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 해군에서 벌어진 어뢰의 결함으로 인한 문제. 이 문제 때문에 해군 잠수함대 전체와 뇌격기들이 수년동안 절름발이 신세가 되었다.
"어뢰에서 가장 신뢰 할 수 있는 점은 바로 어뢰를 신뢰 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1]
2 스캔들의 주인공- Mark.14 어뢰
태평양 전쟁 초창기, 가토급 잠수함을 포함한 대부분의 미 해군 잠수함들이 사용한 어뢰인 Mark.14 어뢰는 무게 1,490kg에 292kg의 Torpex 작약이 충전되었고 길이 6.25미터, 최대사거리는 31노트. 항주시 사거리 8,100미터에 최고속도 46노트의 메탄올 추진식 어뢰이다. 이 어뢰는 등장 당시에는 미 해군의 기대를 잔뜩 모았으나...여러가지 문제가 발견되면서 역사에 오명을 남겼다.
3 발생한 문제점들
1. 적정수심보다 더 깊게 항주해버렸다.
연습 표적함을 명중하지 못하고 배 밑을 그대로 지나쳐버리는 Mark.14 어뢰 - 1926년 촬영 |
원인은 황당하게도 제대로 된 탄두를 사용하거나 실 탄두와 무게가 흡사한 무게추 등을 넣고 테스트를 해야했으나 실제로는 탄두에 그냥 물만 채워넣고 테스트를 진행한 후 그 결과 그대로 양산에 돌입했다는 것. 이유는 예산 절약. 당연히 실 탄두보다 물의 무게가 훨씬 가벼웠기에 실제로 항주해야 할 수심보다 얕은 수심을 항주하고 있었고, 이걸 수정하지 않아 탄두의 무게로 인해 실제 항주 수심보다 깊이 들어가버려 배 밑바닥을 그냥 지나쳐버리는 문제가 생겼다.[2]
2. 자기기폭장치가 오작동을 일으켰다.
문제의 Mark.6 자기기폭장치. |
Mark.6 자기기폭장치는 군함에서 발생되는 자기장에 반응하여 전파량이 증가했다가 감소되는 순간을 노려 기폭되게 하는 기술이 들어간,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장비였으며 이론상으로는 용골을 지나치는 순간 기폭해서 단 한방에 적함을 두동강 내버릴 것으로 기대했으나...
실제로는 터져야 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터지지 않거나, 미리 터져버리거나, 뒤늦게 터지는 상황이 다발하게 되었다. 함선에서 발생하는 자기장은 여러 방식으로 생성이 되고 있었고 특히 적도 부근에서는 함선의 항진 방향으로 자기장이 쏠린다는 사실을 당시에는 그 누구도 몰랐기 때문에 이것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결과 생긴 일이다(...).
3. 구형 어뢰 신관의 격침을 설계 변경 없이 그대로 사용하여 불발이 발생했다.
구형 Mark.10 어뢰에 사용한 물건을 그대로 Mark.14에 적용했는데 Mark.10 충돌 기준으로 설계 되어 기폭장치의 격침(擊針)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강했던데다 어뢰의 진행방향과 맞지 않는 위치에 있었기에 충돌을 해도 격발이 되지 않았다.
4. 어뢰발사관에서 제대로 사출이 안된다.
추진력의 부족으로 인해 발사할 경우 어뢰발사관에서 나오다가 마는(...) 사례도 있었다. 1차적으로는 어뢰발사관이 어뢰를 사출 시켜줄 만한 기압을 뿜어 내 어뢰를 밀어낸 뒤 항주를 해야 했지만 어뢰가 불량이라 발사 도중 어뢰발사관 입구에서 멈춰 걸려버리는 문제가 생긴 것.
아래는 그로 인해 발생한 해프닝 중 가장 유명한 예.
로렌스 다스핏 소령이 지휘하는 가토급 72번함 SS-283 티노사는 자신의 4번째 순찰 임무중이었던 1943년 10월 26일, 일본군 13선단을 포착해 4,5,6번 어뢰발사관에서 어뢰를 발사하였다. 하지만 곧이어 일본 구축함에게 발각되어 긴급잠함하던 도중 전방 어뢰실에서 5번 어뢰 발사관이 폐쇄되지 않는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결국 티노사는 고생 끝에 일본 대잠망을 피해 겨우겨우 부상을 할수 있었고 두 장교가 수면으로 다이빙해 직접 눈으로 검사를 한 결과 해당 어뢰발사관에서 발사된 어뢰가 발사되다 만 채 걸려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결국 티노사의 승조원들은 일본군이 우글거리는 해상에서 스쿠버 장비를 이용해 수중으로 들어가 기폭장치를 무력화 시킨 후 어뢰를 밖으로 사출시켜 겨우겨우 모항으로 귀환할 수 있었다. |
이 사건은 여러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생긴 문제로 추정된다. 당시 잠수함들의 어뢰발사관은 압축공기를 이용해 수압으로 어뢰를 밀어내는 방식을 사용했다. 이 와중에 펌프 고장이나 압축 밸브 조작 미스 등의 이유로 수압이 부족해 어뢰를 차마 다 못 사출해냈을 가능성이 높았고, 또한 수압으로 압력이 가해지면 엄빌리컬 케이블이 끊어지면서 어뢰의 스크류 모터가 동작하며 항주하게 되는데, 역시 모종의 이유로 끊어지지 않았거나, 혹은 끊어졌는데도 불구하고 모터의 고장이나 결함 등으로 작동하지 않았을 가능성 역시 존재한다.
사실 수압이 낮아도 어뢰발사관 내에서 어뢰가 절반만 추진될 경우 엄빌리컬 케이블은 끊어지게 설계되어 있었고, 어뢰를 다시 사출해낼 당시에도 펌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여 어뢰를 밀어내는 데에 성공했으나 엄빌리컬 케이블이 끊어진 것이 확실한데도 불구하고 어뢰의 모터는 작동하질 않았고 어뢰는 그대로 해저로 가라앉았다. 이런 문제는 다른 잠수함에서도 일어났다는 보고가 이어져 오게 된다. 단순히 어뢰의 관리 소홀 문제였는지 혹은 진짜로 Mark.14 어뢰 모터에 결함이 있어서 그랬는지는 다소 애매한 편이고 다른 어뢰에서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결과적으로는 Mark.14 어뢰의 악명만 더 높여버렸고 잠수함 승조원들의 생사를 가르는 문제였기에 더 임팩트가 컸다.
5. 항주가 불안정하거나 원주운동을 해버린다.
자이로스코프 및 러더의 결함 때문에 어뢰가 원하는 쪽으로 방향을 틀지 못하고 예정된 경로가 아닌 영 엉뚱한 곳으로 항주를 하거나, 설령 방향을 제대로 잡았다 하더라도 항주가 불안정했으며 심지어는 발사하자마자 원을 그리며 돌아오는 원주운동 현상이 발생했다. 이 원주운동 현상은 실제 사격동안 29건이 발생되어 보고서에 기록된 문제였고 심지어 일부 잠수함은 2, 3회 연속으로 이 원주운동 현상을 경험하기도 했다. Mark.14의 22건, 이 Mark.14와 부품을 공유하는 Mark.23이 3건, Mark.18이 3건, 구형 Mark.9이 1건으로 원주운동 발생 횟수로는 Mark.14가 압도적으로 많았다.Circular Running Torpedoes Reported by U. S. Submarines During World War II 심지어 이 원주운동 현상으로 인해 어뢰를 쏜 잠수함을 맞춰버리는 초대형 사고를 두번씩이나 터트리게 되는데 가토급 잠수함 74번함 SS-284 툴리비와 사르고급 잠수함의 네임쉽인 SS-188 사르고(Sargo)[3]가 이 황당한 사고의 주인공이었다.[4]
가토급 잠수함 73번함 SS-284 툴리비(Tullibee), 메어아일랜드 해군 조선소에서 취역식을 가지고 있다. 이때까지는 이 잠수함이 어뢰 결함으로 인해 침몰하게 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것이다. - 1943년 2월 15일 촬영 |
툴리비는 1944년 3월 26일, 4번째의 초계항해 중 팔라우 섬 인근 해역에서 일본군 수송선단을 포착하고 끈질긴 추격 끝에 3천 7백미터까지 접근하는 데에 성공, Mark.14 어뢰를 발사했다. 하지만 약 2분 뒤, 이 어뢰는 원을 그리면서 자신을 발사했던 잠수함 툴리비에게 돌아왔고, 결국 그게 명중하여 툴리비는 자신이 쏜 어뢰에 자기가 피격되어 침몰했다.(...) 생존자는 단 한명.[5]
3.1 해결을 위한 노력
Mark.14 어뢰의 한심한 성능은 진주만 공습 이후 태평양에 제대로 남은 전력이 잠수함대 밖에 없었던 미 해군으로써는 매우 심각한 일이었는데, 심지어 어떤 잠수함은 적 함대에 겨우겨우 파고들어 6발의 어뢰를 발사했지만 모두 불발된 사례가 있을 정도였다. 그 때문에 미 해군 잠수함들은 구형인 Mark.10 어뢰를 가지고 작전에 임해야 했다.[6]
사실 태평양 전쟁 초기에는 이런 문제들이 알려지지 못했다. 알고 있었더라도 병기국 자체적으로 그 문제점을 알게 된 잠수함장의 입을 막아버리거나 개개인의 관리 문제로 치부해버린 것도 있었으며 그 동안 미 해군 잠수함장들은 "무능한 패배자의 변명거리나 될 것 같다"면서 참고 있었지만 그 불만이 어딜 가겠는가. 결국 잠수함장과 일선 잠수함전대장들의 항의가 빗발쳤고 심지어 일부 잠수함장들은 병기국까지 찾아가 쌍욕을 퍼부으며 병기국 연구원들과 몸싸움을 벌일 정도였다. 이 와중,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해군소장 찰스 록우드[7] 제독이 임명되자 어뢰의 성능이 이상하다는 것에 대해 록우드 제독 본인이 직접 정식적으로 공론화를 시작한다.
잠수함대 사령관으로 취임한 록우드 제독은 일선 잠수함 승조원들이 어뢰때문에 사기가 바닥을 치고있다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곧이어 잠수함들의 항해일지를 전부 뒤져서 어뢰가 기본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었는지 확인을 했는데... 앞에서 서술된대로 가히 충격과 공포 수준이었다. 심지어 일부 잠수함 승조원들은 이 어뢰의 추진 연료인 메탄올을 빼내 밀주[8]로 만들어 마시는 등 안 그래도 안 좋은 어뢰의 성능과 신뢰감은 한없이 나락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에 참지 못한 록우드 제독은 어뢰의 오작동 관련에 대해 미 해군 병기개발국에 정식 테스트 요구와 항의를 하고 1942년 6월 20일부터 약 한달간 직접 실탄사격 테스트까지 하며 그 자료를 바탕으로 성능의 재검증을 요구했지만 개발국은 "우리가 얼마나 많은 돈을 들여서 그걸 개발했는데, 불발일 리가 없다. 너희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제대로 사용 못하는 것이다"라면서 배째라 식으로 나갔다.[9]
바로 이 때, 미 해군 총사령관이자 해군참모총장인 해군대장 어니스트 킹 제독이 갑자기 개입을 하면서 상황이 급변해버렸다. 최종보스 등ㅋ장 킹 제독은 록우드 제독의 편지 사본을 읽어본 후 실 탄두를 장착하고 테스트를 진행하라'고 병기국에 명령을 내렸다. 해군참모총장이자 총사령관의 명령을 어길수는 없으니 결국 병기국은 실 탄두를 장착한 뒤 사격실험을 진행했고 록우드 제독의 실험결과와 유사하게 어뢰가 기존 수심보다 깊이 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마지못해 인정하게 되었다.
이후 Mark.6 기폭장치의 문제에 대해서 록우드 제독은 태평양함대사령관 체스터 니미츠 제독[10]의 동의 하에 기폭장치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접촉신관만을 사용하도록 지시했으나... 병기국과 개발 담당자였던 랄프 왈도 크리스티 제독이 태클을 걸어왔다.
결국 폭발한 록우드 제독은 니미츠 제독의 전폭적 지원과 동의 하에 워싱턴 D.C의 해군본부에서 병기국 인원들이 보는 앞에서 대놓고
"만일 병기국에서 어뢰를 똑바로 안 만들어줄것 같으면 우리 잠수함대는 함선국에 요청해서 어뢰 대신에 함선을 잡아 끌어당겨 구멍을 낼 갈고리 장대를 내놓으라고 할 수밖에 없다!"
라며 돌직구를 날리며 어뢰 성능의 개선을 촉구했고 병기국 인원들에게 악담을 퍼부으며 어뢰 결함문제를 공론화시켰다. 비슷한 피해자인 해군항공대의 뇌격기 조종사들 역시 "효과도 없는 어뢰 쓰느니 그냥 철갑탄 쓰겠다."해서 한동안 함선을 상대로도 일반 폭격기마냥 통상적인 수평폭격만 해댔는데, 물론 이런 방법으로는 당연히 전과가 신통치 않았다. 이후 미 해군의 항공어뢰는 지속적인 개량으로 눈부신 성능을 자랑했지만 기존의 허당 항공어뢰 이미지를 깨부수기는 너무 힘들었고, 결국 필리핀 해 해전에서 경항공모함 히요를 항공어뢰로 격침시키고 나서야 겨우 해소된다.
결국 이런 노력에 힘입어 어뢰 개발 관련 인사들이 물갈이 되고 개량 어뢰의 개발이 이루어지지만 당장 그 상황의 공백을 메꿀 필요도 있었기에 아래와 같은 대응책을 모색하게 된다.
항주수심 오작동 문제의 경우 록우드 제독의 테스트 결과 수심조절 다이얼에 나오는 것보다 약 3.3미터에서 3.4미터 이상 깊게 항주한다는 결과가 나왔기에, 이후부터는 항주심도를 약 3미터 이상 높게 임의로 설정해 어뢰발사를 실시하게 되었다. 자기기폭장치의 경우 그냥 잠수함장들과 지휘관들의 재량하에 사용을 금지시켰다.
하지만 이번에는 어뢰가 충돌해도 격발되지 않는 문제가 터졌고, 해군 병기국에서는 "결국 잠수함장들이 어뢰를 미숙하게 사용한 것이다." 라는 반응을 보이며 반격에 나섰다.
이에 록우드 제독은 하와이의 해안절벽에 대고 3발의 어뢰를 쏘아 불발이 된 어뢰 1발을 회수해 조사를 한 결과... 기폭장치의 격침이 너무 무겁고 마찰이 심해 불발이 발생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해결책은 간단했는데, 격침을 훨씬 가벼운 것으로 개량을 하는 것만으로 불발율이 확 떨어진 것이다. 이런 식으로 Mark.14 어뢰에 대한 문제점을 하나하나 수정하고 나서야 잠수함대는 이제야 좀 쓸만하다 라는 평을 내리게 되었다. 이 격침은 진주만 공습 때 격추됐던 레이센의 프로펠러를 녹여 재활용한 것을 썼다고 한다.
하지만 상기된 자이로스코프의 오작동 문제로 툴리비가 침몰하는 사고가 터지면서 여전히 문제가 산재해 있었고, 병기국에서부터 제7함대 잠수함대사령관으로 임명된 랄프 크리스티 소장은 Mark.6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휘하 잠수함장들에게 강요하고 있었으며 자신의 계급과 짬을 이용해서 Mark.6 자기기폭장치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는 잠수함장들이나 지휘관들에게 인사적 불이익을 주거나 본토나 지상근무 등의 한직으로 내쫒는 보복인사조치까지 하고 있었다! 자기기폭장치 사용을 금지한 록우드 제독의 태평양 함대 잠수함대와 사용을 강요하는 크리스티 제독의 제7함대 잠수함대 사이에서 잠수함장들은 심한 곤욕을 치루고 있었는데,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 이전에도 각 함선마다 알아서 자기기폭장치를 해제하는 식으로 운영을 해 왔지만 크리스티 제독 휘하의 제 7함대 잠수함대 소속 함장들은 항구 입항때나 기폭장치를 활성화시켰고 출항하자마자 해상에서 기폭장치를 해제하는 식으로 대처해왔다.
당시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의 총책임자였던 랄프 크리스티 제독은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듣고 뚜껑이 열렸고 병기국과 함께 니미츠 제독에게 "자기기폭장치 사용 금지명령을 내린 것에 대한 이유를 알고싶다" 면서 항의를 했으며 니미츠 제독은
"그것은 아무래도 적이 대응책을 준비했거나, 특이조건 하에 기폭장치가 작동을 하지 않거나, 요구되는 발사 조건이 비현실적인 것 때문으로 추정됨."
이라고 답변을 해왔다. 약간 의역하면 "여튼 이유는 뭔지 모르겠는데 아무래도 이거 쓰는건 좀 아닌거같음. ㅇㅇ" 이라는 의미. 니미츠 제독은 당시 록우드 제독을 상당히 신뢰하고 있었던데다 자기 자신 역시도 잠수함 근무를 해본 짬밥이 있었고 당시에는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무엇인지 명확히 밝힐 방도는 없었으나 분명히 Mark.6 자기기폭장치가 뭔가 문제가 있다는 것은 분명 인식을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이 답변으로 니미츠 제독은 사실상 크리스티 제독을 쌩깐것이나 다름없었고[11] 크리스티 제독은 병기국과 함께 호주의 프레멘틀에서 자기기폭장치에 대해 토론회를 펼쳤고 자기기폭장치를 꼭 사용해야만 하는 이유에 대해서 록우드 제독에게 다음과 같이 토론회 결과를 서신으로 보냈다.
"일단 Mark.6 자기기폭장치는 최소한 가끔씩 정상적으로 작동하며, 흘수선 깊이가 낮은 소형 선박에 대한 공격방법은 자기기폭장치 활성화가 해답인데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물건을 포기하게 되면 앞으로 자기기폭장치의 문제점에 대해서 영영 해결할 방법을 상실할 것임. 자기기폭장치가 문제가 있으면 이를 해결하기 위해 태평양 잠수함대, 제7함대와 해군 병기국과의 공동 조사를 해야 하며 최소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자기기폭장치 사용금지 명령을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바임."
이 서신에는 약 1년전, Mark.14 어뢰의 문제점에 대해 매우 고압적인 태도를 보이며 개선요구를 묵살하던 때랑은 완전 딴판인, 당혹감과 절박감까지 느껴지는 어투가 줄줄 묻어나왔으나 록우드 제독은 이 내용에 대해서 즐을 외치며 쌩깠다.
사실 크리스티 제독의 말에도 어느정도는 일리가 있었다. 자기기폭장치 결함의 원인이 당시에는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었고 흘수선이 낮은 소형선박에 대한 공격대책으로서 상당히 주목받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기에 이를 쉽게 포기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이미 병기국과 자기기폭장치에 대한 신뢰감이 바닥을 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로 인해 생기는 결과와 피해를 감당을 할 수 없는 노릇이어서 이 서신은 그냥 무시를 받았다. 록우드 제독에게 무시당한 크리스티 제독은 "자기기폭장치의 반대는 곧 어뢰를 반대하는 거나 마찬가지인데 그 어뢰를 써서 전과 자랑을 하고 돌아댕긴 놈이 누구냐"며 격분했다.
크리스티 제독이 이런 막나가는 행위를 할수 있었던 데에는 당시 제7함대 사령관이었던 카펜더 제독이 맥아더 장군의 신임을 상당히 못 받고 있었던것도 있는데, 이 때문에 크리스티 제독의 직속 상관임에도 불구하고 해군본부 병기국이라는 막강한 빽을 등에 업고 막가파 식으로 나가는 크리스티 제독의 독단적 행위에 대해 억제를 할 방법이 마땅찮았다. 즉 선임대우 못 받고 먹힌거다.
이런 상황에 미해군 잠수함장들은 그저 눈치껏 알아서 대응을 해 나가고 있던 실정이었으나 카펜더 제독의 후임으로 임명된 제7함대 사령관인 킨케이드 제독[12]이 이 상황을 곱게 볼리 만무했고, 킨케이드 제독의 명령 하에 Mark.6 자기기폭장치의 사용을 원천 금지시켜버림으로써 미 해군 잠수함대는 겨우겨우 자기기폭장치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3.2 평가
이 속칭 어뢰 스캔들은 미 해군 병기국 역사상 최대, 최악의 스캔들로 기록되었고 HVAR 로켓 등의 명작 무기체계를 만들어낸 병기국의 성과에 심각한 오점으로 남았으며 Mark.6 자기기폭장치 개발의 총책임자였던 랄프 왈도 크리스티 제독은 1944년 11월경, 제7함대 잠수함대 사령관직에서 해임당하고 본토로 전출되고 말았다.[13]
전기추진방식의 Mark.18 어뢰 배치와 기존 어뢰의 개량 이후에도 어뢰에 대한 불신은 높았고, 필리핀 해 해전에서 다이호와 쇼카쿠를 Mark.14 어뢰의 구조와 부품을 공유하며 저속 장거리 발사 기능을 뺀 신형 어뢰인 Mark.23 어뢰로 침몰시키고 나서야 어뢰에 대한 신뢰감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어뢰문제가 어느정도 해결 되는 시기가 1943년 9월 경이었다. 근 2년의 기간을 어뢰 문제로 골치를 앓은 셈.- ↑ 즉 어뢰 문제는 미국 대통령인 루스벨트 역시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 ↑ 이런 문제가 터진 이유는 이 당시 미 해군이 어뢰에 쓰던 폭약인 Torpex가 물보다 1.6배 정도 무거웠다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 ↑ 사르고의 경우에는 침몰은 면했었다.
- ↑ 사실 Mark.14 어뢰 말고도 Mark.18 어뢰 역시 똑같은 사고를 내 미 해군 잠수함들 중 탑 에이스였던 발라오급 잠수함 탱(Tang)이 침몰하는 사고도 있었다.
- ↑ 이 유일한 생존자는 함교 위에 있던 병기 담당 인원이었고, 잠수함의 침몰 이후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 표류하다가 일본 구축함 와카타케에게 구조되어 전후 미국으로 귀환했다.
- ↑ 한 가지 웃기는 것은, 구식 S급 잠수함의 경우 어뢰발사관의 길이가 짧아 Mark.14 어뢰를 사용할 수 없어 본의 아니게 Mark.10 어뢰만 사용하게 되어 피해를 덜 봤다는 사실(...).
- ↑ Charles Andrews Lockwood, 1890년 5월 6일 버지니아 주 미들랜드 출생. 1912년 애나폴리스 졸업 후 미시시피, 애커슨 등의 수상함 근무를 시작으로 1914년 잠수함에서 근무하며 잠수함 전문 장교로서 본격적인 커리어가 시작되어 잠수함부대 참모장 역임. 당시 미해군 잠수함 계의 권위자이자 잠수함 오타쿠로서 1942년 5월 소장으로 진급 후 남서태평양 잠수함부대 사령관으로 부임. 이후 중장으로 진급하며 태평양함대 잠수함 함대 사령관으로 부임하며 잠수함 전력의 강화를 위해 발벗고 뛰어다녔으며 그 공로와 잠수함대의 활약을 인정받아 전후 수훈장 3회 등의 훈장을 수여받고 1947년 퇴역, 1967년 6월 7일 사망.
- ↑ 이렇게 만들어진 밀주는 이름하야 어뢰 주스(Torpedo Juice)... 물론 미 해군에서도 못마시게 하려고 빨간색 염료를 타기도 했지만 보급 식빵을 잘 말려 겹겹이 쌓은 후 메탄올만 걸러내 마신다던가, 혹은 어디선가 부품들을 삥땅쳐내 메탄올을 걸러내는 장치 등을 만들어 어떻게든 마시고 말았다.(...) 당연한 얘기지만 메탄올 항목에도 서술되어 있듯 취하기는 취하나 애당초 마실 수 있는 게 아니기에 잘못 마셨다간...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 ↑ 어뢰 성능의 재검증 관련에 대해서 개발국은 "정확한 수심대로 항주를 한다는 뻔한 결과를 놓고 발당 1만달러나 되는 어뢰를 낭비할 수 없다"라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 반응은 사실 어느정도 이해는 되는 것이, 당장 전쟁중이어서 돈 한푼이 아쉬운 상황인데다가 어뢰라는 무기체계는 당시에도 최첨단 기술 중 하나였기에 발당 가격이 괴악하게 비쌌다. 하지만 정상적인 테스트를 하지 않고 결함을 발견하지 않은 채(근 15년의 개발기간 동안 실 탄두 장착 사격테스트를 단 1회도 안 했다!) 그대로 실전배치를 시켜버린 것은 빼도박도 못할 까일거리 맞다.
- ↑ 참고로 체스터 니미츠 제독 자신도 잠수함에 관심을 많이 갖고 있었다. 항목 참고.
- ↑ 쉽게 말하자면 개발자에게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니가 만든 게 불량이니까 안 쓸거다."라고 한 것이다.
- ↑ 전임자와는 다르게 맥아더의 신임을 얻었고 이전엔 과달카날 전역에서 치열했던 전역 중반에 한동안 항모부대를 지휘해서 과달카날의 제해권을 유지하는데 기여했고 북태평양군 사령관으로 타군 장성들과 별마찰없이 전구를 지휘하는등 개인적 역량도 나쁘진 않았고 '미 해군의 마당발'이라는 별명을 가진만큼 지지인맥도 상당했다.
- ↑ 어뢰 스캔이 일단락된후 한동안 유임되었는데 그럭저럭 지내다 지휘체계를 위반한 월권행위를 몇번 일으킨것을 상관인 킨케이드 제독에게 발견되어 해임되었다고한다. 그후 미 본토 워싱턴주의 퓨젯 사운드 해군 조선소장으로 지내다 종전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