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슬란드/역사

북유럽의 역사
스웨덴/역사덴마크/역사핀란드/역사노르웨이/역사리투아니아/역사라트비아/역사에스토니아/역사아이슬란드/역사

1 건국사

History of Iceland

870년경 최초의 이주자인 잉골푸르 아르나르손이 이곳에서 겨울을 난 후 '얼음의 땅 이슬란트'라고 한 것이 국명이 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874년에 처음으로 바이킹들이 들어와서 살기 시작했고, 그 이전에는 쭉 무인도였다.[1]. 하기사 그럴만도 한 것이 전 국토가 화산 대지인 데다가 날씨도 구질구질한 북쪽 동네라 농사도 못 짓는 등 가져봤자 별 메리트가 없는 땅이었기 때문. 그런데 정작 바이킹들은 "어 땅 괜찮다. 딴 애들 몰려오지 못하게 이름을 아이슬란드로 해서 속여보자"는 목적으로 아이슬란드로 지었다고 한다. 반대로 그린란드는 얼음 밖에 없지만 마치 초지 가득한 나라처럼 보이기 위해 지어진 이름. 참고로 아이슬란드의 국토 면적은 대한민국과 거의 비슷한 반면에 그린란드의 면적은 무려 대한민국의 21배에 달한다. 그런데 아이슬란드엔 31만명이나 사는 반면에 그린란드엔 5만 6천명 밖에 살지 않는다. 그러니까 주변의 다른 지역과 비교해보자면 아이슬란드가 그나마 사람 살만한 축에 속한다. 혹은 바이킹들이 발견할 당시에는 지금과는 기후가 달라서, 그린란드는 지금보다 녹지가 많아서 살만한 땅이었고 아이슬란드는 빙하에 둘러싸인 얼음 덩어리였다고 하는 설도 있다.

아이슬란드는 930년세계에서 최초로 "의회(알팅그(Alþingi))"라는 것을 만든 나라다. 흔히 의회 민주주의의 발상지라고 하는 영국에서 의회가 1300년경에 생겼는데, 아이슬란드가 이보다 약 300년 정도 이르다. 하지만 아이슬란드라는 나라 자체가 영국에 비하면 워낙 듣보잡 수준이라서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2] 어쨌든 아이슬란드는 이후 몇백년 동안 괜찮은 시대를 누렸으며 아이슬란드인들은 당시 그린란드아메리카에 도달하기도 했다. 또한 이 무렵 기독교가 아이슬란드에 전래되었다. 이 시기를 아이슬란드의 황금기라고 한다.

2 노르웨이-덴마크 점령 시대

그러나 13세기부터 아이슬란드 내부에서 내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3] 내분 끝에 아이슬란드는 노르웨이와 연합 조약을 체결하여 노르웨이의 영토가 되었다. 노르웨이의 영향력은 그렇게 강하진 않았지만, 이 무렵부터 세계의 기후가 추워지기 시작하면서 아이슬란드는 고난의 시기를 맞게 된다.

1387년부터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전제적 지배를 받게 되었다. 1602년 덴마크는 아이슬란드에게 덴마크 외의 나라와 무역하는 걸 금지했다. 더욱이 이 때 다른 유럽 국가들이 그랬듯 아이슬란드 또한 페스트의 유행 등으로 고생했다. 그러나 그다지 혹독하게 대하지 않은 듯하다. 오히려 같은 민족 취급을 해주기도 했다. 조건이 비슷했던 일본오키나와의 관계가 지금까지도 험악하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나라와 페로 제도는 그래도 대접을 잘 받은 편이다. 17세기 중엽까진 아이슬란드는 독자적 지위를 유지했다.

18세기에 기후는 가장 추워졌을 뿐더러 라카기가르 화산이 폭발하면서 가축의 80%가 죽고 아이슬란드 인구의 4분의 1 가량이 사망했다. 다만 이 화산의 영향으로 덴마크도 엄청나게 피를 보았기 때문에 영국이나 러시아에 비하면 평가가 낫다. 덴마크에서도 8만명이 기근으로 사망했다. 라카기가르 화산이라고 하면 덴마크에서는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다. 그리고 화산이 터진 게 덴마크 탓은 아니잖아

덴마크 지배 시기 아이슬란드에서 의회의 역할은 지속적으로 축소되어 결국 1800년에는 의회가 폐지되었다. 19세기에도 기후 조건은 계속 나빠져 아이슬란드인들이 캐나다로 대량으로 이민 가기도 했다. 아이슬란드 민족주의가 이 때부터 생겨났다. 그러나 다른 나라의 민족주의에 비하면 새발의 피였다... 뭐 다 이렇게 평화적이야 [4] 또한 아이슬란드어로 된 언론인 피욀니르(Fjölnir)가 나오기도 하였다.

3 자치권 획득과 독립, 그리고 2000년대 이전 까지의 현대사

그러나 결국 아이슬란드 민족 운동의 영향으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8세1843년에 아이슬란드에서 의회를 부활시켰다. 1874년크리스티안 8세는 아이슬란드 인들의 자치권을 허용하는 제헌 헌법을 공포했다. 외국과의 무역도 허용되었다. 1918년에 덴마크 왕이 아이슬란드 왕을 겸하는 아이슬란드 왕국[5]으로 독립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 중 덴마크가 나치 독일에 점령 당하자 국민투표 국왕을 폐위해 버리고 공화국이 되었다. 그 뒤로 쭉 독립된 주권 국가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독립한 경위가 매우 특이하다. 전쟁 초기 독일이 덴마크와 노르웨이를 점령하고 독일 해군이 대서양으로 진출할 발판을 얻자 위기를 느낀 영국은 북대서양의 전략적 요충지인 아이슬란드를 무혈 점령해 버렸다. 그리하여 덴마크는 독일에, 아이슬란드는 연합군의 점령 하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아이슬란드에선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독립안이 통과된다. 히틀러1944년아이슬란드 독립을 승인했다. 당시 덴마크가 점령국 나치 독일에 매우 비협조적이었기 때문에 그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아이슬란드는 북대서양에서 독일 유보트를 감시하는 주요 거점으로 자리 잡았다.

NATO 회원국이지만 공식적으로 군대가 없는 나라이기도 하다. 특수 경찰과 해안 경비대로 방위를 대신하고 있다. 대신 1951년부터 2006년까지 미국과 방위 협정을 맺고 미군에게 군사 기지를 제공했었다.[6] 사실 아이슬란드는 북해 및 북극해에서 대서양으로 나오는 중요한 출구인 그린란드와 영국 사이의 갭[7]을 통제하는 전략적 요충지이다. 냉전 시기 아이슬란드에는 소련군의 잠수함을 감시하기 위한 SOSUS[8]기지와 미군 항공 기지가 있었다.[9] 이러한 전략적 이유 때문인지 밀덕톰 클랜시붉은 폭풍에선 미국에서 유럽으로 오는 나토군의 보급로를 끊기 위해 소련이 아이슬란드에 기습 공격을 가하기도 한다.

아이슬란드와 역사적으로 가장 사이가 나쁜 나라는 신사와 기행의 나라 영국. 세 차례(1958, 1972, 1976)에 걸쳐 소위 대구 전쟁(Cod Wars. Cold Wars가 아니다! Daegu Wars는 더더욱 아니다)을 벌인 역사를 갖고 있다. 아이슬란드 해에는 한랭 어종인 대구가 우글우글 한데 이게 영국인의 주식인 "피시 앤 칩스"의 주재료였기 때문. 한편 어업에 국운을 건 아이슬란드에게도 대구는 밥줄이었다. 특히 72년의 2차 대구 전쟁 당시에 아이슬란드의 전관 어로 수역[10]에서 영국 어선들이 영국 군함의 초계 하에 어업을 계속하자 아이슬란드에서 해안 경비대가 출동하여 그물을 보는 족족 끊어버렸다. 이 싸움은 밀어내기 전법[11]에서 상호 포격으로 확대되었고, 결국 국교 단절과 선전포고 직전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NATO의 중재로 전쟁은 면한다. 영국이 아이슬란드의 경제 수역을 잠정 수용하고 어업 쿼터를 수용하면서 끝난다.

이후 76년에도 경제 수역 200해리 공포를 둘러싸고 처음부터 양측 군함이 출동하여 포격전을 벌였으나 EC 경제 장관들이 아이슬란드 편을 들어줘서 영국군데꿀멍하고 끝난다. 정작 아이슬란드 해의 대구 자원은 무분별한 남획으로 이미 회복 불가능한 상태였다는 것을 고려하자면 국가 단위의 대표적 병림픽.[12] 그래서 지금도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덴마크 사람은 좋아해도 영국인에게는 늘 싸늘하다.

4 2000년대 이후

이후 별 탈 없이 복지국가 체제를 구축하며 조용히 잘 먹고 잘 산다. 2000년대 초반엔 외자 유치와 은행 완전 민영화 등으로 금융업을 활성화 시키고 알코아에 알루미늄 제련 공장을 유치 시키는 등 성장 정책을 펼치며 엄청나게 돈을 벌었다. 그리하여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살기 좋은 나라들 중 하나로 등극하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9월 세계금융위기 이후 금융업이 쇠퇴하고 은행이 줄줄이 파산하면서 유럽 국가들 중에서 가장 먼저 금융 위기의 제물이 되는 비극을 겪었다. 어느 정도로 심각했는지 총 부채액이 GDP의 11배에 달하는 수준이었다. 심지어 자본주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맥도날드까지 철수해 버렸다. 이후 반정부 시위[13] 끝에 사태를 책임지고 게이르 호르데[14] 당시 총리가 사퇴했다. 이후 세계 첫 동성애자 총리로 알려진 요한나 시귀르다르도티르가 2013년까지 재임하면서 은행 재국유화와 외자 동결 조치, 가계 부채 탕감 등의 강경책을 써서 위기는 어느 정도 진정되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영국이나 독일 등 채권국과의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리스랑 다르게 그냥 운이 좋았던 게지 2011년에 IMF 구제금융에서 졸업하고 EU에 가입을 신청했다. 그렇지만 금융 위기 과정에서 아이슬란드를 탈출하지 못한 자금이 경제 회복 이후 아이슬란드 부동산으로 몰려드는 바람에[15] 집값이 급속하게 올라(...) 집권당의 지지율이 떨어졌다. 결국 2013년 총선에서 다시 독립당이 집권하여 EU 가입을 포기하게 되었다.

5 관련 문서

  1. 아일랜드에서 허름한 배 타고 와서 살던 사람들을 바이킹이 몰아냈다고도 한다. 혹은 아일랜드의 가톨릭 수도사들이 수도하기 좋은 외딴 곳을 찾다가 들어와 살다가 바이킹들이 들어온 뒤 시끄러워지자 나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아마 아일랜드 계통의 소수 이주민들이 바이킹들에게 밀려났을 가능성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원주민들과 이민자들이 융화 되었을 수도 있고.
  2. 참고로 이 나라는 북유럽국가들이 흔히 그러듯 굉장히 조용한 국회로 유명하다.
  3. 그러나 동시기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굉장히 평화로웠다.
  4. 덴마크에 줄기차게 아이슬란드 자치 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등의 투쟁을 했던 욘 시귀드르손이라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아이슬란드 주민은 그가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심지어 행적을 얘기해주니까 그 주민은 "뭐하러 그런 헛짓거리를 했디야?"라고 했다고.
  5. 동군연합 국가
  6. 다만 1949년에 국민들이 이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인 적이 있었다.
  7. 그린란드-아이슬란드-영국 사이
  8. 수중 음향 감시 시스템
  9. 2006년 이후 미군은 철수한 상태이나 NATO 공군기가 주기적으로 순환 배치되어 아이슬란드 일대의 영공을 순찰하게 되어 있다.
  10. 아이슬란드가 일방적으로 50해리를 선포했다. 영국과 서독이 이를 국제법 위반으로 제소하여 결국 승소했으나 아이슬란드 정부는 생깐다.
  11. 서해에서 우리 해군이 쓰던 그 전술의 원조이다
  12. 영국이 꽤 남획을 했기 때문에 대구 보호면에서 보면 꼭 그렇지도 않다
  13. 이것조차 (좀 나중 일이지만) 전쟁터 수준인 남유럽 국가들의 반정부 시위와 비교하면 평화로웠다.(...) 프라이팬이랑 냄비 두들기고 총리 사퇴하라며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정도로 그쳤다.#
  14. 뱀발로 이 사람은 토종 아이슬란드인이 아닌 노르웨이에서 이민 온 사람이기 때문에 성씨가 있다.
  15. 아이슬란드는 인구 구조 자체가 (유럽 국가 치고는) 워낙 안정적이라서 부동산 산업이 유망하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