다.

3 전간기

종전 직후인 1919년에는 전국민적인 인기를 등에 업고 대통령을 꿈꿨으나 이내 출마를 포기한다. 그러나 여전히 군부와 정계에 영향력이 강했기에 베르사유 조약이나 로카르노 조약 체결 등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군부의 여러 현실적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대표적으로 그는 전차와 항공기 전력의 증강을 강력 주장했고 독립된 군종으로서 공군을 창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페탱의 후원으로 30년대 초 프랑스에 독립 공군이 창설되었다. 전차 및 항공기 전력에 있어서도 20년대에는 예산이 부족하여 실행에 옮기진 못했지만 30년대에는 결국 실현되어 대대적 증강이 이루어졌다.[5] 그리고 훗날 있을지 모를 독일과의 전쟁에서 부족한 인구로 인한 병력 열세 및 1차대전의 전훈을 살려 강력한 요새지대를 구축하자는 제안에 적극 찬동, 마지노 선 건설에도 어느 정도 역할을 했다.

1925년에는 모로코 주둔군 사령관으로 잠시 있기도 하였고, 1934년에는 가스통 두메르그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1935년에는 뷔송 내각에서 내무장관을 역임했다. 그리고 1939년 3월, 스페인 내전이 끝난 스페인에 대사로 부임했는데, 이는 그의 제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새로운 집권자가 되었기에 내려진 인사였다.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직후 달라디에 총리로부터 전시내각 참여를 제안받았으나 나이를 이유로 거절했다.[6]

4 비시 프랑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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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광의 날에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있었습니다. 어려운 날에도, 저는 여러분 곁에 머물러 있습니다."

본격 프랑스의 원수에서 프랑스의 웬수

1940년 6월, 나치 독일의 전격적인 프랑스 침공으로 패전 직전에 몰린 폴 레노 총리는 수습을 위해 페탱을 급히 본국으로 소환한다. 프랑코의 만류를 뿌리치고[7] 귀국한 페탱은 드골 등 항전파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레노의 뒤를 이어 새 총리가 되고 독일에 항복한다.

이후 독일 군정지역이 된 파리 대신 비시를 수도로 하는 정부 비시 프랑스의 수반이 되어 독일과 휴전했다. 페탱은 평소의 보수적 신념을 바탕으로 패전은 나약한 좌파 탓이며 1차대전 이후 약해진 프랑스 사회와 국가를 복원시키고 다시 한 번 강력한 프랑스를 만들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사실상 피점령국의 지도자인 페탱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반파시스트 반독 저항세력을 적극적으로 탄압하였으며 달라디에 전 총리를 비롯한 주요 인사들이 북아프리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를 수립, 항전을 계속하려 하자 식민지 총독들에 명령하여 이를 체포, 본국으로 송환시키기도 했다. 달라디에가 체포되지 않았으면 드골의 런던 자유 프랑스 정부 대신 이들의 북아프리카 정권이 더 대표성이 있었을 것이다.

비시 프랑스 정부는 자유, 평등, 박애라는 프랑스 공화주의의 3대 표어를 가족, 노동, 조국이라는 파시스트의 3대 표어로 바꾸었다. 언론, 출판, 결사, 집회의 자유를 공식적으로 폐지했으며, 노동조합을 금지했다. 전쟁 전부터 활동했던 프랑스 파시스트들은 정부와 그 기관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파시스트 정당 당원들이 경찰과 정보기관원으로 채용되었으며 내각에 입각하기까지 했다. 독일의 요구로 유대인들을 넘겨주는 것 외에도 프랑스 파시스트 정당 당원들이 자의적으로 유대인들을 색출하여 독일에 넘겨주는 것을 묵인했다. 1940-1944년 동안 프랑스 언론의 반유대주의 선전 또한 당연히 묵인되었다. 반유대주의는 비시 프랑스 정부 구성원들 상당수의 신념이기도 했다. 즉, 페탱의 비시프랑스는 적극적인 대독 협력정책을 펼쳤던 것이다.

공식적으로 비시 프랑스의 관할 지역은 독일의 간섭과 수탈 없이 비시정부의 통제에 안정된 상태였다. 아 물론 공식적이고 말로만이다. 당연히 수탈은 있었다. 그리고 독일군의 협조 문서가 들어오면 페탱이 거기에 사인하고 그 문서에 의해 독일군이 물자를 협조받아 넘겼다.

이는 페탱의 신념과 가치관이 파시스트에 친화적이었음과 동시에, 히틀러와 나치를 절대악으로 보지 않고 그냥 강성한 이웃국가 정도로 인식했음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렇게 페탱은 친독 파시스트 독재자가 되었다. 패전의 책임을 3공화국 시기 좌파 정치인들에게 모조리 돌리는 정치 재판을 하기도 하였다. 그나마 비시 프랑스의 통제권은 1942년이 되면서 독일군이 휴전협정을 무시하고 비시 프랑스 영내로 진입하면서 끝나버렸고, 이후 비시 프랑스는 이름뿐인 정부가 되었다.

페탱은 연합군의 파리 탈환 이후 프랑스인 파시스트들과 비시 프랑스 정부의 일부 각료들과 함께 1944년 독일로 망명했다. 거기서 종전때까지 비시 프랑스 망명(?) 정부의 수반 노릇을 계속했다. 이후 종전과 함께 프랑스의 국가 반역자로서 체포되었다.

5 최후

"나의 삶은 중요하지 않다. 내 삶은 이미 프랑스에 봉헌된 것이었다. 만약 여러분이 나를 단죄하려 한다면, 나를 그 단죄의 마지막이 되게 해달라. 그러나 나는 세계를 향해 말하려 한다. 여러분은 정의의 이름으로 죄없는 사람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라고. 판결 후에는 하느님과 후손들의 심판이 올 것이다. 나는 프랑스를 믿는다."

-페탱의 변론. 페탱은 재판이 시작되던 날에 처음으로 이렇게 말한뒤, 아무런 변호를 하지 않았다.

"오늘, 이 재판정에 서있는 피고는 오랫동안 가장 다양한 국민감정을 촉발시킨 장본인이다. 여러분들이 잘 기억하듯, 그는 정열적인 찬미와 국민적인 사랑을, 다른 한편 이에 반해서 극단적 증오와 적대감을 동시에 불러 일으켰다. 여기서 우리가 피고를 재판한 뒤, 후일 어느날 역사가 다시 이 재판부를 심판할 것이며 또한 재판의 과정에 따라서 이 재판의 분위기 역시 평가된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몽지보 재판장

1944년까지만 해도 페탱의 인기는 굳건했다. 사람들은 드골을 프랑스 바깥의 '창의 영웅', 페탱은 프랑스 안의 '방패의 영웅'이라 부르면서 두사람의 합작이 프랑스를 나치의 손아귀에서 구했다고 보고 있었다. 하지만 무장투쟁을 주도했던 레지스탕스와 공산당이 권세를 잡고 드골과 그 수하들이 그들과 결탁하면서 페탱은 희생양으로 지목되었고 분위기는 반전되어 순식간에 죽일놈으로 둔갑했다.

프랑스에서 페탱의 재판은 전후처리에서 가장 큰 골칫거리였다. 페탱에게 무죄판결을 내리면 나치협력자 청산의 열기가 식을수 있다는 것, 또 아직 페탱파가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결코 받아들일 수 없었다. 반면, 사형선고를 내릴 경우 페탱에 대한 동정여론이 강해져 역시 나치청산이 흐지부지될 것이라는 건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드골은 페탱에게 스위스로의 망명을 권유하지만 페탱은 이를 거부하고 프랑스로 출두한다. [8]

페탱은 프랑스에 돌아온 뒤, 큰 충격을 받았다. 그를 호송하는 헌병 중 그 누구도 그에게 경례하지 않았다. 페탱은 마리 피에르 쾨니그(Marie-Pierre Koenig) 장군[9]에게 악수하기 위해 손을 내밀었으나, 거절당했다. 그는 파리로 돌아오는 도중, 2천여명의 시위대를 만났고 그들은 페탱을 사형시키라고 외치며 그가 탄 객차에 돌팔매를 던졌다. 페탱은 파리교외 몽루주의 감옥에 구속 수감되었으며, 그의 재판이 열리기 까지 3달동안 감옥에 갇혀 있었다.이미 89세의 노인이었던 그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지쳐있는 상태로 재판장에 들어섰다.재판에서 페탱의 변호인들은 페탱을 필사적으로 변호하였으나, 비시 프랑스의 수반까지 맡았던 그에게 무죄 판결이 나올리 없었다. 국민들은 독일에 협력한 페탱을 용서하지 않았고[10], 무엇보다 드골 등 자유프랑스 지도자들에게 있어 페탱은 반역자인 동시에 3공화국을 굴욕적으로 승계한 괴뢰정부의 지도자였기에 그 정통성을 무너트려야 할 필요성도 있었다. [11] 결국 법정은 그에게 사형을 언고하였다.[12][13] 그러나 이에 대해서 페탱 역시 할 말은 없는 것이 그 역시 1940년에 정권을 잡고서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재판을 통해 이전 정권의 주요 각료들에게 패전 책임을 씌워 역시 정치적인 재판을 통해 탄압한 전과가 있기 때문이다.

다만 드골이 과거의 상관에 대한 연민의 정이자 베르됭의 영웅에 대한 예우로서 사형만은 피하게 해주자고 하여[14] 종신형으로 감형했고, 프랑스 대서양 연안의 일드외 섬의 감옥에 갇혔고 1951년 죽었다.

6 여담

패탱은 오늘날에도 프랑스에서 있어서도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한다. 페탱이 세상을 떠난 뒤 우익과 극우익을 중심으로 추모하는 모임이 결성되었으며 그에 대한 재심이 여러 번 청구된 적도 있다. 드골도 그의 무덤에 헌화를 한 적이 있긴 하다.

페탱과 그의 재판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 분들은 박원순이 쓴 책인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앙리 루소의 <비시 신드롬>, 주섭일의 < 프랑스의 나치협력자 청산>, 존 레프런드의 <나는 죄 없이 죽는다>[15]를 참고하시길 바란다.
  1. 단 피에르 라발 같은 악질적인 민족 반역자는 아니었기에 지금도 평가가 꽤나 엇갈린다.
  2. 항복 이후인 7월 10일, 프랑스 상하 양원은 내각에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하는 총투표를 실시, 찬성 569표, 반대 80표로 압도적 지지로 내각, 정확히는 내각 수반인 페탱 총리에게 헌법개정의 전권을 부여한다. 현재 프랑스에서는 이 헌법개정권을 불법으로 규정, 페탱의 합법적 총리 임기를 헌법이 개정되는 7월 11일까지로 국한하고 그 이후를 불법내각으로 규정하고 있다.
  3. 식민지 파견근무가 출세 루트인 이유는 두말할 것도 없이 전공을 세울 기회이기 때문이다. 소규모이긴 해도 식민지에서는 늘 독립주의 세력들과 교전이 발생했고, 특별한 연줄이 없는 장교들에겐 이것이 곧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반면 유럽대륙에선 크림전쟁 이후 제1차 세계대전 직전까지 열강간 군사충돌이 전무했다. 이런 식으로 고속출세한 대표적 케이스가 페탱의 제자이기도 한 스페인프란시스코 프랑코다.
  4. 워낙 대규모 전투라 프랑스군이나 독일군 쪽에서 이 전투에 참가한 인물 중 훗날 유명한 사람이 많다. 대표적으로 역시 중위였던 독일군의 프리드리히 파울루스가 있다.
  5. 의외인 사실이지만 프랑스군은 1940년 프랑스 침공 당시 기갑 및 항공전력이 독일군에 비해 부족하지 않았다. 다만 공군은 신형기가 부족했고 각개격파당했으며, 전차는 하나같이 둔중하였으며 무전기가 없는 경우도 많았고, 무엇보다 분산 배치되어 있었다. 결국 프랑스군은 충분한 전력을 확보하고도 이를 보병 화력 지원에 국한시키는 우를 범한건데, 페탱 본인도 애시당초 충분한 화력을 제공한다는 원칙으로 전차와 항공기 전력 증강을 지원했던 것이니 페탱도 책임을 면할 수는 없다.
  6. 다만 달라디에 총리의 내각이 좌파연합 내각이어서 우파였던 페탱이 이에 반감을 가져 불참했다는 의견도 있다.
  7. 프랑코는 "장군님, 가지 마세요. 저 자들은 자신의 실책을 모두 당신에게 떠넘길 작정입니다. 여기에 계세요. 가시면 안됩니다."라고 간곡히 만류했지만, 페탱은 "알고 있습니다, 장군. 하지만 이것이 제가 조국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입니다."라 대답하고 돌아온다.
  8. 훗날 드골은 회고록에서 페탱은 용감한 결정을 내렸다고 평가했다.
  9. 쾨니그는 제 2차 세계대전 때 샤를 드골 장군이 이끄는 자유 프랑스군에서 활약했던 주요 지휘관 중의 한 사람이다. 제 1차 세계대전 때와 전후에 북아프리카에서 군 복무를 마친 뒤, 제 2차 세계대전 초 노르웨이와 프랑스 전선에 참가했으며 1940년 6월 영국으로 철수한 그는 드골 운동에 가담해 자유-프랑스군에서 계속 진급했으며, 1940년 가봉 점령과 1942년 북아프리카에서 독일에 맞서 비르하케임을 방어하여 유명해졌다. 그뒤 프랑스가 아이젠하워 장군 사령부에 파견한 보조 군대 참모장이 되었으며, 1944년 6월에는 점령된 프랑스의 반(反)독일 게릴라 부대인 프랑스 국내군 총사령관이 되었다.전쟁 말기 독일에 있는 프랑스 군대를 지휘하던 쾨니그는 1949년 북아프리카 검열관이 되었으며, 1950년에는 전시비상의회의 부의장이 되었다. 곧 은퇴해 국민의회에서 드골파 대표로 뽑혔고, 1954~55년의 짧은 기간 국방장관으로 재직했다.
  10. 정확히 말하자면, 전쟁 직후와 이후의 분위기가 달랐다. 파리 해방 직후인 1944년 9월엔 페탱이 사형이나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은 3%, 무죄거나 재판 자체가 부당하다고 응답한 이가 58%였으나 1945년 8월엔 사형 혹은 종신형을 받아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37%에, 무죄를 주장한 사람은 17%에 불과했다. 이는 전쟁 직후 나치협력자 청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11. 그렇기에 재판은 상당히 불공정하게 이루어졌다. 변호인들은 자료를 모집할 시간도 얼마 주어지지 않아 밤을 새며 자료를 모았다. 거기다가 페탱에게 유리한 증언을 끊는다든지, 증인에 대한 질문을 불공평하게 배정한다든지 하는 일을 했다. 또한 처벌에 대한 투표를 오직 즉각적인 사형에 대한 찬반투표만 시행했다. 몇몇 배심원들은 사형선고에는 동의하지만 그 집행시기는 따로 논의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거부당했다. 이에 대해 페트뤼스 포레라는 배심원은 정당성이 의심스러운 정치재판의 전형이라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하였다.
  12. 몽지보 재판장은 5년형을 제안했으나, 레지스탕스로 구성된 배심원단이 이를 거절한다. 그리고 사형 표결 결과 13대 14로 사형선고가 확정되었다.
  13. 판사조차도 사형을 언도하면서 "이 형이 집행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끝을 맺었다.
  14. 또한 앞서 언급했듯이, 페탱에게 사형을 내리는 것은 드골로서도 정치적인 위험을 무릅쓰는 일이었다.
  15. 여담으로 책제목이 정말 선정적으로 번역된 경우다. 원제는 정치적 재판의 역사인데 한국에 들어오면서 나는 죄 없이 죽는다가 되었는데 여기에 소개되는 사람들이 나치 전범들, 일본 제국 전범들(...).(루이 16세, 찰스 1세, 에리히 호네커, 슬로브단 밀로세비치를 비롯하여 다른 케이스도 많다.) 이 책도 전범들 변호가 아닌 전범들을 다루던 재판 과정의 부당함을 지적하는 법률적인 문제인데 제목 한번 예술적으로 번역한 셈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