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소라 히바리



美空ひばり 1937년 5월 29일 ~ 1989년 6월 24일

일본의 영원한 국민가수이자 한 시대를 풍미한 일본 음악의 아이콘
일본 음악의 끝판왕, 일본가요계 피라미드 꼭대기의 여가수

(누적 음반 레코드 판매량 8000만장 이상. 비공식 일본가수 음반 판매량 1위)

1 개요

일본가수, 배우[1][2], 본명은 가토 카즈에(加藤和枝)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38년에 생선가게를 하는 아버지 가토 마스키츠(加藤增吉)와 어머니 기미에(喜美枝)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가 노래에 재능이 있다는 사실을 안 어머니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8살의 나이에 데뷔하여[3], 근 40년간 엔카, 나아가서 일본 가요계의 여신(女神)으로 군림하였다.

2.2 활동

향년 52세의 이른 나이에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는데[4], 그녀가 죽고 난 뒤 그녀의 장례식은 일본 전 방송사에 생중계가 되었고 장례식에 모인 조문객만 무려 5만여명이었다고 한다. 규모 면에서도 웬만한 국장, 국민장에 준하는 수준으로 치뤄졌다. 당시 일본 국민들은 5달 전 히로히토 덴노가 죽었을 때보다도 더 큰 애도의 물결을 이루었고, 그녀의 죽음으로 진정한 쇼와 시대가 막을 내렸다고 슬퍼하였다.

3 일본 음악계의 위상

일본 가요계의 레전드로, 일본 만화계에 비유하면 데즈카 오사무 정도의 위치에 있는 인물이라고 봐도된다. 대략 한국으로 치면 이미자+조용필 정도의 위상이다 실제로 이미자는 일본인들에게 '한국의 미소라 히바리'로 알려져 있다.

사후에 일본 정부로부터 여성 최초로 국민영예상을 수상했다. 또한, 그녀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부른 '川の流れのように(냇물이 흐르는 것처럼)'은 NHK에서 조사한 일본의 명곡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 나중에 우리나라에서도 이건우 작사, 가수 이화숙 씨가 "흐르는 강물처럼" 이라는 제목으로 번안해서 불렀다.

4 재일 한국인 루머

오래 전부터 재일 한국인 루머가 끊이지 않는 일본 유명인 중의 하나이며 한국, 특히 재일 한국인들 중에는 미소라 히바리가 재일 2세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정작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생전에 나는 한국계다.라는 말을 한 적은 한번도 없다. 일본에서 활동하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던 작곡가 손목인이 어느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등의 유명 엔카 가수가 한국계라는 것이 공공연한 비밀이라고 주장했던 적이 있고, 우에다 타케히코(植田剛彦)가 쓴 책, <재일(在日)한국인의 실력>에서도 미소라 히바리가 한국계라고 쓰여져 있지만, 두 사람의 주장 모두 본인들의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확실한 근거는 제시한 적이 없다. 또한,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와 이웃에 살았고, 미소라의 한국 공연을 추진한 스즈키 마사부미(鈴木正文)는, 미소라는 아버지의 고향 한국에서 노래하는 것이 소원이었고, 그 꿈을 이루지 못하고 죽은 것에 대해 애통해 했다고 증언한 적이 있지만 스즈키의 발언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길은 없다. 일본 현지에선 미소라 히바리 재일설을 한국 언론이나 재일 등이 만든 도시전설 내지는 근거없는 한국기원설의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로 보고 있다. 왜냐하면 미소라 히바리 본인이 한국계라고 밝힌 적은 물론 쿠와타 케이스케처럼 직접적으로 한국에 대한 호감을 나타낸 적조차도 없고 무엇보다 미소라 히바리에 대한 수많은 재일설 모두 주장만 있을 뿐 확실한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교포 월간지 '아리랑'에 따르면, 미소라 히바리가 어린 시절 일본인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正男) 앞에서 아리랑을 불렀고, 사후에 나온 '히바리 세계의 노래를 부르다' 앨범에 도라지 타령이 수록 되어 있으며, 후렴 부분인 '에헤야'는 또렷한 한국어로 수록되어 있다. 단 미소라 히바리는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리메이크했는데, 이 곡에서도 '부산항'이란 단어는 일어로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부산항'이라고 불렀고, 후렴부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역시 한국어로 부른 적이 있다. 이것은 이 노래를 일본어로 번안한 작사가가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일본 가수들이 부른 '돌아와요 부산항에'의 가사도 대부분 '부산항'과 '돌아와요 부산항에' 부분은 한국어 그대로 불렀다. 단 이 곡을 일본에서 제일 먼저 리메이크한 것은 1979년의 도노사마 킹스의 '泪の波止場(눈물의 부둣가)'[5]이며, 1983년에 아츠미 지로가 발표한 '釜山港へ帰れ'에 처음으로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그대로 들어가있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곡은 아츠미 지로의 버전의 커버이다.

5 트리비아

교토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기념관인 '미소라 히바리관'이 설립되었다.

그녀의 일생을 그린 미소라 히바리 탄생이야기(美空ひばり 誕生物語)《TBS테레비》라는 드라마에서 그녀의 역을 일본의 유명 가수, 여배우 우에토 아야가 맡았다.

마츠우라 아야의 '草原の人'는 생전에 그녀가 작사한 가사에 음을 덧붙여 만들어진 곡이다.

남진의 '가슴 아프게' 등 숱한 명곡들을 작곡해 낸 한국의 거장 작곡가 박춘석은 1978년에 '風酒場'을 작곡한 바 있었다.

일본 대중음악사에 한 획을 그은 여가수로써 현재 그 계보는 여러가지로 뻗어나가며 이어져 오고 있다.



마지막곡이자, 명곡으로 추앙받는 川の流れのように. 작사는 그 유명한 아키모토 야스시. 영상은 1989년 1월 14일 TBS에서의 라이브로 타계하기 6개월 정도 전의 거의 마지막 모습이다.

知らず知らず 步いて來た 細く長いこの道
(시라즈 시라즈 아루이테 키타 호소쿠 나가이 코노 미치)
모르게 모르게 걸어 온 가늘고 긴 이 길
振り返れば 遙か遠く 故鄕が見える
(후리카에레바 하루카 토-쿠 후루사토가 미에루)
뒤돌아보면 저 멀리 고향이 보여
でこぼこ道や 曲がりくねった道
(데코보코 미치야 마가리쿠넷타 미치)
울퉁불퉁한 길, 고불고불 구부러진 길
地圖さえない それもまた人生
(치즈사에나이 소레모 마타 진세-)
지도조차 없는 그것도 또한 인생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ゆる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유루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완만하게
いくつも 時代は過ぎて
(이쿠츠모 지다이와 스기테)
여러 시대는 흘러서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とめどな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토메도나쿠)
아! 강물의 흐름처럼 끝없이
空が黃昏に 染まるだけ
(소라가 타소가레니 소마루다케)
하늘이 황혼에 물들 뿐…


生きることは 旅すること 終わりのない この道
(이키루 코토와 타비스루 코토 오와리노 나이 코노 미치)
살아가는 건 여행하는 것, 끝없는 이 길
愛する人 そばに連れて 夢探しながら
(아이스루 히토 소바니 츠레테 유메 사가시나가라)
사랑하는 사람을 옆에 데리고 꿈을 찾으며
雨に降られて ぬかるんだ道でも
(아메니 후라레테 누카룬다 미치데모)
비에 젖어서 질퍽이는 길이라도
いつかはまた 晴れる日が來るから
(이츠카와 마타 하레루 히가 쿠루카라)
언젠가는 또 다시 맑은 날이 올테니…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移りゆく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우츠리유쿠)
아! 강물의 흐럼처럼 변해 가는
季節 雪どけを待ちながら
(키세츠 유키도케오 마치나가라)
계절 눈이 녹는 날을 기다리며…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おだやかに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오다야카니)
아! 강물의 흐름처럼 평온하게
この身をまかせていたい
(코노 미오 마카세테 이타이)
이 몸을 맡기고 싶어요
ああ川の流れのように いつまでも
(아- 카와노 나가레노요-니 이츠마데모)
아! 강물의 흐름처럼 언제나
靑いせせらぎを 聞きながら
(아오이 세세라기오 키키나가라)
푸른 시냇물 소리를 들으며…



12살 때의 모습, 영화 <悲しき口笛> 에서의 한 장면이다. 부르는 노래는 ブギにうかれて 라는 곡,



15살때의 모습, 영화 <悲しき小鳩> 에서의 한 장면이다. 부르는 노래는 東京キッド 로 그녀의 대표적인 히트곡 중 하나로, 김연자가 리메이크 하여 취입하기도 했다.

1957년 1월 13일 국제극장에서 공연도중 동갑내기 여성 극성팬에게 황산테러를 당했으나 다행히 얼굴에 큰 상처는 입지 않았다. 범행을 저지른 여성팬은 이전에도 미소라 히바리의 집에 찾아 가거나 전화를 걸었으며 공연 대기실에도 들어가려고 했으나 제지 당한적이 있었다. 범행 이유는 자신을 만나주지 않는 미소라 히바리가 미웠기 때문이라고 한다. 2주 정도의 치료 후 1월 29일 다시 무대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62년 영화배우 고바야시 아키라와 결혼했지만 2년만에 이혼했고[6][7]출산경험은 없다. 다만 조카를 입양하여 아들로 입적시켰고, 그녀의 사후, 양자인 가토 카즈야(加藤和也)[8][9]가 저작권과 관련된 사업을 운영하고 있다.

형제, 자매들도 모두 배우, 가수로 활동 했는데 바로 한살 아래 여동생인 사토 세츠코(佐藤勢津子)는 언니 사후 뒤늦게 50대의 나이에 1993년에 엔카 가수로 데뷔하여 활동하고 있고, 남동생 가토 테츠야(かとう哲也)[10][11]도 배우였는데, 도박, 폭행, 권총소지, 권총밀수 등의 혐의로 여러 차례 체포되고 야쿠자와 연루되는 등의 사고를 치며 미소라 히바리의 속을 썪이다가[12][13], 1983년 42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막내 동생 카야마 타케히코(香山武彦)[14] 도 배우로 활동하다 연예계를 은퇴하고 음식점을 경영 하였는데 1986년 심장마비로 사망하였다. 따라서 미소라 히바리의 형제 자매들 중에서 2015년 현재 사토 세츠코 만이 유일하게 생존해 있다.

여담으로 미소라 히바리의 데뷔 전인 태평양 전쟁 시기에 이미 미소라 히바리 라는 예명으로 활동했던 여배우가 있었다. 이 여배우의 본명은 타카기 후쿠코, 결혼 후엔 야마모토 후쿠코 인데, 단 3편의 영화에만 출연했던 배우 였고, 일찍 은퇴했기 때문에, 이 여배우의 존재를 아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고, 미소라 히바리도 이 여배우의 존재를 알지 못했었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미소라 히바리라는 예명을 사용하는 것에 대해 그녀에게 아무런 양해를 구하지 않았으나, 정작 그녀는 미소라 히바리를 배려하여 자신이 미소라 히바리라는 이름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밝히지 않았다고 한다. 1923년생인 이 여배우는 2016년 현재까지도 가나가와 현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1. 가수 경력이 워낙 먼치킨이라 국내에선 미소라 히바리가 배우 활동을 했다는 사실은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잘 알지는 못한다.
  2. tirashi_benten-kozo.jpg 이런 찬바라 영화를 찍기도 했다.
  3. 너무 어린 아이여서 "노래는 잘 하는데 어린이 답지가 않다." , "어린애가 너무 어른 흉내를 낸다." 라며 비판적으로 까는 사람들도 많았었다. 미소라 히바리가 전설이 된 후 이 사람들이 어떤 욕을 먹게 되었는지는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4. 1980년대 초반 이후부터 어머니와 두 동생, 그리고 라이벌이자 절친한 친구였던 에리 치에미,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 이었던 다오카 카즈오 등 그녀 주변의 여러 지인들이 차례차례 병으로 세상을 떠났고, 슬픔과 외로움으로 술과 담배에 의존하였던 그녀의 건강도 빠르게 악화되고 말았다.
  5. 가사내용은 원곡과 거의 같으나 부산항이라는 단어가 다른 단어로 대체되어있다.
  6.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었기 때문에 법적으로는 미혼이다.
  7. 고바야시 아키라는 미소라 히바리가 연예 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 충실하길 원했지만 미소라 히바리는 연예 활동에 미련이 많았기 때문에 불화가 시작 되었다. 거기다가 미소라 히바리의 어머니나 매니저 등 주변 사람들도 두 사람의 부부 관계에 개입을 많이 했기 때문에 불화가 커져갔고, 거기에 고바야시 아키라가 마음대로 빚을 지는 등의 문제를 일으켰고 결국 이혼하게 되었다. 이혼을 알리는 기자회견에서 고바야시 아키라는 이혼하기 싫다고 징징대었으나 이혼을 원하는 미소라 히바리의 마음을 되돌릴순 없었다.
  8. 다키마쿠라의 창시자 챵코 마스다가 출연한 방송에서 테이블에 앉은 이들 가운데 노란머리를 하고 있는 양키풍의 사람이다. 금수저인 주제에 뭘믿고 나와서 잘난척하느냐는 악플세례를 항상 받는다.
  9. 카토 카즈야는 기타노 다케시의 팬인데, 카토 카즈야가 아직 어렸던 1980년대 초반 미소라 히바리는 기타노 다케시와 TV에서 함께 공연했던 적이 있었는데 이 때 미소라 히바리는 "내 아들이 널 만나고 싶어해." 라며 기타노 다케시를 억지로 자신의 집으로 데리고가 카토 테츠야와 만나게 해줬다는 일화가 있다.
  10. 바로 위에 언급된 양자 가토 카즈야의 친부다.
  11. 여담이지만 미소라 히바리의 대표곡 중 하나인 人生一路(인생일로)가 카토 테츠야가 작곡한 곡이다.
  12. 카토 테츠야가 여러 차례 사고를 치고, 또 야쿠자 동생으로 인해 미소라 히바리도 야쿠자와 연루 되어 있다는 의심을 사서 공연이 취소 되기도 하는 등 크게 곤욕을 치루기도 했지만 미소라 히바리는 끝까지 동생을 포기하지 않았고 남매간의 우애는 좋았다.
  13. 미소라 히바리의 소속사 사장이자 후견인인 다오카 카즈오는 악명높은 야쿠자로 야마구치구미의 3대 두목이기도 했다.
  14. 본명은 가토 타케히코(加藤武彦)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