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군 4 원수 | ||||
체스터 니미츠 | 어니스트 킹 | 윌리엄 홀시 | 윌리엄 리히 |
해당 인물의 이름을 딴 항공모함에 대해서는 니미츠급 항공모함 문서를 참조하십시오.
God grant me the courage not to give up what I think is right even though I think it is hopeless.하나님은 비록 내가 희망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내가 올바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포기하지 않도록 용기를 주신다.
A ship is always referred to as "she" because it costs so much to keep her in paint and powder.배를 왜 "그녀"[1]라고 부르냐고? 도색하고 분칠하는 데 돈이 엄청나게 드니까.
이름 | Chester William Nimitz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
출생 | 1885년 2월 24일, 미국 텍사스 프레더릭스버그 |
사망 | 1966년 2월 20일, 미국 캘리포니아 예르바부에바 섬 |
복무 | 미합중국 해군(1905–1966)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
주요 이력 | 미군 해군참모총장 |
주요 참전 |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필리핀 해 해전 레이테 만 해전 오키나와 전투 |
주요 서훈 |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국가 방위 공로 훈장 프랑스 레지옹 도뇌르 훈장 |
1 개요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태평양 전쟁에서 맹활약한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태평양 전쟁을 미국의 승리로 이끄는 데 엄청난 공헌을 한 유능한 장성이었다. 어니스트 킹, 윌리엄 홀시, 윌리엄 리히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해군 원수[2]의 일원이다.
2 생애
1885년 2월 24일 텍사스 프레더릭스버그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니미츠가 태어난 지 5달 만에 류머티스성 심장병으로 사망하여 니미츠는 모친이 재혼하기 전까지 친척의 도움을 받아 양육되었다. 8세 때부터 방과 후에 정육점 일을 하는 등 힘든 유년기를 보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당시 니미츠의 조부인 찰스 H 니미츠(Charles H. Nimitz)는 독일 상선의 선원 출신이었는데 니미츠에게 바다에 대한 이야기를 해 줌으로써 니미츠가 해군에 관심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니미츠는 원래 웨스트포인트에 진학하여 미 육군 장교가 되고 싶어했으나 당시 TO가 없었고, 대신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였다. 1905년 졸업할 당시에는 114명 중 7등으로 졸업하는 등 생도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니미츠 본인은 독서, 산책과 운동 등을 즐겨해 언뜻 보면 조용히 혼자 지낼 것처럼 보이는 사람이었지만 상당히 사교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항상 집에 해군 관련 인물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고 항상 환영했다고 한다. 기억력과 배려심이 상당히 좋아서 조직 관리에 아주 뛰어난 능력을 보였고 드립력 유머가 뛰어났다고 한다.[3] 오만한 성격 탓에 정적이 많았던 더글러스 맥아더와 달리 인성 문제가 아무것도 없다 보니 전국민에게 사랑받은 제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비록 정치에 관심이 없는 참군인이라 해군참모총장의 지위에서 멈추게 되지만...
2차 대전 해군에 좀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 정도로 유명한 제독이며 그 당시 주력함 전함보단 잠수함에 더 관심이 많은 제독이기도 했는데 그 이유는 2차 대전까지(그리고 그 이후로도) 전함과 인연이 멀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미 해군 최연소 구축함 함장(21살!)[4]을 맡은 적이 있고 뛰어난 기술자+행정가여서 민간 기업으로 스카웃 제의도 받은 적이 많은 진정한 먼치킨 제독.
대위 때 구축함 함장을 하다가 한번 좌초한 경험이 있었으나 평소에 뛰어난 능력을 보여 주었고 과실이 거의 없었다 보니 상당히 관대히 넘어갔다.[5]
그후 독일로 유학 가서 배워 온 디젤 엔진 기술을 이용해 해군 조선소에서 근무하게 된다. 이로부터 니미츠는 디젤 엔진에 관한 한 해군 제일의 권위자라 할 정도로 뛰어났는데, 이 때문에 민간 기업에서도 스카웃 제의가 들어왔으나[6] 해군에 남기 위해 거절하였다. 그리고 그 뒤에 잠수함에 디젤 엔진을 적용시키기도 하고 잠수함 승조원으로 근무하기도 하면서 니미츠는 다른 연합군 장성들과는 달리 2차 대전 발발 직전에도 잠수함에 대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생각을 가졌으며, 태평양 함대 사령관 취임식 역시 잠수함인 그레일링호 갑판에서 이루어졌다. 니미츠 본인이 잠수함 부대 출신이라 원하기도 했지만, 니미츠의 잠수함대 애호와는 별개로 취임식을 거행할 만한 대형 수상함정이 전무했다는 사정도 있고, 무엇보다도 취임식을 치른 진주만의 잠수함 도크는 연료 저장 시설과 함께 진주만에서 타격을 입지 않은, 한 손에 꼽히는 해군 시설 중 하나였다. 참고로 취임식을 치뤘던 진주만 잠수함 도크는 니미츠가 초급 장교 시절에 건설 감독을 맡았던 시설이다.[7]
항공모함의 경우는 오늘날 주류가 된 항공모함 주변을 원형으로 둘러싸는 원형진을 고안한 연구 멤버 중 한명이었다. 참고로 이 진형은 유틀란트 해전의 사후 연구 과정에서 영국군이 자랑했던 복잡하고 예술적인 기동이 '그저 복잡하다'는 미 해군 지휘관들의 문제 의식 하에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연구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다. 그 이전까지는 직사각형의 함대 배치를 했기 때문에, 함대가 방향을 선회하는 경우 개별 함정의 기동이 매우 복잡하다는 문제가 있었고, 그리하여 니미츠가 참가한 연구에서는 유틀란트 해전 역시 혼란을 우려해 두 함대가 선회를 하지 못한 채 조우하고 끝난 것으로 결론을 내렸던 것 같다. 니미츠는 해군 대학에서 이 연구를 가지고 학위를 땄는데, 딸이 유틀란트 해전의 의의를 '요약'하는 것에 대해서 대학 리포트를 쓰기 위해 질문을 하자 이쑤시개와 후추통을 가지고 2시간 동안 식탁 위에서 개별 함정의 기동을 일일이 설명했던 일화가 있다고 한다. 아마도 그 시점까지 니미츠가 해군에서 했던 일들 중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었기 때문일지도.
그 외에는 퇴역 함정의 항공기 공습의 위력을 시험하는 실험에도 참여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 비주류였기 때문에 떠맡은 일이었던 것 같다. 이 실험에서 항공기의 뇌격은 퇴역한 순양함을 일격에 두 동강 내는 위력을 과시했고, 당시 실험에 참여했던 니미츠는 깊은 인상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것과는 별도로, 니미츠가 항공기나 항공모함에 더 관심을 가지는 일은 없었다.
진주만 공습 직후 미 해군 태평양 함대 사령관을 맡았다.[8] 최초 부임 시에는 패전 처리가 임무였던 것 같다. 유명한 일화로 부인에게 "태평양 함대의 사령관에 부임하게 되었다"고 말하자, 부인이 "축하해요. 당신은 항상 그런 직책에 부임하길 원했잖아요."라고 축하의 말을 하니 "그런데, 그 함대는 이미 바닷속에 가라앉아 있다오."라고 대답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 게다가 해군 본부는 비밀리에 니미츠를 부임시키길 원했기 때문에, 니미츠는 전속부관과 함께 사복 차림으로 기차를 타고 서해안까지 이동해서 비행기를 타고 현지에 도착해서 잠수함 위에서 취임식을 치뤘다. 이 과정에서 니미츠는 자신의 정체를 기자들이 알아챌까 조마조마했다고 하는데, 그런 일은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다.[9]
그리고 니미츠는 그 당시에 소장이었기 때문에 해군 사령부 지휘관의 궁색을 맞추기 위해 대장으로 승진하게 된다. 당연히 수많은 선배들을 재치고 한 승진이기 때문에 니미츠는 현지에 부임해서도 '현지 지휘관들의 깔보는 시선'에 상당히 곤란해했으며, 그런 예하 제독들의 태도를 아니꼽게 여긴 윌리엄 홀시 제독의 도움으로 간신히 리더쉽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니미츠 본인마저 '잘리지 않고 6개월만 버텨도 성공'이라고 여기고 있었다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그나마 유효한 전력인 항공모함 및 잠수함대로 당시 세계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일본 해군 연합함대를 맞아 전선을 유지했으며, 해군 장관에게서 위임받은 태평양 함대 사령부 인선을 위한 무제한의 인사권(!)을 휘둘러서 미 해군 본부의 인사부처에서 일할 때 눈여겨 본 '인정받지 못했던 인재들(레이먼드 스프루언스가 대표 주자)'을 하나씩 긁어모아 자신만의 사령부를 건설하게 되며, 이 시기에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윌리엄 홀시, 마크 미처, 커티스 르메이 등등의 태평양 전쟁의 주요 지휘관들이 사령부에 합류하게 되고(르메이는 해군 장관의 요청.), 미드웨이 해전 등에서 큰 실적을 남긴 태평양 함대의 정보부 역시 질적, 양적으로 크게 확대되게 된다. 니미츠 제독은 어려운 시기에 자신을 도와준 윌리엄 홀시 제독의 은혜를 잊지 않고 중부 태평양 진격 작전 이후 많은 도움을 줬다. 루손 섬 상륙 작전중 태풍이 제 3함대를 직격해서 많은 손실을 입어 사문회에 불려나갔던 윌리엄 홀시 제독을 어니스트 킹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적극적으로 비호해 준 일은 그 한 가지 사례.
니미츠는 자신이 뽑은 인물들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이 선택한 지휘관들이 전투에 돌입하면 전투와 관련된 모든 사항을 위임한 스타일로도 유명하며, 이후 혼자서 함대를 통제하려 들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이나 작전 입안 전에 참모진들의 난상 토론으로 계획을 만들면, 실전에서는 본인의 허락 없이는 작전 변경을 할 수 없었다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스타일과도 종종 비교되었다. 레이테 만 해전 당시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고 홀시 제독에게 전문을 보낸 일화는 이런 불간섭 원칙을 깼던 예외 중의 예외로서 당사자였던 홀시 제독마저 당혹스러워했던 해프닝이다.
사실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 사건은 의도치 않게 일이 확대돼 버린 경우다. 원래 "34기동부대는 어디 있는가?"가 전문의 본 내용이고, 뒤의 "전 세계가 궁금해하고 있다."는 전문의 끝을 알리는 삽입구였다. 이 경우 뒤의 삽입구는 해당 전문을 다른 전문과 문장길이를 동일하게 맞춰서 도청을 당하더라도 전문의 내용을 쉽게 파악할 수 없게 만드는 역할을 한다. 당일이 크림 전쟁 당시 발라클라바 전투가 벌어진 날과 같은 날이라 전문 담당하는 소위가 발라클라바 전투를 기리는 테니슨의 '경여단의 돌격(Charge of the Light Brigade)"의 한 소절을 삽입구[10]로 쓴 것. 그런데 당시 홀시가 이끌던 3함대는 일본 해군 오자와 지사부로 제독의 미끼 전술에 낚이는 바람에 산 베르난디노 해협을 완전히 비워 버려서 니미츠는 물론이고 7함대 사령관 토머스 킨케이드 제독으로부터도 후딱 돌아오란 전문을 수시로 받고 있었다. 이런 상황이니 홀시가 해당 전문을 전 세계가 궁금해하는데 너 어디서 삽질하고 있냐? 빨리 안 와?라고 받아들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고 당연히 격분, 니미츠는 당황했고 담당 소위는 전출당했다. 상황이 어떤지 대충 느끼고는 있었을 텐데, 전형적인 쏘가리였나 보다...
여하튼 제독들을 포함해 도크, 보급, 정보, 해병대 등등의 병과 역시 니미츠의 기대에 충족하는 활약을 펼쳤으며, 니미츠가 뽑지 않은 동시에 실적도 좋지 않았던 이들은 니미츠가 말없이 지켜보다가, 사령관의 인내심이 바닥나는 순간 태평양 사령부에서 전출되었다. 하지만 이때도 징계 형식이라기 보단 그저 근무지 변경이나 진급을 위한 순환 근무 등으로 처리하여 원성을 들을 일이 없다시피 했다고 한다.
니미츠의 인선이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고, 함대 운영의 중심을 항공모함으로 변경하는 기본 지침이 결정된 이후, 미 해군 태평양 함대는 산호해 해전에서 일본 해군에게 첫 패배를 안겨 줬고,[11]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해군의 주력 항공모함을 모조리 인공어초로 만든 뒤 주요 거점을 중심으로 반격을 펼쳐서 일본군을 압박했다. 이 승리를 일궈낸 것은 니미츠가 완성한 '알아서 완벽하게 돌아가는 자신만의 사령부'였고, 니미츠 본인은 위에서의 압박에 실드를 쳐 주거나 부하들의 요구 사항을 관철하는 것 외에는 권총 사격(군인다운 취미라고 생각해서 취미로 삼으려고 노력했다.별로 안 좋아했구만 그의 수전증 치료에도 큰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과 산책으로 시간을 때웠다고. 이는 사령관이 권총 사격을 즐길 정도로 여유가 있음을 부하들에게 보여 주려는 의도도 있었다.
소소한 에피소드로 제임스 포레스탈 앞에서 망신(?)을 당한 적이 있다. 태평양 사령부를 방문한 포레스탈과 니미츠가 보트를 타고 진주만을 둘러보고 있었는데 마침 상륙함을 발견하였다. 그러자 니미츠는 상륙 작전 때 상륙함을 어떻게 운용하는지, 그리고 상륙함의 가치가 어떠한지에 대해 포레스탈에게 상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런데, 니미츠의 말이 끝난 직후 상륙함 위에 나타난 것은 수영복 차림의 해군 간호사들(...).
그 활약상으로 종종 더글러스 맥아더 육군 원수와 비교되는데, 전체적인 평가는 니미츠 제독이 가치 있는 승리를 더 많이 일궈냈다는 평이다. 그러나 정치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아서 일본 항복 조인식 대표의 명예는 맥아더 원수에게 내 줬고 한반도에도 영향을 미쳤다. 즉, 니미츠 원수가 극동 방면 총사령관이 되었다면 대한민국 해군도 육군에 버금가는 발전(육방부 소리 듣는 한국의 현실을 생각해보자...)이 가능했을 거라는 가설이 그것이다.[12] 그러나 니미츠는 GHQ 사령관보다 해군참모총장 자리를 더 바라고 있었기 때문에 별 의미는 없다. 그 때문에 항복 선언 대표로 맥아더가 단독으로 선정되었어도 참았다고 한다. 실제로 본국으로 귀국한 뒤 당시 해군참모총장의 고유 권한[13]을 상당히 포기하면서까지 그 자리에 올랐던 걸 보면 일생일대의 꿈이었나 보다. 해군으로서 오를 수 있는 가장 높은 위치라 그런 건지.[14]
해군참모총장의 임기가 끝난 후엔 캘리포니아에서 지내다가 그 당시 분쟁이 벌어졌던(그리고 현재에도 진행 중인) 인도-파키스탄의 카슈미르 분쟁 조정 위원회의 유엔 판문관을 지내기도 했다. 허나 이 위원회는 결국 인도와 파키스탄 양측이 조정을 거부함에 따라 결국 해산되고 그 뒤론 해군장관의 고문역을 하다가 그만둔 후엔 인기가 많다 보니 각지를 돌면서 연설 혹은 행사에 참여하거나 했고 1960년대에 출판된 《해양력:해군의 역사》 편찬에 참가했다.[15] 그리고 러일전쟁 때 일본을 승리로 이끈 도고 헤이하치로를 존경했었기 때문에 그의 기함이던 미카사[16]와 그의 생가를 복원, 유지하는데 큰 공헌을 했다.
2차 대전 이후 미 육군 항공대에서 공군으로 바뀐 미 공군과 미 해군의 싸움[17]이 슬슬 시작할 때 니미츠의 해군참모총장 퇴임 연설은 해군에 힘을 실어 줬고[18] 후에 있었던 제독들의 반란 사건에 도움을 준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니미츠 자신은 불필요한 정치적 논쟁[19] 때문에 구술사를 제외하고는 자신의 회고록을 남기지 않았다. 부하들에 대한 개인적인 감정이 담긴 편지도 전부 부인이 소각해 버렸다. 니미츠 사후 미 해군사관학교 교수인 포터가 쓴 전기가 니미츠에 대한 고전이 되었다. 한국에도 2권으로 번역이 되었고 나중에 양장 합본이 나왔다.[20] 그러나 지금 그의 이름은 미국의 힘을 상징하는 니미츠급 항공모함에 붙여졌으니 그 노고는 충분히 보상받은 셈일까. 항공모함 함대를 앞세워서 승리를 일궈낸 사람을 기리는데 이보다 더 알맞은 무기는 없으리라.
3 기타
- 영화 미드웨이에서는 헨리 폰다가 열연을 펼쳤다.
-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선 평범한 백인 남성으로 나오긴 하는데 미드웨이 해전을 앞둔 미 해군 전력의 상황에 낙담해 "이런 니미! 움직일 수 없는 항모는 2척밖에 없는데."라고 한마디 해줘서 굽시니스트 특유의 언어유희를 보여줬다. 물론 그후로 다들 알다시피 파손된 항모 요크타운을 3일 동안 미친 듯이 수리해 합류시킨다.
- 1980년 영화 최후의 카운트다운에서는 그의 이름을 딴 니미츠급 항공모함 1번함 니미츠가 F-14를 가득 실은 채로 아직 니미츠가 소장이었던 진주만 공습 전날로 타임슬립한다. 졸라 짱센 전투기가 날아다니는 건 둘째치고 당시엔 상상도 못했던 헬리콥터(...)의 위용에 넋이 나간 채 니미츠함에 탑승한 상원의원이 루스벨트랑 니미츠가 나도 모르게 뭔 수작을 부린 거냐며 비명을 질렀다.
- 아들인 체스터 윌리엄 니미츠 주니어도 대를 이어 해군에서 복무하였는데, 진주만 공습 때 잠수함(USS Sturgeon)을 지휘했으며, 소장까지 진급했다.[21](아버지가 종신 원수였으므로 아버지보다 빨리 퇴역했다!) 하지만 아들은 2002년에 아내와 함께 수면제를 과다 복용하고 자살했다. 아내가 말년에 시력을 잃었고 자신도 위장염과 울혈성 심부전으로 고생하였다고.
대부분 내용의 출처는 한국에도 정식 출간된 니미츠 전기이다.
4 진급 내역
- 1907.01.07 : 소위(Ensign)[25]
- 1910.01.31 : 중위(Lieutenant Junior Grade)
- 1910.01.31 : 대위(Lieutenant)
- 1916.08.29 : 소령(Lt. Commander)
- 1918.03.08 : 중령(Commander)
- 1927.06.02 : 대령(Captain)
- 1938.06.23 : 소장(Rear Admiral)
- 1941.12.31 : 대장(Admiral)[26]
- 1944.12.19 : 원수(Fleet Admiral)[27]
5 주요 서훈 내역
- 해군 공로 훈장
- 육군 공로 훈장
- 해안경비대 인명 구조 기장 은장[28]
- 미 국가 방위 훈장
- 아시아-태평양 전역 복무 공로장
- 제2차 세계대전 승전 기념장
- 국가 방위 공로 훈장
- 레지옹 도뇌르 훈장
- ↑ 영어권에서는 전통적으로 배나 전차, 무기류나 항공기를 여성 명사 취급한다.
- ↑ 이외에 미서전쟁의 영웅 조지 듀이 대원수도 있긴 하나, 엄밀히 말하자면 듀이 역시 5성 계급을 단 적은 없다.
- ↑ 니미츠는 화장실에 유머책을 상비해 놓고 보았고 니미츠의 유품 중에 여러 모로 공부한 흔적이 있는 너덜너덜한 유머책이 있었다고 한다.
- ↑ 마찬가지로 쟁쟁한 제독들인 레이먼드 스프루언스나 헬시가 30대 전후에 처음으로 구축함 함장을 맡았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대단한 거다.
비록 구식함이었지만 - ↑ 이 일은 본인에게 추억이 된 듯, 훗날 원수가 되었을 때 "군법 회의에 회부되고도 장성으로 진급한 전례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자기 자신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면서 웃음 짓기도 했다.
역시 먼치킨 - ↑ 부슈-슐처 브라더스 디젤 엔진 컴퍼니(Busch - Sulzer Brothers Diesel Engine Compnay) 사에서 5년 계약 연봉 2만 5000달러짜리 일자리를 제의하였는데도 "고맙지만 해군을 떠날 생각은 없다" 며 거부했다. 당시 그의 연봉은 3,456달러였고 그 무렵 2만 5천 달러가 현재 가치로 따지만 50만 달러(!)를 휠씬 넘는 엄청난 금액이다.
- ↑ 원래 잠수함 도크는 건설 자재 배정 자체가 안 되어 있던 것을 니미츠가 부여받은 권한으로 본토에서 징발하여 끌고 온 거다. 즉 거의 니미츠가 다 한 것.
- ↑ 그 직전에는 워싱턴 해군 본부의 항해국장을 맡고 있었다.
- ↑ 단, 그와 면식이 있던 교수 하나는 그를 알아보고 니미츠 제독이 여기 탔다고 떠들고 다녔다고.
- ↑ 문장 길이로 내용을 추측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 문장 길이를 비슷하게 맞추려고 삽입하는 문구.
- ↑ 당시 미 태평양 함대는 항모 렉싱턴 호를 잃고 요크타운 호가 중파되는 손실을 입었다. 일본 해군은 소형 항모 쇼호를 잃고 즈이카쿠와 쇼카쿠가 중파되는 손실을 입었지만 일본군이 소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전략적인 승리는 미군이 거둔 셈이 되었다.
- ↑ 참고로 한국과는 달리 니미츠는 일본 해군의 복구에도 어느 정도 기여했고, 준사관 시절 만날 기회를 가졌던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 제독을 존경했다. 그런 반면 야마모토 이소로쿠 제독에 대한 개인적인 평가는 매우 좋지 않아서, 정보부 참모들이 야마모토 제독이 탑승한 일본 해군기를 격추하는 작전을 입안하자 '멍청한 놈을 죽이고 똑똑한 이가 대신하게 하는 결과를 낳는 것이 아닌지' 우려했다는 일화가 있다. 이때 정보부 참모의 대답은 '이소로쿠 제독의 상징적 의미는 미 해군에서 니미츠 제독의 상징성과 같기 때문에 대신은 불가능하다.'였다. 야마모토를 무시했다기 보단(일단 진주만 기습만 해도 엄청난 평가를 받았다) 만약을 대비하는 경우라고 봐야할 듯. 정보참모 레이턴 대령이 "이소로쿠가 갖는 위치는 제독님과 동등하기 때문에 절대 딴 놈이 그 자리 못 꿰찹니다." 라고 해서 결국 작전은 실행되었고, 결과적으로 일본군의 사기에 대타격을 가하는 데에 성공했다.
- ↑ 일단 임기부터 기존의 4년이 아닌 2년이었고, 대통령을 만나려면 해군 장관을 반드시 거쳐야 했다.
- ↑ 해군 장관은 민간인 출신이 될 때도 있으며 정치적으로도 할 일이 많은데 니미츠가 정치를 좋아하지 않기도 했다.
- ↑ 이 책은 7개 국가에 번역되어 출판되었는데 어째 국가마다 제목이 다르다...
- ↑ 미카사는 러일전쟁 이후로 박물관처럼 돼 버렸는데 소련은 당연하게도 이걸 파괴하려 했다. 그런데 명분이 없으니 요새 해체라는 명분을 내걸었고 니미츠는 미카사에 있던 마스트와 포대를 제거함으로서 지켜낸다.
- ↑ 다음 전쟁 때 각자의 전략적 역할을 정하기 위한 싸움+그를 위한 예산 다툼.
- ↑ 하지만 공군의 홍보가 워낙 뛰어나서 뒤에 이 힘을 상당수 까먹는다.
- ↑ 전후 작전 상의 문제 및 지휘권 다툼으로 많은 장군들과 제독들이 논쟁을 불러 일으킨 경우가 많았다. 이들은 각자의 회고록에서 자신의 주장을 다시 강조함으로서 논쟁을 야기시켰는데, 대표적인 경우가 사이판에서 지지부진한 진격으로 해병대사령관에게 해임당한 육군 장성 스미스 소장 등이 있다. 물론 그 육군 장군 스미스를 해임한 해병 장군 스미스 중장도 회고록을 내서 자신이 육군의 모든 분노를 떠안도록 니미츠 제독의 해군에게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홀시 역시 회고록을 남기지 못했지만 전후 레이테에서의 지휘로 곤욕을 치뤘고 버마 전선의 조지프 스틸웰 역시 정치적 입장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스틸웰은 회고록의 서문만 정리하고 사망한다).
- ↑ 역자 서문에서 지적하듯이 허만 우크의 Winds of War가 이 전기를 대단히 많이 참조했다.
- ↑ 니미츠 2세도 2차 대전에서 많은 공훈을 세웠고 부친의 후광에 힘입어 4성 제독이 될 수 있는 여지는 충분했지만 전쟁 후 변화된 해군 장교로서의 가치관(제독들이 정치가에게 과도하게 종속되었다고 생각했다.) 에 의문을 품었고 결국 전역을 결심했다고 한다..
- ↑ 과거에는 독일어에서의 z를 '쯔'라고도 썼기 때문에 '니미쯔'는 독일어 Nimitz의 번역으로 가능한 표기이다. 슈바르쯔→슈바르츠(Schwarz), 쯔바이→츠바이(Zwei) 등. '니미쓰' 또는 '니밋쓰'라고 쓴 경우는 일어 표기인 ニミッツ의 중역일 가능성이 높다.
하루제보단 낫지 뭘. - ↑ 다만 미 해군에서 와스프급 상륙모함의 LHD-7 이오지마라든지 알레이버크급 이지스 구축함의 DDG-118 대니얼 이노우에처럼 군함 이름에서 일본스러운 이름이 아예 없진 않다. 알레이버크급에는 중국계 제독의 이름도 붙어있는 판인데 이오지마야 애교고 이노우에도 명예 훈장 수훈자니까 당당하다. 타이콘데로가급 순양함에도 장진호 전투로 유명한 장진호의 이름이 일본식 이름인 초신으로 올라 있다.
사실 이름을 따올 제독이나 유명인사들보다 이름을 붙일 배가 더 많아서... - ↑ 실제로 김홍래가 번역한 국내 니미츠 평전을 보면 니미츠가 해군 자원자를 불합격시킨 가정의 어머니가 "니미츠란 이름을 가진 외국놈이 우리 건강한 아들을 퇴짜보냈어요!"라고 항의편지를 쓴 일화가 나온다.
- ↑ 1900년대 전후에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2년간 사관후보생으로 복무하다가 소위 임관 시험을 통과해야 하는 규정이 있었다. 실제 해군사관학교 졸업일은 1905년 1월 30일.
- ↑ 소장에서 바로 대장으로 진급했다.
- ↑ 미국 해군원수는 Fleet Admiral, Admiral of the fleet은 영국 해군원수 명칭으로 불린다.
- ↑ 니미츠 제독은 약장을 잔득 붙이고 다니는 걸 싫어해서, 약장을 2~3개 정도로 줄여 다는 경우가 많았는데, 해군 공로 훈장과 함께 이 훈장은 꼭 달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