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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제국러시아 제국

핀란드의 역사를 다루는 항목.

1 독립이 되기까지

핀족이라는 민족이 살던 곳으로서, 주변국이 나라를 세우며 역사에 이름을 남기던 와중에 이들은 스웨덴의 영토로 조용하게 살았다. 스웨덴의 지배를 받기 이전에는 각 족장들이 난립하는 형태로 일종의 군장 국가들이 존재했으며, 핀란드보다 먼저 가톨릭을 받아들인 스웨덴은 십자군 전쟁을 일으켜서 핀란드를 공략했고, 13세기에 완전히 정복되어 스웨덴의 속령으로 13세기부터 18세기까지 500년 간 지배를 받았다. 이후 북방전쟁러시아의 땅이 되어 약 200년 간 지배를 받고, 러시아의 1917년 10월 혁명을 틈타 독립했다. 스웨덴과 러시아의 속령임에도 불구, 핀란드의 위정자들이 이 두 나라를 잘 구워 삶은 덕택에 높은 수준의 자치를 허용 받았다고 한다. 핀란드 왕국 참조.

과거 스웨덴과 러시아가 핀란드를 지배했음을 보여주는 유적지가 있다. 헬싱키 항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는 곳에 위치한 수오멘린나 요새가 그것이다. 수오멘린나 요새는 18세기에 스웨덴이 지어 관리하다 이후 러시아가 핀란드를 장악하며 러시아가 소유했다. 유네스코세계문화유산으로도 지정되어있는데, 유일하게 전쟁과 관련된 세계문화유산이다.

제정 러시아의 로마노프 왕조 시절 알렉산드르 3세 시기까지만 해도 핀란드에게 고도의 자치권을 주었으나, 니콜라이 2세 시기에 러시아화 및 중앙 집권화를 강요하면서 민족 의식이 발전하게 되었다. 독립 직전에는 독일계 헤센-카셀 가(家)를 핀란드 왕가로 하는 입헌 군주국을 준비하고 있었으나 독일의 패배로 무산. 혹시 이때 독일이 승리하면 헤센-카셀 왕가를, 연합국이 승리하면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방계 후손을, 이도 저도 곤란하면 스웨덴이나 덴마크 왕가의 방계 후손을 핀란드 군주로 영입하기로 비밀 결정을 내렸으면 이야기가 달라졌을 것이다.

독립하던 과정에서 핀란드도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좌파와 우파가 각각 적위군백위군으로 갈라져 핀란드 내전을 치뤘다. 자칫 잘못하다가 소련과 독일의 대리전으로 번질 뻔 했다. 그러나 오합지졸 군대 체계가 제대로 잡히지 않은 적위군에 블라디미르 레닌이 병력 지원을 해주지 않고[1], 군대 체계가 잘 갖춰진 백위군은 비록 1차 대전 때문에 적은 인원수가 파견되긴 했지만 독일의 도움을 등에 업어 어렵지 않게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내전 기간 중 백위군의 백색테러로 1월~5월 사이에만 5만 명 이상의 적위군과 혁명 지지 노동자들이 백위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내전 기간 동안 핀란드에서 백색테러에 의해 희생당한 사람들의 숫자는, 1918년 전 기간 동안 러시아 전역에서 벌어진 적색테러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보다 많다. 당시 핀란드 전체 인구는 100만. 이러한 흑역사는 이후 핀란드의 정계의 중도화를 불러일으켰고, 핀란드 정치판은 세계 정치에서도 보기 드문 레인보우 내각을 탄생 시키기도 했다. 2차대전 직전, 유럽을 뒤흔들던 극우주의 물결에서도 핀란드인들은 극우 정당에게 5~6퍼센트에 불과한 지지율을 보였다. 한편 이때 백위군을 지휘한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하임(Carl Gustaf Emil Mannerheim)은 2차 세계 대전 후반에 대통령 직위를 수행하기도 했다.

2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제2차 세계대전 발발 직후 소련의 침공을 받아 겨울전쟁을 겪기도 했다. 소련군은 한줌도 안되는 핀란드 국방군을 깔보다가 데꿀멍 쇼를 벌여야 했고 물량 공세로 겨우 힘겨운 승리를 거둔다. 독소전 개전과 함께 핀란드는 독일과 동맹을 맺고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지만(계속전쟁) 추축국의 패배가 분명해지자 소련과 휴전하고는 연합군 측으로 돌아선다. 이를 위해 전 국토를 전장으로 만들며 독일군을 몰아냈다(라플란드 전쟁). 일부 병사는 한때의 적이었던 소련군과 함께 베를린 전투에까지 참여하기까지 했다는 풍문이 있으나 사실 소련 편에 붙은 핀란드 공산군도 있었다. 그 외에도 핀란드가 소련과 협상하자 독일군 내에 있던 핀란드인들 대다수는 자국의 이러한 결정에 반대하며 독일군에 남아 베를린 결전까지 참여하기도 했다.

1944년 3월말에 이루어진 휴전 회담 때 소련은 6억 달러의 배상금을 요구하였다. 이외에 배상금 이외의 조건도 너무 가혹했기 때문에 동년 4월 12일에 핀란드 국회는 소련의 강화 조건을 모두 거부했다. 5개월 후 다시 열린 강화 회담에서(소련은 핀란드가 독일과의 동맹 파기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9월 15일까지 독일군 병력을 핀란드 영토 내에서 축출하는 조건으로 재강화 협상을 받아들였다) 소련은 이전과 같은 조건에 해군 기지 임차, 병력 감축 등의 요구 사항을 추가적으로 덧붙었지만 전쟁 배상금은 3억 달러로 탕감해주었다(단, 지불은 1938년 기준의 금화로 하라고 요구했다. 이는 당시 시세로 4억 5천만 달러 정도였다).

전후 정치적 중립을 선언하며 마셜 플랜을 거부했지만 소련에게 3억 달러의 배상금을 단 5년만에 모조리 갚아버리는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실 1차 대전 이후에도 많은 유럽 국가들 중 유일하게 미국 정부로부터 빌린 채무를 성실히 갚은 나라이기도 하다. 겨울전쟁F2A 버팔로 전투기[2]와 농산물이 지원되었던 것도 미 의회가 이 부분을 높이 샀기 때문. 그러나 소련의 압박으로 인해, 대외적으로는 추축에 참여한 적이 없었지만 영국과 미국도 핀란드에 선전포고를 해야만 했으며, 겨울 전쟁으로 인해 생겨난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자유의 투사'라는 이미지는 '스와스티카를 공군기에 쓰는 나치의 하수인이자 독재자 만네르하임이 다스리는 나라'라는 문구를 당대 서적에서 찾아볼 수 있게 되는 등 180도 바뀌게 되었다(에릭 폰 로젠이라는 스웨덴인 사업가가 전투기를 대거 기증하면서 이런 일이 터져버렸다. 물론 반소감정이 있던 핀란드인들은 적의 적은 나의 친구란 심정으로 덥석 받아들였지만...이런 일이 일어날 줄은 몰랐어 어떡해)

독소전쟁에서 독일이 밀리기 시작하자 핀란드는 사면초가의 형국이 되었다. 독일과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영미로부터는 지원을 기대하기가 어려웠고, 소련군은 독일과 싸우면서 엄청나게 막강해진 전력으로 핀란드를 삼킬 기세. 이때 핀란드는 독일과 동맹을 파기하기 위해 꼼수를 썼는데, 독일에 "소련과 단독 강화 안 하겠다"고 약속한 리티 대통령이 사임하고, 이를 개인적 약속이라고 주장, 비상 대통령으로 취임한 후임 만네르하임 원수가 이를 개인적 약속이므로 핀란드는 독일에 빚없다고 주장하면서 결국 1944년에 소련과 단독강화를 맺고 이전의 동맹과 적을 맞바꾼다. 그럼에도 겨울 전쟁에 호되게 당한 탓인지 소련은 핀란드를 위성국으로 삼기보다는 서방 세계와의 방파제 노릇으로 삼았다. 이후 핀란드는 소련에 엄청난 전쟁 배상금을 물고[3] 억지로 소련과 군사 동맹을 맺었으나, 다행히 소련은 핀란드의 내정에는 그다지 간섭하지 않았다.

이런 관계는 사실 핀란드에 이득을 가져온 면도 있는데, 서방측과의 교역도 계속 하면서 소련으로부터 여러 우방국 혜택을 받아서 싼 원유나 지하 자원을 공급 받아 1970년대 오일 쇼크가 벌어졌을 때도 핀란드는 이웃 나라들과는 달리 별 타격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오일 쇼크 기간에 타 국가들이 비실비실거리는 틈을 탔고 반대로 소련은 오일 쇼크의 여파로 꽤나 먹고 살만해 졌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이어나갔고 1980년대 중반까지도 경제성장을 이어가게 된다.

아직도 러시아와는 국경을 맞대고 있고, 워낙 두 나라가 생활수준 차이가 많이 나다 보니 러시아 사람들이 들어와서 트러블을 벌이는 일이 잦은지 러시아와는 사이가 좋지는 않다. 물론 냉전 기간에는 소련의 눈치를 보아야 했고 WTO 가맹 등을 거부하는 대신 마셜 플랜을 포기하거나 T-72 전차와 MiG-21 전투기 같은 소련 무기로 군대를 무장하는 등 알아서 기어야 했다. 그리고 소련의 심기를 거스르게 할 수 있는 주장, 학설 등은 자체적으로 검열삭제하기도 하는 등 소련의 그늘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이러한 현상을 서독에서는 핀란드화(Finnlandisierung)이라는, 영어로는 Finlandization 신조어로 평했다. 하지만 냉전은 이제 끝났다. 현재는 유럽연합 가입국으로 레오파르트2F/A-18이 주전력이 되었다.[4]

아무튼 냉전 시기에 사실상 중립국의 지위를 누리고 있어서 베트남 전쟁 때 베트남 난민들이 이쪽으로 유입되는가 하면, 소련 쪽에서 망명한 이들도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이유로 핀란드에 정착하곤 했다. 최근에는 아프리카, 이란 등의 정치 망명객들이 선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런 묘한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하여 쏠쏠한 이득을 보기도 했다. 핀란드와 소련은 서로 괜찮은 무역 동반자였다. 핀란드의 대 소련 무역은 두 번째로 중요했는데, 핀란드에서 소련으로 목재가 많이 수출됐다고 한다. 그런데 소련이 붕괴되자 1990년대 초반 핀란드는 심각한 경제위기를 겪기도 했다.[5] 소련의 레닌그라드에스토니아의 탈린은 핀란드와 지리적으로 가깝다는 점 때문에 서구 세계의 문화가 동구권으로 들어가는 관문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레닌그라드에 비틀즈 덕후들이, 에스토니아에 컴덕후들이 생겨났다는 얘기가 있다 여하튼 러시아가 90년대 말부터 경제가 나아지면서 핀란드의 경제도 다시 활황세를 탔다. 사실 노키아의 영향이 더 컸지만

하지만 요즘 러시아는 나토의 동진을 막기 위해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서 핀란드에서도 긴장하고 있다. 그렇지만 러시아가 유가 하락으로 경제성장이 꺾이고 노키아도 몰락하면서 핀란드의 경제도 침체 상태에 놓여있다.

3 관련 항목

  1. 장갑차 등 약간의 물자 지원은 해주긴 했다.
  2. 이 당시 기준으론 최신기였는데 이걸 44대나 공여했다. 2차 대전 동안 항공기 제작 기술이 미칠듯이 발전해서 전쟁 초기 이후의 전투기들에 비해 성능이 부족해져 태평양에선 제로센에 탈탈 털리고 그보다 우수한 연합군 전투기가 대거 등장, 다른 전선들에선 잉여 전투기가 되었다. 그럼에도 옛날 전투기라 단순해서 그런지 핀란드의 개떡같이 추운 기후와 시설 미비 등 열악한 상황에서 높은 가동률을 보여줬다. 슈퍼마린 스핏파이어 같은 다른 전선에서 호평 받은 전투기는 핀란드의 끔찍한 환경에서 하절기에나 가동할 수 있어 '여름철 전투기'란 평을 받을 정도였기 때문에 이런 높은 신뢰성은 핀란드에서 버팔로가 고평가 받게 해주었다. '하늘의 진주'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 이런 내력은 고공 전투가 주된 대서양과 태평양에선 잉여취급을 받았으나 이런 서방 연합군과 공중전 양상이 달라 저공 전투가 주요했던 소련에선 마르고 닳도록 공중전에 투입하고 냉전 시기까지도 써서 NATO 코드명을 부여 받은 미제 전투기(…) P-39 에어라코브라와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외국인이 써서 기종 최고 격추 기록을 세웠단 것도 같다 계속전쟁 동안 소련기를 상대로 충분히 활약했다.
  3. 소련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강화를 맺은 추축국(동독, 루마니아, 불가리아 등)중에서 유일하게 전쟁 배상금을 탕감해주지 않고 모조리 받아낸 나라가 핀란드다.
  4. 그래도 좋은 러시아 무기들은 아직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T-55는 한국의 M48처럼 2선급에서 현역으로 쓰고 있고. 야포는 서방 규격인 155mm가 있긴 하지만, 2014년 핀란드군 훈련을 보면 아직도 견인포들은 러시아 규격인 122mm와 152mm가 많이 보인다. 총기들은 Rk 95의 7.62x39mm탄과 PKM의 7.62x54mm R과 NSV12.7x108mm을 쓰고 있다.
  5. 사실 북유럽 국가들은 모두 80년대 후반에 형성된 거품이 90년대 초반에 꺼지면서 엄청난 경제위기를 겪었는데, 그 중에서도 핀란드는 실업률이 1989년 3.5%에서 1994년 7월 19.9%까지 치솟는 등 상태가 제일 심각했다. (다만 노르웨이는 1988년에 일찌감치 구조조정을 해서 그 피해가 훨씬 덜했다.)