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방전쟁


대북방전쟁의 여러 전투들

1700~1709년까지의 전개도1709~1721년까지의 전개도

1 개요

전쟁의 승패는 천재의 원맨쇼가 아닌 국가가 지닌 국력이 결정한다는 것을 보여준 한 예

1700년에서 1721년까지 러시아스웨덴발트해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벌인 북방전쟁이다. 표트르 대제 휘하의 러시아는 발트해 진출을 숙원으로 삼아 당시 발트해를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던 스웨덴을 겨냥해 덴마크, 작센[1]과 반스웨덴 동맹인 소위 북방동맹에 가입하였다. 전쟁은 동맹군이 스웨덴을 선제공격함으로 1700년에 시작하였으며, 전쟁이 길어짐에 따라 여러 정치적,외교적 상황으로 인해 여러 정치세력이 참가하거나 탈퇴하여 영국-하노버 동군연합,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오스만 제국,우크라이나 카자크,슐레스비히-홀슈타인,폴란드-리투아니아가 참가하는등 동맹도 이리저리 변했다. 뉘스타드 조약, 스톡홀름 조약으로 1721년에 종결되었으며 스웨덴 제국은 몰락의 시발점을 열었고 러시아 제국은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2 배경

칼 12세표트르 대제

30년 전쟁 및 수 차례의 북방전쟁 결과 스웨덴은 발트해 지역과 포메라니아를 비롯한 북독일 지역을 상당부분 장악하여 북유럽의 맹주로 군림하고 있었다. 또한 러시아 대공위시기인 혼란 시대때 개입하여 러시아의 유일한 발트해로의 출구인 잉그리아 지방도 장악한 상태였다.[2] 때문에 러시아는 어떻게든 이 지역을 탈환하여 발트해로서의 진출을 모색하였고 젊은 개혁군주인 표트르 1세가 즉위하여 서구화에 박차를 가하면서 군사력을 신장시키고 있었다.

한편 스웨덴에서도 검술에 능하고 무골이었던 야심만만한 군주인 칼 12세가 1697년 약관 15살 어린 나이에 즉위했지만 어리다고 얕보지 말라는 듯 군사력을 정비하고 있었다.

3 전쟁의 전개

3.1 스웨덴의 초전에서의 승리와 나르바 전투

러시아와 작센,덴마크 동맹군은 1700년 일제히 스웨덴에 대한 공격을 개시하였다. 또한 처음엔 주저하던 폴란드-리투아니아도 결국 지원병을 보내 사방팔방에서 스웨덴을 압박하는 형세를 취했다. 러시아군은 잉그리아와 핀란드로 침공해들어갔으며 덴마크,작센군은 스코네 지방과 리보니아로 진격하였다. 그러나 칼 12세는 당황하지 않고 7만명의 병력을 모았으며 핀란드 방면의 스웨덴 군대가 러시아 공세에 버틸동안 가까운 덴마크 부터 제압하기로 결정하였다. 1700년 8월 영국 해군의 도움을 얻어 코펜하겐 북부에 상륙한 칼 12세의 대부대는 순식간에 덴마크 군대를 패퇴시키고 코펜하겐을 포위하였다. 이에 덴마크-노르웨이는 버티지 못하고 평화조약을 맺고 동맹에서 탈퇴하였다. 이후 칼 12세는 발트해를 가로질러 에스토니아에 상륙, 눈과 비를 맞으며 강행군을 해서 러시아의 공세에서 버티고 있던 지역 스웨덴군과 합류하였다.

이후 11월 양군대는 나르바에서 일전을 벌이게 되었는데, 스웨덴군은 약 10,500 여명에 대포 37문, [3] 지휘는 칼 12세가 직접 하고 있었다. 러시아군은 3만 7천명 정도에 대포는 195 문,총지휘관은 표트르 1세였지만, 국내 정치 문제로 자리를 비우고 러시아군 총사령관 압테몬 골로빈은 외무 장관이기도 해서 표트르 1세와 함께 떠난지라 전투 당일에는 군사 고문인 샤를 외젠 드 크루이 공작이 [4] 지휘하고 있었다.

이 전투에서 비록 숫자는 적었지만 강도높게 훈련되어있던 스웨덴군과 칼 12세는 눈보라가 치던 날씨를 잘 이용하여 부대의 기동을 은폐해 성공적인 기습 공격을 가한다. 러시아군은 남북으로 배치되어 있었는데, 스웨덴 군은 북쪽과 중앙 사이를 공격해 러시아군의 중앙과 우익을 양분 시킨다. 크루이가 스웨덴군이 가까이 다가온 걸 발견했을 때 정찰대를 내보내려 했지만 러시아 장교들이 외국인 명령 듣기 싫다고 뻗대서 실패했다고. 더군다나 눈보라가 스웨덴군의 배후에서 러시아군을 향해 불어오고 있어, 스웨덴군의 공격은 도와주고 러시아군의 공격은 방해했다. 북쪽 우익에 있던 근위연대는 표트르 대제가 신경써서 양성한 정예부대였기에, 그나마 수레로 임시 방벽을 쌓고 처절하게 항전했고 일부 병사들도 이들에게 합류했다. 하지만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러시아 병사들은 순식간에 모랄빵이 터져 붕괴했다. 러시아군은 강변에 주둔중이였는데, 다리가 몰려든 러시아 병사들의 무게를 못 견디고 무너지면서 퇴로도 끊겨버렸다. 크루이는 통제 불능이 된 병사들을 보고 절망해 항복했다. 북쪽에서 방벽을 만들고 저항하던 부대들은 대포들이 포위해 오자 장교들만 포로가 되고 병사들은 개인 무기를 지닌채 후퇴한다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나마 남쪽에서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 전력을 보존하고 있던 바이데 장군의 사단은 다음 날 동이 터오면서 남은 아군 부대가 없는것을 확인하자 항복했다. 스웨덴 기병들은 그날 내내 돌아다니며 흩어져 있던 러시아 병사들을 포로로 잡아왔다. 이렇게 러시아군은 전멸했다. 러시아군은 최소 8천여명이 전사하고[5] 2만여명이 포로로 잡혔고, 스웨덴군은 장교 30 여명, 병사 6백여명이 전사했다. 그리고 러시아군의 모든 연대기와 대포, 수만정의 머스킷 등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했다.

이것이 바로 나르바 전투로 칼 12세 최대의 영광이자 표트르 대제 최대의 위기였다.

전투에서 압승을 거둔 칼 12세는 러시아를 계속 추격하여 패퇴시키기보다는 거슬렸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치기로 결정하고 군대를 돌려 남진하였다. 이에 표트르 1세는 간신히 숨통을 돌릴 수 있었고 급히 군사력을 재건하기 시작했다.

3.2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

한편 나르바에서 러시아군이 대패하고 스웨덴군이 물밀듯이 폴란드로 처들어오자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의 의회였던 셰임은 당황하였다. 작센 선제후면서 폴란드왕에 선출된 아우구스트 2세가 리보니아를 되찾자고 주장할때 반대하였지만 결국 국왕이 강행하자 좋은게 좋은거라고 지원을 하던 상황에서 이렇게 갑자기 전개가 불리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작센군과 폴란드군이 연합해서 스웨덴군과 맞서 싸웠지만 전황은 계속 불리해져만 갔다. 1702년 클리슈프 전투에서 결정적으로 작센-폴란드 연합군은 패퇴하였고 폴란드 양대도시인 바르샤바크라쿠프까지 포위될 정도로 수세에 몰렸다. 스웨덴군은 폴란드 북부를 휩쓸면서 무차별적인 파괴와 약탈을 자행하였다. 1705년 스웨덴군은 달아난 아우구스트 2세를 쫒아가서 작센까지 추격하였으며 1706년 결국 폴란드 왕위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폴란드 의회는 칼 12세와 친했던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국왕으로 추대하였으며 동맹에서 탈퇴하여 1709년까지 스웨덴편에서 싸우게 되었다.

3.3 러시아의 반격과 폴타바 전투

한편 나르바에서 대패한 표트르 대제의 러시아군은 칼 12세가 폴란드에서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군력을 증강하고 군사력을 재정비하는데 성공하였다.[6] 칼 12세는 폴란드를 가로질러 러시아 중부의 스몰렌스크를 공략하였으나 러시아의 초토화전술과 강력한 방어에 휘말려 제대로 공략은 성공못하고 군사력만 낭비하였다. 이에 방향을 돌려 당시 남부 러시아 지역인 우크라이나로 쳐들어갔는데 당시 우크라이나의 카자크이반 마제파가 칼 12세를 적극 지원하여 러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나고자 일제히 봉기하였다.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1709년 폴타바를 포위하였고 이에 표트르 대제는 자신이 직접 이끄는 정예병을 이끌고 우크라이나 폴타바로 진격하였다.


(폴타바를 지켜보고 있는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

칼 12세는 전투전에 저격을 당해 다리를 다친 상황이었다. 따라서 1709년 7월 8일 벌어진 폴타바 전투는 그의 장군들이 도맡아 지휘하였다. 표트르 대제는 그간 키워낸 병력을 총동원한 상태였으며 스웨덴보다 전력이 훨씬 강성한 상황이었다. 결국 폴타바 수비군과 함께 스웨덴군을 오히려 역포위해버렸고 스웨덴군은 지휘의 연계성이 떨어저 우왕좌왕 하였다. 칼 12세는 포위군 북쪽을 돌파하려 하였으며 러시아군이 이를 막으려 하였다.

전투초기에는 치열한 접전끝에 스웨덴군이 잠시 유리한 상황이 있었으나 미리 구축한 야전진지에서 표트르가 차분하게 방어한 결과 스웨덴의 공세는 둔화되어 버렸다. 이후 러시아군이 반격을 가해 좌우익의 기병대로 스웨덴군의 측면을 공략하였다. 좌-우익의 스웨덴 기병대와 전열이 붕괴해버리자 중앙도 사실상 버티지 못하고 패주해 스웨덴-카자크 연합군은 궤멸해버렸다.

러시아에서 제작한 대북방전쟁 - 폴타바 전투 영화. 파트 1편이며 유투브에서 나머지도 쭉 확인 가능하다. 러시아 애국주의적인 요소가 많이 들어간 영화긴 하지만 당시의 상황을 볼 수 있다. 스웨덴 네티즌들의 징징거리는 댓글도 볼 수 있다.

3.4 오스만 제국의 참전과 반스웨덴 동맹의 재결성

우크라이나에서 대패한 칼 12세와 이반 마제파는 패주한 병력을 데리고 남쪽으로 도주하여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하였다. 생뚱맞게 북유럽의 국왕의 도착을 환영한 오스만 제국의 아흐메드 3세는 이 기회를 틈타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 하였다. 칼 12세도 계속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를 공격하길 청원했으며 결국 북방과 남방에서 싸우던 러시아군은 1711년 프루트 강 전투에서 표트르 1세가 친정한 러시아군이 오스만군에게 패배하자 한발 물러나 1714년경 아조프몰다비아 영토를 오스만 제국에 할양하게 된다.

한편 폴타바에서 칼 12세가 대패하고 오스만 제국으로 망명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시 붕괴했던 반스웨덴 동맹은 재결성 되었다. 우선 작센의 아우구스트 2세가 스타니스와프 레슈친스키를 내쫒아버리고 다시 폴란드 국왕에 복위하여 스웨덴과의 전쟁을 재개하였고 덴마크도 다시 스웨덴에 선전포고하고 공세를 강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약세가 확인되자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와 포메라니아를 노리고 브란덴부르크-프로이센이 동맹군에 가담하여 참전하였으며 거기다 더해 영국-하노버 동군연합마저 반스웨덴 동맹에 가담하여 브레멘과 홀슈타인 일대를 공략하였다. 당시 브레멘은 스웨덴령이었는데 하노버는 내륙지였기 때문에 영국과 연결되는 해안영토를 얻고자 하였다.

3.5 전쟁의 후반기와 칼 12세의 전사

오스만 제국에 머물고 있던 칼 12세는 망명 초창기엔 환영받았으나 이후 체류비용 문제와 정치적인 상황에 휘말려서 예니체리에 공격을 받아 사실상 유폐되어 버린 상황이었다.[7] 결국 오스만 제국과 스웨덴과의 협상끝에 풀려나와 급히 육로로 스웨덴으로 복귀하였으나 그가 갇혀 있던 시기 이미 전세는 결정적으로 기울어 1710년 러시아는 핀란드 탈린과 비푸리(Viipuri)를 점령하였다. 1714년 표트르의 해군은 스웨덴 해군의 소규모 분견대를 공격하려 시도하였고, 이로 인해 항코 반도(Hanko peninsula)에서 최초로 러시아 해군이 승리를 거두었다.

러시아군은 1713년에서 1714년 핀란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1714년 오스트로보트니아(Ostrobothnia)의 이소퀴레(Isokyrö)에서 벌어진 나푸에 전투(battle of Napue)에서 최종적인 격돌이 이루어졌다. 1714년에서 1721년간의 핀란드 정복기간은 거대한 분노(Greater Wrath; 핀란드 어: isoviha)로 알려져 있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복 기간동안 많은 핀란드 인들이 살해당하거나 러시아로 끌려갔다.

1715년경에는 이미 포메라니아, 슈테틴을 비롯한 북독일 지역의 스웨덴 영토도 모조리 다 뺏겼고 리보니아 역시 러시아의 영토로 넘어갔다. 그나마 이렇게 버틴것도 호른 백작을 비롯한 유능한 스웨덴 장관들 덕분이었다.

한편 스웨덴을 떠난지 14년만에 복귀한 칼 12세는 1716년 덴마크령이던 노르웨이 오슬로로 병력을 모아 공격을 가했으나 이미 철저히 대비한 방어군의 수비에 밀려 제대로 공격도 못해보고 철수하고 말았다. 그래도 그치지 않고 다시 반격을 가해 오늘날 노르웨이 할덴주인 프레드릭스텐을 포위 공격하였다. 그러나 1718년 포위 상황을 순시하던 중 유탄에 맞아 전사함으로서 그 파란만장한 생을 마무리 짓고 말았다.

칼 12세는 결혼도 하지 않았고 후계자도 없었기 때문에 왕위는 여동생인 울리카 엘레오노라에게 넘어갔다. 2년후 남성 계승원칙에 의해 그녀의 남편인 프레데리크 1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후 전투는 교착상황이었으나 스웨덴은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소규모 국지전을 계속 감행하고 있었다.그렌감 전투에서 승전하여 스톡홀름으로 진격하던 러시아군은 막아냈으나 제해권은 이미 러시아군에 잡혀있는 상황이었다. 결국 최후로 덴마크와 러시아 연합 해군의 스웨덴 본토에 대한 강력한 해상 공격이 이루어졌으며 스웨덴의 해안도시들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4 전쟁의 결과

결국 버티지 못한 스웨덴은 전쟁을 포기하고 1721년 우시카우풍키(Uusikaupunki)에서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뉘스타드 조약이 최종적으로 이루어졌다.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발트해안 지방과 북독일 지방의 대부분을 상실했다. 표트르 대제러시아 제국은 핀란드를 돌려주는 대신 발트해 영토를 대부분 차지했으며 발트해 진출의 숙원을 이룩하고 동유럽의 강대국으로 등장하였다.

러시아가 조약을 맺기 전 스웨덴과 스톡홀롬 조약으로 강화조약을 맺은 프로이센은 스웨덴의 슈테틴과 포메른의 일부분을 비롯한 독일 영토를 획득하였다. 영국-하노버 동군연합은 브레멘 일부 지역을 할양 받았다.대신 그 대가로 1719년 이후 스웨덴편을 들어 해군을 보내 러시아 해군에 압박을 주었다.

폴란드-리투아니아가 얻은 영토는 없었지만 아우구스트 2세의 왕위가 완전히 인정되었다.덴마크는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홀슈타인이 일부 차지하고 있던 슐레스비히의 완전한 영유권을 얻은 뒤 홀슈타인과 스웨덴의 동맹을 파기시켰다. 다만 덴마크가 점령하고 있던 나머지 포메른은 스웨덴에 반환 되었다.

이와 같은 스웨덴의 압도적인 패배결과는 스웨덴 제국의 종말의 시작점이었으며 쥐고 있던 북유럽의 패권 역시 소멸하였다. 또 스웨덴의 반러시아 감정을 부채질시켜 1741년의 스웨덴-러시아 전쟁을 유발시켰으나 그 전쟁도 역시 스웨덴의 패배로 끝났다. 1788년의 전쟁도 벌어졌으나 무승부로 끝났고 이후 스웨덴은 대불동맹에 가담하여 반나폴레옹 편에 섰다가 대패한 뒤 포메른을 빼앗기고, 1808년 나폴레옹과 일시 동맹이었던 러시아에게 핀란드마저 완전히 빼앗김으로서 30년전쟁 이래 공세로 일관하던 발트해 정책과 대유럽 정책을 완전히 폐기하고 수세로 전환하였다.[8]

지금도 스웨덴 사람들에겐 아쉬움이 무척 많이 남는 전쟁이고 러시아에는 영광의 상징으로 기억되고 있는 전쟁이다. 아울러 더 이상 전쟁의 승패는 천재적인 전술가 한두명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전쟁역량의 총량에 의해 결정된다는 시대상의 변화를 확인시켜준 전쟁이기도 하다

5 같이 보기

  1. 작센 선제후 아우구스트 2세가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상황이었으며 스웨덴령인 리보니아(오늘날 발트3국)의 수복을 노렸다.
  2. 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일대이다.
  3. 이에 더해 나르바의 수비군은 1,800 여명에 대포 297 문이였다고 한다.
  4. 러시아 사람이 아니다. 크루이 가문은 브루고뉴에서 시작된 신성로마제국 지역의 공작 가문. 샤를 외젠 드 쿠루이는 스페인계 네덜란드 인이였다고. 이외에도 당시 러시아군에는 외국인 장교가 많았다고 한다.
  5. 전투 직후에는 집계된 사상자 총합이 8천여명 이였지만, 추운 날씨 탓에 부상자들이 많이 죽었다.
  6. 나르바 전투에서 잃은 수백문의 대포와 수만정의 머스킷을 메꾸기 위해, 러시아 전역 있는 교회들의 종중 1/3 을 뜯어다 녹여 대포를 만들고, 상인과 교회에게 고율의 세금을 뜯어내 머스킷 수만정을 수입해 왔다.
  7. 예상외로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가 빠르게 휴전해버리자 계속 술탄에게 러시아 좀 더 공격해주세요 징징징 하였으나 이를 귀찮게 여긴 술탄은 결국 그를 무시해버렸다.이후 오스만 제국 황실에 친 스웨덴 세력을 심으려고 획책하다가 걸리고 자신과 부하들의 주둔비용이 오스만 제국 재정에 부담을 주면서 점점 칼 12세는 술탄에 맘에 안들게 되었다. 얹혀사는 설움 한편 그의 측근이 막대한 빚을 지자 상인들과 연계되어 있던 예니체리가 그냥 쳐들어와서 소규모 충돌끝에 찍 소리도 못하고 갇혀 지냈다.
  8. 물론 나중에 스웨덴 국왕에 오른 장 밥티스트 베르나도트가 덴마크를 두들겨패서 노르웨이를 강탈하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