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마구치구미


야마구치구미의 문장

1 역사

1.1 초대 ~ 3대 다오카 카즈오 시대까지

야마구치구미(山口組, 산구조[1])는 1915년 고베[2]의 항만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구미쵸(두목)인 야마구치 하루키치가 오오시마구미 산하 조직으로 결성하였다. 고베중앙도매시장 개설 당시 이권문제로 오오시마구미와 대립해 격한 항쟁을 치룬후 독점권을 손에 쥐고 1932년 독립한다.

전후 등장한 야쿠자의 교과서격인 조직으로 오늘날 야쿠자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구축해놓았으며 규모나 수입이 가장 큰 조직이다. 일본 전체의 야쿠자조직을 통틀어봐도 2위와 3위 규모의 조직을 합쳐야 야마구치 구미만큼의 조직원 수가 나올 정도가 된다. 일본 전국 3분의 2가량의 현에 산하조직들이 위치해있는지라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영향력을 자랑한다. 2014년 포춘지에서 야마구치구미가 한해동안 마약판매 도박 등의 비합법적인 사업으로 66억 달러의 총수익을 올린다고 보도했다. 이는 전세계 범죄 조직 중 2번째 규모에 해당한다.

전후 고전적인 바쿠토 체제를 벗어나 본격적인 조직적인 야쿠자 체제를 구축한 야마구치구미는 미군정하의 단 5년사이에 오사카 지역 대부분을 차지할정도로 빠른 성장을 보였다. 특히 이 야마구치구미의 중흥을 이끈 것이 바로 야마구치구미의 제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다.

다오카 카즈오는 1913년 시코쿠에서 태어나 고아가 된 이후 고베에서 항만 노동자로 일했는데 14세에 제2대 구미쵸인 야마구치 노보루가 있던 야마구치구미에 입단한 이래 곰같은 덩치로 싸움에서 상대의 눈알을 손가락으로 끄집어 낼 정도로 잔혹한 모습을 보여서 조직에서 곰이라는 별명을 받으면서 그 입지를 다졌다. 1936년에 반대파 단원을 찔러 죽인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전쟁기간 중 절반을 옥중에서 보냈는데 43년 석방된 시점에서 야마구치구미는 야마구치 노보루의 죽음과 일본 경찰의 엄격한 단속으로 상당히 그 규모가 줄어있었다.

이에 따라 그 잔인한 명성으로 25명 규모의 작은 조직의 구미쵸가 된 다오카 카즈오는 이전의 야쿠자들과는 다르게 기존사업에 기업체제를 적용해 세력확장을 시작했다. 특히 1940년대 말 고베 지역에서 가장 큰 바쿠토계 조직인 혼다카이[3]와 전략동맹을 맺었다가 이를 계기로 한신 지역에 영향력을 넓힌 이래 오사카 미나미 지역에서 큰 세력을 형성하고있던 한국계 구렌타이 메이유카이 또한 흡수하는 데에 성공, 사실상 전후 얼마 안 가 오사카지역 전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형성하는 데에 성공한다.

이후 다오카는 기존의 항만하역, 창고업과 마약판매 경마 경륜 야구도박 도박장개설 등의 바쿠토 사업을 넘어 조직의 사업을 다각화하기 시작하는데 특히 흥행업인 홈런 히트 퍼레이드라는 예인단을 조직해 전국 일주를 돌리며 노하우를 쌓아 고베예능사를 발족. 당대 최고 인기의 소속 연예인들을 무기로 메이져 방송국에도 압도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며 엄청난 매출을 올렸다. 노무자 중개업을 바탕으로 화물 회사에 대한 재정적 관여를 통해 60년대 중반에는 고베 부두 하역량 전체의 80%를 지배하게된다. 참고로 이 시기 한해 동안 야마구치구미가 화물사업과 관련해서 벌어들인 액수만해도 약 60억엔으로 추정하고 있다.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세력 확장 속도를 가속화하기 시작하는데 소위 야마구치구미의 전국 정벌이라 불리는 세력 확장을 시도, 이때 메이유카이와의 항쟁 후 2차단체로는 승격됐지만 오사카에서 제대로 된 세력권을 확보하지 못한 재일교포 야쿠자인 양원석의 야나가와구미에게 타지역 진출을 허용하였고 이에 한록춘의 잇신카이 등이 합세하여 활약해 야마구치구미는 전국구 조직으로 발돋음 하게 되었다. 65년 기준 야마구치구미는 산하 424개 구미, 9,450명의 인수를 자랑하기에 이른다. 이 시기부터 시작된 야마구치구미의 전성기는 조직의 연간 매상이 100억엔이 넘었으며 도박, 고리대금업, 스포츠 및 흥행업에 이르기까지 약 5,000개 이상의 기업에 영향력을 미치며 이중 5억엔가량을 경찰에 상납하는 등 엄청난 수준을 자랑했다. 야마구치구미의 힘이 어느정도 감소한 시기의 기록이지만 84년 마이니치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야마구치구미 한 간부가 밝힌 바에 따르면 야마구치 조직원들의 벌이는 말단 꼬붕들의 평균 연수입이 330만엔정도이고, 클럽지배인급이면 약 1,000만엔, 중간급 두목이면 연간 3,000만엔정도를, 대부급이면 1억엔정도를 챙겼다고 한다.

정재계와 결탁하여 뒷세계에서 일본을 좌지우지하는 흑막같은 이미지로 그려지는 야쿠자 역시 야마구치구미로부터 비롯되었는데 리즈시절의 야마구치구미를 이끌던 3대 구미쵸 다오카 카즈오는 표면적으로 항만용역추진협회를 통해 현직 교통상이었던 고노 이치로의 정치적 후원을 받았으며 항만노조를 부두에서 잔혹한 폭력으로 몰아냄에 따라 정치적으로도 탄탄한 입지를 다졌기 때문이다.

특히 야마구치구미가 전성기를 달린 60년대는 안보투쟁의 영향으로 극우조직의 득세가 심각했고 야마구치구미는 이들과 적극적으로 협력해서 정치적으로 강력한 지지를 얻어냈다. 이 시기의 협력경향의 중심에는 1960년대 초 회원 15만명규모의 극우조직 전애회의에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다나카 세이겐이 있었다. 다오카 자신은 고다마 요시오와 어느정도 협력은 하고있었지만 한편으로는 고다마의 정치적 라이벌인 다나카 세이겐과도 적극적으로 교류하면서 친우관계를 유지해왔다.

이런 야마구치구미가 위기를 맞은건 1978년 벨 아미 나이트클럽에서 벌어진 다오카 암살시도 사건으로부터였다. 관서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야마구치구미였지만 여전히 그에 반하는 조직 또한 존재했는데 75년 3대 야마구치구미 산하의 사사키구미와의 싸움에서 오야붕을 잃은 마츠다구미 산하 대일본정의단 소속 조직원 나루미 키요시는 대범하게도 야마구치구미의 영역 한복판인 교토에서 권총으로 암살을 시도한다. 이 암살시도에서 다오카 카즈오는 목을 스치는 총상을 입으며 간신히 살아남지만 그 충격으로 몇달간 두문불출하게 되면서 그 카리스마에대한 조직 내 의심이 짙어진 것이다.

여담으로 암살을 시도한 나루미 기요시는 얼마안가 고베 근교 롯코산에서 검테이프에 둘둘말려 10일 정도 부패된 채로 발견된다. 사체는 손,발톱이 거의다 뽑혀 있었고 양손 지문이 사라져 있는 등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연일 지속되던 더운 날씨에 얼굴이 백골화 되는 등 부패도 상당히 진행되어 알아보기조차도 힘들었는데 적외선조사로 등짝의 흐릿한 선녀문신을 찾아내고 그가 소년원 시절 성기에 박아넣었다는 2개의 진주는 무사하여 사체의 주인을 그로 확정할 수 있었다.

특히 이 시기에는 너무 커진 야마구치구미에 대한 경찰의 수사망이 강화되고 야마구치구미 내부의 장년층과 청년층의 대립이 심화되면서 조직의 정책에 반대하는 하부 구미의 구미쵸들이 23명이나 경찰에 잡혀가는 등 내외부적으로 위기가 심화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이른바 경찰관 1,100여명이 동원된 80일 전투라고 불리는 전후사상 최대규모의 소탕작전이 시작되었고 그 결과로 단 2달만에 간부 518명, 조직원 2,000명이 구속되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병보석 중이던 다오카의 오른팔이자 조직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마저 구속된다.

결국 연속으로 발생한 위기를 수습하기 위해 다오카 카즈오는 60명이 넘는 신문기자들을 자신의 호화자택에 불러 그 자리에서 조직이 대중과 경찰에 폐를 끼친 것에대해 사과하는 굴욕적인 기자회견을 가지게된다. 이 기자회견 이후 완전히 은거에 들어간 다오카 카즈오는 건강이 극도로 악화되기 시작했으며 이후 81년 심장마비로 사망하게 된다.

다오카 사후 야마구치구미는 경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약 3개월의 준비끝에 커다란 영결식을 거행하게 되고 이를 경고하는 의미로 일본 경찰은 전국적으로 구성권 900여명을 구속하는 대대적인 진압을 시도하지만 결과적으로 다오카의 영결식에는 200개 조직 1,300여명의 야쿠자 조직원이 모인다. 이 영결식은 고베의 가장 명성높은 변호사들 사무실 한복판에서 대담하게 이루어졌으며 고다마 요시오를 위시한 극우 조직의 추종자들과 정치인, 타바타 요시오나 다카쿠라 켄을 포함한 일본 흥행업계의 스타들도 대거 참석했다.

다오카는 죽기 전 잔인한 성격의 2인자 야마모토 켄이치를 후계자로 지명했다고 전해지는데 앞서의 기자회견 이후 투옥되어 있었던 겐이치는 공식적인 취임이 어려웠고 이에 따라 상주로는 다오카의 아내였던 다오카 후미코가 담당하였다. 이 장면은 남성 일색의 야쿠자 세계에서 상주라는 핵심적 역할을 여성인 후미코가 담당하게 됨에 따라 큰 충격을 가져다 주었는데, 비록 야마모토 켄이치의 출소하기 전까지의 임시직이었다고는 하나 상당한 반향이 있었다. 물론 이 시기까지 여자 구미쵸들이 아예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나 12,000여명이 넘는 유례없는 대규모 조직에서 여성이 핵심적인 역할을 차지했다는 건 당시의 가부장적인 분위기에서는 상당히 이례적인 일이기도했다.

이후 82년 야마모토 켄이치가 출소하게 됨에 따라 다오카의 자리는 야마모토에게 넘어가나 얼마 안 가 7개월만에 야마모토는 간경변증으로 사망, 결국 야마구치구미는 완전히 상당한 타격을 받게 된다.

야마구치구미는 이전의 전통적인 야쿠자 조직들과는 달리 사카즈키라는 의식을 바탕으로 수많은 조직들이 느슨하게 연결되는 구조로 조직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이는 야마구치구미가 급속도로 세력을 확장하는 근간이되기도했지만 다오카 카즈오라는 주도적 인물의 죽음 이후 이는 독이 되어 돌아온다.

1.2 4대 다케나카 마사히사 시대

다오카 카즈오의 사후 시점을 기준으로 야마구치구미는 구성원만 약 13,000여명에 공식 가입조직만 580여개, 일본 전체 47개 현 중 36개를 세력하에 두고 있었다. 다오카와 야마모토 사후 8명의 거대 조직의 두목들이 다오카 후미코와 함께 임시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고있었지만 최종적으로 다오카의 뒤를 잇는 구미쵸가 필요했고 최종적으로는 2명의 후보가 남게된다.

한 사람은 조직의 2인자였던 야마모토 켄이치의 라이벌이었으며 조직의 큐슈진출에 지대한 공적을 남긴 야마모토 히로시였고, 또 한 사람은 다오카 및 야마모토 켄이치와 가까운 위치에서 공격적인 카리스마를 자랑한 다케나카 마사히사였다. 당시 평가로는 야마모토 히로시는 인텔리 야쿠자였으며, 다케나카 마사히사는 공갈, 폭행을 서슴치않는 전형적인 야쿠자였다고한다.

결국 최종적으로 다오카의 후임은 104명의 하위조직의 두목들의 투표에 의해 결정되기로 하였으며 57대 19로 후미코의 지지를 받던 다케나카 마사히사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때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사태가 발생하는데 결국 경합에서 탈락한 야마모토 히로시가 다케나카의 부하가 되기를 거부하면서 그를 따르는 고위급 부두목 18명을 데리고 이치와카이를 결성한다. 이때 이치와카이가 데려간 조직원만해도 당시 야마구치구미의 조직원의 절반인 6,000여명에 달했다고 알려진다.

이후 이치와카이와 야마구치구미의 대립이 심화되었지만 야마구치구미는 썩어도 준치라고 돌아오는 모든 조직원들에게 사면령과 함께 퇴직수당을 제공하는 파격안을 제시함으로써 이치와카이의 조직원수를 3,000명 수준까지 줄이는데에 성공한다.

결국 이를 견디지 못한 이치와카이는 다케나카를 노리고 총을 쏴 최고위 두목 2명과 다케나카를 죽이는데에 성공하였으며 이후 전국적인 규모의 유혈참극이 벌어진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다케나카 사후 이 두 조직간에서만 단 1년만에 약 200회 이상의 무장총격사태가 발생했다고한다. 이 시기의 대립에서 야마구치구미는 인수에서는 압도했으나 정작 주도권을 잡지는 못했는데 이는 이치와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부터 이탈하는 과정에서 무기의 대부분을 가지고 나갔기때문이다. 이에 따라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를 이기기 위해 무기의 보급이 절실했는데 이를 위해 하와이 호놀룰루로부터 무기보급을 시도하게 된다.

그러나 이 시도는 결국 야마구치구미에게 있어서 오히려 항쟁에 소극적이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85년 9월 호놀롤루에서 미연방마약관리국이 다케나카의 동생이자 조직내 실권자인 다케나카 마사시와 조직의 재정담당자인 오다 히데오미를 체포한 것이다. 적발 당시 이들은 하와이의 마피아로부터 로켓 발사기 3문, 기관총 5정, 권총 100정을 구입하고 외국인 암살자 1명을 고용하려했으며 이와 동시에 당시 기준 133억엔이나 되는 24kg의 암페타민과 헤로인 5.5kg을 판매하려했다고한다. 결국 이 사건으로 야마구치구미는 이치와카이와 무한정 대립을 하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자중하는 방향으로 진로를 틀으며 밀수를 주도했던 타케나가구미는 조직 내 입지가 상당히 줄어들게된다. 타케나가 마사시가 프로레슬러 히로 사사키에게 공연료 4억엔의 마이클 잭슨의 일본 공연을 의뢰, 보증금으로 5천만엔을 관계 부동산업자에게 건넨다. 하와이에 건너가 마이클 잭슨 공연 기본계약서에 사인을 한 3일 후 사사키는 타케나가에게 호놀롤루에서 마피아에게 미육군 권총과 기관총을 구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건넨다. 일본으로 돌아온 타케나가는 항쟁에 쓰일 무기가 필요했던 차라 무기구입 보증금으로 4억엔을 송금 후 조직의 자금책이던 오다와 홍콩삼합회 미전성을 대동해 호놀롤루 마피아의 결성 25주년 파티에 참석하고 무기 거래를 완료하기 위해 호놀룰루로 날아갔으나 3명 모두 대기하고 있던 미연방마약관리국에 바로 검거된다. 사실 사사키는 미연방마약관리국 소속 조사원합법사기꾼이었으며 마이클잭슨 공연과 마피아, 무기 거래는 모두 미연방마약관리국이 꾸며낸 가공의 이야기즉 함정이었다.

그러나 항쟁이 장기화 된 결과 이치와카이에서는 홋카이도의 세이유카이가 야마구치구미로 돌아서고 산하 조직 구미쵸들이 대거 은퇴하며 조직을 해산 해 버리는 등 조직 약화를 버티지 못하고 이나가와카이의 이나가와 세이죠와 아이즈코테츠카이의 타카야마 토쿠타로(강외수)의 중재를 받아들이기로했다.

야마모토 히로시는 야마구치구미로 부터 목숨을 보전받는 조건으로 아이즈코테츠카이 타카야마(강외수)회장을 통해 야마구치구미 본부에 사죄와 항쟁종결의 뜻을 전하였다. 이에따라 이치와카이는 야마구치구미에 보호받게 되었고 이 항쟁에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야마켄 구미의 2대 조장 와타나베 요시노리가 5대 야마구치구미의 오야붕으로 추대된다.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마츠다구미와 야마구치구미간에 벌어진 오사카전쟁 에서 활약한 무투파로, 야마이치항쟁에선 이나가와카이를 움직여 중재를 성사시켜 조직내 영향력이 높아졌다. 하지만 이 화해 결정에 다케나카구미는 불복하였고 야마구치구미를 탈퇴해 기존 이치와카이에 대한 보복을 지속하였다. 야마모토 히로시와 이치와카이의 보호를 약속한 5대 야마구치구미는 타케나가구미를 향해 일방적으로 공격을 감행해 야마타케항쟁에 다시돌입하게 되는데 야마모토 히로시가 병사하는 1993년에 이르러서야 종결되게 된다.

결국 타오카 사후 야마이치항쟁과 야마타케항쟁은 조직 내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한 내부투쟁이었을 뿐이지만 이과정에서 야마구치구미와 이치와카이는 500억엔 정도를 날렸으며 항쟁의 여파로 민간인 희생자가 여럿 발생하는 등 사회안전에 대한 우려가 또 다시 전사회적으로 재기되 폭대법 제정의 계기가 된다. 이로 인해 폭력단원들의 경마, 경륜 등의 공공시설 입장금지와 마츠리에 노점 개설을 불가하는 등 이후 야쿠자 활동에 큰 지장을 초래하기 시작한다.

1.3 5대 와타나베 요시노리 시대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기존의 다오카같이 카리스마로 조직을 1인이 정점에서 통괄하는 체제에서 벗어나는 방향으로 조직의 쇄신을 도모하였는데, 내부적으로는 블록제를 도입, 야마구치구미가 활동하는 세력범위를 5개 블록으로 나누어 각 지역의 산하조직들의 상위 두목을 지정하고 이들에게 폭넓은 권한을 주었다. 이러한 체제혁신은 후계문제로 고생을 한 야마구치구미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지만 동시에 이후의 분열사태에도 영향을 미치게된다.

이렇게 쇄신을 거듭하던 5대 야마구치구미는 97년 타쿠미 마사루 암살사건을 겪으면서 또 한차례 홍역을 치르게된다. 타쿠미 마사루는 5대 야마구치구미의 와카가시라이자 조직의 주요 자금책으로써 실질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던 인물이었는데, 신고베오리엔탈호텔(현•ANA크라운프라자호텔고베)에서 산하 2차단체인 나카노카이의 히트맨들에게 사살되는 사건이 발생한것이다. 나카노카이와 아이즈코테츠카이가 교토에서 부동산 문제가 발단이되어 나카노카이의 카이쵸가 총격을 받는 등 과격한 항쟁이 거듭되던중 타쿠미가 나카노카이의 동의없이 아이츠코테츠카이와 일방적으로 화해시켜 이에 앙심을 품은 나카노카이가 타쿠미 포함 키시모토, 노가미 3명의 최고간부를 습격해 타쿠미 마사루가 총에 7발 맞고 사망한 사건. 타쿠미와 동석했던 키시모토와 노가미는 무사하였으나 근처 테이블에 있던 치과의사가 유탄에 중상을 입고 6일 후 사망했다.

이에 따라 야마구치구미는 사건의 당사자인 나카노카이를 절연하고 타쿠미구미를 중심으로 나카노카이의 간부 대부분을 습격해서 죽여버렸고, 그 결과 나카노카이는 주요 간부들을 대부분 잃고 2005년 해산하게된다.

이 후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2004년 갑작스럽게 집행부에 모든 전권을 위임한채 은거에 들어갔고 이듬해인 2005년에는 건강상의 문제를 이유로 돌연 은퇴를 선언한다. 그 과정에서 와타나베 요시노리는 타쿠미 사후 계속 공석으로 남아있던 와카가시라 직책에 츠카사 시노부(본명 시노다 켄이치)[4]를 임명했고 얼마안가 츠카사에게 구미쵸 자리마저 승계한다.

이 갑작스런 은퇴와 승계에 고도카이의 쿠테타 설도 제기되는데 와타나베는 구미쵸로 있는 동안 돈에 유난히 집착해 지방이권사업의 경우 조직산하의 지방조직이 아닌 자신의 영향권에 있는 업자에 수주를 주고, 부인이 운영하던 고급부띠크에 신상품 입점시 부하들에게 전화로 알리는등 실질적인 강매를 해 조직내 불만이 중첩되고 있었다. 그리고 츠카사가 타쿠미암살사건 배경에 대해 결정적인 증거를 쥐고 있었다고도 알려져있다. / 나카노카이는 5대 야마구치구미 직계가 되기 전까지 2대 야마켄구미 2차단체 였고 2대 야마켄구미 구미쵸는 와타나베 요시노리 였으므로 와타나베가 야마켄구미 샤테이카시라보좌 출신인 나카노 타로(나카노카이 카이쵸)를 이용해 조직운영의 실권을 쥐고있던 타쿠미의 암살을 부추기고 버렸다는 추정도 당시 5대 야마구치구미 내에서 거론되었다.

1.4 6대 시노다 켄이치 시대

6대째에 들어서면서 야마구치 구미의 블록체제는 더욱 강화되는데,[5] 1차단체인 야마구치구미본가를 중심으로 일본전국을 7개 블록[6]으로 나누고 각 블록의 장은 나고야의 고도카이를 중심으로 한 조직집행부에 의해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혁신 이후 야마구치 구미는 다시금 내홍을 겪기 시작했는데, 2008년 고토우구미 처분 문제에 연좌되어 7개의 조직의 구미쵸들이 절연 처분을 받는등 고도카이를 중심으로한 집행부에 반항하던 조직들이 숙청되었고, 이 사태 이후 고도카이에 눌려 더욱더 세가 약화되가던 칸사이계 조직들이 2015년부터 야마켄구미,타쿠미구미를 중심으로 뭉쳐 고도카이와의 갈등을 표면화 시켰다.

1997년 타쿠미 마사루의 죽음 이후 고도카이는 급격한 경제적 성장[7]을 하며 조직의 규모가 야마켄구미를 압도하기 시작하였는데, 6대 구미쵸로 츠카사 시노부가 취임한 이후 고도카이가 야마구치구미 중핵조직이 되며 조직내 중요 요직을 싹쓸이하였고 야마켄구미 산하에서 알짜 수익사업인 연예흥행사업을 관리하던 쿄쿠신렌고카이를 독립 직계로 승격시키는 등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하는 기존 사업들이 박살 나버린 관서계 조직들의 입장에서는 불만이 증폭될 수 밖에 없었다.

15년 8월부터 표면화되기 시작한 이러한 갈등은 9월에는 본격적으로 야마켄구미를 중심으로하는 13개 조직의 이탈로 이어졌고, 이렇게 이탈한 조직들과 이들에 신조직 하나가 합류해 총 14개조직이 연합해 고베야마구치구미가 새롭게 만들어졌다. 고베야마구치구미가 공식적으로 세워진 이후 야마구치구미본가는 곧장 이 사태를 주도한 야마켄구미와 타쿠미구미 및 이에 동조한 세력들을 절연-파문하였다. 현재 고베야마구치구미의 규모는 준구성원을 포함해 조직원수가 6,100여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과거 비슷한 사례였던 야마-이치 항쟁때 큰 규모의 전쟁과 사상자가 났던만큼 일본사회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으며, 실제로도 분열 이후 이들이 관계된 사건만 분열 이후 반년동안 20개도도부현에서 50건 가까이 발생하였다. 주로 서로의 조직 사무실에 총알이 날아든다던가, 차량으로 적대 사무소 건물을 돌진해 받아버린다던가 하는 폭력사태들이 발생하고있다. 이에 따라 일본 경찰은 고베야마구치구미를 지정폭력단으로 지정하고 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를 대립항쟁중폭력단으로 지정, 경계태세에 들어간 상황이다.

분열 이후 2015년 10월 6대야마구치구미 3차단체 카케노구미 구미원이 이적문제로 사살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고 같은달 6대야마구치구미 산하 쿠라모토구미 카와치 토시유키 구미쵸가 타살가능성이 보이는 자살을 했다. 그리고 11월에는 6대야마구치구미 산하 아이오우카이 히시다 타츠유키 구미쵸가 맞아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 외에는 특별한 사상자 없이 두 조직 다 암묵적인 휴전체제에 돌입한 양상이었다.

하지만 6대 야마구치구미에 비해 사업내용이 전통적인 깡패사업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고베야마구치구미는 자금동원력에서 6대 야마구치구미에 절대적 열세에 있어 항쟁이 장기화에 접어들수록 불리한 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결성초기부터 (엄청난 자산을 보유하고 있다고 알려져있는)박정호[8]의 나미카와카이와 결연을 시도하는 움직임을 노골적으로 보이고 있으나[9] 나미카와카이가 이번 분열사태에 중립적인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일각에선 야마구치구미 내 한국계 야쿠자와 부락민 출신 야쿠자의 대립이 표면화 된 것 이라는 분석이 대두되나 6대야마구치구미와 고베야마구치구미 모두 주요직책에 한국계가 포진해 있으므로 억측일 가능성이 높다. 그보단 고도카이를 위시로한 나고야계 조직들에 주요 사업을 상실한 기존의 파벌들이 돈벌이를 되찾기 위한 특히 야마켄구미가 쿄쿠신렌고카이로 부터 연예흥행사업을 타쿠미구미가 오하라구미로 부터 금융사업을 되찾기 위해 손잡고 고베야마구치구미를 결성을 주도했다고 보는 추정이 더욱 유력하다. 역시 깡패는 돈이 의리

2016년 5월 하순 6대 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츠카사는 5대 이나가와카이 카이쵸 신병규 자택을 방문해 고베야마구치구미와의 화해 중재를 의뢰했는데 고베야마구치구미는 화해의 댓가로 츠카사의 총재 승격, 형무소에 수감중인 타카야마 키요시 와카가시라의 은퇴, 7대 구미쵸 자리를 공석으로 하는 대신 고베야마구치구미 이노우에 회장이 7대의 와카가시라로 취임하는 것을 요구했다고 알려졌다.

이렇게 경시청의 두조직에 대한 특별감시기간 동안 두조직은 화해를 향해 물밑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5월 31일 고베야마구치구미 산하 이케다구미[10]의 와카가시라 타카키 타다시가 6대야마구치구미 고도카이 산하 타카야마구미의 구미원[11]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고베야마구치구미는 즉각 보복을 금한다 는 공문을 산하 조직에 날렸으나 급속히 진행되던 화해 분위기는 없던 일이 되게 생겼다.

7월 27일 밤 중립을 지키던 나미카와카이 산하 무라카미잇가와 6대 야마구치구미 직계 이즈구미[12]산하 하라타구미의 조직원들끼리 후쿠오카 하카타의 번화가에서 싸움이 벌어졌다.

이후 이즈구미는 나미카와카이에 화해의 뜻을 전달했지만 나미카와카이는 화해의 댓가로 하라타구미 마츠모토 카츠히로 구미쵸의 한쪽 팔을 요구하며 이즈구미의 모든 제안을 거절. 후쿠오카하카타서는 화해의 가능성은 없고 항쟁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해 경계에 들어갔다.

2 일화

다오카 카즈오가 두목이던 시절에 연예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며 토에이 에서는 다오카 카즈오와 야마구치구미를 소재로 하여 <야마구치 3대> <삼대계승>, <제패> 등의 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야마구치 3대> 와 <3대 계승> 에서는 타카쿠라 켄 이 다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고, <제패> 에서는 미후네 토시로가 다오카 카즈오를 연기하였다. 1989년에 제작된 TBS 드라마 <미소라 히바리 이야기>[13] 에서는 기타노 다케시가 다오카 카즈오를 연기 하였다.

다오카 카즈오는 <삼대계승> 촬영 당시 직접 촬영 현장을 방문하여 타카쿠라 켄을 격려하기도 하였다. 다오카 카즈오와 타카쿠라 켄은 영화가 제작 되기 전에도 이미 친분이 있었는데, 타카쿠라 켄의 결혼식에도 다오카 카즈오가 초대되어 참석했을 정도 였다. 타카쿠라 켄은 야쿠자 영화로 톱스타가 되기 전에 미소라 히바리의 상대역으로 유명했는데,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이 다오카 카즈오 였기 때문에 서로 안면이 있었고, 친분이 있었다.

<야마구치 3대>와 <삼대계승>은 당시 기자들이나 비평가들에게는 야쿠자를 미화[14]한다고 욕을 바가지로 먹은 작품이지만 의리없는 전쟁에 웃도는 관객을 동원하며 흥행에 상당히 크게 성공했는데, <삼대계승> 이후 더 이상의 속편이 나오지 않은 이유가 야쿠자를 미화한다고 계속 욕을 먹는것에 토에이가 부담을 느꼈고, 또 속편이 계속 진행될수록 다오카 카즈오와 깊이 연관 되어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영화에 등장해야 하는데, 남동생 가토 테츠야 덕분에 야쿠자 연루설로 크게 곤욕을 치루고 있던 미소라 히바리가 속편 제작을 허락치 않았다는 카더라가 있다.

이렇게 야마구치구미가 연예계에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을때 일어난 불미스러운 사고 중 하나가 1953년에 일어난 배우겸 가수 츠루타 코지가 야마구치구미 조직원들에게 습격, 폭행을 당한 일명 <츠루타 코지 습격 사건> 이다. 최무룡김희갑임화수에게 구타 당한 사건이 어떻게 보면 이 사건의 한국판이다. 이 사건이 언론을 통해 연일 보도되는 바람에 외려 광고효과(?)가 되어서 이 때까지만 해도 지방의 듣보잡 조직이던 야마구치구미는 당당한 전국구 스타 조직(?)으로 거듭나게 된다.

사건의 내용을 간략히 요약하자면 1953년 1월 6일 저녁 야마구치구미의 야마모토 켄이치 주도하에 4명이 동료 배우들과 식사를 하고 있던[15] 츠루타 코지를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위스키 병, 벽돌 등으로 후려 치고 도주했는데, 츠루타 코지는 구급차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머리와 손에 11바늘을 꿰매는 중상을 입었다.

경찰의 조사에 의하면 사건의 발생 동기는 사건 발생 몇 달 전인 1952년 가을 다오카 카즈오가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에게 미소라 히바리와 츠루타 코지의 조인트 공연을 제안 했는데 거절 당하자 이에 앙심을 품었는데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의 태도와 언행이 불손하고 오만하다 하여 보복과 본보기를 보이겠다며 야마모토 켄이치가 나서서 자신포함 네명의 조직원과 츠루타 코지의 습격을 하였다고 한다.

이후 습격한 조직원 4명은 기소 되었고, 다오카 카즈오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판결을 받았다. 그리고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는 사건 발생 2년 후 음독 자살을 하고 만다. 나중에 다오카 카즈오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당시 츠루타 코지의 매니저의 태도에 빡쳤긴 했지만 나는 습격을 지시하지 않았고 조직원들이 마음대로 저지른 짓이다." 라고 적었지만 경찰 반응은 "이게 뭔 개소리야."

한편 아무런 이유도 모른채 갑자기 습격을 당한 츠루타 코지는 다오카 카즈오에게 사과와 해명을 요구했고, 두 사람은 서로 만나서 긴 대화를 나눈 끝에 결국 화해 했는데, 츠루타 코지가 대인배스럽게 용서를 해줬기 때문에 이후 다오카 카즈오는 츠루타 코지를 함부로 못 건드렸다고 한다.
  1. 여기서 '~구미(組)'는 한국의 '~파'에 해당하는 접미사. 그래서 '야마구치파'라 번역하기도 한다.
  2. 본거지가 고베인 관계로 과거 고베 대지진 당시 조직원을 동원해 재난 구호 활동을 해서 유명해지기도 했다.
  3. 한 때 야마구치구미와 함께 칸사이를 양분했던 조직으로 본거지인 고베에서는 야마구치구미보다도 규모가 컸었다. 오오시마 구미에서 1940년 독립해 창고업과 항만하역업 등에서 야마구치구미와 경쟁했고 제2차히로시마항쟁 당시 야마무라구미를 지원하며 대리전쟁을 치뤘다. 제1차 정상작전당시 전략해산 하였다가 대일본평화회로 재건 이후 폭대법에 의해 지정폭력단으로 지정되었었으나 1997년 해산을 기점으로 지정해제 되었다.
  4. 초대 고도카이 카이쵸 / 본래 고도카이의 전신인 히로타구미는 구미쵸인 히로타 타케시와 야마모토 켄이치가 사적으로 가까운 관계였기 때문에 다오카 사후 4대 구미쵸로 야마모토 켄이치를 지지했지만 야마모토 켄이치의 갑작스런 병사후 구미쵸 승계를 두고 타케나카 마사히사와 야마모토 히로시가 대립했을 당시 야마모토 히로시의 지지를 표명하였다. 하지만 츠카사가 히로타를 적극적으로 설득해 히로타구미는 이치와카이 진영에도 4대야마구치 진영에도 참가하지 않으며 히로타 타케시는 히로타 구미를 해산시켰다. 츠카사는 해산된 히로타구미를 그대로 수습 계승해 고도카이를 만들어 4대 야마구치구미의 직계로 승격했다.
  5. 5대 때 와는 달리 조직의 힘을 고도카이에 집중시키는 방법으로 활용된다.
  6. 칸토-홋카이도, 츄부, 북오사카, 남오사카, 한신, 츄고쿠-시코쿠, 큐슈 / 2016년 현재 칸사이, 칸토, 토우카이, 츄고쿠-시코쿠, 츄부, 큐슈 블록으로 재구성해 6개 블록이 되었다
  7. 금융관련 사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하는데 특히 한국의 IMF금융위기시 나고야계 재일교포 자금이 한국 사채시장에 엄청나게 진출하던 때와 시기상 겹친다.
  8. 고베야마구치구미 구미쵸 이노우에 쿠니오와 나미카와카이 카이쵸 나미카와 마사히로(박정호)는 쿄다이 사카즈키를 나눈 의형제 관계
  9. 2016년 3월29일에 있던 고베 야마구치구미의 관동회합이 박정호가 소유한 토쿄 타이토쿠 있는 나미카와카이 관동본부 빌딩에서 열리는 등
  10. 이케다구미의 구미쵸 이케다 타카시(김효지)는 고베야마구치구미의 샤테이카시라로 이케다구미는 고베야마구치구미 내에서 발언권이 쎈 조직이다.
  11. 야마모토 히데유키(32)가 경찰에 출두 자수했으나 사용총기가 다른점 등 정식 기소하기에 증거가 부족한 상태이다.
  12. 후쿠오카를 거점으로 하는 조직으로 구미쵸 아오야마 치히로는 6대야마구치구미 서열5위의 샤테이카시라를 맡고있다.
  13. 미소라 히바리의 후견인이 다오카 카즈오 였고, 거기다가 미소라 히바리의 남동생 가토 테츠야도 야쿠자와 연관되어 있었다. 그래서 미소라 히바리의 야쿠자 연관설은 끊임없이 그녀를 괴롭혔다.
  14. 다오카 카즈오가 시나리오, 감독 선정 등 영화의 제작에 깊게 관여했다. 영화 상영 이후 토에이의 자체적인 관객 조사 만족도에서는 관객의 92%가 다오카 카즈오의 휴먼 드라마에 감동했다는 충공깽 스러운 데이터가 나왔다.
  15. 현장에는 약 10여명 정도 되는 인원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