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楊昭
(584 ~ 606)
수나라의 인물로 수양제와 양민황후(煬愍皇后) 소씨(蕭氏)[1]의 장남이다.
590년 하남왕이 되었고 601년 봄 1월 13일 진왕이 되면서 내사령에 임명되었으며 604년 수양제가 즉위하고 605년 황태자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606년 양소가 장안에서부터 수양제에게 동도 낙양으로 조현하러 왔다가 수개월이 지나서 돌아가게 되자 조금 더 머무를 것을 요청했지만 허락받지 못했으며 절하고 여러 번 요청했고 양소의 몸은 평소에 비대해서 이로 인해 피로로 병을 얻게 되었다가 7월 22일 사망했다.
수양제가 그를 위해 울면서 곡을 했는데 몇 번 소리를 내고서 중지했다가 얼마 안돼서 여가에게 음악을 연주하는 것이 평일과 다를 바 없었다. 그가 죽으면서 태위공, 홍농등십군, 태수로 추증되었고 장사지내는 것을 성대하게 되었다.
원덕태자(元德太子)로 추존되었으며 훗날 아들 양유가 황제에 즉위하자 세종(世宗) 효성황제(孝成皇帝)로 추존되었다.
1.1 자식들
- 장남 연왕(燕王) 양담(楊倓, 603 ~ 618) - 양제 유씨(大) 소생
- 차남 월왕(越王) 양통(楊侗, 604 ~ 619) - 양제 유씨(小) 소생
- 삼남 대왕(代王) 양유(楊侑, 605 ~ 618) - 태자비 위씨 소생
2 楊素
(544 ~ 606)
북주, 수나라의 인물로 자는 처도(處道)이다. 북주의 재상 양부의 아들로 양현감의 아버지이다. 일설에는 그가 후한 태위 양진의 후손이라고도 하는데 수나라의 황실인 양씨와는 먼 친척 관계이다.
홍농 화음 사람으로 어려서 재주, 예능이 많고 큰 뜻을 가지면서 조그만 것에 구애된 것이 없었다.
수나라 건국 이후 상서우복야가 되었다가 수양제 즉위 이후 상서좌복야로 상승하게 된다.
2.1 북주 시절
양부가 절개를 지키다가 북제의 공격으로 정양성을 잃자 시호를 추증받지 못하자 양소가 추증을 받도록 두세 차례 표문을 올렸다. 우문옹이 화가 나서 목을 베려고 하자 양소는 무도한 천자를 섬겨 그 분수를 다하다가 죽는다고 외쳤고 우문옹은 그 말을 장하게 여겨 양부를 대장군으로 추증하면서 양소는 의동삼사에 임명되어 예우받았다.
조서를 쓰도록 명령받으면 붓을 잡고 즉시 완성했고 문장, 뜻이 아름다워 우문옹이 이를 힘쓰면 부귀하지 못할까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양소는 부귀한 것에 관심이 없다고 했으며, 575년에 우문옹이 북제를 공격하기 위해 6만 명을 이끌고 하음으로 향하자 선봉을 자청했다.
변주자사, 서주총관을 지내다가 580년에는 울지형이 반란을 일으키자 우문주를 공격했다.
2.2 수나라 건국/진나라 평정
581년에 수나라에 세워지자 상주국이 되었다가 584년에는 어사대부가 되었다.
양소는 587년에 진나라를 공격하기 위해 영안에서 오아, 황룡, 평승, 책맹 등의 함선을 만들었고 588년에 청하공인 양소는 행군원수가 되어 영안에서 출발했으며, 진나라의 척흔을 유인은이 격파하자 수군을 이끌고 가서 양자강에 주둔했고 진나라의 군사들이 청하공이 바로 강의 신이라면서 두러워했고 유인은과 함께 진혜기, 여충숙 등과 40여 차례 싸워 격파했다.
590년 7월 18일에 납언이던 양소가 내사령에 임명되었고 진나라였던 지역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양소가 행군총관이 되어 경구에서 주막문을 격파하고 진릉의 고세흥, 무석의 섭략 등을 격파했으며, 심현증 등을 격파하고 내호아의 기습이 성공해 고지혜를 격파했다. 또한 심효철을 온주에서 격파하고 천태산으로 도망가자 추격해서 붙잡았으며, 조정에 돌아갔다가 남쪽으로 돌아와서 회계의 왕국경을 격파한 후에 고지혜를 죽이도록 설득해 항복시켜 강남을 평정했다.
2.3 천하통일 이후
592년 12월 14일에 상서우복야가 되어 고경과 함께 정사를 관장했고 593년 2월 6일에 기주의 북쪽에 인수궁을 만들게 되자 이를 감독하면서 우문개를 검교장작대장, 봉덕이를 토목감으로 삼게 했으며, 595년에 인수궁이 완성되자 수문제가 행차했고 날씨가 더워 역부들 중에 죽은 사람이 많자 그 시체를 모두 불태웠다.
그런데 이 일로 수문제는 양소가 백성의 힘을 쓴 것으로 궁을 만들어 천하 사람들에게 원망을 맺도록 했다고 하자 양소는 이를 듣고 두려워했는데, 봉덕이가 황후께서 도착하기를 기다리면 특별히 은정을 내리는 조서가 있을 것이라 하자 그 말대로 독고황후가 이 궁을 보고 칭찬하면서 각종 물품을 내리자 귀한 신분이나 재능을 믿고 남을 업신여기던 양소는 봉덕이만큼은 칭찬하고 귀중하게 여기게 되어 그를 내사사인으로 추천했다.
599년에 양소는 월공으로 있으면서 힐가시다나도람가한이 대동성을 공격한다고 해 영주도로 파견되었고 도람가한과 동맹을 맺은 달두가한과 싸워 기병으로 싸우는 전법을 만들었다가 주라후의 진언으로 달두가한을 공격해 격파했으며, 600년에는 달두가한이 요새를 침범하면서 양광과 함께 영무도로 나아가 마읍도에 있던 양량, 사만세 등과 합류해 공격했다.
우문술이 양광을 태자로 세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양약에게 접근했는데, 양약이 양광은 태자로 삼아야 한다고 하자 양약의 말을 듣고 양광을 태자로 지지하게 되었다. 601년에 좌복야가 되었고 운주도 행군원수가 되어 의리진두계민가한과 함께 보가가한을 공격했으며, 602년에 이 공으로 아들 양현감의 작위가 주국으로 올라가고 양현종의 작위가 회남공이 되었다. 독고황후가 죽고 장례의 일을 처리해 상서로운 땅을 찾았다고 해서 다른 한 명의 아들이 의강공으로 책봉되면서 채읍 1만호를 포함해 다양한 물품을 받았다.
또한 교주의 이족 사람인 이불자가 봉기하면서 유방을 추천했으며, 그가 추천한 유방이 이불자를 진압하는 것에 성공했다.
2.4 수양제 시절
수양제가 즉위하고 604년에 양량이 반란을 일으키자 병부도행군총관, 하북도안무대사가 되어 무리 수 만을 인솔해 양량을 진압했고, 이 공로로 상서우복야에서 상서좌복야가 되게된다. 606년 6월 29일에 사도가 되었다. 그러나 수양제는 양소가 공이 많아 시기를 했고 겉으로는 특별한 대우를 하면서도 속으로 박대했는데, 양소는 초공으로 옮겨졌다가 병이 들어 침상에 누웠다.
명성과 지위가 극에 달한 것을 걱정해 약을 먹으려고 하지 않았는데, 7월 23일에 사망해 태위공, 홍농등십군, 태수로 추증되고 장사지내는 것을 성대하게 했고 시호는 경무공(景武公)이다.
사족으로 야사의 일화를 첨부하자면, 양량 토벌 이후 수양제가 연회를 열었는데 연회가 무르익자 일부러 술에 취한척 해서 수양제에게 폐하께서는 선제께서 하신 실수를 반복하지 마시옵소서. 제위를 물러주실때에는 시원시원하게 물러주시옵소서. 선제께서 제위를 물러주는 것을 계속 주저해서 이 노신이 이 고생을 한것이 아닙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이에 우문술를 비롯한 신하들이 '좌복야 어르신 농담이 너무 지나치십니다'라고 하자, 수양제가 '아니다. 좌복야 말이 맞도다. 이 나라에서 짐을 훈계할수 있는 자가 좌복야 말고 또 누가 있겠느냐?'라고 하고 퇴장했다고 한다. 이후 양소가 우문술과 함께 귀가하는데 우문술이 왜 그랬냐고 까닭을 묻자 양소왈 폐하께서는 그 기운이 너무 성하셔서 그 기운을 눌러주지 않는다면 그 기운이 어디로 튈지 모르니, 그 기운을 꾹 눌러줘야 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이후 수양제가 저지른 폭정을 보면 양소의 말은 틀린 말은 아닌셈.
2.5 성품
성격이 꼼꼼하지 못하고 간략하면서 말을 잘했고 마음대로 다른 사람을 높이거나 내렸으며, 고경을 추앙하고 우홍을 공경하고 설도형을 후하게 대접했지만 소위는 없는 것처럼 여겼고 다른 귀한 사람들은 모욕당했다. 재능이나 풍격은 고경보다 뛰어났지만 사람을 성실하게 대하면서 나라를 자기 몸처럼 느끼면서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는 재상의 식견이나 도량은 고경보다 못했다.
양소는 군사를 사용하면서도 꾀가 많았지만 매우 엄정해 다른 사람의 과실을 찾아내 죽였고 많으면 100여 명, 적어도 십 수명을 내려가지 않았으며, 흐르는 피가 많아도 태연하게 웃었고 100, 200명이 적에게 달려가도록 해 진지를 함락하지 못하면 돌아오는 사람의 목을 베어 2, 300명에게 다시 나아가도록 해서 그 방법을 똑같이 했다.
이 때문에 장수와 병사들이 무서워해 필사적으로 싸워 이기지 못하는 일이 없어 명장으로 불렸으며, 양소는 귀하고 총애를 받아 말하면 허락받지 않는 일이 없었고 양소를 따른 사람들은 작은 공로라도 반드시 기록할 정도로 다른 장수에게는 가면 큰 공로를 가져도 대부분 책망이나 퇴짜를 당해 양소가 잔인해도 병사들은 양소를 따르기를 원했다.
그래도 파경의 고사의 사례를 보면 막장일 정도는 아닌듯
2.6 대중매체에서
드라마 연개소문에서는 고경과 함께 수나라를 지탱하는 양대 먼치킨으로 나오며, 권신 이미지가 가미되어있다.[2] 양광이 황제 즉위하는데 큰 힘이 되어줬지만, 이후 양광에게 토사구팽 당할 처지가 된다. 양광이 연회를 열고, 양소에게 좋은 술이 있다고 권하지만, 양소는 술병을 보고서는 거부한다.[3] 그러나 양광이 계속 권하자, 좋은 술은 윗사람부터 마시는것이라고 하며 태자에게 권해서 태자를 죽게 만든다. 이후 태자가 죽자, 양광은 서둘러 사태 수습[4]을 하며 연회를 파한다. 이후 양소는 더 이상 살수 없다면서, 비굴한 모습을 보이기 싫다고 한다. 작중에서의 언급을 보면 자결한 듯하다.
후에 장남 양현감이 613년에 반란을 일으키자 빡친 양광은 그의 무덤을 파헤쳐 그 목을 베라고 명령했다. 즉, 양광에 의해 두 번 죽게 된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