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합중국 해군 4 원수 | ||||
체스터 니미츠 | 어니스트 킹 | 윌리엄 홀시 | 윌리엄 리히 |
1 개요
▲ 1941년 6월 2일 타임지 표지로 선정된 어니스트 킹 | |
이름 | Ernest Joseph King (어니스트 조셉 킹) |
출생 | 1878년 11월 23일, 미국 오하이오 주 |
사망 | 1956년 6월 25일, 미국 메인 주 |
복무 | 미합중국 해군(1905–1956) |
최종 계급 | 해군 원수 |
주요 이력 | 미국 해군참모총장 |
주요 참전 | 미국-스페인 전쟁 제1차 세계대전 태평양 전쟁 |
주요 서훈 | 해군 십자장 |
미합중국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을 가졌던 군인.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합중국 해군의 제독으로 최종 계급은 원수. 당시 미합중국 함대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미 해군 총사령관이자 최종보스.[1] 체스터 니미츠, 윌리엄 홀시, 윌리엄 리히와 더불어 미 해군에서 단 4명만 배출된 원수 중 한 명이었다.
2 일생
그의 부친은 아일랜드계 이민자였다. 외조부는 영국의 선박공으로 일하기도 했고 그의 부친은 한때 이리 호에서 뱃일을 한 적도 있었다. 그의 집안은 매우 가난하여 고등학교에 가는 게 고작이었고 가정 형편상 1897년에 미국해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그는 재학 중 일어난 미서전쟁에 지원해 순양함 샌프란시스코에서 근무한다. 1901년에 졸업할 당시 67명 중 4등의 성적으로 졸업한다. 소위후보생[2]이 된 이후 전함 일리노이에서 근무하나 부장과의 다툼으로 인해 순양함 신시내티로 옮겨간다.
전간기에는 파일럿 자격을 취득한 후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으로 근무한다. 근무 시기에 대일 전략을 검토하는 과제에 "적 오렌지[3]는 미국을 불리한 대외전으로 이끌어서 타격을 줄 것이다. 이를 위하여 오렌지는 필리핀, 나아가서 하와이를 공격할 가능성도 있으며 미국은 오렌지와의 싸움에서 몹시 불리한 수단과 방법밖에 주어지지 않은 전쟁에 휘말리는 것을 예측해야 한다"라고 써냈는데, 이는 그의 일본 여행에서 겪은 경험을 바탕으로 작성한 것이었지만 놀랍게도 이후 일본과의 전쟁은 저때의 예상과 아주 동일하게 흘러갔다.
1933년엔 소장으로 진급, 1938년엔 중장으로 진급했으며 1939년엔 소장으로 돌아가고 장관회의의 멤버가 된다. 원래는 퇴역을 기다릴 지위였지만 찰즈 에디슨 해군장관의 미합중국 함대 관열의 수행원이 되었을 때 함정의 대공포 대책을 명받았고 통상 3년이 걸릴 일을 겨우 3개월만에 끝낸 데서 칼 빈슨 하원의원의 눈에 들게 된다. 1940년 7월에 양양함대법이 성립되어 대서양 함대가 발족하자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의 지명을 받아 대서양함대 사령관에 취임한다. 그리고 1941년엔 드디어 대장으로 진급한다.
이후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그 보고를 한 부관에게 "그래, 난 이리 될 줄 알았어!"라고 소리쳤다. 그리고 1941년 12월 16일 프랭크 녹스 해군장관의 지명을 받아 미합중국함대사령관 겸 해군참모총장으로 취임한다.
이후 태평양 전쟁 동안 미 해군을 지휘하게 된다. 과달카날 전역 이후에는 태평양의 주요 거점들만 돌파한 이후 일본 본토로 진격하자는 의견을 내세워서 잠시 더글러스 맥아더와 대립하기도 한다.
태평양 전쟁이 끝나고. 45년 12월 15일엔 자신의 자리를 체스터 니미츠에게 넘기고 은퇴 생활을 보내다 47년 뇌출혈이 발생해 병원에 입원한 이후 일어나지 못한다. 결국 56년 6월 26일 77세에 심장발작으로 세상을 뜨게 된다.
3 평가
최악의 성격을 가진 최고의 사령관.[4]
"킹은 정신적 깡패다."
사실 제복 안에는 근육질이 숨어있으며 남몰래 고아원에 돈을 기부하고 있는 마음 착한 인물이다
실력으로만 본다면 아주 우수한 제독이다. 잠수함, 수상함, 항공모함 근무는 물론 지휘관, 참모, 행정 업무 분야까지 다방면에서 활동한 경험을 가졌음은 물론 전략적 안목과 그것을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추진력까지 갖춘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일본과의 전쟁이 격화되고 과달카날 전투에 접어들자 대부분의 수상함 병력을 태평양으로 차출해 대서양에 많은 신경을 쓰던 조지 C. 마셜 육군참모총장이 언짢게 여기기도 했지만 그동안 미군은 태평양을 안정화시켜 한숨 돌릴 수 있었고, 가장 위험한 시기를 넘긴 미군은 더욱 가열차게 스팀롤러를 돌려 연합군을 지원할 수 있었다. 또한 가난한 집안에도 불구하고 만렙까지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로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인격적인 면에서는 아주 평가가 극악이었는데, 고집불통에 말투도 영 좋지 않고 성격이 까다롭기까지 했다. 다른 제독들에 비해 웃는 얼굴이 나온 사진도 굉장히 적다. 오죽하면 "패튼과 그를 같은 방에 넣어 둔다면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그냥 두면 대화하다가 패튼이 화가 나서 그를 때려 죽일 것이고 칸막이를 설치하면 패튼이 제 화를 못 이기고 자살할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까지 있을 정도.[5] 한마디로 모든 사람이 그를 싫어했고 본인 역시 자신 이외의 모든 사람을 싫어했다(…).
일본 본토 공습을 하던 커티스 르메이의 폭격기 부대를 빼내어 일본 근해에 기뢰를 살포할 때도 르메이를 중심으로 육군 항공대에서 징징대서 헨리 아놀드 육군항공사령관까지 불만을 표했지만 킹 제독은 이들의 투정에 대해 격려나 협의 같은 거 없이 "그럼 해군 없이 싸워 보시던지."라며 배째라는 태도를 관철하여 육군 항공대를 당황케 했다. 결과론적으로 이는 가장 가성비가 우수한 작전이었지만 그의 성격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일화로 꼽힌다.[6]
게다가 툭하면 마셜과 마찰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물론 마셜이 성격상 과묵하고, 매우 차분하고 진중하기에 킹과 직접적 충돌을 일으키지는 않았지만 유럽을 주목한 마셜의 전략과 태평양을 중시한 킹의 전략은 대립을 피할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최고사령관 참모장 윌리엄 리히는 각군의 최고 지휘관이던 마셜과 킹, 아놀드를 조율하는 데 있어서 애를 먹었다고 한다. 물론 정치 9단 군 통수권자 FDR 앞에서 다 데꿀멍한 건 마찬가지. 단, FDR 본인이 해군 빠에 아들 루스벨트도 해병대 장교로 태평양 전선에서 복무중이었던 건 넘어가자
4 기타
- 미군 역사상 최대의 권력을 가졌던 군인이었다. 아주 작은 규모의 군대라면 몰라도 문민통제가 확실하게 자리잡은 민주국가의 군대에서 군정권과 군령권을 한 사람이 겸임하는 일은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평시에도 그런데 하물며 저때는 전시인데다 당시 미 해군은 병력만 해도 400만이 넘었다. 일선 전역 사령관이던 더글러스 맥아더,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 같은 인물들은 물론이고 같은 합참의 구성원이자 육군참모총장이던 조지 C. 마셜이나 공군참모총장이던 헨리 아놀드[7], 심지어 선배 제독이자 합동참모의장이던[8] 윌리엄 리히 조차도 저만한 권력은 가지지 못했다. 게다가 성격까지 격렬해서 마셜이나 아놀드와는 수시로 충돌했고, 수하 제독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윌리엄 홀시 같은 고위 장성들도 킹의 눈치를 봐야 했을 정도였다. 미국이 군사 독재 국가라도 되지 않는 한 저 정도 권력을 가진 군인이 다시 나올 가능성은 없을 듯하다. 항목 작성은 전선 사령관이던 체스터 니미츠나 그 휘하 함대 사령관들이던 윌리엄 홀시, 레이몬드 스프루언스 같은 수하 제독들보다도 늦었지만 실제로는 미 해군의 최종보스라는 표현이 결코 과장이 아닌 인물이었다.[9]
- 위에서 나왔듯이 그는 일본을 매우 싫어했는데, 그가 탄 함선인 신시내티가 일본에 입항했을 때 가마쿠라 대불을 보기 위해 가마쿠라로 가다가 소매치기를 당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역무원에게 사정을 설명하며 표를 후불로 사려고 했으나 역무원은 그에게 굉장히 불친절하게 대했고, 그날 이후로 그는 일본에 상당히 나쁜 인상을 품게 되었다. 그가 일본 본토 공격에 찬성하자 니미츠 제독은 "40년전에 잃어버린 지갑을 되찾을 수 있을까 생각하셨나 보군."이라고 생각했다고. 물론 킹 제독은 이미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본의 진주만 공습을 예견한 만큼 그저 감정만 가지고 일본 본토 공격을 찬성할 사람은 아니다.
근데 감정이 안 섞였다고 100% 확신은 못한다
- 비록 건방진 성격으로 유명했지만 남들의 능력까지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다. 레이먼드 스프루언스 제독을 평가하길 "난 미 해군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다. 스프루언스만 빼고."라는 이야기가 그 대표적인 예. 또한 대서양의 대 독일 잠수함 전략을 두고 영국 해군의 서부 해역 사령관 해군대장 맥스 K. 호턴 제독과 갈등하였지만, 자신보다 더 뛰어난 대 잠수함 전문가임을 인정하고 그의 전략을 수용했다고 한다. 호턴 경은 1942년 11월 중엽부터 영국의 대잠 부대를 맡아 근해 접근로 방위, 원양 초계, 호송선단 작전 등을 총괄했다. 이에 대해 독일 해군 총사령관 해군원수 카를 되니츠 제독은 "호턴 제독의 지휘 하에 영국 대잠 부대는 재료나 기술적인 면은 물론 전술과 정신적인 분야에서도 대단한 향상을 이루었다. 그는 어느 누구보다도 독일 U보트 부대의 생각을 읽어낼 수 있는 사람이었다." 라고 평가하였다. 영국의 유명한 해전사가인 스테판 W. 로스킬 대령 또한 "과감한 결단력과 풍부한 식견으로, 호턴 경은 의심할 바 없이 되니츠 제독의 온당한 경쟁자가 되었다." 라는 평가를 남겼다.
- 깐깐한 성격만큼이나 꼼꼼하고 상식적인 사람이기도 해서 비효율적인 무기들의 개선에도 신경을 많이 썼다. 어뢰에 문제가 있다며 함장들과 개발진들 사이에 싸움이 일어나자 그는 함장들의 손을 들어 주었고, 분석 결과 개발진들이 어뢰값 아깝다고 폭약 대신 물을 채워 실험을 했던 것이 밝혀졌다.[10] 또한 한때 미국에서 '박쥐 폭탄' 같은 걸 만들려고 한 적이 있었다. 소이탄을 최대한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병기로 계획 자체가 아주 쓸모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이미 원자탄도 완성된 마당에 그런 걸 더이상 연구할 필요가 없다 여겼고 이 소식이 그의 귀에 들어가자 킹 제독은 즉시 그 계획을 중단시켰다.
- 굽시니스트의 본격 제2차 세계대전 만화에서는 킹(철권)으로 패러디하였다. 만화 특성상 태평양 방면의 다른 제독들처럼 비중이 매우 낮다. 플레처급 구축함 포터 만화에서도 킹으로 패러디 되었다. 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 중에서는 저 킹이 제일 유명하다보니 저 외에도 국내 창작물에서 표범두건을 쓴 모습이 은근히 자주 보인다.
- 항공모함 렉싱턴의 함장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었기에 렉싱턴 호를 매우 아꼈다고 한다. 다만 1942년에 있었던 산호해 해전을 지휘한 프랭크 플레처가 렉싱턴 호를 잃고 말자 매우 불쾌해했다고 한다. 그래서 플레처 제독은 뛰어난 인재임에도 불구하고 킹 제독의 눈밖에 났기에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만년 중장에서 머물렀다고 한다. 물론 해당 항목에도 언급되어 있듯이, 이는 플레처 제독의 전장에서의 불운과, 항공모함의 전략적 가치가 급등하면서 항공 병과 출신 장교들의 입지가 초월적으로 높아진 전시 상황 때문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킹이 아무리 성격이 개차반이기로서니 개인적 감정만으로 인재를 썩힐 사람은 아니었다.
물론 감정이 없다고는 안 했다왜 자꾸 이런 문장이 늘어나지? 누구야!
- 킹 제독은 전쟁 중 기존의 CPO 이상 해군 장병들의 근무복 겸 하약정복인 카키색 군복을 검은색 부착물이 들어간 청회색 군복으로 바꾸어 피복비를 절감하려고 이고했다. 해군 내에서는 적십자 직원 제복이냐며 인기가 없었고, 이들의 의사를 반영해 니미츠 제독은 기존의 카키 정복이 보다 해군스럽고 열대 환경에 더 적합하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킹 제독은 회색 정복을 입고 카키 정복을 입은 니미츠 제독과 함께 기자들 앞에 나왔는데, 한 사진사가 킹 제독에게, "이봐 상사. 니미츠 제독의 사진을 찍어야 하니 옆으로 비켜 서게."라고 말해 킹 제독을 삐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비가 오는 중이라 두 제독 모두 정복 위에 레인코트를 걸쳤는데, 여기엔 계급장을 달지 않게 되어 있어 정모 챙에 새겨진 잎사귀 자수와 모표, 턱끈 재질만으로 신분(CPO/준사관 및 위관/영관/장관급 장교)만 확인할 수 있었고, 회색 정모는 단가 절감한답시고 챙의 자수를 생략하고 턱끈을 CPO용 검정색을 달았기 때문에 이를 보고 사진사가 착각했던 것이다. 이 굴욕 이후 킹 스스로도 회색 정복을 점점 멀리했고, 1948년부터는 회색 정복이 아예 폐지됐다.
- 윈스턴 처칠과의 사이도 썩 좋지 않았는데, 태평양 전선이 한참 격화되어 대서양 함대 대부분을 태평양으로 차출하자 유보트에 의한 피해가 극심해졌고,[11] 이에 처칠은 "
우리 킹은 대영제국의 구심점이시지만 너네킹이 영국을 말아먹는다!"며 킹 제독을 비난했다.[12] 그리고 2년 후 전황이 나아지자 처칠이 자존심을 회복하고 인도양에서 희대의 굴욕을 선사한 일본에게 복수할 겸 인도양 함대를 태평양에 투입하려고 했지만 킹 제독은 다 된 밥에 숟가락만 얹으려 하는 영국의 선택을 매우 반대했다.하지만 이 인간 성격을 보면 저 비난 때문일 거 같다왜 자꾸 이런 문장이 늘어나지2사실 그 때문만도 아니고 당시 영국이 파견할 함대의 보급능력이 상당히 의심스러운 수준이기도 했으며 니미츠 제독도 그것을 우려하여 영국측에 캐묻기도 했다. 니미츠 제독이 영국 함대를 오키나와 전투에 기동부대로 참전시킨 것은 영국측이 보급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기로 다짐한 뒤였다.
- 킹 이 사망한 뒤 2차 대전에서 같이 활동했던 어느 영국 제독이 킹의 딸에게 "아버님은 왜 항상 영국에 대해 그렇게 화를 내셨습니까?" 하고 묻자 킹의 딸이 "아버지는 미국과 미 해군을 제외한 모든 것에 화를 내셨어요."라고 대답했다.
미 육군 및 미 공군 : 니들만 그런 거 아니야
- 직함이 Chief of Naval Operations(CNO)이고, 조직도 상 해군청 장관의 관할 하에 있다는 점 때문인지 다소 오래된 번역서에서는 해군 작전과장으로 번역되기도 했다(...)[13] 500만 해군을 이끄는 명실상부 해군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이 한큐에 과장으로 강등.
킹 과장님!뭐 임마?
- ↑ 그보다 보직이 높았던 선배 제독 윌리엄 리히가 있었지만 그 양반은 합참의장 비슷한 존재라서 논외.
- ↑ 이 시대에는 사관학교를 졸업하고도 준사관 내지 사관후보생 신분으로 1년 이상 복무하다 소위 임관 시험을 쳐서야 비로소 소위가 될 수 있었다.
- ↑ 일본 제국을 말한다. 이는 미국의 전간기 컬러코드 전쟁 계획에서 기인한 것인데, 미국은 각국에 색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전쟁 계획을 수립했었다. 영국은 빨강, 독일은 검정, 자국인 미국은 파랑인 식이다. 참고로 영국이 왜 끼어 있나 싶을 수 있겠지만 놀랍게도 영국 및 캐나다, 호주 등 식민지에 대한 전면적 공격 계획인 워 플랜 레드는 이 중에서도 가장 세심하게 계획되었고 실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되었다. 1974년 이 기밀이 해제되자 미영관계와 미국-캐나다 관계가 악화되었다고 할 정도. 영국이 완전히 미국 시다바리가 된 오늘날과 비교하면 격세지감.
- ↑ 태평양 전쟁은 킹의 체스판이었다고 볼 수 있을 정도로 모든 것은 이 사람에 의해 기획되고 추진되었다.
물론 모든 말이 상대의 3배쯤 되지만100배이상이다 - ↑ 사실 이 농담은 패튼을 엄청나게 띄워 준 것으로, 킹은 패튼의 상관이던 아이젠하워 같은 전역 사령관들보다도 한 급 높은 진짜배기 미 해군 총사령관 겸 참모총장이었고, 패튼은 겨우(?) 군단장~군사령관 정도였는데 이 둘을 같은 선에 놓은 격이니..사실 패튼은 위에 마셜과 아이젠하워라는 직속상관이 둘이나 있었고 유럽 쪽에서만 거의 활동했기 때문에 딱히 킹과 접점은 없었다.
- ↑ 당시 미국 육군 항공대는 육군과는 거의 별개로 실질상의 공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헨리 아놀드 장군은 합동참모회의의 일원이자 실질상의 공군참모총장으로 마셜 장군이나 킹 제독과 권위가 동일했다. 결국 이는 공군참모총장이 통합작전에 의문을 표하는데 해군참모총장이 거기다 대고 배째라 모드로 나간 것. 물론 커티스 르메이가 약간 억지를 쓴 것이긴 하다. 통합군인 태평양 해역군 예하 부대이면서도 기뢰 부설 같이 뽀다구 안 나는 임무는 하기 싫다고 더 윗선인 자기네 보스를 통해서 떼를 쓴 격이니...
- ↑ 당시는 육군항공대사령관. 그러나 이때 이미 육군 항공대는 거의 육군과는 별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 ↑ 당시 명칭은 최고사령관(대통령) 참모장
- ↑ 사실 이 현상은 타군도 비슷한데, 육군의 마셜도 수하인 아이젠하워, 맥아더, 브래들리, 패튼 등의 존재감에 묻혔고(...) 공군의 아놀드도 수하인 르메이 등의 존재감에 묻혔다(...) 마셜, 킹, 아놀드 위에 있던 합참의장 리히 정도 되면 갓 입문한 밀덕들에게는 존재감이 없다(...)
- ↑ 어뢰용 폭약인 Torpex의 밀도는 물의 1.6배이므로, 물 대신 폭약을 넣으면 어뢰가 실험 당시보다 무거워져서 발사시 예상 궤적보다 아래로 가라앉아 버린다. 실제로 불발이라고 생각되었던 어뢰의 상당수는 불발이 아니라 적 함선의 밑으로 쏙 빠져서(...) 어이없이 빗나간 것이었다.
- ↑ 이 때문에 미국도 개전 초 독일 유보트가 뉴욕 을 기습하는 꼴을 두 눈 뜨고 보고만 있어야 했고 유보트의 실적도 이때 순간적으로 뛰어올랐다.
- ↑ 하지만 둘 다 굉장히 긴박한 상황이긴 했다. 영국은 대서양의 유보트를 처리하지 않으면 국가가 말라죽을 상황이었고, 미국은 과달카날이 함락당하면 태평양의 제해권을 잃고 미국 서부로 통하는 고속도로가 뚫릴 판이었다.
- ↑ 지금도 미 해군참모총장의 영문 명칭은 이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