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유럽의 역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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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STONIAN WAR AND OCCUPATION HISTORY / EESTI SOJA JA OKUPATSIOONI AJALUGU pt 1 (Eestikeeles)
에스토니아는 소련 등의 국가로부터 수 회에 걸쳐 점령 되었다가 독립하였다. 마지막으로 1991년에 소련으로부터 재독립되었다.
18초 만에 보는 에스토니아 역사.
역사가 안습하기론 폴란드보다 더 비참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다.
2 고대~중세
에스토니아는 상고적부터 우랄어족의 핀-우그르어파 또는 핀-우그리아어파(Finno-Ugric languages)에 속하는 에스토니아어를 쓰는 에스토니아인들의 땅이었다. 작은 부족 국가들이 건설되었고 덴마크 바이킹들이 잠시 지배한 적도 있었다.
이 지방을 지도로 한번 보면 알겠지만, 독일과 러시아, 폴란드라는 유럽의 괴물들 사이에 끼어있으며 스웨덴은 괴물이 아니다. 근데 얼핏 보면 맞는거 같기도 한데? 독일의 리보니아 그리스도 기사 수도회(Fratres militiae Christi Livoniae)에 의해 1227년 정복되어 기독교화 되었다.
리보니아 검우 기사단과 몇몇 주교령, 그리고 에스토니아 공작이 서로 뭉쳐 리보니아 연맹을 구성하였다.
1590년 리보니아 전쟁에서 루스 차르국의 공격을 받고 붕괴했다.
독일 기사단이 점령 한 후 근대까지 에스토니아의 중상류층(지주, 상공인)은 독일계가 많았다. 1917년까지 제대로 된 나라 하나 가져보지 못한 곳으로 독일 기사단 이후에는 스웨덴이 뺏었다가 리투아니아가 뺏었다가 폴란드가 뺏었다가 러시아가 뺏었다가를 반복했다.
3 근세
근세에 들어와서는 개신교도 전파되었고, 30년전쟁을 계기로 가톨릭을 신봉하는 폴란드와 개신교를 믿는 스웨덴이 이 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렬한 싸움을 벌였다. 그 결과 약 100년 동안 스웨덴이 이곳을 지배하였다가 대북방전쟁으로 1721년 러시아가 새로운 지배자가 되었다. 러시아 치하에서 발트 3현이라 일컬어진 이 지방에서는 독일인이 들어오고 농노제가 폐지되었으며 도르파트 대학(현재의 타르투 대학)이 흥성하여 문화가 크게 발전하였다.
4 근대
19세기 후반에는 러시아의 문호로서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이었기 때문에 더욱 개발되었다가 1차 대전을 맞게 되고 1917년 독립, 독일군의 점령과 적백내전을 거쳐 적군이 승리함으로서 잠시나마 평화를 이루게 된다.
위에서 설명했듯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구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지역으로 당초에는 동부 전선에서 승리를 거둔 독일이 차지할 계획이었다. 발트해 지역은 예로부터 독일계가 많은 지역이기도 했으므로 독일의 영토에 편입 시키려는 목적이 있었던 것. 그러나 독일이 곧바로 서부 전선에서 털려 패전국이 되고(…) 10월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난 뒤 1918년 2월 24일 에스토니아는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와 함께 독립을 얻게 되었다.
이후 1934년에 초대 국무총리였던 콘스탄틴 패츠(Konstantin Päts)가 쿠데타를 일으켜 반공 정권이 들어섰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0년 6월 소비에트 연방(소련)의 영향 아래에 독재로부터의 해방이라는 명분으로 선거가 치뤄져서 독일의 사실상 묵인하 소련에 합병되고 말았다. 이 때문에 소련에 대한 반발로 1년후 독소전쟁이 벌어지자마자 독일군을 해방군으로 환영하였으며 독일군에 참전한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물론 독일군이 좋은 의도로 점령하지는 않았으니 결국 피보는 것은 매한가지...(…) 어쨌든 독소전쟁 중 에스토니아는 다시 소련에 재점령되었고, 이후에 러시아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 러시아로 편입되었다. 덕택에 현재 에스토니아와 러시아 간의 영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중. 소련 내에서는 15개 공화국 중에 영토는 13위, 인구는 15위. 원래 에스토니아 민족 자체가 100만이 안 되는 소수 민족이다.
1991년까지는 소련의 치하에 있었고 이 과정을 거치면서 과거 에스토니아에 살던 독일계들이 빠져 나가고 러시아인들이 들어왔다. 현재도 주민의 28%은 러시아인이다.
5 현대
1988년 발트해 3국 중에서 처음으로 공산당 이외의 정치 단체인 인민전선이 결성되었다. 인민전선은 1990년 2월 최고 회의 선거에서 압승하였으며, 1991년 3월 3일 국민 투표에서 77.8%가 독립을 지지하였다. 1991년 8월 쿠데타를 계기로 완전 독립을 선언하였고, 9월 구소련이 이를 승인하였다. 결국 1991년 8월 20일 독립을 되찾았다. 8월 20일은 에스토니아의 국경일이다.
이 과정에서 발생한 '노래 혁명'이 유명하다. 시작은 1988년 5월 타르투에서 열린 인기 가요 축제에서 어떤 가수가 에스토니아가 독립국이던 시절의 노래를 부른 것이었다. 이 사건 이후 탈린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벌어지면서 독립 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 20일, 에스토니아인들이 노래를 부르며 거리에 집결했는데, 수도 탈린에 전체 에스토니아 인구의 1/5 이상인 30만 명 가까운 수가 모였다. 이후 동년 8월 23일에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서 몰려든 2백여만 명이 넘는 군중이 빌뉴스-탈린 사이의 가도를 점거한 채 손을 맞잡고 노래했는데, 그 행렬은 600km 이상 이어졌다. 이는 1939년 8월 23일에 체결된 독일-소련 불가침 조약으로 발트 3국이 소련에 편입된 지 50주년이 되는 날을 맞아 열린 시위였고 이후 발트 3국은 50여년 만에 독립을 쟁취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소련은 독립 운동이 고조되기 시작하자 이를 무력 진압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타르투에 있던 공군 기지 사령관인 조하르 두다예프가 에스토니아의 독립 운동에 호감을 표시하면서 노골적으로 지원하는 바람에 무력 진압 시도는 실패한다. 당시 조하르 두다예프는 에스토니아에 주둔한 소련군 내에서 상당히 강력하고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결국 1990년 타르투 공군 기지는 철수해야 했고, 조하르 두다예프는 고향인 체첸으로 귀환. 이츠케리아 체첸의 초대 대통령이 되어 독립 운동을 벌이다 1996년 4월 21일 러시아군의 미사일에 맞아 전사했다. 그가 사망한 후 타르투에는 조하르 두다예프 거리가 생겼고, 그의 집무실이 보존되어 있다.
여하튼 독립 직후에는 러시아로부터 자원을 헐값에 수입할수없게 되고 무역도 크게줄면서 경제난으로[1] 한 동안 고생하는 듯 싶었다가 90년대 중반에 바닥을 찍고 그럭저럭 경제성장을 이록하게 되었다.
이후 2004년에 나토(NATO)와 유럽연합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11년에 유로화를 도입.
6 관련 항목
- ↑ 사실 이렇게 된 이유에는 핀란드도 소련붕괴로 인해 경제적으로 도움을 주기 힘들었던것도 있었다. 당시 핀란드의 경제도 에스토니아와 비슷하게 소련에게 많이 의존하고 있었는데 소련이 붕괴되고 새로 탄생한 독립국가연합 회원국들이 잇따라 경제적으로 카오스 현상에 빠지면서 극심한 침체에 시잘리게 되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에게 지원을 많이 주지는 못했고 핀란드의 경제가 나아진건 노키아가 휴대전화 시장을 석권하면서부터다. 다만 노키아에 너무 의존했다가 2010년대에는 다시 극심한 침체에 빠지고 있는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